설교일2024.09.15 | 말씀빌립보서 3장 4-9절 | 설교자석기현 은퇴목사 |
2024.09.15 주일대예배
경향의 강단(39)
예수를 아는 지식
빌립보서 3장 4-9절
석기현 은퇴목사
요즘 현대사회에서 갑자기 자주 사용되기 시작한 외래어 중에 ‘스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specification’이라는 영어 단어를 줄인 말로서 원래 ‘제원, 규격, 명세, 사양’ 등의 뜻인데, 우리나라에서 ‘스펙’이라고 할 때는 통상 ‘사람의 학력, 경력, 재력 등에 대한 자세한 명세서’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스펙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곧 취직에 유리한 조건을 잘 갖춘 사람이나 이상적인 결혼상대로 통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그처럼 ‘좋은 스펙’을 소유하게 되면 그것으로 정말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유수한 대학교를 졸업한 후 석박사 학위를 따고, 대기업에 입사한다든지 의사나 변호사 등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고, 게다가 집안도 부유하고 유력하여 젊을 때부터 벌써 고급 아파트 한 채쯤 소유하고 있는 소위 ‘완소남’이나 ‘엄친딸’이 곧 최고의 인간이겠습니까?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다.’라고 대답하겠지만, 성경은 ‘절대 그렇지 않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시간 저는 사도 바울의 체험적인 간증을 통해 기독신자가 ‘세속적인 스펙’보다 훨씬 더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참된 신자는 ‘세속적인 스펙’을 내세우지 말고 오직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꼭 소유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4절부터 9절에 “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라는 말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회심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그의 ‘사회적 스펙’을 가리킵니다.
본문 바로 앞의 2절과 3절에서 바울이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라고 경고하고 있는데, 그 ‘개들’과 ‘행악하는 자들’이란 당시 유대 율법주의자로서 그런 인간적 스펙을 내세우기 좋아했던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라고, 즉 ‘세속적 자랑거리를 따진다면 나도 내세울 것이 많다.’, ‘율법주의자들이 그런 스펙을 자랑하면서 나온다면 나야말로 그 분야에서는 최고였다.’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선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가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으로 태어난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이것을 ‘자랑거리’로 말한 이유는 율법주의자들이 자기네는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바울은 ‘이방 지역인 다소 출신’이라고 멸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혈통으로 따지면 자기도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순수한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반박했던 것인데, 그것은 사실 바울뿐 아니라 율법주의자들에게도 그다지 내세울 만한 특별한 자랑거리는 될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진짜로 내세울 만한 ‘사회적 스펙’은 바로 그가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최고의 ‘경건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에게 최고의 덕목이었던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생활에는 그야말로 자타 공인 제일인자였는데, 바울이야말로 자신을 가리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강조했듯이 그 점에서만은 정말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던 것입니다.
더욱이 바울은 그 바리새인 중에서도 사도행전 22장 3절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가말리엘의 문하”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은 여러 계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가말리엘’은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랍비 힐렐의 손자였습니다.
그는 ‘율법의 영광’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유대 사회에서 손꼽히는 율법학자였으며, 그래서 그가 죽었을 때 유대인들은 “율법의 영광은 떠났고, 그 정결과 성결도 죽었다.”라고 애도할 정도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바로 그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심문하는 공회의 일원으로 나타나는데, 유대 최고 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에서도 발언권이 매우 높은 유력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서도 바로 그 가말리엘 문하의 수제자였으니, 이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유대 사회에서 ‘최고 학부’를 졸업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그런 사회적 배경을 가리켜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 즉 ‘남 앞에서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인 동시에 “내게 유익하던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바리새인’이며 특히 ‘가말리엘 문하 출신’이라는 사실은, 유대 사회에서 그야말로 앞날이 창창한 ‘출세의 길’을 보장해 주는 조건이며, 누구나 다 부러워할 만한 최고 수준의 스펙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할 때 그를 돌로 친 “증인”들이 자신의 겉옷을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 7:58)라고 한 것 역시, 그가 그때부터 이미 유대 사회에서 ‘장래가 최고로 촉망되는 유망한 인재’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그대로 반영해 준 사건이었습니다.
즉 바울은 오늘날 우리나라로 치자면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까지 이미 합격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요즘도 그렇지 않습니까?
신랑감 하면 물론 재력, 지위 등도 보지만 거기에다 좋은 학력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아직 사울이었던 시절에 바울은 유대 사회에서 바로 그와 같은 ‘신랑감 후보 제1위’ 아니 ‘0순위’와 마찬가지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당시 유대 상류사회의 중매꾼들은 자신의 수첩 제일 첫째 칸에 사울의 이름을 기록해 두었을 것이며, 예루살렘 성 안에 살고 있던 처녀들은 사울이 길거리를 지나갈 때 창문 틈으로 바라보면서 가슴이 설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그처럼 유대 사회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자신의 입신출세를 보장해 주던 ‘유익한 스펙’을 두고 본문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는 그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아예 “배설물”처럼 여긴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우리나라말 번역에서는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하여 ‘배설물’이라고 했지만, 사실 문자 그대로 하자면 ‘똥’입니다.
이것은 정말 이상한 말이 아닙니까?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되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자랑스러운 자신의 학벌과 배경을 인제 와서는 ‘똥’처럼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소위 옛날에 ‘KS 마크’라고 부르던 명문학교의 졸업장이 있거나 혹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속한 대학교에서 석사나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기독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들을 ‘똥’처럼 여길 사람이 있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인이 된 것이 훨씬 중요하고 감사한 일인 것은 분명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명예로운 학벌까지 오히려 자기에게 ‘해롭고’ ‘내버려야 할 쓰레기’ 같은 것으로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진심어린 고백으로 성경 기록에까지 남겼던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8절에서 그가 밝히고 있는 대로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 사회의 최고 학부에서 공부하여 정통하고 있던 ‘율법에 대한 지식’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오직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아예 차원부터가 다르게 훨씬 더 ‘격이 높은 최고의 지식’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그처럼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하게 된 동기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사실 당시 유대인 치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며, 지금 바울을 대적하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조차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알고는’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알았던’ 것입니까?
그는 예수님을 알기는 알면서도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던 대다수의 유대인과는 달리 ‘어떤 예수님을 알게’ 되었던 것이겠습니까?
그 대답이 바로 8절 하반절부터 9절에서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라고 고백하는 말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그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발견된’ 자신의 모습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신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칭의’, 즉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인정함을 받는’ 은혜였습니다.
한 번 더 설명하자면, 바울은 ‘죄인인 자기를 아무 조건 없이 당장 의인이라고 아예 인을 쳐 주시는’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기 짝이 없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은 무슨 신학적인 의미에서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지극히 개인적으로, 정말 자신의 피부에 와 닿도록, 아니 자신의 혼과 영 전체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던 엄청난 체험을 간증하는 말입니다.
즉 ‘죄인을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는’ 칭의의 은총을 그 누구보다도 강력하고도 뜨겁게 맛보았던 사람이 바로 바울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기 전 아직 ‘사울’이었을 때 그가 저질렀던 죄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6절에서 그가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라고 회상하고 있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의 죄는 그냥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다 가지고 있는 ‘원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인생을 사는 날이 오래되면 될수록 자동으로 더 많아지는 일반적 자범죄, 즉 거짓말이나 탐욕이나 미움 따위의 죄에서 끝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기 전에는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을 냈던 죄, 즉 ‘하나님을 끝까지 믿지 않는 죄’를 제쳐 놓으면 그다음으로 가장 중하다고 할 수 있는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저질렀던 그 부끄러운 죄를 회심한 이후에 여러 차례 교회와 성도 앞에서 고백했으며, 그것이 신약의 바울 서신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자면, 갈라디아서 1장 13절에서 그는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4절에 보면,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로마 군병에게 체포당한 후에 자기를 죽이려 달려드는 유대인들 앞에서 설교할 때에도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중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 전도하게 되었을 때도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라고 고백했다고, 사도행전 26장 9절부터 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교회를 박해하고 성도를 핍박하는 극악무도한 일에 그야말로 악에 받친 사람처럼 열을 내었던 사람이 바울 자신이었습니다.
심지어,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던 다메섹 도상 역시 바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박해를 피해 멀리 다메섹까지 피난을 갔던 성도들을 집요하게 추격하여 그 씨를 말리려고 갔던, 속된 표현을 빌자면 ‘도시락까지 싸 들고 원정 체포’하러 가던 길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바울이 자신의 그런 과거를 생각해 보면 그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라는 고백 외에는 다른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냥 ‘죄인’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될, ‘모든 죄인 중에서 최악의 죄인’이라고, 교회와 성도와 동역자를 대할 때마다 항상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울의 솔직한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심한 직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를 친히 찾아와 주셔서 당신을 영접하게 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 ‘사울이 저질렀던 과거의 모든 죄’를 깨끗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최악의 죄를 저지른 그를 완전히 용서해 주시는 것만 해도 정말 조금도 기대할 수 없는 일인데, 그것도 ‘아무 조건도 없이’ ‘단 한마디의 따지는 말이나 경책조차 없이’, 그야말로 마치 ‘기억도 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순식간에 몽땅 다 용서해 주셨으니, 바울로서는 스스로 자기 뺨을 꼬집어보아도 믿기 어려울 정도였던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바울은 회심한 후에도 특히 초대교회 앞에서는 낯을 들 수가 없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자기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잡아 죽이려고 찾아다녔던 ‘열두 제자 출신의 사도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사울’이었던 시절에 투옥시켰던 교인을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혹은 자기가 ‘사형 선고에 찬성투표’를 하여 죽게 했던 순교자의 유가족 성도들과 직접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을 때, 그야말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서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라고, 그야말로 ‘감당할 길이 없는 부끄러움’에 가득 찬 간증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바울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해 주셨습니까?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찾아오셔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라는 한마디 충격요법 같은 말씀으로 그를 회개시키신 이후에는 단 한 번도 그것을 다시 들추어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회심하기는 했지만 워낙 과거에 저지른 죄가 중하고 크니, 한 10년 정도는 자숙한 후에 세례를 받거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메섹 도상의 사건 후 약 사흘 만에 그의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게 되었을 때 곧 세례를 받게 하셨습니다(행 9:18). 예수님께서는 바울이 회심한 직후부터 이미 아나니아에게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고 해서 바울에게 ‘너 옛날에 나를 그렇게 핍박했으니 이제는 진짜 죽도록 날 위해 충성해야지.’라고 은근한 압력을 가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는”(행 9:20) 전도자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은 그가 교회를 핍박할 때 ‘유대교를 반대하는 이단의 교주’ 쯤으로 여기고 있던 예수님이 아니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죄인 중에서도 두목 죄인’과 같은 자신을 그 어떤 추궁 한마디조차 없이 그냥 ‘의롭다’고 거저 인쳐 주신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그 예수님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자신의 그런 끔찍한 죄, 사람 앞에서 얼굴을 들 수도 없게 만드는 그 죄송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극악무도한 죄를 한순간에 깨끗이 씻어 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에게 그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바로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도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죄에 대하여 무한히 자비로우시고 한량없이 인애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얻고’ 그 안에서 ‘의인으로 새롭게 발견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지식이다. 이런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주로 모시면서 교제하게 된 은혜와 특권을 생각해 본다면, 과거에 내가 내세웠던 유대 사회에서의 특권적 지위와 학벌 따위는 그저 똥이나 다름없다.’라고 뜨겁게 간증하게 되었습니다.
실로 당대 최고의 ‘지성’을 자랑했던 바울이었지만 그 역시 오로지 ‘죄 사함’이 꼭 필요한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 ‘율법적 지식’에 따라 ‘열심’을 내어 과거에 저질렀던 온갖 끔찍한 자신의 죄악을 신기할 정도로 간단하고도 깨끗하게 용서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알게 된 까닭에,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오직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고상한 지식’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기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화려한 세속적 스펙’이 아니라 ‘내 모든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나를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칭해 주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이 진정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필수적인 ‘가장 고상한 영적 스펙’인 것을 꼭 깨닫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알고 있던 어느 전도사님이 언젠가 서울대학교로 학원심방을 다녀온 후에 제게 “야, 그 서울대학교 캠퍼스 안에 들어가는 순간 기가 팍 죽더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그 ‘팍’이라는 말을 엄청나게 강조했습니다.
글쎄요, 명색이 전도사라는 분이 서울대학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기가 팍 죽었던 것일까요?
그분은 그 말을 ‘겸손’이라고 생각하고 하셨는지, 아니면 ‘명문대학교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하셨는지 알 길이 없지만, 저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서울대학교 졸업생이나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성도가 계시면 절대 오해하지 말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서울대학생은 ‘죄인’이 아닙니까?
‘똑똑한’ 사람이면 저절로 남보다 ‘의로운’ 사람이 됩니까?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공로가 되어서 ‘구원’도 그냥 프리패스를 받을 수 있습니까?
명문 대학을 졸업해서 변호사나 의사나 박사가 되면 ‘구주 예수 그리스도’마저 필요 없을 만큼 잘난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해 거저, 완전히 죄 사함 받게 되는 가장 고상한 지식’이 빠진 ‘석박사 학벌’은, 바울이 사울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열심’을 오히려 더욱 부채질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는 실로 은혜로운 체험’이 없는 ‘화려한 사회적 스펙’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목을 더욱 꼿꼿하게 세우는 교만을 촉발할 뿐입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전도자라면 교인을 심방하거나 전도할 때 그 상대방이 아무리 ‘엄청난 사회적 스펙’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죄 사함의 구원’을 얻게 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나가는 목사나 전도사라면 서울대학교가 아니라 하버드 법대 캠퍼스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기가 팍 죽을’ 이유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그냥 역사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양심을 통해 ‘나의 구주’로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성경공부 시간을 통해 배우고 외우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각자의 개인적인 만남,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강력하고도 뜨거운 체험을 통해 ‘이 예수님이 날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써 내 모든 부끄러운 죄를 깨끗이 다 용서해 주셨다.’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많은 봉사에 충성을 다하고 생애 최고와 전부를 바치는 헌금까지 드렸다는 공로 때문이 절대 아니라, ‘나는 그냥 죽어 마땅한 죄인일 뿐인데, 오직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나를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인정받게 해 주셨다.’라고 진정 감사드리고 있습니까?
바로 그런 신앙인이야말로 그 어떤 화려한 ‘세속적 스펙’과는 비교도 안 될 진짜 소중한 최고의 ‘영적 스펙’을 완전히 갖춘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역사적으로만 안다면, 그냥 ‘상식적 지식’으로 끝날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의인으로 칭해 주시는 구세주’로 알아야 ‘가장 고상한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교리적으로만 배우고 그친다면, 그것 역시 ‘배설물 같은 세상 지식’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얻고’ 그 주님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중생의 은총을 뜨겁게 체험해야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율법적인 지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인이라고 거저 인정해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하며 증언하는 ‘신앙양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부터 29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 이유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학벌이나 재력이나 지위 따위가 사람 앞에서는 꽤 자랑거리가 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도 없습니다.
‘세속적 스펙’만을 ‘내게 유익한 것’으로 여기는 교만한 인생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를 부끄럽게 만드시고 폐하시는 심판에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명심하면서, 오직 ‘내 모든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나 같은 죄인 중의 괴수를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고도 소중한 ‘영적 스펙’으로 반드시 얻고 지키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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