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2024.09.01 | 말씀마태복음 18장 5-14절 | 설교자석기현 은퇴목사 |
2024.09.01 주일대예배
2024′경향의 강단(37)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마태복음 18장 5-14절
석기현 은퇴목사
경향의강단(37)(2024년 9월 1일 / 주일대예배)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마태복음 18장 5-14절 /석기현 목사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제 아내가 아들 영은이를 출산하고 반년쯤 지나서, 나중에서야 알게 된 병명이었지만, ‘조현병’(schizophrenia)에 걸렸습니다.
저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고 정신질환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던 까닭에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도 안 되고 그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점이 첫 손자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보여드리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우리나라 방문을 예정해 놓고 비행기 예약까지 마쳤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아내의 언행이 아주 이상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온 가족과 함께 서울로 왔습니다.
입국 후 바로 다음 주 월요일에 아내의 병원 진료를 예약해 놓은 상태에서 당시 여의도 우정빌딩에 있던 경향교회의 주일예배에 같이 참석했는데, 원로목사님의 설교가 끝날 무렵에 제 아내가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이나 제재했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고, 저는 축도가 끝나자마자 제 아내를 부축하다시피 붙잡고 조금이라도 빨리 예배당을 벗어나려고 서둘렀습니다.
그 순간, 아마 제가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는 분인 것 같기는 했지만, 제 등 뒤에서 어느 교인이 “미쳤어!”라고 했는데, 딱 한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경멸조’는 천근만근처럼 정말 뼈아프게 저를 강타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좀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정신질환자를 대하는 우리나라 사람의 일반적인 인식이나 태도는 제가 미국 사회에서 겪었던 것과 비교할 때 여전히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환자나 장애인은 그래도 신경을 써 주고 존중하는 자세를 지키려 하면서도, 정신질환자 역시 어디까지나 ‘환자’라는 사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말이나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만 가지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흔히 업신여기기 쉬운 사람을 가리켜 ‘작은 자’라고 표현하셨는데, 물론 여기에는 정신질환자를 위시하여 온갖 종류의 사회적 약자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적어도 우리 기독신자만큼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이런 ‘작은 자’를 한순간이라도 멸시하지 말고 지극히 아끼며 사랑해야 할 이유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작은 자’야말로 성도가 예수님을 영접하듯이 존중하고 대접해야 할 사람입니다.
본문 5절에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앞의 1절부터 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 백성이 되고자 하는 제자는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어린아이’같이 지극히 낮추면서 늘 겸손을 지켜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은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 아주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곧 ‘타인’에 대한 자세, 특히 흔히 업신여기거나 멸시하기 쉬운 ‘작은 자’에 대한 자세라고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엄중히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 5절에 나오는 “어린아이”(child)라는 말은 4절 이전에 나온 “어린아이”와 단어는 같지만 의미는 조금 달리 사용되고 있는데, 바로 6절에 나오는 ‘작은 자’(little one)와 같은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5절은 ‘어린아이 같은 자를 영접하라.’라고 하셨기 때문에, ‘어린아이같이 겸손하라.’라고 하신 4절보다는 그다음 6절 이하의 ‘어린아이같이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라는 문맥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여기서부터는 ‘어른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어린아이’ 대신 ‘어른으로부터 중요하게 여김을 받지 못하고 푸대접 당하는 어린아이’라는 개념으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어린아이 같은 작은 자’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이라고 했는데, 여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한다.’라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사람의 눈으로만 판단한다면 그냥 무시하거나 심지어 멸시해도 될 것 같은 사람까지 마치 ‘예수님을 대하듯이 존중하고 환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처럼 ‘작은 자’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 ‘영접(welcome)’이란 ‘진심으로 환영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저도 경향교회 대학부 SFC 시절에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저와 같이 주교교사를 했던 같은 학번의 어느 자매 운동원이 있었는데, 저는 그 자매에게서 아주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 자매는 자기가 맡은 반에서 별 매력 없고 못 생기기까지 한 아이를 오히려 더 귀여워하고 그 아이에게 특별한 애정을 쏟아 주었습니다.
아무리 주일학교 교사라 해도 사람의 본성은 좀 더 예쁘고 착한 애가 더 귀엽고 정이 가고 안아 주고 싶기 마련인데, 그 자매 운동원 교사는 그와 정반대로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도 외식적인 행동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의식적으로 하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 자매 운동원 교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을 수밖에 없는 아이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그냥 더 마음을 쓰고 더 많은 사랑을 부어주었던 것입니다.
기독신자라면 누구나 다 이론적으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잘 따르지 못하고 있는 교훈을 그 자매 운동원이 경향교회 주일학교에서 매주일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저는 정말 크고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같은 교회의 교인이지만 아직도 ‘작은 자’로만 취급하면서 아예 ‘마음 밖에 두고’ 가능하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내는 사람은 혹 없습니까?
얼굴은 알고 있지만 가까이 사귀어 보아도 별로 재미없을 것 같고, 내게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더 나아가서 나와 무슨 개인적 친분을 가지기에는 너무 ‘격이 떨어진다.’라고 여겨져서 아예 모른 척하고 지내는 교인은 없습니까?
같은 주일학교, 같은 찬양대, 같은 전도회 안에서 교회봉사를 함께 하고 있으면서도, ‘내가 너보다야 낫지.’라는 생각 때문에 ‘멀찍이 피해 다니는’ 교우는 없습니까?
하지만 그런 교우야말로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듯이 영접해야 할 작은 자’입니다.
‘작은 자’를 영접하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으니, 그처럼 ‘별 볼일 없는 작은 자’로 여겨지는 교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예수님을 면전에서 내쫓는 것이나 조금도 다름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아야 합니다.
약하고 별 매력이 없다고 해서, 특히 ‘나보다 못해 보인다.’고 해서, 이런 ‘작은 자 교우’를 자기 마음에서 내쫓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과연 천국으로 영접해 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정말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신자라면 누구나 다 조금 전에 언급했던 그 자매 운동원처럼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스스로 의식하지 않는 중에도 절로 나타나도록 생활화되어야 할 자세입니다.
우리에게 만약 예수님을 직접 만나거나 식사 대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야말로 서로 하겠다고 앞을 다투어 줄을 서지 않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예수님을 직접 영접하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평소에 그리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교인, 같은 전도회 소속이지만 무슨 봉사 활동 같은 것 때문에 엮이고 싶지 않은 회원, 아니 얼굴을 잠시 맞대는 것조차 부담스럽고 귀찮은 교구 성도 ? 바로 그런 사람일수록 오히려 ‘예수님처럼 여기고 존중하고 대접해야’ 할 소중한 ‘작은 자’임을 꼭 명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지옥에 떨어질 수 있을 정도로 큰 죄입니다.
6절부터 9절에 기록하기를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했습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라고 표현한 예수님의 말씀은, 비록 사람의 눈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신앙 하나만큼은 분명한 성도를 가리킵니다.
그런 자를 “실족하게” 한다는 말은 ‘발부리가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뜻입니다.
즉 곁에 있는 다른 교우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나 신앙생활에 낙심까지 시킨 경우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즉 그렇게 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같이 남을 실족하게 만드는 죄를 저지르는 것은 성도 간에 범할 수 있는 죄 가운데 최악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얼마나 최악인가 하니, “연자 맷돌” 즉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짐승의 힘으로 돌리는 커다란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정도로 심각한 죄라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그처럼 다른 ‘작은 자 교우’의 마음을 ‘실족시키는’ 악한 “범죄”가 반복되면 정말 자기 “손”과 “발”을 “찍어 내버리는”, 즉 손발을 ‘잘라 버리거나’ 자기 “눈”을 “빼어 내버릴” 단단한 각오로써 그 악습을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극단적으로 강조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밝히면서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은 친구가 있는데, 지금 고등부 S.F.C. 운동원인 ‘하음’이라는 학생입니다.
저는 하음이가 아직 미취학 아동인 시절에 교구 심방 중 하음이 어머니를 통해 하음이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하음이도 왔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튼 저는 그 자리에서 지금은 경향키즈놀이학원으로 이름이 바뀐 경향어린이선교원에 하음이가 다운증후군 환자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곧 원감 전도사님을 불러 상황을 물어보았더니, 원감 전도사님도 하음이를 입학시켜 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다른 원생의 학부모들이 반발할까 봐 염려되어서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원감 전도사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만약 하음이를 입학시켰다고 해서 뭐라고 말하는 부모가 있다면 그분의 자녀를 선교원에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세요. 저는 오히려 하음이 같은 다운증후군 환자도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며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원생 어린이들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_” 원감 전도사님은 제 말뜻을 곧 알아듣고 즉시 하음이를 입학시키려 했는데, 하음이 부모님께서 사양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저도 주일 2부 예배 때마다 제일 앞자리에 앉아 예배드리는 하음이를 유심히 보았는데, 특히 찬송 시간에 하음이가 자기만의 표현 방법으로 정말 열심히 찬송하는 천진한 모습을 보면서 가끔 혼자 눈물짓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와 하음이는 교회에서 만날 때마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친구 사이가 되었는데, 몇 년 후 하음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무렵 어느 주일에 저를 만난 자리에서 무언가 제 손에 쥐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음이가 주일학교에서 받았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고!’라는 말과 ‘엄지 척!’이 그려진 아주 작은 칭찬 스티커 두 장이었습니다.
저는 그 두 장의 스티커를 저의 강단용 성경책과 심방용 성경책 표지에 붙여 놓고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는데, 제가 경향교회에서 20년 동안 시무하면서 여러 성도로부터 받았던 온갖 선물 가운데 단연 ‘최고!’였습니다.
우리는 ‘같이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 중 하나’를 예수님처럼 여기며 존중하고 ‘대접’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실족’시키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를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안 그래도 인간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는 아픔을 매일같이 겪고 있는 ‘작은 자’인데, 같은 교회에 다니는 성도마저 그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그 심령을 낙심시킨다면 몇 갑절 더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런 상처 때문에 ‘작은 자’이기는 해도 ‘예수님을 믿는 신앙’만큼은 지키고 있다가 그마저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를 실족하게 만드는 사람은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엄중히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것 때문에 이 인간사회는 더욱 냉랭해지고 불행해지고 있지만, 적어도 우리 기독신자만이라도, 특히 교회 안에서 ‘같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작은 자’를 절대로 실족시키지 않도록 참으로 조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세상에서는 ‘작은 자’로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실로 귀중한 천국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10절 이하 14절에 “10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2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업신여겨도 될 것처럼 보이는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결코 “업신여기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가리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각 개인에게 무슨 ‘수호천사’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 항상 ‘대기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비록 사람은 ‘작은 자’를 아주 쉽게, 심지어 아주 당연한 듯이 업신여기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작은 자’를 천사보다 위에 두시고 천사를 동원하여 수종들게 하실 정도로 귀중히 여기고 계시는 것입니다.
“삼가”라는 말은 ‘극도로 조심해서’라는 의미입니다.
즉 ‘작은 자를 업신여기는 죄’는 절대로 저지르지 않도록, 무심코라도 범하지 않도록 항상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 ‘작은 자 하나’를 아끼시는 정도는 마치 ‘도로 찾은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리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도 더 기뻐하는 목자의 심정과 같다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목자에게 있어서 자기의 양 ‘한 마리’의 가치는 곧 ‘전체 백 마리’의 가치와 똑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교회 공동체 전체’를 소중히 여기는 것만큼 ‘천국백성에 속한 작은 자 하나’를 지극히 귀중히 여기신다고 분명하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께서 은퇴하신 후 미국에 사는 따님 댁에 오셔서 살게 되었는데, 그 따님이 제 친구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그 은퇴목사님의 치매 증세가 아주 심해지면서 나중에는 당신에게 심방을 온 목사님한테 “예수가 누구요?”라는 말까지 하셨다고 했습니다.
제가 언젠가 원로목사님께 그 이야기를 해 드렸더니, 원로목사님께서도 안쓰러워하시면서 ‘그렇지만 그 목사님께서 정신이 온전하실 때 했던 신앙고백을 따라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은 틀림없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전적으로 동감했습니다.
예전에 어느 꽤 유명한 여자 배우가 자살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배우는 평소 착실하게 교회에 다니던 기독신자였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의 어느 부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그 배우를 언급하면서 ‘자살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제 아내 때문에 새 의사를 만나게 될 때마다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아내 분께서 자살하고 싶어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인 적이 있느냐?’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울증 환자가 자살 충동을 받는 일이 흔히 생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중에 그 부목사님을 불러서, ‘자살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에 자살한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다는 말이 분명히 맞습니다. 하지만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나중에 정신질환에 걸려서 자살한 경우에는 어디까지나 병으로 인한 증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반면에, 비록 어릴 때부터 정신질환을 앓아서 정상적인 신앙고백을 한 번도 하지 못한 환자라 할지라도 최소한 교회에 다니고 있기만 하면, 우리는 그 ‘작은 자’ 역시 ‘천국 백성’으로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본인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상교회 안에서 교제하게 되는 교우 가운데 그 어떤 사람이라도 ‘작은 자’처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이유, 단 한 명이라도 내 마음 밖으로 밀어내서는 안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절대로 “업신여기면” 안 되는 이유, ‘아흔아홉’ 명의 대다수 교인과 잘 지내고 있으니 ‘한 사람’ 쯤이야 어떨까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관심을 끊고 있는 그 ‘한 명’, 내가 무시하고 있는 그 ‘작은 자 하나’가 하나님께 있어서는 ‘지극히 귀중한 한 마리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작은 자’가 하나님께서 온 천사를 다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구원하려 하시는, 아니 아직 실족하지 않은 다른 모든 교인을 통틀어 센 숫자보다도 오히려 더욱 귀중하게 여기시는 ‘천국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 존재감과 중요성이 담임목사와는 정말 비교조차 할 수 없어 보이는 ‘장애우 교인’ 한 명이, 놀랍게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담임목사보다 더 소중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장로에 비해서 교회에 아무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거추장스럽게까지 여겨지는 ‘문제 교인’이, 오히려 하나님에게는 ‘아흔아홉 명의 당회원’보다 더 귀중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고는 있지만 다른 교우들로부터 거의 ‘투명 인간’같이 취급받는 교인, 아니 차라리 교회에 안 나오는 편이 담당 교역자에게 더 편하게 보일 수 있는 ‘부담스러운 교인’이, 하나님 아버지의 눈에는 ‘독생자의 십자가를 통해 대속해 주실 정도로 지극히 사랑하시며 절대로 잃을 수 없는 택자’일 수 있는 것입니다.
지상교회 안에서는 ‘다른 교인으로부터 업신여김 당하는 작은 자’가 있을지라도 천국에는 ‘하나님께서 작은 자로 대하는 자녀’가 단 한 명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늘 심령에 새기는 가운데, 특히 내 주변에 있는 연약한 교우일수록 그 ‘작은 자’를 같은 하나님의 자녀 된 형제자매로서 귀중히 여기며 더 뜨거운 사랑을 베푸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제 아내가 발병한 후 결국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원로목사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석 목사, 우리가 이런 일을 직접 겪어 보지 못했더라면, 우리 역시 목사라 하면서도 정신질환자 가족을 둔 교인의 아픔과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이해해 주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그랬을 것입니다.
제 아내의 일이 아니었다면, 저 역시 제일 처음 서론에서 제 아내를 보고 ‘미쳤어!’라고 경멸하던 그 교인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선입견을 가지고, 정신질환자도 어디까지나 환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기 십상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느 텔레비전 방송에서 이런 ‘몰래 카메라’ 실험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자폐아 아이를 둔 한 부부를 일반 식당에 보내서 식사하게 했는데, 사실 그 자폐아나 부부 모두가 다 배우였습니다.
제작진은 그 가족이 식사하는 도중에 자폐아 역을 맡은 아역배우가 다른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식사 중인 손님들을 방해하는 연기를 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 아이가 자기 가족 테이블에서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한 중년 남성에게 특히 자주 다가가서 귀찮게 했는데, 부모가 주의를 주고 만류해도 그 아이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원래 자폐증의 증상 중 하나가 같은 행동을 자꾸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 중년 남성은 처음에는 좀 얼굴을 찌푸리기만 하다가 그런 방해가 계속되자, 결국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아이의 부모한테 “여기는 공공장소인데, 이런 곳에 이 아이를 데려와서 손님들에게 폐를 끼치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화를 벌컥 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중년 남성 역시 제작진에서 섭외한 배우였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곧바로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그 곁에 있던 손님 한 명이 그 중년 남성에게 “지금 여기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사람은 저 아이가 아니라 바로 당신 한 명뿐이오.”라고 오히려 그 중년 남성을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식당에 있던 다른 모든 손님이 다 그 말에 동의하면서 박수까지 쳤습니다.
그때 제작진은 식당 손님들에게 이것이 ‘몰래 카메라’ 프로그램이었다고 알려 주고 상황을 종료시켰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제작진은 열 군데 이상의 다른 식당에서도 똑같은 상황을 연출해 보았는데, 가는 곳마다 첫 번째 식당과 똑같은 결과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방송을 보면서 미국 사람의 기본양식과 장애인식 수준에 정말 감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만약 이런 몰래 카메라를 우리나라에서 실험해 보았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저부터도, 만약 제 아내의 일이 없었더라면, 그 중년 남성이 연기했던 것과 대동소이하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도 ‘저 아이가 내게 피해를 끼친다.’라고 불쾌하게 여겼을 것이고, 어쩌면 식당에 있는 모든 손님들이 ‘내가 직접 말하기는 뭣한 것을 대신 나서서 속 시원하게 대변해 주었다.’라고 그 ‘중년 남성’에게 박수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땠을 것 같습니까?
제가 제 아내의 발병 이후 여러 의사를 만나면서 온갖 조언을 들었지만, 그중에 잊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한인 의사 선생님께서 “환자의 남편께서도 이 상황이 정말 힘드실 것은 잘 알지만, 사실 환자 본인이야말로 속으로 무척 괴로워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그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정신이 확 드는 느낌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제 아내야 그냥 제정신이 아닌 상태이니 스스로 무슨 정신적 고통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을 것이고, 오로지 그것을 곁에서 보고 간병하는 제가 가장 큰 피해자이며 제일 괴로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제 아내야말로 그 병의 ‘피해 당사자’이며 또한 정신질환 환자 본인만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매일 매순간 당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자칫하면 업신여기거나 멸시하기 쉬운 ‘작은 자’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힘든 인생, 정말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작은 자’야말로 우리가 더 사랑하고 더 존중하고 더 많이 도움을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특히 ‘한 교회 안에서, 같이 예수님을 믿는 형제자매’인 ‘작은 자’에게는 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자’야말로 기독신자가 예수님을 영접하듯이 대해야 할 사람이며,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것은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을 정도로 큰 죄이며, 우리가 쉽게 업신여기는 ‘작은 자’를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귀중한 천국 자녀’로 맞이해 주신다는 사실을 꼭 깨닫고, 우리 경향권속 중에 내가 ‘잊고, 무시하고, 업신여기기까지’ 하는 ‘작은 자’가 단 한 명도 남지 않도록 내 주변에 있는 연약한 교우일수록 더욱 귀중히 여기고 더 크고 많은 사랑을 꼭 베푸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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