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2024.07.07 | 말씀마가복음 6장 41-44절, 14장 22-26절 | 설교자석기현 은퇴목사 |
2024.07.07 주일대예배
2024′경향의 강단(29)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마가복음 6장 41-44절, 14장 22-26절
석기현 은퇴목사
신자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경우는 여러 가지 많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식전에 음식을 두고 드리는 감사기도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법을 어린 자녀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부모는 열이면 열 다 가장 먼저 식사 감사기도부터 교육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적어도 신앙생활의 기본을 갖춘 신자라면 다른 감사는 혹 잊어버리더라도 최소한 식사 시간의 감사기도만큼은 꼬박꼬박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식사 감사기도가 그처럼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자주 드리는 것인 까닭에 자칫하면 형식적인 감사가 될 위험도 있습니다.
식사 감사기도를 드려 놓고도 깜빡 잊어버리고 ‘내가 기도했던가?’ 하면서 한 번 더 기도하고 밥을 먹은 경험이 웬만한 신자라면 한두 번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분명히 감사기도를 하기는 했지만 몇 십 초도 지나지 않아서 그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무성의하게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눈앞에 있는 맛있는 음식을 얼른 먹고 싶은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서 ‘하나님, 이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는 가장 간단한 감사기도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 동안 잠시 눈만 감았다가 뜨고서 스스로는 감사기도를 드린 것으로 치는 경우도 꽤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식사 감사기도를 이처럼 무성의하게 대충 넘기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 눈에는 그다지 중요한 감사제목같이 보이지는 않는 이 식사 감사기도까지도 실로 진지하게 드렸던 분이셨습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주님께서 식전에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 장면이 여러 번 나타납니다.
우리나라말 성경에는 그런 장면에서 “축사하시고”, “축복하시고” 혹은 “감사기도 하시고”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 원문을 보면 그 모든 경우가 다 똑같이 ‘감사하다’(give thanks)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니까 ‘보통 감사’가 아닌 그 무언가 색다르고 특별한 감사일 것이라고 여겨져서 그처럼 ‘좀 더 멋진 단어’로 번역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음식을 앞에 두고 항상 하셨던 일은 그냥 순수한 ‘감사기도’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라면 식사 감사기도를 드릴 기분이 별로 나지 않을 법한 상황에서조차 어김없이 항상 하시던 그대로 진지하게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기도는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응답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에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식사 감사기도’의 모범을 통하여, 별로 감사드릴 상황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때에도 잊지 않고 감사드리는 성도가 누리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가진 것이 부족할 때도 하나님께 먼저 감사부터 드리면 ‘풍성하게 채워 주시는 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저 유명한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41절부터 44절에 “41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다 배불리 먹고 43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 중에서 41절에 나타나는 장면, 바로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장면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합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는 배가 고파서 밥 먹고 싶은 생각만 간절한 사람이 남자만 해도 오천 명, 여자와 아이까지 합치면 적어도 만 수천 명이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푸른 잔디 위에 앉게”(39절) 하셨는데, 그것은 이제 곧 식사를 차려 주겠다는 말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는데, 이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감사기도’를 올리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처럼 식사 감사기도를 드리실 때 그 ‘상에 차려진 음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달랑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식사해야 할 사람은 만 명이 넘는 판에 겨우 ‘한 사람분의 도시락’을 앞에 놓고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부터 드리셨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그런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면 ‘진심으로’ 감사기도를 드릴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우리 교회에서는 교회설립기념주일이나 추수감사절에 전 교인에게 식사를 대접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날에 교회 식당에 가보니 웬걸 서빙 테이블에는 딱 일인분의 식사만 준비되어 있는데, 제가 마이크를 잡고 거기 모여들고 있는 수백 명의 교인 앞에서 ‘우리 다 같이 식사 감사기도를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도 주일학교 학생이라면 기도 중에도 키득키득 웃을 것이고, 장년 교우들도 눈을 감고 같이 기도는 할지라도 속으로는 ‘목사님이 지금 우리를 놀리시나?’라고 의아하게, 어쩌면 괘씸하게 여길 것입니다.
사실 음식이 필요한 양의 ‘만 분의 일’밖에 안 되는 상황이라면 그 누가 감사기도를 드릴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모자라는 것을 채워 달라고 ‘간구의 기도’를 드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들었지, 그런 상황에서 ‘감사기도’란 정말 당치도 않게 여겨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그 디베랴 언덕의 푸른 잔디 위에 앉아서 식사를 기다리던 무리 중에도 예수님께서 겨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앞에 두고 감사기도 드리는 것을 보고 그처럼 어처구니없게 여긴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천연스럽게, 하지만 실상은 아주 진지하게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먼저 감사기도부터 드리셨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기왕에 하실 일이라면 일단 오병이어를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써 만 배로 부풀려서 먼저 각 사람 앞에 한 상씩 가득 차려 주는 기적을 일으키신 후에 감사기도를 드렸더라면, 거기 있던 군중 역시 깜짝 놀라면서 그 감사기도에 뜨겁게 동참할 수 있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있는 것 그대로’를 두고, 아니 ‘턱도 없이 모자라는 것’을 가지고도 평소에 늘 하시던 그대로 위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기도부터 먼저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 감사기도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다 배불리 먹고”도 남을 정도로 풍성한 잔치가 되었습니다.
부족하다고 불평하지 않고 그렇다고 더 주십사고 졸라대지도 않고 일단 무조건 감사부터 드린 결과, 성부 하나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만 배’나 더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우리의 감사생활과 비교해 보면 과연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무엇이 ‘꼭 많아야만’ 감사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만족스럽게 채워질 때만 감사드릴 마음이 생깁니다.
아니 우리는 그런 감사의 습관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필요한 것이나 원하는 것이 완전히 충족되지 못한 상태란, 신앙이 약한 교인에게는 그저 불평 원망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고, 좀 신앙이 깊은 교인이라 해도 그 부족한 것을 채워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상황이지 일단 감사부터 먼저 드려야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범사에 감사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적게 받았을 때도, 턱없이 부족할 때도, 지금 내 손에 쥐어진 그 적은 것을 두고 먼저 ‘하늘을 우러러’ 감사부터 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반찬이 변변치 않은 밥상을 앞에 두고도, 한 달의 생활비로만 쓰기에도 빠듯한 월급을 받게 되었을 때도,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즉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향해 진심으로 뜨겁게 감사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항상 음식 투정, 옷 투정만 하는 자녀를 둔 부모의 심정과 다른 집의 아이만큼 못 해주는데도 그래도 자기를 키워 주시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항상 감사할 줄 아는 자녀를 둔 부모의 심정을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쪽이 그 부모를 기쁘게 하는 성숙한 자녀인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지 않습니까?
없다고 항상 투정만 부리는 것은 그야말로 가장 유치한 단계의 교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실 때 감사할 줄 아는 것은 그보다는 좀 성장한 신자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마치 자기한테 밥을 차려 주고 옷을 사 입혀 줄 때만 부모님께 감사할 줄 아는 어린이의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말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란, 부잣집 친구보다는 좀 못 먹고 못 입는다 하더라도 자기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는 부모님께 감사하는 자녀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도 늘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자세를 그대로 지킬 줄 아는 성도입니다.
그처럼 무엇이 부족할 때도 늘 당신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자녀를 성부 하나님께서 그냥 그대로 부족하게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밖에 없는 것을 두고도 ‘하늘을 우러러’ 진정 뜨거운 감사를 드릴 줄 아는 성도에게는 그야말로 ‘배불리 먹고도 남는’ 풍성한 것으로 반드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을 때뿐 아니라 적을 때도 먼저 감사부터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고, 그 결과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을 잘 아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 모든 것을 넉넉하게 채워 주시는 복을 꼭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어려운 일이 닥칠 때도 하나님께 잊지 않고 감사를 드리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보여 주신 감사의 모범입니다.
마가복음 14장 22절부터 26절에 “22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본문에 나오는 “축복하시고”와 “감사기도 하시고”라는 번역 역시 원래는 같은 단어로서 ‘감사하시고’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도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떡을 가지사” 감사기도를 드리셨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떡과 포도주는 여느 식사 때와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기념하게 하려고 나누어 주신 음식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 떡과 포도주란 곧 십자가에서 찢기시게 될 당신의 살과 흘리시게 될 당신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이제 곧 당하시게 될 그 엄청난 고난의 사역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실은 26절에서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라는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찬미하면서 감람산으로 나아갔다.’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찬송을 부름으로써 유월절 잔치를 마친 후 감람산으로 떠났다.’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찬미’란 바로 유대인이 유월절 만찬 도중에 부르는 ‘할렐’이라는 일련의 찬송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할렐 찬미’는 시편 113편부터 118편까지로 구성되는데, 유월절 만찬 도중에 113편과 114편을 부르고 만찬이 끝날 때 115편부터 118편까지를 불렀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마지막 찬미인 시편 118편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감사찬양으로 시작됩니다.
그뿐 아니라 제일 마지막 두 절도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감사의 연속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그 엄청난 고난을 앞에 두고도 기도와 찬송으로써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 역시 저나 여러분이라면 결코 감사드릴 수 없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이 떡과 잔을 나누기 직전에 가룟 유다의 배신이 있었으며, 베드로를 위시한 나머지 제자들도 다 당신을 부인하거나 버리고 도망칠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잘 알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실로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곧 마주하게 될 상황에서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들로부터 배반을 당하는 ‘정신적 고통’까지 겪어야하는, 실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습니다.
그처럼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사역 중 가장 어렵고 괴로운 순간을 맞이하시면서도 성부 하나님께서 그 ‘선하시고 인자하신 구속사’를 당신의 ‘살과 피’를 통하여 성취하시려는 것을 두고 실로 뜨거운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감람산에서 밤새 간구하실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셨지만, 결국은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라 해도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성부 하나님께 감사기도와 감사찬미를 올렸을 때, 주님께서는 스스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하실 때까지 그 십자가를 감당하실 힘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이었다면 그 경우만큼은 감사를 드리기보다는 위로를 받아야 마땅한 입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온갖 환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교회를 위해 충성을 다해 섬기겠다고 단단히 각오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런 때는 정말이지 하나님 편에서 내게 무슨 격려나 칭찬을 먼저 해 주셔야 할 때이지 내 쪽에서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려야 할 때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그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우리의 판단이 결코 맞지 않다고 일깨워 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비단 순경뿐 아니라 역경 중에도 역시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 오로지 감사만 드려야 하며, 감사를 잊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당신의 ‘떡과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너무나도 감동적인 본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만사가 형통’할 때 감사드릴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감사는 그야말로 ‘이방인도’ 할 줄 아는 감사일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이 잘못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현재의 상황이 어렵게만 돌아가고 있을 때’도, ‘눈앞에 태산 같은 난관이 닥쳐왔을 때’도 똑같이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 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조금도 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역경의 현실’이 당신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변하거나 끊겼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안 그래도 사업이 잘 안 풀려서 마음이 심란한데 어떻게 교회 일에 충성하라고 합니까?’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예수님의 모범을 따른다면 여러분의 집안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일어난다 해도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맡기신 직분은 끝까지 감사함으로 섬겨야 할 뿐입니다.
‘나는 지금 내 인생부터가 꼬일 대로 꼬여서 골치 아파 죽을 지경인데 도대체 어떻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는 말입니까?’라는 말을 교역자에게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는 교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십자가에서 찢기실 당신의 살과 흘리실 피를 두고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예수님 앞에서도 감히 그런 ‘무례한 항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십여 년 전에 ‘별들의 여름학교’를 진행하면서 ‘뮤지컬 손양원’을 이 강서 성전 본당에서 우리 교회의 별님들과 교우들이 함께 관람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여러 가지 은혜로운 장면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손양원 목사님께서 당신의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게 되었을 때 그 장례식장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아버지라도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과 괴로움만 가득했을 그 자리에서 손양원 목사님은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로부터 시작하여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등등 무려 열 가지의 감사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바로 그런 감사로 인하여 손양원 목사님은 결국 당신의 두 아들을 총살했던 그 원수까지 용서하고 회개시켰을 뿐 아니라 더욱이 자신의 양아들로 삼는, 그야말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멋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힘들다고 불평만 하고 괴롭다고 원망만 하는 사람은 결국 그 ‘영적 악순환’ 안에서 모든 것이 점점 더 악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도 그 가운데서 감사의 제목을 찾을 줄 아는 성도에게는 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미 다 예비해 놓고 계시는 ‘피할 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진정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답게 ‘우리 몫에 맡겨진 십자가’까지도 오로지 감사함으로 지고 나아감으로써, 그 어떤 시험과 환난도 넉넉히 통과할 수 있는 힘을 얻을 뿐 아니라 우리의 형편을 이전보다 나중이 더욱 창대하게 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까지 꼭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는 항상 드리던 식사 감사기도까지도 이처럼 진지하고 뜨겁게 성부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이 사실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의 사건을 통해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제자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지만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눅 24:16) 있었던 까닭에 주님이신 줄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언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까?
누가복음 24장 30절과 31절에 보면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라고 했습니다.
몇 시간 동안이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가면서도 못 알아보았던 예수님을, 그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는”, 즉 식사 감사기도를 드리는 바로 그 순간에 즉시 알아차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께 감사부터 드리시던 예수님, 식사를 하실 때마다 항상 진지하고도 뜨겁게 감사기도를 드리시던 주님의 모습이 그 제자들의 심령에 얼마나 뚜렷하고 인상 깊게 박혀 있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만일 우리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것과 같은 참된 감사, 깊고도 뜨거운 감사생활을 평소에 꾸준히 계속한다면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인상 깊은 한 장의 사진으로 새겨질 것입니다.
학생 여러분은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가끔은 형편없이 맛없는 음식을 대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은 다 투덜거리고 불평할 때, 여러분은 그 음식을 앞에 두고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귀한 양식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남들은 불평하는 음식을 두고 그처럼 진지하게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한 말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전도가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께서도 가정과 직장 생활에 눈코 뜰 새 없이 쫓기면서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될 때, 정말 돈 한 푼이 아쉬울 정도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칠 때, 또는 그냥 죽고 싶을 정도로 인생 전체가 괴로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럴 때에도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고 이처럼 세상 사회에서는 무능력한 자인데도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귀한 직분을 받아 섬기게 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 여러분 모습은 여러분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어렵게 살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사장이나 동료나 고객의 눈에는 실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영상으로, 진정 ‘자기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으로 인상 깊게 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처럼 부족할 때나 어려울 때도 먼저 감사드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잊지 않고 감사드리는 성도를 저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 얼마나 사랑스럽게 보시겠습니까?
‘당신의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아끼지 아니하시는’ 성부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성도에게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과 ‘십자가 뒤에 따르는 영광’을 예비해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많이 받았을 때뿐 아니라 부족할 때도 먼저 감사드리고 순경뿐 아니라 역경 중에도 늘 감사드림으로써, 그처럼 범사에 감사드리는 당신의 자녀에게 베풀어 주시는 ‘더 풍성한 복’과 ‘끝까지 이기는 힘’을 꼭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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