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2024.07.14 | 말씀시편 3편 1-4절, 20편 1-5절, 27편 4-6절 | 설교자석기현 은퇴목사 |
2024.07.14 주일대예배
2024′경향의 강단(30)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시편 3편 1-4절, 20편 1-5절, 27편 4-6절
석기현 은퇴목사
미국에 사는 한인교포 중에서 돈 좀 벌었다 하면 엄청나게 큰 집을 매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독 주택이면서 지상 3층, 지하 1층까지 있고, 온갖 특별한 이름을 갖다 붙인 방과 공간이 열 몇 개쯤 되는, 처음 들어가 보면 정말 ‘대궐 같다’는 느낌이 절로 드는 집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그래도 그 집에 아이들이라도 좀 있을 때는 괜찮은데 그 자녀들이 다 출가하고 부부 둘만 덩그러니 남게 되는 경우입니다.
저도 그런 집에 실제로 한 번 가 보았는데, 마침 겨울이라 난방비를 아낀다고 부부가 자는 방 한 곳에만 전기장판을 켜 놓고 나머지 집안 전체는 아예 히터를 다 꺼놓고 달달 떨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일부 한인들이 그렇게 큰 집 장만에 몰두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나라에 살 때 이 좁은 땅에서 셋방살이로 전전하던 생활에 한이 맺혀서 그런 것이 아닐까 제 나름대로 짐작해 봅니다.
사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내 집 장만의 꿈’을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신혼부부와 젊은 부부 대부분은 보다 더 값싼 월세를 찾느라고, 혹은 만기가 된 전셋집을 옮겨야 할 때마다 무주택자의 서러움을 톡톡히 겪고 있습니다.
다윗은 무주택자는 아니었지만 자기 손으로 지은 성전을 가져보지 못한 것 때문에 그런 아쉬움을 평생 안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의 특권을 다윗에게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인 솔로몬에게 주셨기 때문이었는데, 그 결과 다윗은 법궤가 안치되어 있던 성막을 성전 대신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그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며 철두철미하게 성전중심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를’ 간구했던 다윗의 기도를 통해, 성도가 철저한 교회중심의 생활을 할 때 누리게 되는 복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교회는 환난 중에 있는 성도의 간구가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되는 ‘기도의 중계탑’입니다.
시편 3편 1절부터 4절에 “1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시편 3편 1절 바로 앞에 나오는 표제를 보면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자기의 친아들에게 반역을 당했습니다.
또한 평소에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많은 신하조차 이 앞날이 창창해 보이는 새 권력자 밑에서 한자리 차지하겠다고 다들 다윗을 배반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본문 1절에서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그를 더욱 괴롭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2절에서 다윗이 토로한 대로 “많은 사람”, 즉 예전에는 다윗이 행차하면 그 앞에서 환호하던 백성 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고, 즉 ‘저 다윗이 지금 당하고 있는 꼴을 보니 하나님께서도 그를 저주하고 계시는 것이 틀림없다.’라는 조롱과 비난을 퍼부었던 사실이었습니다.
정말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원투 펀치를 연속으로 맞으면 그대로 녹다운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믿었던 사람이 자기의 대적으로 돌아서는 현실에는 크게 낙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였지만, 하나님마저 자기를 버렸다는 소리가 들리자 다윗은 오히려 불끈 일어나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그것이 이어지는 3절에서 다윗이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라고 크게 외치고 있는 내용입니다.
‘너희들이 뭐라고 말해도 하나님께서는 내 편이시며 이런 환난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나의 머리를 들어 주시고야 말 것이다.’라고, 자기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자들을 향하여 정면으로 카운트펀치를 날렸던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요 ‘사면초가에 빠진 항우’와 같은 처지인데 도대체 무슨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처럼 ‘하나님은 끝까지 내 편이시다.’라고 자신 있게 응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 대답이 바로 4절에 나옵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라는, 다윗의 이 자신 넘치는 확신에 가득 찬 소리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그의 성산’이란 바로 법궤가 모셔져 있는 시온산을 가리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서 급히 도망갈 때 성막은 물론 법궤조차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 성막이 있는 예루살렘의 성산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를 올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김없이, 즉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런 기도의 응답이 확실했던 까닭에 다윗은 자기를 배반한 그 많은 대적과, 자기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그 많은 원수 앞에서도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라고 자신만만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오히려 더 많은 난관만 첩첩산중으로 쌓여 가는 때야말로 우리가 ‘시온산’을 향해 마음의 창을 열고 기도하기에 가장 알맞은 적기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언제 어떤 처지에서 주님을 찾더라도 바로 그 ‘부르짖음’은 송신된 순간 즉시 이 경향교회에 높이 설치된 기도의 중계탑을 통하여 곧바로 하나님께 상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기도를 수신하신 하나님께서 그 ‘성산’에서 보내 주시는 답신 역시 ‘크고 똑똑하게’ 전달됩니다.
‘여호와의 육성’이 교회라는 중계탑을 통하여 성도에게 들릴 때, 세상의 잡음은 조금도 끼어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드리지 않으면 우리는 ‘저 사람은 기독신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는 조롱에 주눅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나아와서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를 비난하고 조소하는 소음에 결국 배겨낼 수 없게 됩니다.
인생의 쓴맛이 가중될 때, 전후좌우 어디를 둘러보아도 빠져나갈 길이 없어 보이는 환난을 당할 때, 그럴수록 이 ‘기도하는 집’을 통하여 위에 계신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실로 ‘주님께서 나의 방패요 영광이요 머리를 드시는 자가 되어 주시는’ 즉각적인 응답을 날마다 체험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교회는 전투하는 지상교회가 필승의 지혜와 능력을 받게 되는 ‘영전(靈戰)의 사령부’입니다.
시편 20편 1절부터 5절에 “1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4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시편은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승리를 간구하면서 함께 부른 찬송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전투에 임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승의 작전지시를 내려 주고 대적을 맞설 사기와 용기를 공급해 주는 본부가 어디인지를 뚜렷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곳 역시 “성소”가 있는 “시온”이었습니다.
2절은 1절과 계속 이어지는 문맥으로서, 바로 그 “여호와”, “야곱의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라고 보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이 적군과 조우하게 된 장소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이방의 접경 부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온산의 성소에 좌정하셔서 그곳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사령부로 삼아 그들을 “높이 드시는” 승리의 길로 이끌어 주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을 나가면서 그들의 진짜 사령부인 성소,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호와께서 총사령관이 되셔서 그들을 “도와주시고... 붙드시는” 성소만을 철저히 의지하면서 출정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이어지는 3절에 나오는 대로, 전쟁터로 출정하기에 앞서 바로 그 성소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소제”와 “번제”를 먼저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필승의지의 각오를 다지고, 반드시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면서 돌아오게 되리라는 필승확신의 신앙을 굳혔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치르는 전쟁의 승패는 전장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예배드리는 성소에서 이미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의 “깃발을 세우게” 될 것이 결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평소에 훈련을 받는 기지인 동시에 전시에 출정하게 되면 명령을 내려 주는 본부가 됩니다.
우리가 평소에 이 교회에서 말씀을 통하여 ‘전투수칙’을 숙지하고 선한 일에 봉사함으로써 ‘숙달된 용사’가 되고 또한 성도 교제를 통한 ‘영적 전우애’를 쌓아 가면, 큰 영전(靈戰)이 한바탕 터지게 될 때도 조금도 당황하거나 지레 겁먹지 아니하고, 오히려 모든 교인이 함께 필승의 “계획”을 짜면서 파이팅을 크게 외치며 그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해”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담대히 전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공대원이 ‘침투 및 폭파 작전’을 실시할 때 그 주요 대상은 항상 적군의 본부입니다.
몇 명의 특공대원이 전 중대나 대대 병력을 다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야간에 경계근무 라인을 돌파하여 중대본부나 대대본부만 폭파하고 돌아오면, 본부의 명령을 받을 수 없는 나머지 군대는 절로 전투력을 상실하면서 사분오열되기 마련이며 따라서 간단하게 소탕할 수 있습니다.
이와 똑같이 사탄도 신자들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고 교회의 머리 되신 총사령관으로부터 명령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작전을 씁니다.
교인들이 평안의 때에도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할 줄 모른다면 전시 상황이 닥칠 때는 ‘초전필패’로 전멸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 뻔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전투하는 지상교회’의 승패는 바로 그 교회 성도들의 ‘교회중심의 생활’에 달려 있습니다.
자녀의 신앙교육이든지, 직장과 사업에서의 복이든지, 선교지에서의 구령 역사든지 간에 모두가 다 여러분이 평소에 이 예배당을 얼마나 자주 출입하고 이 성전을 얼마나 사모하면서 훈련을 잘 받아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잘 하느냐 하는 여기에서 이미 다 결판나는 것입니다.
교회중심으로 뭉쳐지지 않은 교인들이란 문자 그대로 ‘오합지졸’이 될 수밖에 없으며 사탄의 밥이요 마귀의 저격 대상이 될 뿐입니다.
그런 교인들이 모인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사 위에 자랑스러운 ‘승리의 깃발’을 꽂기는커녕, 약간의 시험만 닥쳐와도 각자의 개인 신앙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 운동이 계속되는 동안 절대로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 사탄은 세상 끝날까지 한시도 휴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을 향한 온갖 시험과 도전의 싸움을 걸어올 때마다, 늘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필승의 지혜를 얻고 이 전투부대의 전우끼리 서로 사기를 북돋워 주는 가운데 압승의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앞으로도 수많은 ‘승리의 깃발’을 경향교회의 이름으로 함께 높이 세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교회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한 성도의 기쁨이 최고조에 달하는 ‘영광의 예배처’입니다.
시편 27편 4절부터 6절에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이 시편에서 다윗은 “내가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라고, 평소에도 늘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던 소원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게” 되는 것, 즉 자기 손으로 지은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남은 평생토록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이 소원을 허락받지는 못하게 되었으니까 아마 이 시편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거절을 듣게 되기 전에 지은 것 같지만, 어쨌든 다윗의 마음만큼은 문자 그대로 ‘꿈의 성전’(a dream house of the Lord)을 짓고 거기에 평생 산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왜 그처럼 ‘여호와의 집에 사는 것’을 간절히 바랐습니까?
4절 하반절에 보면 그 이유는 곧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대중가요 중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마치 연인들이 자기네 소유의 집에서 둘만의 사랑을 평생 나누고 싶어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다윗 역시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그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면서 가까이 모시는 예배생활을 할 수 있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예배생활에는 왜 그처럼 은혜가 넘쳤습니까?
그것은 5절과 6절에 나오는 대로, 그는 우선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비밀히 지키시고... 숨겨” 주시는 도움을 체험했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높은 바위 위에 두심”으로써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는” 통쾌한 경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개인의 삶을 통하여 기도의 응답을 받아 본 성도, 사탄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체험이 있는 공동체가 ‘여호와의 집’에 모였을 때, 바로 거기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며”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는” 예배를 뜨거운 인격의 감격, 폭발적인 성령의 감동 속에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얼마나 놀라운 간증을 하고 있습니까?
그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는 임금의 옥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높이 들어 주시는 예배의 자리’였습니다.
아까 시편 3편에서도 나왔듯이, 어떤 환난 중에도 기도드리기만 하면 다윗의 “방패” 되신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 “성산에서 응답해” 주시면서 그를 조롱하던 불신자들 앞에서 다윗이 오히려 의기양양하게 “머리를 들게” 해 주셨습니다(시 3:3-4).
또한 앞서 시편 20절에서 보았듯이, 적군이 사면에서 이스라엘을 압박하며 공격해 올 때도 다윗이 드리는 “소제를 기억하시며... 번제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성소에서” 다윗을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셔서(시 20:2-3), 그를 “둘러싼 원수” 즉 다윗을 포위하고 있던 원수들 앞에서 마치 ‘용용 죽겠지?’ 하며 보란 듯이 높은 바위 위에, 그들의 머리 위에 들리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다윗의 예배가 그 얼마나 뛸 듯이 즐겁고 신나며 그 기쁨이 극에 달했겠으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그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예배였겠습니까?
교회는 바로 이처럼 기도 응답의 기쁨과 승리의 영광이 충만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장소입니다.
‘주님, 몇 십 년 동안 핍박을 받으면서도 제 불신가족을 위해 꾸준히 드려왔던 기도에 드디어 응답해 주셨습니다.’라는 감격적인 감사, ‘주님, IMF에다 코비드 재앙까지 통과하면서도 헌당헌금 완결을 해내고 말았습니다.’라는 가슴 뿌듯한 감동이 우리의 예배 시간에 충만해야 합니다.
이런 기쁨과 영광이 없는 교인들이 드리는 예배는 당연히 ‘무감동의 외식(外飾)’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모이는 경향교회가, 바로 예배시간에 경향의 강단에 서게 되는 목사에게 있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인 동시에 특권적인 영광입니다.
마귀의 시험에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불패의 신화’ 아니 ‘불패의 실화’를 자랑하는 경향교회 당회가, 바로 경향교회 장로석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장로님들의 무한한 기쁨이요 최고의 영광입니다.
“우리 찬송 듣고 지옥 떨리니 형제들아 찬송 찬송합시다”라는 노래로 예배시간마다 “원수 마귀 모두 쫓겨 가게” 만드는 경향교회 찬양대가, 우리 찬양대원 각자가 매주일 아침마다 누리는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주일성수와 십일조 생활에서 승리하도록 교육하는 경향교회 주일학교와 S.F.C.가, 그 경향교회의 교사만 누리는 고유의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새소식반과 경향키즈놀이학원을 통해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끈질기게 전도한 끝에 결국 경향교회에 등록시킨 교인 한 명을 옆에 함께 앉히고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는 시간이, 바로 경향교회 구역장에게 있어서는 생애 최대의 기쁨인 동시에 최고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도 이 성전을 통하여 기도 응답을 받고야 만 성도의 기쁨이 최고조에 달하는 예배, 그 어떤 원수의 도전 앞에서도 백전백승의 연승가도를 달려오는 공동체의 영광이 높이 들리는 예배를, 이 강서성전에 경향교회의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와의 집’은 ‘부르짖으면 응답하신다’라는 직통전화선(hot line)이 이 성전에 365일 24시간 내내 연결된 ‘기도의 중계탑’입니다.
‘여호와의 집’은, 마귀가 그 어떤 시험을 가지고 도전해 와도 모든 성도가 오직 교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싸우면 전도와 교회 부흥, 경상비 흑자뿐 아니라 이단과 우상종교와 공산독재 정권과 싸우는 선교의 전장에서 반드시 연전필승하게 만들어 줄 ‘영전(靈戰)의 사령부’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를 체험한 성도의 기쁨이 최고조에 달하는 ‘영광의 예배처’이니, 경향교회 교인의 영광이 이 경향교회를 떠나면 어디에 있겠으며 저와 여러분의 진짜 기쁨이 이 예배라는 영적 잔치 자리가 아닌 다른 어느 곳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저와 여러분은 다윗이 ‘평생에 그토록 구했지만 받지 못했던 한 가지 일’의 복까지 마음껏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1만 평에 달하는 경향학원의 터, 이 수천 석의 예배당과 수많은 교육실과 사무실 및 부대시설, 게다가 강서사거리 요충지에 자리 잡은 경향선교관과 교회 정문 건너편의 교육관까지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집이 없어 서러운 고아’도 아니며 ‘대출금 납부에 쫓기는 채무자’도 아닌, ‘여호와께서 거하게 해 주신 집이 있는 행복한 자녀’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아름답고 멋진 성전을 일주일에 겨우 한 번씩만 쓴다면 얼마나 아까운 일인지, 이 은혜롭고 복스러운 경향공동체의 예배시간에 겨우 주일오전 한 시간만 참석하고 만다는 것이 얼마나 큰 손해요 어리석은 일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무리 ‘꿈의 내 집’을 마련했다 해도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면 쓸쓸하고 처량할 뿐이며, 아무리 대궐이라도 비어 있으면 ‘유령 영화’에나 등장하는 폐가가 되고 맙니다.
바로 그것이 지금에 와서는 텅 빈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유럽의 대부분의 교회가 실증해 주는 현재이며, ‘모이기를 폐하는’ 현대 교인들에게 영락없이 벌어질 미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교인 등록은 늘어가고 주일 낮예배 출석은 증가하면서도 밤예배와 주중의 기도회 모임들은 점점 더 줄어드는 것이 현대교회의 공통적인 현상이요 추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수요예배를 잃어가고 금요기도회와 새벽기도회를 모이지 않게 되면 주일오전예배만이라도 남게 될 것 같습니까?
어림도 없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고질적인 게으름의 본성에 스스로 채찍질을 가하고 이 악한 사조를 거슬러 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집이 있는데도 외박하기를 더 좋아하는 문제아가 되어서는 안 되며, 이 강서성전이 몇 세대 후에 가서는 무슨 관광명소로 전락해 버리는, 가정하기조차 싫은 비극을 절대 초래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부지런히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는 것’ 바로 여기에 개인 신앙의 사수와 교회 부흥의 승패 관건이 달려 있고, 바로 그것으로 결판이 나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사용할 줄 모르는 교인은 ‘아버지와의 대화가 단절된 자녀’가 되고 맙니다.
교회의 관할과 치리를 따를 줄 모르는 교인은 아무리 장로, 집사, 권사라 해도 실상은 대장 되신 그리스도께 불충하는 탈주병이요 배반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한 공동체로 모여 함께 드리는 예배는 성도의 최고 기쁨과 감격과 은혜와 영광의 총 집합체이며, ‘교인’과 ‘신자’의 차이는 바로 이 예배생활에서 완전히 갈라지는 것입니다.
실로 교회는 신자의 현주소가 있는 집이며, 예배는 그 ‘영적 스위트 홈’에서 누리는 최상의 복입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집에서 ‘교회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늘 교회에서 예배드린 후에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학교에, 직장에, 기업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인사드릴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포스트 경향희년 첫해의 하반기에는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이 강서성전에 더 자주 모여 예배드리기를 힘씀으로써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사는’ 복을 마음껏 누리고, 그런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통해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더욱 사모하며 ‘그 도우심과 승리’가 주는 기쁨과 영광을 충만히 체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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