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2024.08.04 | 말씀사무엘상 27장 1절 - 28장 2절, 29장 1-11절 | 설교자석기현 은퇴목사 |
2024.08.04 주일대예배
2024′경향의 강단(33)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사무엘상 27장 1절 - 28장 2절, 29장 1-11절
석기현 은퇴목사
현대사회에서 ‘중년의 위기’(mid-life crisis)라는 말을 흔히 씁니다.
나이가 한 사오십 대쯤 될 때 사람이 자기 인생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거나 낙담하면서 맞이하게 되는 정신적인 위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요즘에 와서는 ‘청년의 위기’라는 용어가 새로 등장했는데, 영어로는 ‘quarter-life crisis’, 즉 백세 시대를 4분의 1쯤 통과한 25세 무렵에 시작되는 위기라고 해서 그렇게 부릅니다.
컴퓨터 시대의 3차 산업이 급속도로 다양하게 발달됨으로써, 대학 졸업과 동시에 혹은 아예 대학을 도중하차까지 하면서 이십대 때부터 소위 IT산업이나 벤처기업 등의 사업에 뛰어드는 청년이 많아졌는데, 자연히 그중에는 실패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옛날에는 그래도 마흔 정도는 넘어야 겪었던 인생의 위기, 즉 사업의 파산, 인간사회의 매운맛, 자기 정체성에 대한 회의, 인생 자체에 대한 절망 등을 이제는 이삼십 대의 새파란 젊은이들이 겪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위기관리 능력’(crisis management skills)의 중요성도 예전보다 더욱 높아졌습니다.
시기가 다르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인생의 위기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인데, 오로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내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진짜 인생 파산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아직 창창한 청년 시기에 일찍 그런 인생의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맹렬한 증오와 집요한 추격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그는 자기 인생을 도대체 어떻게 주체해야 할지 모를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런 절망의 밑바닥에서 다윗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라고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과연 다윗이 사울의 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어떤 시도를 했으며 실제로 어떻게 극복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기독신자의 진정한 ‘위기관리 능력’을 함께 배양하고자 합니다.
1. 위기에 빠졌을 때 불신앙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게 됩니다.
27장 1절부터 7절에 “1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2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3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4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5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바라건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하니 6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7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 수는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죽음의 고비를 연이어 통과한 후에도 사울의 집요한 추격을 끝도 없이 계속 받게 된 다윗은 ‘이러다가는 내가 결국 사울의 손에 죽고 말 것이다.’라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그는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도망하는 것이 “좋으리로다”라고, 즉 상책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매사에 항상 하나님께 여쭈어보고 결정하던 다윗이 인제 와서는 자기 머릿속에서 짜낸 어설픈 아이디어 하나에 전 인생을 걸게 된 것이었습니다.
연이어 닥치는 인생의 맵고 아픈 것이 그의 심령을 지치게 하고 하나님 의지하는 믿음을 약화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부하 “육백 명”을 이끌고 당시 블레셋의 5대 도시 중의 하나였던 “가드”의 왕 “아기스”에게 찾아가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옛날에 자기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던 블레셋 사람에게 이제는 다윗 쪽에서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제 발로 기어들어 간 격이었습니다.
즉 그는 원수에게 의존하여 자기 목숨을 보전하려 하는, 실로 수치스러운 ‘적과의 동침’을 취했던 것입니다.
아기스 왕은 그런 다윗을 쾌히 받아 주었습니다.
적국 이스라엘의 최고 장군이 자기에게 정치적 망명을 요청해 온다는 것은 그로서는 그야말로 기분 좋은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기스에게 다윗이 자기네 거주지로 요청하여 얻은 “시글락”은 가사의 동쪽이며 유다의 남쪽에 있는 성읍이었습니다.
그처럼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울은 더 이상 다윗을 “수색”, 즉 잡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최대 정적이 황무지이건 산악 동굴이건 어쨌든 이스라엘 땅 어느 구석에 있을 때는 자신의 왕권 유지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었지만, 일단 국외로 떠나면 그렇게 영향력을 발휘할 길이 없다고 사울은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여튼 그렇게 사울이 추격을 포기함으로써 다윗이 블레셋 망명을 통해 목적했던 바가 일견 그대로 성취된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안식은 원수에게 굴복하여 얻은 수치스럽고도 또 불의한 것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짓까지 감수해 가면서 얻은 것이라고는 정말 속 편할 리가 없는, 진정한 평안 아닌 반쪽 평안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그 안식조차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이어지는 8절 이하에 보면, 시글락에 거하던 다윗은, 그 동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부근에 있던 가나안 원주민 족속을 공격하게 됩니다.
8절에 나오는 “그술... 기르스... 아말렉”은 창세기 15장 16절부터 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종족입니다.
이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에게 아주 위협적이고도 골치 아픈 존재였는데, 다윗은 이들을 공략함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부분적으로나마 성취한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아기스 왕에게는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 즉 남방 지역에 살고 있던 유다 족속과 친유다 족속들을 공격했다고 허위보고를 했는데, 이것은 아기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아기스의 신임을 더 크게 얻고자 꾀를 부려 자기는 이제 유다 족속을 공격할 정도로 완전히 블레셋 편이 되어 있다는 것을 과시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그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남녀를 살려서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하고” 다 죽여 버린 것도 자기가 거짓말한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아예 입을 막아 버리고자 함이었습니다.
이것도 일견 다윗의 의도한 대로 된 듯이 보였습니다.
그런 보고를 들은 아기스는 다윗을 가리켜 “영원히 내 부하”가 될 사람이라고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실로 비참한 일이었습니다.
여기 “부하”라고 번역된 말은 문자적으로 ‘종’이라는 뜻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할 사람이 원수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하고 그 원수가 마음대로 부리는 종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다윗이 자신의 인생 위기 극복을 위하여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불신앙적인 방법을 꾀했을 때 사태는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28장 1절과 2절에 “1그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함께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2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 당신의 종이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하니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를 영원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너는 밝히 알라”라는 말은 ‘똑똑히 들어라’라는 뜻으로서, 아기스 왕이 아주 강력한 어조로 명령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 명령은 지금 이스라엘을 상대로 출전하는 블레셋 군에 다윗과 그의 부하들도 함께 종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지금까지 거짓말에 거짓말을 덧붙여서 아기스의 신임을 얻으려 했던 다윗은 완전히 자가당착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기스의 명령을 거부하면 당장 자기의 충성심을 의심받고 자신과 부하들과 처자들의 생명이 끝날 것이 뻔했습니다.
그렇다고 아기스의 명령을 따르자니 조국 이스라엘의 군사와 백성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할 판인데,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겠다는 사람으로서는 또 다른 무덤을 스스로 파는 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속된 표현으로 ‘빼도 박도 못할’ 진퇴양난에 이르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이 한 말, “그러면 당신의 종이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라는 말을 쉽게 번역하자면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보여 드리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속으로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지만 당장 목숨을 부지하자니 다윗으로서는 일단 아기스의 비위를 맞추어 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말을 듣자 아기스는 “내가 너를 영원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라고 했는데, 이 말은 바로 다윗을 그의 친위대장으로 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실로 그 얼마나 비참한 결말이었습니까?
다윗이 원수에게 굴복해서 얻은 안식이란 결코 평화스럽지 못했고, 원수에게 잘 보임으로써 얻은 것이라고는 완전히 ‘원수의 똘마니’로 추락한 수치뿐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무슨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곁길로 나가기 시작하면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번 잘못한 것을 또다시 불신앙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면 할수록 더더욱 헤어날 수 없는 영적 악순환을 스스로 불러들이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그처럼 마귀와 타협하는 수단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까?
시험을 당해서 마음이 편치 않으면 주일 예배에 출석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일주일에 겨우 한 시간 출석하던 예배조차 평소에 그 얼마나 마음에 부담이 되었기에 그 예배 출석을 좀 쉬면 마음이 평안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과연 그런 마음에 진짜 평안함이, 정말 참된 안식이 주어지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평소에는 그런대로 정직히 살다가도 너무 물질적으로 쪼들리게 되면 불신앙적인 아이디어를 자기 딴에는 ‘상책’이라고 또 내놓습니다.
‘이 고비 넘길 때까지만’이라고 작정을 하고 십일조를 바치지 않음으로써 그 위기를 타개해 보겠다고 합니다.
물론 가당치도 않은 생각입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을 팔아먹고 현실과 타협하려 하면 할수록 더욱 그 자신은 마귀의 손아귀에 꼼짝 못하고 붙잡히는 종이 될 뿐입니다.
인생 위기를 현실과 타협하여 해결하려 하고 절망적인 사태를 불신앙적인 생각으로 극복해 보겠다고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수밖에 없는 최악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그 어떤 어려울 때에도 절대 잊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위기에 처하게 되어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는 신자는 반드시 구원받게 됩니다.
29장 1절 이하 5절에 “1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 2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인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3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이르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하니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4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5그들이 춤추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그 다윗이 아니니이까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블레셋군이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전열을 맞추어 전진하는 중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앞에서 아기스 왕이 말한 대로 그의 ‘머리 지키는 자’ 즉 친위대장이 되었고, 다윗의 부하들은 아기스의 친위부대원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았다는 사람이 지금 그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터에 나와 있는 적군 사령관을 호위하고 있으니 사실상 반역도 이런 반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실로 비참한 꼴, 처참한 몰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저질러 놓은 일에,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함정에 빠져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역사가 다윗의 능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신 존재는 바로 블레셋의 “방백들”, 즉 아기스 왕의 신복들이었습니다.
그 블레셋 장군들은 지금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싸우는 전투에 출전하면서 다윗과 그 부하들이 자기 진영의 배후에 있는 것을 아주 달갑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다윗은 어찌 되었든지 간에 이스라엘 장군 출신이었으며 다윗의 진짜 속마음을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다윗이 그들 앞에서 ‘예, 예’ 하면서 굽실거렸지만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마음이 변해서 무슨 짓을 할지 그들로서는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처럼 자기네 뒤통수에다 이중간첩일지도 모르는 용장을 배치해 놓고 전선에 나아간다는 것은 그 블레셋 장군들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기스 왕에게 다윗을 전열에서 빼내어 시글락으로 복귀시키지 않으면 전투에 임할 수 없다고 강력히 항의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6절부터 11절에 기록하기를 “6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진중에 출입하는 것이 내 생각에는 좋으나 수령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7그러므로 이제 너는 평안히 돌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에게 거슬러 보이게 하지 말라 하니라 8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하니 9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 10그런즉 너는 너와 함께 온 네 주의 신하들과 더불어 새벽에 일어나라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서 밝거든 곧 떠나라 하니라 11이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과 더불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떠나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가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르엘로 올라가니라”라고 했습니다.
신복들의 강력한 반발을 받은 아기스 왕은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논리가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기스 왕은 자기 개인적으로는 다윗을 전적으로 신임하면서도 결국 다윗을 불러 자초지종을 말하고 그에게 대(對) 이스라엘 전투에 참여하지 말고 전열에서 나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아기스의 지시에 대하여, 8절에 나오는 다윗의 대답은 ‘아니, 평소에 제가 무엇 한 가지라도 잘못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도대체 왜 여기까지 와서 저를 임금님의 원수인 이스라엘과 한바탕 싸워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드십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엄살이 아니겠습니까?
아기스의 말을 듣는 순간 다윗은 속으로는 그야말로 ‘이제 살았다!’ 하고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자기로서는 빼지도 박지도 못할 지경에 꼼짝없이 몰리게 되어 있었는데, 천만뜻밖에도 아기스 왕 쪽에서 먼저 ‘너는 이 전투에 나가지 않아도 좋다.’라는 말이 떨어졌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아이고, 정말 아쉽기 그지없습니다.’라고 내숭을 떨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윗을 그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구출해 준 사람은 아기스 왕도 아니고 블레셋 방백들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절묘하게 역사하신 일이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전혀 불가능했던 제일 어렵고 골치 아픈 일, 다윗이 스스로 자초했던 인생 최대 위기의 뒤치다꺼리를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손 걷어붙이고 나서서 깨끗하게 정리해 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그렇게 가만히 내버려 두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다윗이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무슨 ‘이쁜 짓’을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다윗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곁길로 나가 외도하고 있다가 오도 가도 못할 난관에 스스로 빠져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다윗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예정하고 계셨으며, 그런 당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버려두실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의 역사를 위하여,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다윗을 그런 결정적인 위기에서 친히 구원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택자를 위해서만 베풀어 주시는 참으로 놀랍고도 위대한 사랑의 섭리 - 바로 이것이야말로 신자가 인생의 위기를 벗어나게 되는 최선의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붙잡힌 존재,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위하여 사용될 인생,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큰 일을 위하여 쓰일 도구와 병기가 되는 것이야말로 그 모든 인생의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보증 수표나 마찬가지입니다.
미 공군의 전투기가 격추되어 조종사가 적지에 낙하하게 되면 그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하여 그야말로 육해공의 입체적인 작전이 펼쳐집니다.
사용할 수 있는 기술과 장비를 총동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조종사 구출 작전만 전문으로 하는 특수부대까지 가동하는데, 그러다 보면 조종사 한 명을 구출하려다가 다수의 구조대원이 희생당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발생합니다.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면서도 그 구출 작전을 감행하는 이유는 전투기 조종사 한 명의 가치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당신께 꼭 필요한 일꾼, 요긴한 용사가 위기에 빠지면 반드시 구원하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선포의 사명을 끝까지 수행해야 할 전도자가 어떤 영적 낙심에 빠져 있도록 버려두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섬기는 요직에 크게 쓰여야 할 직분자가 가정이나 사업에서 당하는 시험에 매여 꼼짝 못 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세계 선교를 위해 그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사용하시려는 계획을 세워 두신 한 성도를, 어떻게 자기 인생에 대하여 절망하고 완전히 쓰러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는 신자는 그 어떤 치명적인 인생 위기가 닥친다 해도 실로 오묘하고도 강력한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반드시 재기하게 됨을 꼭 확신하고 체험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라는 이 말은 자기에게 닥친 최대의 인생 위기를 벗어나려는 다윗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그가 원수를 찾아가서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이라고 하면서 탈출구를 찾으려 했을 때 그의 위기는 더욱 진퇴양난의 수렁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도움, 기적적인 탈출구는 다윗 자신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던 중에 오로지 위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신자가 자신의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거나 잠시 보류하고 곁길로 나가는 것이 어떻게 ‘문제해결’로 이어질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어떤 불신앙적인 방법으로 돌파해 보겠다는 것이 어떻게 ‘상책’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바로 사탄이 던지는 ‘최하책’의 미끼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택함을 입은 성도,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교회는 그 하나님께서 절대로 망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굳게 확신하고 끝까지 의지하면 반드시 전화위복, 기사회생의 역전승을 거두게 됩니다.
오래전에 모 카드 회사의 CF송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는 노래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졌었습니다.
불경기에 허덕이면서 가장으로서의 자신감마저 상실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아버지 가운데 아마도 이 노래의 내용처럼 자기 자녀와 아내의 응원에 힘입어서 재기의 의지를 새롭게 다진 사람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욱이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과 그 약속을 굳게 믿고 그 하나님께서 새로운 용기와 힘을 내려 주실 것을 끝까지 의지하는 신자는 어떠하겠습니까?
항상 자신이 하나님께 택함 받았음을 기억하며,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를 결코 쓰러진 채로 버려두지 아니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자상하고도 강력한 손에 붙들려 있음을 확신함으로써, 그 어떤 ‘시험을 당해도 결코 죄 짓지 말고’ ‘주님 내 편에 서서 항상 도와주시는’ 승리를 꼭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목록 | |
---|---|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설교일2024.09.22 |
MP3
|
예수를 아는 지식
설교일2024.09.15 |
MP3
|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설교일2024.09.01 |
MP3
|
형제와 원수, 기도와 대접
설교일2024.08.25 |
MP3
|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설교일2024.08.04 |
MP3
|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설교일2024.07.28 |
MP3
|
여호와의 소리
설교일2024.07.21 |
MP3
|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설교일2024.07.14 |
MP3
|
새 노래, 즐거운 소리
설교일2024.07.07 |
MP3
|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설교일2024.07.07 |
MP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