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2024.08.25 | 말씀마태복음 7장 1-12절 | 설교자석기현 은퇴목사 |
2024.08.25 주일대예배
2024′경향의 강단(36)
형제와 원수, 기도와 대접
마태복음 7장 1-12절
석기현 은퇴목사
제가 신학교에서 설교학 강의 첫 시간에는 늘 학생들에게 ‘설교를 바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직신학을 잘 알아야 한다.’라고 말하며 신학생 시절에 무엇보다도 조직신학을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합니다.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란 일반 성도에게는 매우 딱딱하게 들리는 말인데, 이것을 아주 쉽게 정의하자면 ‘성경 전체의 문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구약 66권에는 수많은 구절과 단어가 있는데, 만약 그 하나하나를 부분적으로만 이해하면 전체적으로는 심각한 신학적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 전체의 문맥은 살피지 않고 그저 개인적인 주장을 뒷받침하는 듯 보이는 몇 구절만 부분적으로 인용하는 것이 이단의 대표적인 수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한 본문을 택해서 설교할 때 그 본문 구절만 부분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성경 전체의 문맥을 정리해 놓은 조직신학으로 검증해야만 바른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나무를 보려면 숲을 보아야 한다.’라는 명언을 빌리자면, 성경 전체의 ‘숲’이 곧 조직신학이고 각 구절은 ‘나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처럼 성경을 읽을 때 각 구절을 따로따로만 해석하지 않고 바로 앞뒤에 있는 ‘문맥’부터 살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이 시간 저는 예수님의 유명한 교훈 두 가지를 바로 그 뒤를 따라오는 구절의 문맥과 연결해서 상고함으로써 더욱 깊고도 정확한 의미를 함께 깨닫고자 합니다.
1. 기독신자는 같은 교우는 함부로 비판하지 말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원수는 철저히 배척해야 합니다.
1절부터 5절에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비판하다’라는 단어는 원래 ‘판단하다’(judge)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타인을 판단할 때는 긍정적 판단보다 부정적 판단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본문에서 ‘비판하다’라고 번역한 것은 문맥상 적절합니다.
그렇다고 이 “비판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타인에 대해서는 아무 판단도 내리지 말라.’, 즉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 쓰지 말고 살아야 한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해 습관적으로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지 말라.’라는 의미인데, 사실 걸핏하면 남을 나쁘게 비판하는 버릇은 스스로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매우 형성되기 쉬운 악습입니다.
3절 이하에서는 그 대상을 “형제”라고 구체적으로 반복해서 지칭함으로써, 이것은 특히 같은 교회의 교우 사이에서 극히 삼가야 할 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 성경에 보면, 2절 앞에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즉 2절은 성도가 함부로 다른 교우를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 주는 내용인데, 그것은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헤아림”이라는 말은 ‘타인을 비판하는 잣대’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교우를 함부로 비판하는 사람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와 똑같은 잣대로써 그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른 교우에 대한 비판을 아주 쉽게 하지만, 만약 그 ‘헤아리는 잣대’를 본인에게 갖다 대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타인을 비판할 때처럼 날카롭게 하지는 못하고 적당히 핑계를 대며 무마해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타인을 비판하는 잣대를 그대로 사용하셔서 우리를 직접 심판하시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우리 가운데 그 ‘하나님의 엄중히 헤아리시는 심판’에서 벗어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까닭에 기독신자는 평소 ‘다른 교우를 판단하는 잣대’를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까지 볼 수 있는 그 세밀하고도 예리한 ‘헤아림’으로 만약 본인을 들여다본다면, 자기 속에는 ‘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들보”같이 커다란 잘못이나 엄청난 죄가 있음을 금세 깨닫게 될 것입니다.
비록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와 대조되는 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사실 ‘들보’는 워낙 커서 눈 속에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란 아주 어색한 표현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설혹 자기 눈 속에 ‘들보’가 들어 있다고 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감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과장법을 쓴 것입니다.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나라 속담을 빌린다면 바로 ‘어떻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랄 수 있느냐?’입니다.
여기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이라는 문장의 영어 번역은 ‘How can you say that?’, 즉 본인 눈 속에 들보가 들어 있는 처지에 ‘도대체 어떻게 그런 식으로 남한테 말할 수 있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어처구니없는 모순(irony)이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자주 벌어지는, 아니 나 자신이 정말 무심하게 매일같이 저지르고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딴에는 그런 비판을 그 형제 교우를 바로잡아 주는 ‘좋은 일’,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잘못을 고치는 ‘옳은 일’이라고 확신하면서 마치 사명처럼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자기가 ‘좋은 일’을 한다고 자화자찬하며 다른 교우 비판을 일삼는 사람은 사실상 “외식하는 자”일 뿐이라고 엄히 책망하십니다.
이 ‘외식’이란 예수님께서 흔히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같은 자들을 책망하실 때 사용하신 말이지만, 여기서는 ‘본인에게 훨씬 더 큰 잘못이 있는데도 자기보다 훨씬 더 사소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지적하는 행위’의 의미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형제의 눈 속에 티’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으십니다.
즉 그 상대방도 분명히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비판하는 본인의 잘못에 비하면 그저 ‘티’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비판자의 눈에 그 작은 티는 똑똑히 보이는데 그처럼 크고 무거운 자신의 들보는 전혀 인식조차 안 되는 것은, 타인에 대해서는 무한정으로 엄격한 반면 자신에 대해서는 무한정으로 관대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타인을 정말 공정하게 판단하는 사람, 다른 교우의 잘못을 정말 제대로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신자가 되려면 그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눈 속에서 들보를 빼내야” 합니다.
다른 교인이 무언가 잘못하는 것이 보이면 먼저 ‘나는 어떤가?’부터 자문해 보고, 다른 교역자의 사역에서 문제점이 발견되면 먼저 ‘나는 어떻게 하고 있나?’부터 돌이켜 보고, 다른 장로나 집사나 권사를 보면서 ‘저러면 안 되는데...’ 싶은 생각이 들면 그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과연 제대로 하고 있는가?’부터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진정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기’ 위해서 반드시, 예외 없이 선결되어야 할 필수과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는 이런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의, 언뜻 보면 5절까지의 문맥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이 보이는 말씀이 따라옵니다.
6절에 기록하기를 “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에서만 발견되는데, 예수님께서 5절 이상의 말씀과 6절의 말씀을 한 자리에서 이어서 하셨는지 그 여부는 사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구절들이 본문에 이어서 기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즉 여기에는 5절 이전의 교훈에만 집중하다가 반대쪽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 경고해 주시고자 하는 성령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뜻하며, “진주”는 ‘복음 진리’를 의미합니다.
“개”와 “돼지”는 ‘불결한 것’의 상징으로서, 본문의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대적’인 동시에 ‘형제의 반대편에 있는 불신자나 이단’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라는 말씀은, 마귀 편에서 하나님과 신자를 대적하는 자들을 철저히 경계하고 배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김정은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원수와 동침’하는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려 하면 오히려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하는” 역공격을 당하게 될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엄중한 경고를 5절 이전의 문맥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즉 ‘형제를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개’나 ‘돼지’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신자가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해서 불신앙이나 이단조차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기독신자는 ‘비판적’(judgmental)이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별력’(discernment)을 잃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명색이 보수적 장로교회의 목사라 하면서도 항상 ‘우리나라의 장로교회가 회개해야 한다.’라는 소리만 높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유주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한마디도 없고 명백한 이단인 천주교에 대해서는 오히려 ‘어머니 교회’ 운운하기까지 합니다.
군대에서 실수로 아군에게 사격하거나 폭격하는 것을 두고 ‘friendly fire’(오인 사격)라고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실수가 아니라 아예 의도적인 ‘내부 총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데에는 거의 천재적이며,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오르려고 하는 소질을 발휘할 때도 있습니다.
반면에 자신을 스스로 비판하는 일에는 너무나 무식하고 둔하며 언제나 관용이 넘칩니다.
즉 신자조차도 근본적으로 ‘내로남불’의 본성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떤 때는 불신 사회에서보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이 악습이 더욱 기승을 부릴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기독신자는 같은 교회 안의 ‘형제 교우’, 같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분명히 믿는 ‘형제 기독교회’에 대한 비판은 극히 삼가야 하며,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 ‘헤아림’을 먼저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게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실로 우리를 너그럽게 대해 주시지만,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다른 교우를 엄격하게 비판만 하는 사람은 더 이상 그 특혜를 누릴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중에도 우리는 마귀나 이단에게만은 그런 ‘비판의 분별력’을 아주 엄격하고도 날카롭게 발휘해야 합니다.
마귀는 기독신자가 맞서서 ‘대적’해야 할 원수이며, 이단은 교회가 ‘한두 번 경고한 후에 물리쳐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교우’를 함부로 비판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하는 가운데, 교회 안에 숨어 있는 ‘이단’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는 항상 경계하고 철저히 배척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기독신자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도를 통해 가장 좋은 것을 받지만, 다른 교우에게는 오직 먼저 대접해야 합니다.
7절 이하 11절에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앞의 6장에서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 교훈을 주셨는데, ‘용서를 구하는’ 기도, ‘믿음으로 간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뜻에 따른 기도’를 할 것 등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기독신자의 기도는 ‘자식을 향한 사랑이 무한한 아버지에게 구하는 것’과 같은 까닭에 당연히 백 퍼센트 응답받게 될 뿐 아니라, 오히려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응답받게 될 것을 보증해 주고 계십니다.
“구하라”(ask)라는 말씀은, 기도의 기본 의미가 일단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청하는 것’임을 가리킵니다.
“찾으라”(seek)라는 말씀은, 때로는 기도하면서도 무엇을 ‘찾아야 할지’ 모를 수 있으며 ‘무엇’인지는 알아도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를 수도 있는데, 어쨌든 기도하기만 하면 ‘잘못 구한 것’도 바로 얻게 되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랐던 그 방법’도 정확하게 깨닫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문을 두드리라”라는 말씀은, ‘꽉 막혀 있던 상황’, ‘어렵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기도하기만 하면 순식간에 해결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냥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고만 하셨지, ‘열심히’라든지 ‘응답받을 때까지’ 계속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 대신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는 말씀에 곧 이어서 세 번 다 “그리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기도하기만 하면 그 응답은 자동으로 따라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8절에서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라고, 바로 앞의 7절 말씀을 거의 똑같이 반복하심으로써 더욱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성경 다른 곳에서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처럼 기도를 ‘간절히’ 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 적도 있지만, 적어도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요점은 바로 ‘기도 응답의 필연성’입니다.
왜 기독신자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만 하면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됩니까?
그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간절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라는 말씀은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절대로 그럴 리가 없음을 강조하는 설의법적 표현입니다.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라는 말씀을 우리나라 식으로 의역하자면 ‘아들이 밥을 달라 하는데 흙을 먹으라고 줄 리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뱀”을 ‘보양식’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유대인에게는 절대로 먹을 수 없는 ‘부정한 동물’(레 11:12)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께 기도하는 자녀에게 그 구하는 것보다 ‘더 안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리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그 사실을 더욱 강조하십니다.
자녀에게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는 아버지가 더 잘 압니다.
심지어 ‘악한 아버지’, 즉 도둑이나 강도나 살인자라 할지라도 자기 자식에게만큼은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더 좋은 옷을 입혀 주고 싶어 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therefore), 이것은 아주 좋은 번역입니다, 선하시기가 한량없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얼마나 더 좋은 것으로, 얼마나 더 많이’ 당신의 자녀에게 주고 싶어 하시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기도만 올리면 다 응답받는다.’라는 정도가 아니라 ‘기도만 올리면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응답받는다.’라는 사실을 참으로 쉽고도 강력하게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에 이어지는 12절에, 앞의 6절에서 그랬던 것과 똑같이 갑자기 엉뚱해 보이는 말씀이 따라옵니다.
“12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있는 만큼 예수님께서 11절까지의 말씀을 하신 후 곧 이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우선 이 12절은 비기독교인도 자주 인용하는 소위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사실 다른 종교의 경전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오기는 합니다.
예를 들면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같은 말로서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시키지 말아야 한다.’, 즉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입니다.
하지만 공자는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남한테도 하지 말라’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황금률’에 그쳤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황금률’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고 재차 강조하셨습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같은 의미로서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킵니다.
‘남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자신도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씀은 사실 십계명 제6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의 내용이기도 하고, 구약의 많은 율법에서 명하고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구약의 율법이 예표하고 있는 ‘새 계명’, 즉 ‘남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정도에서 한 차원 더 올라가 ‘남이 내게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을 내가 먼저 남에게 해 주어야 한다.’라는 ‘새 계명’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말씀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이어져 있는 것이겠습니까?
조금 전까지 ‘하나님께 기도만 드리면 더 좋은 것으로 반드시 응답받는다.’라고 구구절절 강조해서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여기에 와서는 왜 갑자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고 전혀 딴판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이어서 하신 것이겠습니까?
여기에는 아주 중대한 ‘문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대접받고 싶어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그야말로 ‘불감청 고소원’한 일이지만, 우리 기독신자는 ‘하나님의 자녀’인 까닭에 놀랍게도 그 ‘대접’(treatment)은 기도만 올리면 자동으로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성도’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법칙이지, ‘성도와 성도’ 사이에까지 확장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일방적이고도 무조건적으로 ‘대접받고’ 있다고 해서 다른 성도에게서도 항상 ‘대접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부터는 일방적으로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지만, 다른 성도에 대해서는 오직 일방적으로 주기만 해야 하는 ‘의무’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만 올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교회 안에서 교역자나 다른 교우에게까지 기대하면 안 됩니다.
교인이 목사나 강도사나 전도사에게 무엇이든지 부탁하거나 요구하기만 하면 그 원하는 것을 무조건 대접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으면서 주위의 다른 교우들이 늘 대접해 주는 것을 아주 당연한 듯이 받기만 하는 교인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저 교인은 날 보면 인사 좀 해 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면 자기가 먼저 인사하면 됩니다.
‘우리 교구 전도사님이 왜 나를 존중해 주지 않나?’라는 느낌이 생기면 자기부터 먼저 그 교역자를 존중해 주면 됩니다.
그처럼 남에게 먼저 하는 인사나 존중이 때로 자기에게는 되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그것을 무슨 손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자가 형제 교우를 먼저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릴 때처럼 무슨 ‘응답’을 바라면서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아무리 남에게 베푼다 하더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대접받은 것을 생각하면, 그 하나님께 받은 ‘일만 달란트’와 우리가 베푸는 ‘일백 데나리온’의 차이가 어디 계산이나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일방통행으로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시는 것처럼, 성도 역시 다른 성도에게는 일방통행으로 먼저 대접해야 할 의무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받게 되는 특권을 마음껏 누리는 가운데, 형제 교우에게는 사랑과 존경과 도움과 구제를 ‘무조건 먼저 주는’ 의무를 꼭 지키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의 교훈을 그 본문의 문맥에서 벗어나거나 조직신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고 그냥 ‘일반화’시키는 것은 중대한 해석의 오류를 낳게 되며 심한 경우에는 이단에까지 빠질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목사의 입에서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으니 독재자 김정은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라는 어처구니없는 개똥신학이 나오는 것이나, 천주교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20)라고 한 ‘신행일치’를 가르치는 말씀을 ‘이행득구’의 이단 교리를 뒷받침해 주는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늘 본문은, 진정 ‘성경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개혁주의 기독신자는 그런 잘못에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것을 잘 보여 줍니다.
예민하고 엄중한 비판은 결코 ‘형제 교우’에게가 아니라, 오직 ‘개’와 ‘돼지’ 같은 ‘하나님의 원수’에게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형제 교우’한테서 항상 대접받을 자격이 있다는 착각을 깨끗이 버리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기만 하면 ‘가장 좋은 것’을 반드시 받을 수 있는 특권을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형제 교우’는 비판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원수’를 늘 경계하고 배척하며, ‘하나님 아버지’께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기도’를 통해 ‘좋은 것의 응답’을 받는 가운데 ‘형제 교우’에게는 무조건 먼저 베푸는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진정 예수님의 말씀을 바로 순종하는 신행일치의 제자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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