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20-01-12 “발견한 책의 말씀” 역대하 34장 1-33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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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20-01-12
2020′경향의 강단(3) (2020년 1월 12일 / 주일 대예배)
“발견한 책의 말씀” 역대하 34장 1-33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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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한 책의 말씀”

역대하 34장 1-33절 / 석기현 담임목사
2020′경향의 강단(3) (2020년 1월 12일 / 주일 대예배)
“발견한 책의 말씀” 역대하 34장 1-33절 / 석기현 담임목사
새 학기가 시작될 때 학생들은 새 교과서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 교과서들에는 당연히 지난 학기 혹은 지난 학년에서 배웠던 것보다 좀 더 수준 높은 교과내용이 있기 마련입니다.
  물론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진학하게 되면 그 차이가 좀 더 현격하게 나타납니다.
  그냥 교과내용만 조금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과목을, 새로운 방식으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기독신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똑같은 한 권의 교과서만 사용하는데, 바로 성경입니다.
  주일학교와 SFC에서도 성경을 가르치고, 장년 예배에서도 성경만 가지고 설교를 합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새신자도 성경공부를 시키고, 어릴 때부터 평생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 역시 죽을 때까지 성경책만 읽고 배웁니다.

  만약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했는데 초등학교 교과서를 나누어 준다든지, 대학교의 교수가 수십 년 전의 강의노트를 글자 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사용하면서 가르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학생들은 ‘이미 배운 것을 왜 또 가르치느냐?’고 항의할 것이며, 그런 교수는 ‘무능력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2천 년 전 초대교회 시절부터 오늘날의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신앙생활의 연륜이나 직분에 아무 상관없이 오로지 ‘오래전 옛날 말씀’인 신구약 성경 하나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성경이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꼭 필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저는 2020년 역시 오직 ‘성경 중심’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반드시 깨닫고 늘 기억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진리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경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죄인임을 고백하게 만드는 ‘율법책’입니다.

  1절부터 7절에 “1요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 년 동안 다스리며 2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3아직도 어렸을 때 곧 왕위에 있은 지 팔 년에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고 제십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하게 하여 그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거하여 버리매 4무리가 왕 앞에서 바알의 제단들을 헐었으며 왕이 또 그 제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을 찍고 또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5제사장들의 뼈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였으며 6또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시므온과 납달리까지 사면 황폐한 성읍들에도 그렇게 행하여 7제단들을 허물며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며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태양상을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요시야”는 겨우 “팔 세”에 남조 유다의 제16대 왕이 되었지만, 그의 제위 “삼십일 년”을 통해 유다 왕들 중 가장 훌륭한 성군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의 일생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라고 본문에서 칭찬일색으로 요약하고 있는 대로, 그야말로 ‘모범 인생’, ‘모범 신자’ 그 자체였습니다.
  요시야가 그처럼 훌륭한 왕이 된 계기는 그가 “왕위에 있은 지 팔 년에” 있었는데, 8세에 즉위하고 8년이 지났으니 곧 16세 되던 때였고, 그래서 그가 “아직도 어렸을 때”라고 한 것입니다.
  그때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자신이 직접 신앙고백을 했다는 뜻입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다가 청소년 시기에 ‘입교’를 하고 정식으로 기독신자가 된 격입니다.

  그러다가 왕이 된 지 “제십이년에” 즉 나이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요시야 왕은 그 신앙을 본격적인 행동으로 발휘했는데, 그것이 곧 ‘유다의 종교개혁운동’이었습니다.
  그 당시까지 유다 백성들은 그 이전에 있었던 악한 왕들의 영향 때문에 “바알”“아세라”를 비롯한 온갖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는데, 요시야 왕은 과감하게 그 모든 “우상들을 제거해” 버리고 우상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부수어 버린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린” 것은 우상숭배를 하고 죽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반드시 임할 것을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제사장들의 뼈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버리기까지 했는데, 이것은 이미 죽은 우상제사장들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불살랐다는 뜻으로서 역시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선포한 행위였습니다.

  6절에 나오는 지명들 중에 “시므온”은 남조 유다의 최남단에 위치한 지파이지만, 나머지 “므낫세와 에브라임” 그리고 “납달리”는 북조 이스라엘에 속한 지파들이었는데 거기에까지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영향력이 미쳤습니다.
  당시 북조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 제국의 침공으로 멸망당했는데, 그 앗수르는 북방의 민족과 싸우느라 팔레스타인 지역에 계속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요시야 왕은 북조 이스라엘에 속한 “사면 황폐한 성읍”들에 남아 있는 우상들까지 모조리 제거했던 것이었습니다.

  본문 8절 이하에 보면 요시야 왕은 “왕위에 있은 지 열여덟째 해” 즉 스물여섯 살이 되었을 때 그 우상척결 작업을 다 마치고 곧 이어서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는” 더 선한 일에 착수했습니다.
  타락한 유다 왕들이 다스리던 동안 성전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데, 일부 왕들은 성전의 기구들을 다른 장소로 제멋대로 옮기기도 하고 아예 성전의 일부를 “헐어버리기”도 했기 때문에 심지어 “들보”까지 새로 만들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 성전 수리를 위한 비용은 “전에 하나님의 전에 헌금한 돈”으로 충당했는데,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온 유다와 베냐민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서 거둔” ‘성전세’를 가리킵니다.
  그 헌금을 “감독하는 자들”에게 주어서 “목수들과 건축하는 자”들을 고용해서 대대적인 성전 수리 공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4절부터 21절에 기록하기를 “14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헌금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15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매 16사반이 책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서 복명하여 이르되 왕께서 종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종들이 다 준행하였나이다 17또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돈을 쏟아서 감독자들과 일꾼들에게 주었나이다 하고 18서기관 사반이 또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 앞에서 그것을 읽으매 19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 20왕이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의 아들 압돈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21너희는 가서 나와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들을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제사장 힐기야”가 그 보관해 두었던 성전세를 꺼내다가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책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이어지는 사건의 문맥과 연결해 보면 아마도 모세오경의 마지막 권인 ‘신명기’ 즉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될 때 지켜야 할 율법을 조목조목 기록한 책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율법책이, 타락한 유다 왕들이 우상숭배에 빠지고 성전을 제멋대로 훼손하던 시절에 그만 분실되고 말았다가 그때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서기관 사반”이 그 새로 발견한 율법책을 가져와서 요시야 왕 앞에서 읽어 주었을 때 그는 그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금식이나 베옷을 입은 것과 마찬가지로 큰 슬픔과 고통 중에 회개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후에 즉시 사람들을 보내면서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 말씀에 대한 자세한 해석을 선지자에게 물어 오라는 지시였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그처럼 개인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을 정도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해 왔으며 또한 공적으로 우상 타파와 성전 수리 등 선한 일에 헌신해 왔던 요시야 왕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으니 웬만한 사람이라면 쉽게 향락에 물들고 교만에 빠져서 타락하기 십상이었겠지만 요시야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신행일치의 삶까지 이처럼 열심히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지금까지 몰랐던 또 하나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즉시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고 죄 많은 존재에 불과함을 깨닫고 옷을 찢고 회개했습니다.

  나중에 27절에 보면 그 율법책이 책망한 내용은 직접적으로는 “이곳과 그 주민” 즉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요시야 왕은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자신의 죄부터 “하나님 앞”에서 “통곡”까지 하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시야의 그런 모습을 두고 그가 “내 앞에서 겸손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죄인에 불과함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잘난 체 할 수 없습니다.
  설혹 전 인류가 칭송해 마지않을 만큼 훌륭한 ‘모범 인생’을 살고 ‘백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위인이나 성인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해도 이 유일신 앞에서만큼은 조금이라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진노 받아 마땅한 죄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그 하나님 앞에서 그저 항상 부끄러워하고 끝까지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곧 사람이 절대주권자 앞에서 당연히 가져야 할 가장 기본자세 곧 ‘겸손’인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그 어떤 교과서도, 그 어떤 교양서적도, 그 어떤 경전도 이 사실을 가르쳐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그처럼 스스로 죄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낮추는 것은 못난이요 졸장부 같은 자세라고 질책하기까지 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부터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책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라는 사실을 대전제, 절대명제로 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신의 존재’는 일단 뒷전에 두고 오로지 사람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인본주의’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겸손해야 한다는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0-18)라고 이 점에 있어서는 사람 가운데 ‘단 한 명도’ 예외가 없다고 단호히 천명합니다.
  이런 성경의 말씀을 깨닫는 사람은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양심적으로 정직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가르치는 세상의 교훈에 미혹당하지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있다.’고 선포하는 이 ‘율법서’의 말씀을 따라 나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죄인에 불과함을 겸손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경은 원래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있던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는 ‘언약책’입니다.

  22절부터 28절에 “22이에 힐기야와 왕이 보낸 사람들이 여선지자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그는 하스라의 손자 독핫의 아들로서 예복을 관리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살았더라 그들이 그에게 이 뜻을 전하매 23훌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말하라 하시니라 2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 앞에서 읽은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하리니 25이는 이 백성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그의 손의 모든 행위로 나의 노여움을 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노여움을 이곳에 쏟으매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26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전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들은 말을 의논하건대 27내가 이곳과 그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8그러므로 내가 네게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에 사신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제사장 “힐기야”를 비롯하여 요시야 왕이 “보낸 사람들”은 그 발견된 율법책을 “여선지자 훌다”에게 가져가서 그 자세한 뜻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 대답만 들으면 그 내용은 유다 백성에게 그저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훌다는 하나님께서 “이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 앞에서 읽은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하실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지금까지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저지른 우상숭배의 죄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격발시켰고 그 진노는 “꺼지지 아니할” 것이라는 실로 무서운 저주였습니다.
  한 가지 위로가 있다면, 요시야 왕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여” 회개를 했기 때문에 그 “재앙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고 “평안히”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 조만간 남조 유다가 필연적으로 멸망당하게 될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준엄한 말씀을 전해들은 요시야 왕과 유다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29절 이하 33절에 기록하기를 “29왕이 사람을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30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주고 31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32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이 다 여기에 참여하게 하매 예루살렘 주민이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니라 33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들을 다 제거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요시야는 곧 “모든 장로”들을 위시하여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을 총동원하여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대집회를 열었습니다.
  그 집회는 특별한 다른 순서는 없고 단지 요시야 왕이 직접 그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주는” 것뿐이었습니다.
  앞서 14절에서 그 책을 발견했을 당시에는 “율법책”(the Book of the Law)이라고 했던 것이 여기서는 “언약책”(the Book of the Covenant)이라고 바뀌어졌습니다.
  전자는 ‘불순종할 때 벌을 받게 되는 법’을 강조하는 반면 후자는 ‘순종할 때 복을 받게 되는 약속’을 강조합니다.
  같은 책을 두고 이처럼 명칭이 바뀐 것은, 요시야 왕이 비록 유다 백성이 율법을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그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약책 낭독이 끝난 후 요시야 왕 자신부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여호와 앞에서” 서약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주민”을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까지 그 서약에 “참여”하면서 다시 “조상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는” 참으로 멋진 일, 즉 전 국민적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요시야 왕이 유다 백성에게 읽어 준 ‘율법책’은 그것을 불순종한 자에 대한 저주로 가득 찬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백성의 반응은 오직 ‘여호와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순종하겠다는 결단으로 나타났습니다.
  자기네를 저주한다고 욕하면서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이제부터라도 평생토록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절대복종하겠다고 단단히 맹세를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죄를 책망하고 저주를 경고하는 율법책’일 뿐 아니라 동시에 ‘회개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을 약속해 주는 언약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인죄론’과 ‘구원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만 죄 사함이 따라올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주 아래에 있다는 선포가 선행되어야만 구원의 복음이 제대로 순서를 잡고 따라올 수 있습니다.
  영벌이 예비되어 있음을 알아야만 영생이 얼마나 좋은 것인 줄을 알 수 있으며, 지옥이 있는 것부터 분명히 해 두어야 천당을 더욱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사람을 기쁘게 해 주려 하는’ 목사들은 강단에서 ‘천당 구원’은 입에 발린 듯이 외치면서도 ‘지옥 저주’에 대해서는 일 년 내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세련된 현대인’에게 죄를 책망하고 지옥을 경고하는 설교는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고, ‘나름대로 양심껏 살아 보겠다고 교회에 나온 교양인’에게 그런 기분 나쁜 설교를 하면 당장 반발할 것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택자는 그렇게 반응할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만세 전부터 구원받기로 예정된 택자’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죄의 값은 사망이요”(롬 6:23상)라는 엄중한 저주의 경고부터 들어야,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하)는 고마운 복음의 약속을 기쁨에 넘치는 ‘아멘’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신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노여움’과 그 ‘재앙’ 아래에 꼼짝 없이 잡혀 있던 존재라는 사실부터 깨닫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고 감사 감격에 겨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말세에 오로지 ‘사람의 가려운 귀를 시원하게 해’ 주려고만 애쓰는 가운데 ‘사람의 사욕을 따라가 주는 삯꾼’들이 실로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딤후 4:3). 그들은 ‘교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만 두려워하면서 ‘죄와 저주’에 대해서는 일절 가르치지 않는 가운데 실제로 그 교인들의 영혼을 결국에는 아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 말씀 그대로 그야말로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는”(마 22:29) 꼴이 아니겠습니까?
  그저 ‘평안하다, 평안하다’라고만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게”(마 15:14) 되는 꼴을 결코 당하지 말고,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는 가운데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5)고 약속해 주시는 이 ‘언약책’의 말씀을 통해 구원의 확신과 기쁨 가운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요시야 왕과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한 권의 책’만으로도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해지면서 구원의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구약 66권 성경 전체를 ‘듣고 순종하는’ 성도가 받을 은혜와 복은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성경은 이전의 찬송가 가사에 나오는 대로 ‘오래 전 옛날 말씀’입니다.
  하지만 무려 수천 년 전부터 기록된 책이기는 해도 결코 고리타분하거나 케케묵지 않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그 어떤 사람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영원불변의 최신식, 최첨단의 말씀’입니다.
  그런 까닭에 찬송가 205장의 고백처럼 ‘나 항상 듣던 말씀’이지만 ‘또 들려주시오’라고 간절히 사모할 수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한 장 더, 한 절 더 들을 때마다 택자의 심령은 하나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면서 그 삶은 항상 구원 확신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의 경고를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의 헛된 미혹’에 빠지지 않고 날마다 성화되면서 ‘날 구속하신 주 예수의 은혜’에 감사하며 ‘천국의 빛난 영광’을 바라보는 기쁨만 넘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즉 그저 자신의 양심 속에서만 끝없는 갈등과 후회의 고통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율법책’의 말씀을 깨닫는 신앙인만이 세례서약 제1조에 있는 대로 “나는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진노를 받아야 할 죄인임”을 고백하는 ‘신전인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의 득도를 통해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라든지 ‘무슨 종교를 믿든지 간에, 아니 무종교인이라 할지라도 착한 일만 많이 행하면 그 선행의 공로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는 따위의 인본주의 우상을 따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언약책’의 말씀을 듣고 믿는 성도는 세례서약 제2조에 이어지는 대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는 행복한 ‘천국 시민’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에게는 오로지 신구약 66권 성경만이 언제 어디서나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이한 규범’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올 한 해에도 이 ‘참된 진리의 말씀’을 더욱 부지런히 “배우고”, 그리하여 바로 이 ‘복스러운 말씀’을 통해 성화와 구원의 “확신한 일에 거하는”(딤후 3:14)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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