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20-01-05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한복음 4장 19-24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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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20-01-05
2020′경향의 강단(2) (2020년 1월 5일 / 신년주일 대예배)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한복음 4장 19-24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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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한복음 4장 19-24절 / 석기현 담임목사
2020′경향의 강단(2) (2020년 1월 5일 / 신년주일 대예배)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한복음 4장 19-24절 / 석기현 담임목사
제가 어릴 때 예배에 대하여 흔히 듣던 표현은 ‘예배를 보다’입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려 할 때에도 ‘얘들아, 예배 보자.’라고 자녀들을 불렀고, 교역자들이 성도들의 예배 참석을 권유할 때에도 ‘예배 보러 오세요.’였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예배를 드립시다.’라든지 ‘예배를 올리겠습니다.
 ’라는 표현은 적어도 제가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의 시절에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보다’라는 표현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전혀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처럼 그 말이 기독신자에게 일반화되어 버린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어쩌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전파될 때 서양인 선교사가 예배를 인도하는 모습이 신기해서 그것을 한 번 ‘보려고’ 예배당에 모인 것이 발단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인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배를 자신이 하나님께 올리는 ‘인격적인 제사’로 여기지 못하고 그저 목사의 설교나 찬양대의 찬양을 ‘구경하는 자리’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독신자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며 필수적인 신앙생활인 예배를 그처럼 ‘구경꾼’의 자세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실로 버릇없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우리는 ‘예배를 보다’라는 표현부터 삼가하고 그 대신에 ‘예배를 드리다’ 혹은 ‘예배를 올리다’라는 바른 용어를 통해 예배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지켜야만 합니다.
  이제 2020년이 시작되면서 올해에도 우리는 각각 쉰 두 번의 주일예배와 주일밤예배와 수요예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특별예배로 모이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예배들 중에 어느 것 하나도 그저 습관적으로, 무성의하게 드려져서는 결코 안 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시간 저는 오늘날에도 그냥 예배를 ‘보고’ 돌아가는 출석교인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어떻게 다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배 시간 동안 ‘예배의 장소’에 몸만 앉아 있는 사람은 ‘예배에 출석한 교인’에 불과합니다.

  19절과 20절에 기록하기를 “19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4장 앞 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가라 하는 동네”“우물 곁”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던 중에,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그녀의 복잡한 남자관계를 정확히 들추어내셨습니다.
  갑자기 뒤통수를 느닷없이 한대 맞은 그 여인은 “아이구 선생님, 알고 보니 선지자이시군요.”라는 찬사로써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무마시키려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 짐작건대 대화의 흐름을 자기의 부끄러운 사생활로부터 딴 곳으로 돌리려고 그랬는지, 새로운 대화의 주제를 끄집어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커다란 쟁점 중에 하나였던 예배장소의 문제였습니다.
  “우리 사마리아인들은 조상 적부터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 왔는데, 당신네 유대인들은 예배는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한다고 말하더군요.”라고 그녀가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 사마리아 여인이 “이 산”이라고 하는 산은, 사마리아 지방의 중남부에 자리 잡고 있는 그리심산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산은 옛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축복의 산’으로 선포하신 곳으로서, ‘저주의 산’으로 상징된 에발산과 마주 보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북조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의 침략으로 인하여 멸망했을 때, 그 곳에 살아남았던 이스라엘인들 중 일부가 이방 민족과 더불어 결혼하여 혼혈민족을 이루었는데 이들이 바로 사마리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남조 유다도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멸망당하게 되고 그 중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혀갔었습니다.
  그러다가 칠십 년 후에 해방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유대인들은, 이들 사마리아인들이 민족의 순수성과 종교의 정통성을 상실했다고 멸시하면서 아예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귀환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자, 이에 반발한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의 영토 안에 있던 그리심산에 따로 성전을 세우고 거기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역대하 6장과 7장에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명하신 말씀을 따라 성전은 오직 예루살렘에만 세워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이 독자적인 성전을 세우자 크게 격분했습니다.
  그리고는 기회를 엿보며 벼르다가 마침내 주전 128년경에 무력으로써 그 사마리아인의 성전을 파괴해 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하여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적대감은 더욱 고조되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앙금이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바로 그 핫이슈를 예수님께 제기하면서 과연 ‘어느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으냐?’라고 묻고 있었습니다.
  즉 이 여인은,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요소는 바로 그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리심산이냐 아니면 예루살렘이냐?’ - 바로 여기에 예배의 본질, 예배의 핵심이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그 옛날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 했던 것처럼 서로 자기네 예배당만이 옳은 예배장소라고 싸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사고에 있어서, 지금도 역시 바른 예배를 성립시키는 최대의 요건이 바로 ‘예배당이라는 장소’에 있다고 자기도 모르게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즉 우리 역시 예배라는 개념을 떠올릴 때 오로지 ‘어디에서’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히기 쉬운 것입니다.

  ‘예배를 본다’라고 할 때에 그 말 속에서 어떤 그림이 연상됩니까?
  그것은 매주일 아침 정한 시간에 이 예배당이라는 일정한 장소에 나와서 일정한 시간 동안 한 자리를 채우며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입니다.
  비록 그 한 시간 동안 머릿속에 온갖 잡념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할지라도, 어쨌든 예배가 끝날 때까지 앉아만 있으면, 즉 주일 오전 11시부터 한 시간 동안 이 예배당이라는 장소에 내가 앉아 있기만 하면, 일단 남들에게 “오늘 예배를 보았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여러분 중 한 사람에게 담당 교역자가 주중에 전화를 걸면서 “지난 주일에 예배를 드리셨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다 “예, 저 지난 주일에 교회에 갔어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어쨌든 예배시간에 예배당이라는 장소에 내 몸이 갔다 오기만 하면 그것이 곧 예배드리기 위한 모든 조건을 충족한 것이라고, 그것이 곧 예배행위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바로 이 사마리아 여인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큰 착각입니다.
  물론 우리가 정기적으로 공적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어떤 구별된 예배의 장소가 필수적인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배의 장소는 어디까지나 예배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한 여러 가지 조건들 중 하나일 뿐인 예배장소를 두고, 우리는 마치 그것만으로 충분한 듯이 여기는 착각에 빠져 들기 쉬운 것입니다.
  각종 예배에 나아올 때마다 ‘이 한 시간 동안 예배당에 내 몸이 앉아 있기만 하면 예배를 드린 것이다.’라고 속단하는 ‘출석교인’의 모습을 올해에는 꼭 벗어버리고 진정한 ‘예배자’로 성화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배 시간 내내 ‘예배의 대상’을 의식하면서 ‘예배의 자세’를 지키는 사람이 ‘예배를 드리는 성도’입니다.

  21절 이하 24절에 “21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내가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라는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을 주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 둘 중에 하나는 당연히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질문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둘 다 아니다.
 ’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께서 이어서 하실 말씀은 당연히 ‘그 대신 이러이러한 장소에서 예배드려야 한다.’라는 내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어떤 ‘제3의 장소’가 언급되어야 할 순서에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 또한 의외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배에 대하여 ‘어디서’를 묻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동문서답처럼 ‘누구에게’를 대답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의 장소는 아무 상관 않으시고 그 대신 ‘예배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까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 문제를 끄집어내면서 그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라고만 말했지 ‘누구에게’ 예배한다는 말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빼먹은 문장의 ‘목적격’, 즉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무슨 장소나 시간의 문제보다도 우선 자신이 드리고 있는 예배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예배임을 단 한순간이라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라고 이 점을 더욱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이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쓰고 있던 성경과 유대인들이 쓰고 있던 성경의 차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 오경의 율법서를 비롯하여 기타 구약의 모든 역사서와 선지서와 지혜서들을 정경으로 받아들였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오직 모세 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 사마리아인들은 비록 스스로는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너희들은 그 하나님을 모세 오경만을 통해서 알려고 하는 까닭에 모든 구약 성경을 통하여 폭넓게 계시된 참된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전체를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까닭에 ‘온전히 아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네들이 예배드리고 있는 대상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바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 헛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게” 되는 것도,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통하여 계시된 그대로 하나님을 바로 믿고 그 ‘참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마리아 여인에게 일단 ‘누구에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23절 이하에서는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만날 ‘대상’이 분명히 결정되면 그 만나는 ‘자세’도 그 대상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른을 만날 때에는 어른을 대하는 자세가 있듯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그 자세 역시 세상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만날 때와는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점을 두고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그 예배드리는 자세가 남다른 것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예배의 자세란 곧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배를 드리는 중에 각 성도의 ‘영’(spirit)은 성령의 감화 감동을 통하여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리로’(in truth)라는 말은 그런 영적 교통은 오직 예배 시간에 성경이 선포해 주는 진리를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음을 가리킵니다.
  적어도 예배 시간만큼이라도 세상의 딴 생각, 내 속의 못된 생각들에 한순간이라도 빠지지 말고 내내 성경 말씀의 진리만이 나의 사고 작용을 온통 지배하는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오고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처럼 ‘영과 진리’를 통해서만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가리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육’이 아니라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신 까닭에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만나듯이 예배할 수가 없습니다.
  즉 사람 앞에서 인사하듯이 무슨 ‘삼천배’ 따위로 허리를 굽실거리는 것이 예배가 될 수 없고, 사람에게 식사 대접을 하듯이 제사상을 가득 차려 놓고 예배라고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자는 이처럼 ‘내가 지금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라는 사실을 예배시간 내내 의식해야 합니다.
  즉 ‘살아 계신 참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멋대로 머릿속에서 그려낸 상상의 신, 세상 철학이나 윤리에서 말하는 관념적인 신, 그저 소원 성취를 위해 비는 신 - 이런 ‘우상 신’에게는 백날 예배를 드려 보았자 문자 그대로 헛수고일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만 생각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 역시 외식에 불과합니다.
  예배 시간에 누구를 만나서 볼일 볼 목적으로 겸사겸사 나온다든지, 자꾸 전화해 주는 구역장이나 교역자에게 인간적으로 좀 미안해서 ‘그저 얼굴이라도 비쳐야지.’라는 마음으로 나와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란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가는 것이다.’라는 생각도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히 11:6)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예배 시간 중에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있다.’라는 사실을 믿고 계십니까?
  결코 어떤 애매모호한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실존하시는, 진짜로 살아 계시는 절대주권자 하나님 앞에 내가 지금 이 시간 경배하고 있음을 한 시간 내내 의식하고 계십니까?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약속 시간에 약속 장소에 나갈 때에 그 만나려고 하는 대상이 분명히 있듯이, 우리가 예배를 드리러 나아올 때에는 그 만날 대상이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하며 또한 그 하나님 아버지를 꼭 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 뵙는 예배를 ‘어떻게’ 드릴 수 있습니까?
  바로 ‘성령께서 성경의 진리를 통해 감화 감동’해 주시는 역사를 통해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참 하나님의 존재를 바로 알고 믿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신구약 66권의 성경 외에는 결코 없습니다.
  이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님, 그 아버지를 ‘알고’ 그 ‘아버지께’ 예배하는 것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참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성경을 읽고 들을 때 그것을 믿도록 우리의 영을 강권적으로 충동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 충만하게 우리를 감화 감동해 주시는 가운데 영감 있는 찬송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간구가 하나님께 전달되는 것,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뜻이 깨달아지는 것, 헌금을 통하여 우리의 감사가 하나님께 제물로 상달되는 것들이 바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통’이 오가는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예배를 보는’ 교인들은 근본적으로 이런 ‘영적 교통’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이 ‘보다’라는 말은 ‘무엇을’이라는 직접 목적어만을 취할 수 있지 ‘누구에게’라는 간접 목적어를 취할 수 없는 동사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본다.’는 말은 그 문장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배를 보다’라는 말은 ‘하나님께’라는 예배의 대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그저 ‘본인이 예배 그 자체를 구경한다.’는 의미밖에 남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예배를 그냥 ‘보러’ 모이고 있겠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그런 교인들에게 ‘쇼와 연기’를 강단에서 ‘보여 주려’ 하고 있습니까?
  참된 예배자는 ‘목사의 사회와 설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줄 알아야 하며, 목사 또한 예배 사회를 하면서도 그 모든 순서 하나하나를 통하여 자기 자신부터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올리는’ 자세를 지켜야 마땅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그저 예배의 구경꾼이나 예배의 연출자로 끝나지 말고, 성령의 뜨거운 감화 감동하심과 성경 진리의 밝은 계시를 통하여 그 예배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과 신령한 교통을 충만히 나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주일 아침마다 그저 몸만 이 예배당이라는 장소에 한 시간 동안의 지겨움을 참으면서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예배가 끝나면 후련한 듯이 바삐 떠나면서 ‘오늘 예배드렸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이 주일예배 시간만큼이라도 참 하나님과 진정한 영적 교통을 나누는 산 제사를 드리고 계십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아니 우리에게 바른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이처럼 명백하게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본문 23절 하반절에서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참으로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덧붙이고 계십니다.
  “자기에게”“하나님”이라는 참된 예배의 대상을 향하여 “이렇게”“영과 진리”라는 올바른 예배의 자세를 갖추고서 예배를 드리는 자를 그 성부 하나님께서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왜 이다지도 안타까운 어조로 ‘아버지께서 이런 예배자들을 찾고 계신다.’라고 말씀하시는지 의아스러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자들을 굳이 ‘찾으셔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지구상에 주일만 되면 수천만, 수억의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모여 있을 텐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셔야만 하겠습니까?
  뭐 이리저리 찾아다니실 필요 없이 대형교회 단 한 군데만 골라 가셔도 바로 그 한자리에서 수만 명의 예배자들을 한눈에 볼 수 있으실 텐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는’ 것이겠습니까?
  아마 모르기는 하지만 참된 예배자의 숫자가 겉보기보다는 훨씬 적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비록 이 지구상에 숱한 교회가 있고 수많은 교인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의 짐작보다는 훨씬 더 많은 숫자가 그냥 ‘출석교인’에 불과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예배시간에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다 예배자로 인정하시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주일 그 어느 곳에서 드리는 예배에서든지 간에, 단순히 예배 출석자, 예배 관람자, 예배 감독자에 불과한 자들을 정확하게 구별해 내고 계십니다.
  오늘 주일 바로 이 시간에 전 세계에서 통계적으로는 엄청난 숫자의 교인들이 ‘어디선가’ 모여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겠지만 그들이 다 참된 예배자는 결코 아닌 까닭에,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과연 누가 ‘이렇게’ 그리고 ‘자기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를 살펴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니 바로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저와 여러분 중에서도 누가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찾고 계실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경향교회의 주일예배에 나아온 교인들 중에서 과연 몇 명의 참된 예배자들을 찾아내셨을 것 같습니까?
  그 숫자가 몇 명일까 하고 궁금해 할 것이 아니라, 바로 나 한 사람부터 꼭 그 수에 들어가 있어야만 합니다.

  ‘어디서’가 아니라, ‘누구에게’와 ‘어떻게’가 바르고 참된 예배를 결정짓는 진짜 요소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보고’ 오는 사람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하며, ‘앉아 있다’ 오는 출석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며, ‘듣기만 하는’ 청중이 아니라 ‘그 진리의 말씀에 성령으로 감동되는’ 영적 예배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올 2020년에도 정해진 날과 시를 따라 이 경향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 순간에도 찾고 계시는 소수의 참된 예배자,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써’ 바른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