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12-29 “얍복 나루와 브니엘” 창세기 32장 13-32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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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12-29
2019′경향의 강단(55)(2019년 12월 31일 / 연종주일예배)
“얍복 나루와 브니엘” 창세기 32장 13-32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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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복 나루와 브니엘”

창세기 32장 13-32절 / 석기현 담임목사
2019′경향의 강단(55)(2019년 12월 31일 / 연종주일예배)
“얍복 나루와 브니엘” 창세기 32장 13-32절 / 석기현 담임목사
줄리어스 시저가 갈리아 지방 정복에 출정했던 자기 휘하의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향해 진군해 오다가 루비콘강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전 인생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강은 시저의 지휘권 아래에 있는 지역과 그가 월권할 수 없는 로마 사이에 있는 경계선이었기 때문에, 그 강을 건너는 순간 그는 공식적으로 국가에 반역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역적이 되는 것이었고, 만약 그 거사가 실패하면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 상황이었습니다.
  성공과 실패, 생과 사가 걸려 있는 그 중차대한 기로에서 루비콘강을 바라보던 시저는 저 유명한 말,“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외치면서 자신이 제일 먼저 말을 몰고 강물 속으로 뛰어 들어 건너가기 시작했습니다.
  즉 시저에게 있어서 그 루비콘강 도하는 자기 인생 전체를 건 일생일대의 도박판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일단 그 강을 건너간 순간, 그는 다시는 되돌아올 길이 없이 그저 로마를 향하여 앞으로만 진군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국면, 그의 전 인생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한 장이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야곱 역시 ‘얍복 나루’ 앞에서 그와 같은 인생 최대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자기가 어렵게 성취해 놓은 것들을 한순간에 몽땅 다 잃느냐 아니면 이제부터 오히려 더 본격적인 축복의 시대를 맞이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 시점의 현재 상황은 실로 위태롭고 미래에 대한 예측은 불안하기만 했지만, 야곱은 끝내 과감한 결단을 내리면서 그 ‘얍복 나루’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연종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역시 2019년이라는 한 해를 뒤로 하고 2020년을 향해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 년을 통해 과연 허송세월과 실패를 반복하느냐 아니면 성공하고 복을 받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주신 말씀을 통해 기독신자가 ‘현재의 난관’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면서 반드시 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현재에 닥친 난관은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돌파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얍복 나루’를 과감하게 도하한 방법이었습니다.
  13절부터 20절에 기록하기를 “13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14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16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17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18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19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20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20여 년 전에 혈혈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외삼촌의 집이 있는 밧단아람으로 갔던 야곱은 이제 금의환향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아내와 여러 자식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가축을 크게 두 떼나 거느리는 거부가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귀향길에서 야곱은 “얍복 나루”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작은 “시내”(23절)를 건너가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 건너편에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를 향해 가던 도중에 자기 종들을 앞서 보내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 자기의 귀향 사실을 미리 전해 주도록 했습니다(3절).
  하지만 그 종들은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려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6절). 에서는 야곱에게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빼앗긴 일에 대해 여전히 분기탱천해 있을 것이니, 그가 사백 명이나 되는 장정들을 이끌고 오고 있다면 그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누가 보아도 뻔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틀림없이 자기를 죽이려고 오는 줄 알고 “심히 두렵고 답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얍복 나루에서 문자 그대로 인생 최대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강을 건너가면 지금까지 그토록 어렵게 성취해 놓은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게 될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밧단아람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발붙일 곳 없는 신세가 될 것이 뻔했고, 무엇보다도 가나안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야곱은 그의 인생 전체의 성패를 걸어놓고 다시는 물릴 수 없는 일생일대의 승부를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차피 피할 길이 없는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자 야곱은 그 난관을 돌파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7절과 8절에 보면, 그는 우선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떼는 피하리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지금 야곱이 판단하기에는, 에서와 조우하게 되면 그의 물리적인 공격을 받게 될 위험이 가장 농후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이 가진 소유물을 일단 둘로 분산시켰습니다.
  만일 에서가 자기의 가축 떼를 공격해 오더라도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보자는 의도에서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그처럼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을 뿐 아니라, 그 위기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것이 곧 13절 이하에 나오는 대로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여”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예물 즉 선물은 일단 양적으로도 풍성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 선물을 형 에서에게 보내는 방법에 있어서도 치밀한 계획을 세웠는데, 그 많은 선물을 한꺼번에 보내지 않고 “각각 떼로 나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각 떼”를 거느리고 가는 종들에게 “형 에서를 만났을 때 그가 너희더러 ‘이게 뭐냐?’ 하고 물으면 ‘당신의 종 야곱이 형에게 드리는 예물이고, 야곱은 뒤에 따라오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라.”
고 지시했습니다.
  첫째 떼를 거느리고 가는 종뿐 아니라 그 뒤 둘째, 셋째에 이르기까지 각 떼를 거느리는 모든 종들에게 똑같이 그렇게 말하도록 사전교육을 철저히 시켰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복잡한 방법으로 선물이 전달되도록 준비한 야곱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분명했습니다.
  20년 동안이나 응어리져 있던 감정을 한순간에 누그러뜨리기란 그 어떤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임을 야곱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선물이라 할지라도 한 번에 다 갖다 주면서 그 짧은 순간에 형 에서의 마음이 획기적으로 돌아서기를 기대하는 것은 성공 확률이 매우 낮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양의 선물이라도 여러 번 나누어서 보내면, 첫 번째의 선물을 받을 때 일단 에서의 마음에 약간의 변화만 있어도 그 다음 두 번째, 세 번째 계속해서 선물을 받게 될 때마다 차츰차츰 마음이 조금씩 더 풀리게 되면서 나중에는 자기를 완전히 용서하게 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클 것이라고 야곱은 치밀하게 계산했던 것입니다.
  즉 야곱은 같은 양의 투자를 이용해서 그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꾀했던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야곱의 이와 같은 행위를 두고 믿음이 없어서 한 일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9절부터 12절에 보면, 최악의 사태를 위해 대비하고 또한 그 최악을 막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그 두 과정의 중간에서 야곱은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즉 야곱의 그 철두철미한 준비와 노력은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는 믿음에 철저하게 바탕을 두고 행해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난관에 봉착했을 때 어찌하든지 그 위기를 반드시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기가 현재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 넣어야 합니다.
  무슨 드라마 때문에 ‘올인’(all in)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익숙하게 되었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슨 ‘배팅의 올인’이 아니라 바로 ‘최선의 올인’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진실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 도우심을 믿는 성도는 결코 그 믿음을 핑계로 해서 자기 자신은 ‘나 몰라라.’ 하고 앉아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날 도와주시기만 하면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은 결코 바른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핑계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지난 한 해 동안 어떤 목표를 세우고 바라는 그것을 위해 기도드린 일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과연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습니까?
  기도는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저 하늘에서 뭔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식의 기도, 사실 미신숭배자들과 별 다름없는 기도를 드려놓고서 아무 응답이 없다고 하나님께 불평하지는 않았습니까?
  피할 길 없어 보이는 난관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아예 미리 포기해버림으로써 결국 무방비 상태로 그 최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완전히 버리셨다고 원망한 적은 없었습니까?
  내 가정이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고, 내 직장에서 승진을 못했다고, 내 사업이 번창하지 못했다고 불만스럽게 생각하기 이전에, 지난 한 해 동안 그것들을 위하여 과연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를 먼저 살펴보면서 실상은 자신의 나태가 진짜 원인이 아니었는지를 솔직히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 후에 실패하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지만, 노력을 하지 않고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일 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의 달란트를 그냥 ‘땅에 묻어 둔’ 진짜 불충의 죄인 것을 우리는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허락해 주시는 새해에는 그런 핑계만 내세우는 실패자가 되지 않도록, 그 어떤 불리해 보이는 난관이 닥쳐오더라도 일단 자신의 최선을 투자하여 그 돌파구를 뚫어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미래가 불안할 때에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기도를 통해 축복의 확신을 얻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야곱이 받은 ‘브니엘’의 응답이었습니다.
  21절 이하 32절에 “21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아까 살펴보았던 대로 야곱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이미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형 에서를 만나게 될 것이 두렵다는 것을 솔직하게 아뢰고 하나님께서 애초에 그에게 약속해 주셨던 언약을 따라 자기를 도와달라고 기도를 드리면서, 자신의 소유물을 두 떼로 나누고 또한 에서의 마음을 풀 수 있는 선물들을 먼저 보내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준비가 끝나고 자기 아내와 여종과 아들들과 마지막 소유까지 다 얍복 나루를 건너가게 한 후 야곱은 “홀로 남아” 있었는데, 거기서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나중에 30절에서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바로 화육강세 이전에 현현(顯現)하신 ‘성자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또한 그 “씨름”은 단순히 힘을 겨루는 투기로서의 씨름이 아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밀고 당기는 그의 간절한 심정이 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자’를 붙들고 늘어지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호세아 12장 3, 4절에 보면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의 씨름은 ‘울며 간구하는’ 간절한 기도의 씨름이었고, 그 결과 그 기도에 응답을 받게 된 사실이 곧 그 씨름에서 “겨루어 이긴” 것이었습니다.

  그 씨름의 과정과 결판이 나는 장면을 본문은 실로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어긋나게” 즉 탈골이 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야곱이 “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끝까지 그를 놓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고 야곱에게 부탁을 해올 정도로 결사적으로 달라붙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자기 기도에 대한 분명한 응답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런 야곱의 간절한 기도에 ‘네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라는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무슨 암호 같이 들리는 말이지만 사실은 어찌하든지 복을 받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야곱 인생의 핵심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아까 호세아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야곱”이란 원래 이름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았다’입니다.
  즉 형이 받게 될 복을 자기가 다 차지하겠다는 욕심을 세상에 태어나는 첫 순간부터, 아니 태중에서부터 이미 발휘하고 있던 것이 바로 ‘야곱’의 본성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그처럼 형이나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복을 받고 싶다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에서의 발꿈치를 잡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무척 시장한 틈을 타서 그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이라는 턱도 없는 헐값으로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에서인 체하고 아버지 이삭까지 속이면서 형이 받을 축복을 몽땅 가로채는 일종의 사기행각까지 벌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실로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정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던 것이 바로 ‘야곱’이라는 이름에 따른 그의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야곱이 그날 밤 얍복 나루에서의 기도를 통하여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복을 받겠다고, 형과 아버지까지 속여서라도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겠다고 안간힘을 쓰던 그가 이제는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하고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내 인생을 축복해 주시는 주권자가 되어 주지 아니하시면 나 혼자서는 아무리 용을 쓰고 기를 써도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결코 이 기도의 씨름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
 ’라고 기도할 줄 아는, 완전히 다른 인생으로 탈바꿈했던 것입니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 즉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다.’는 뜻의 아주 멋진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네가 씨름에서 이겼다.’고 말씀해 주신 것은 실제로 야곱이 하나님과 무슨 밀당이나 경쟁을 해서 이겼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서 끝내 응답을 받아내었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간절한 기도가 축복의 약속으로 응답받게 된 것을 확인한 야곱은 그제야 마음 놓고 얍복 나루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양처럼 온순하게 만들어 놓으신 에서가 야곱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아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미래를 앞에 두고, 아니 실패하고 망할 위험이 훨씬 더 높은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하는 중에도 야곱은 그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면서 간절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대면한 브니엘’의 기도가 지금까지의 ‘야곱’으로서는 결코 성취할 수 없었던 인생 최고의 복을 본격적으로 누리게 해 주는 ‘이스라엘’의 응답을 받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 자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냥 덥석 자녀의 손에 쥐어주는 것은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 세뱃돈 주세요.”하고 두 손을 모아 벌릴 때, 그 손에 돈을 쥐어주는 것이 할아버지에게는 보통 기쁨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다 자란 대학생 자녀라 할지라도 그냥 용돈을 주면서 자기가 알아서 사도록 할 때보다는, 함께 쇼핑을 나갔다가 “아빠, 저 외투가 하나 필요한데, 이게 마음에 들어요.”라고 부탁해 올 때 “그래라.” 하면서 당장 그것을 사주는 것이 훨씬 더 뿌듯한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원하시는 순서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에 그 다음은 곧 그 문제와 그 소원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하며, 특히 그 기도를 하나님과 씨름하듯이 결사적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간절히 드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혹 ‘야곱’의 행세만 하지는 않았습니까?
  복을 받고 싶다는 욕심만은 정말 굴뚝같았지만 그것을 성취하려는 과정에서 오직 철없는 ‘야곱’의 전철만 반복하지는 않았습니까?
  옆 사람의 ‘발꿈치를 붙잡고’ 내가 앞에 나서려는 편법만 날마다 궁리하지는 않았습니까?
  가까운 친구나 형제까지도 속여서 일단 나부터 잘되고 보아야 하겠다는 ‘야곱’의 심보가 지난 한 해 동안 내 사고방식을 좌우하지는 않았습니까?
  진정 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그와 같은 ‘야곱’이 먼저 ‘이스라엘’로 바뀌어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내’가 나를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나에게 축복해 주셔야만 함을 깨닫고 그 하나님과 기도로써 대면하는 ‘이스라엘’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하나님, 이것저것 해 주십시오.’라고 자기의 요구사항들만 차례로 한번 나열하고서 끝내는 것은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통지’에 불과하지 결코 간절히 매달리는 ‘씨름’이라고 불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내 인생 앞에 놓인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거나 혹은 인생의 성패가 걸린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될 때, 그 알 수 없는 미래를 두고 초조해 하거나 불안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럴수록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뜻과 인도에 다 맡기면서 씨름하듯이 결사적으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올해의 마지막 주간을 맞이하면서 이처럼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놓지 않겠습니다.
 ’라고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그 응답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새해를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2019년과 2020년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얍복 나루’를 건너가야 할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미 2019년은 다 지나가고 다시는 그리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차피 건너가야 한다면 저 건너편에 있는 2020년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복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하는 두 가지 갈림길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가 다지고 결단해야 할 자세 역시 분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일에든지 일단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한 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의 복을 받기 위해서 교역자는 말씀과 기도와 심방과 전도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가정이 평안하고 생업이 번창하는 복을 받기 위해서 성도는 자신의 모든 땀과 노력과 시간과 정성을 아낌없이 바치면서 뛰어들어야 합니다.
  최선의 투자가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최선의 결과를 내려주실 리는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최선의 노력과 함께 이제 하나님께서 그 성패를 인도해 주실 것을, 아니 반드시 성공하도록 축복해 주실 것을 위해 기도로 씨름하는 한 해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해들과 마찬가지로 2020년 한 해 동안 우리 각자의 인생과 교회를 향한 축복의 열쇠 역시 오직 하나님 한 분께서 다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그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실 이유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 역시 일단 ‘스스로 돕는’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성과 힘을 다 동원해야 하는 것은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결정적인 사실 곧 ‘하늘’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 사랑하시는 자녀를 반드시 도와주신다는 100퍼센트 성공 보장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최선의 노력과 간절한 기도와 함께 이 2019년의 ‘얍복 나루’를 건너감으로써 저 2020년의 건너편에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해 놓으신 ‘브니엘’의 형통과 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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