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12-08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 6장 36-46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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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12-08
2019′경향의 강단(51) (2019년 12월 8일 / 주일 대예배)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 6장 36-46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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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 6장 36-46절 / 석기현 담임목사
2019′경향의 강단(51) (2019년 12월 8일 / 주일 대예배)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 6장 36-46절 / 석기현 담임목사
지난 2000년 8월 12일에 러시아의 핵잠수함 쿠르스코 호가 침몰하여 승무원 118명 전원이 사망한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을 때였습니다.
  4개 월 후 쿠르스코 호를 인양했을 때 사고의 원인은 선내에 있던 노후된 어뢰가 오작동으로 폭발했기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보다 끔찍하고도 안타까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통상 그런 사고가 나면 모든 승무원들이 즉사하기 마련이지만, 쿠르스코 호의 경우에는 생존자가 있었는데 터빈부 팀장이었던 콜레스니코프 대위가 그 사실을 메모로 남겼던 것입니다.
  축축하거나 젖은 상태에서도 글을 쓸 수 있게 되어 있는 해군 연필과 수첩으로 기록된 그 내용은 “오후 1시 15분 잠수함 후미의 6, 7, 8번 격실의 승무원들이 9번 격실로 대피했다. 총인원은 23명이다. 사고가 발생한 까닭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 우리 중 아무도 위로 올라갈 수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비상 탈출용 해치는 있었지만 수심 1백8미터의 바닥에서 그냥 탈출하면 설혹 수면까지 도달한다 하더라도 급속한 감압 때문에 잠수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콜레스니코프 대위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러시아 당국이 사고 직후에 생존자가 있을 가망성을 알았으면서도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잠수함 속에서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가 감지되었지만 러시아 해군은 잠수함 부품이 부서지는 소리일 것이라고 일축했으며, 심지어는 낙후된 구조정밖에 없던 러시아 해군을 위해 영국과 미국 등의 서방국가에서 구조 기술을 지원해 주겠다는 제의까지도 군사비밀이 유출될 것만 걱정하여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처럼 국방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자국 군인들을 반드시 구조해야겠다는 ‘의지’도 ‘기술’도 없었던 러시아의 대통령과 군부 수뇌들 때문에 사고 직후에 적어도 1, 2일은 살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23명의 승무원들은 끝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구속사에서는 단 한 명이라도 놓치는 법이 없으며 반드시 100퍼센트의 성공률을 발휘합니다.
  그것이 곧 본문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9절)고 예수님께서 천명하신 사실입니다.
  즉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는 죄인 구원이라는 이 위대한 구조작업을 위한 ‘의지’ 즉 ‘뜻’과 ‘기술’ 즉 ‘능력’을 동시에 총동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저는 죄인 구원을 위한 그 ‘성부의 뜻’과 ‘성자의 능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구도자(求道者)’가 아니라 ‘택자’를 반드시 구원하시려는 뜻을 이루어 주십니다.

  본문 36절부터 40절에 기록하기를 “36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우리 예수님 앞에 ‘문제’처럼 보이는 일이 생겼습니다.
  바로 36절에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예수님께서 탄식하신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 성취를 위해 친히 화육강세까지 하신 성자 예수님에 대하여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불신앙’으로 반응했으며 대다수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적대행위’만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현실적인 상황만 본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구세주를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려 하시는 일이 큰 난관에 봉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인간 쪽의 불신앙 때문에 의지가 꺾이거나 낭패를 당할 분이 결코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내게 오는 자는”(37절하)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40절하)고 아주 자신만만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즉 무슨 ‘성공의 가능성이 있는 구원’ 정도가 아니라 ‘이미 확정되어 있으며 필연적으로 성취되고야 말 구원’을 천명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지옥 영벌’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는 죄인에게는 그야말로 최고로 ‘기쁜 소식’입니다.
  더구나 이런 구원 보장의 선언이 무슨 정치가나 교주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구세주’께서 친히 확증하고 계시는 것이니 정말 ‘고맙고도 든든한 복음’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 구원이 그처럼 100퍼센트 기정사실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점에 대하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설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비록 당신을 ‘보고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다수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되어 있는 택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르심’에 반드시 응하게 되어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소명(召命)’을 듣고 당신께 나아오는 자를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은 ‘이미 받아주시기로 확정된 상태’, 다시 말해서 ‘사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예정’임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구원하실 자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과 ‘구원받을 자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아주 강력한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라는 말이 “내게 오는 자”라는 말과 동격이면서도 먼저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더욱 뚜렷이 드러납니다.
  즉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사람 자신의 의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 쪽에서 이미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그 필연적인 결과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 ‘하나님의 보좌를 떠나 화육강세하신 구세주’가 되신 목적은 곧 ‘성부의 뜻을 순종하여 실행함’에 있으며, 그것이 바로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택자 구원 완성’이 그 얼마나 확고부동하게 보장되어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부의 뜻’을 반드시 ‘행하고야’ 마실 것이라고 선언하시는데 거기에 무슨 착오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반드시 구원해 주시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해 주시는데 그 과정에 어떻게 ‘실수’라는 것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4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뜻”“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해 주는 것이라고 이상의 모든 말씀을 총정리 요약하셨습니다.
  여기서는 특히 37절에서 동격이었던 ‘내게 주시는 자’와 ‘내게 오는 자’가 이제는 ‘아들을 믿는 자’와 동격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논리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소명’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게 되는 ‘믿음’ 역시 결코 사람 자신의 어떤 구도(求道)적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 편의 주권적 선택의 결과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실로 죄인 구원은 처음부터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시작하시고 주도적으로 진행해 나가고 계시는 사역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죄와 저주에 빠진 인간을 위해 당신의 공의에 따른 마땅한 지옥영벌 대신에 당신의 무한한 인자에 의한 구원을 계획해 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그 성부의 은혜로우신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시고 그 놀라운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영화로우신 보좌 우편을 떠나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까지 내려와 주셨습니다.
  이처럼 전지전능하신 절대주권자의 ‘뜻과 계획’을 따라 사랑의 구세주께서 친히 ‘행하시는’ 일이니 하나님의 구원은 단 한 명이라도 놓치거나 버리지 않고 반드시 100퍼센트 성공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부와 성자께서 이렇게 친히 행하시는 일에 어떻게 인간의 의지라는 것이 1퍼센트라도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남아 있겠으며 또한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미 죄로 말미암아 완전부패 상태에 있는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자신의 종교심으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소위 그런 ‘구도(求道)의 종교’라는 것은 결국 ‘물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 지푸라기라도 잡아서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헛수고’일 뿐이며 ‘자가당착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인본주의적 발상’에 불과합니다.
  구원은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 지혜도 없고 찾으려는 의지도 없는 죄인에게 영생 구원을 거저 베풀어 주시기로 ‘뜻을 정하시고’ 그 ‘계획을 행하기’ 위해 독생자까지 세상에 보내 주신 성부 하나님께서 홀로 시작하신 위대한 사역인 것입니다.

  갓난아이는 부모가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갓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지각(知覺) 능력이나 의지로써 엄마의 품을 찾아 안길 수가 있습니까?
  사실상 갓난아이는 자기 부모를 스스로 ‘인식’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엄마 편에서 ‘내 아이’라고 끌어안고 젖을 먹이고 아빠 편에서 ‘내 아들딸’이라고 정성껏 보살펴 주는 것이지, 아이 쪽은 그야말로 ‘전적무능력’의 상태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는 순전히 ‘그 부모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런 부모의 ‘일방적이고도 주도적인 사랑’을 받고 생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내쫓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부께서 택하신 자녀’를 ‘성자께서 잃어버린다는 것’ 역시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택자를 구원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은 바로 그래서 만세 전의 예정 때부터 이미 확고부동한 기정사실이요 역사의 종말에 가서 필연적인 결과로 성취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래도 ‘내’가 신을 찾는 종교심을 가지고 ‘내’가 구원의 길을 찾으려고 도를 닦았기 때문에 구원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그런 구원은 애당초 출발할 때부터 이미 ‘가망성 제로’의 절망적 상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구원은 전적으로 ‘하늘 아버지’께서 나를 당신의 양자로 선택하신 ‘뜻’과 그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계획’을 통하여 시작되었음을 깨닫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선행인(善行人)’이 아니라 오직 ‘화육하신 성자를 믿는 자’를 반드시 구원하시는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41절 이하 46절에 “41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42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4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칭하신 것은 당신의 ‘신성(神性)’과 ‘메시아 되심’을 동시에 나타내신 자기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던’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듣고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요셉의 아들 예수’란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신상 정보’로서, 그 유대인들이 오직 예수님의 ‘인성(人性)’만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라는 말 그대로 그들은 마치 ‘요셉이라는 사람을 알듯이’ 예수님도 오직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유대인들은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라고 크게 반박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적어도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분명히 깨닫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신적 존재’이심을 스스로 선포하고 계시는 것을 그들도 알아듣기는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관하여 끝내 ‘믿지 못했던’ 사실이었습니다.
  분명히 인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스스로를 가리켜 ‘하늘로서 내려온 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어불성설이요 오직 신성모독일 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연이어 선포하셨습니다.
  바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는 말씀 속에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까 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을 ‘부정형 문장’으로 표현했을 뿐 그 의미는 똑같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이라는 말씀은 구원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더욱 강조하시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성부께서 보내신 성자를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신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조차 결코 본인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말씀을 본문에서만 해도 벌써 몇 번씩이나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 점에 있어서는 ‘아무도(no one)’ 즉 단 한 명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택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해 주시는 방법’이 바로 4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지자의 글” 즉 이사야 54장 13절에서 예언된 대로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고 하시면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재삼 확인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그들’이란 곧 ‘내게 오는 자’ 즉 예수님을 믿게 되는 신자를 가리키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택자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길로 초청을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이란 곧 ‘성경 말씀을 읽고 깨달은 사람’이며, 그 결과 ‘예수님께로 오게 되는 사람’이란 곧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된 사람’인 것입니다.

  마지막 46절에서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말씀은 예수님 당신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고 보고 믿고 영접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천명하시는 내용입니다.
  바로 앞절에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 ‘성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해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실제로 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하나님은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신성만을 지니신 영(靈)’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 즉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만이 원래부터 ‘성부 하나님을 보고 알고 계시는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또한 충분히 알 수 있게 됩니다.
  즉 ‘독생자의 화육강세’야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가장 쉽고도 확실하게 믿을 수 있게 해 주는 최고의 ‘특별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이 점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밝히셨는데 바로 “(내게)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39절과 40절, 그리고 여기 44절에서 똑같은 말씀으로 세 번씩이나 강조하고 계시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를 두고 ‘마지막 날’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우주라는 공간, 역사라는 시간, 인간이라는 존재가 전부 다 문자 그대로 ‘끝장나는 날’이 피할 길 없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날’은 모든 인류가 그냥 다 소멸되어 사라지는 날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로 앞의 5장 29절에서 이미 밝히셨듯이 역사상 존재했던 각인이 심판주의 백보좌 앞에 서서 ‘생명의 부활’ 혹은 ‘심판의 부활’로 나누어지는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베풀어 주실 구원이란 바로 그 마지막 결정적인 날에 ‘당신을 믿는 자를 반드시 살려 주시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구원이라고 천명하신 것입니다.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이 말씀이 얼마나 간단명료하면서도 구체적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이란 결코 무슨 애매모호한 ‘형이상학적 구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영생’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생명의 부활’로써 구원해 주겠다고 하시는데 도대체 ‘무소유’ 따위가 무슨 행복이 될 수 있다는 소리입니까?
  성자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는 ‘천당의 영생’을 주시겠다는데 그 멋지고 완벽한 구원을 도대체 왜 ‘사회정의구현’이나 ‘지상낙원’ 따위로 한참 격하시켜 버리는 것입니까?
  두말할 필요 없이 ‘부활 영생’이야말로 최고의 구원인 동시에 아주 실제적인 구원입니다.

  이처럼 좋은 ‘영생 구원’을 우리는 오직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성자 하나님으로, 자신의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지극히 쉽게, 그러면서도 틀림없이 얻을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재삼재사 약속하시고 보증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는 약속을 세 번이나 해 주실 때에 그 말씀 앞뒤에 ‘무슨 선행을 행한 자’라든지 ‘어느 정도의 공로를 쌓은 자’라는 따위의 조건이 있습니까?
  단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 ‘영생 구원’을 얻게 되는 과정에는 오직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즉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즉 ‘소명에 대한 택자의 필연적 반응’과, ‘아들을 보고 믿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단명료한 신앙고백’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 ‘믿음’조차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했으니, 실로 구원의 서정 전 과정이 오로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능력’ 이것 하나로써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무슨 토를 달 여지조차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의 ‘이행득구’ 교리는 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써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완성시켜 주시는 구원’을 ‘인간 자신의 선행을 내세우고 그것이 모자랄 때에는 다른 성인들의 소위 잉여 공로에 의지하는 구원’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천주교를 비롯한 모든 ‘인본주의 종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요 자기모순입니다.
  ‘이미 공의의 하나님으로부터 사망 선고를 받은 죄인’이 도대체 무슨 수로 자기 스스로 ‘사죄 조건’을 충족시킬 수가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반면에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는 구원에 대하여 오로지 하나님의 절대주권만을 시종일관 철저히 의지합니다.
  불안하고 시행착오뿐인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전능자’ 성부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 행하시는 일인데 도대체 무슨 염려하거나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들을 믿는 자마다 반드시 영생을 얻게 해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전능의 ‘능력’을 동원하여 반드시 성취하고야 마실 일임을 깨닫고, ‘그 믿음조차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까닭에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끝내 ‘영화’ 즉 구원의 완성에까지 틀림없이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수면 위로 스스로 탈출할 길이 전무했던 쿠르스크 호의 생존자들처럼 완전부패와 전적무능력에 빠져 있던 죄인은 스스로의 ‘구도’나 ‘공로’로써는 살아날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만 달려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예정해 놓으신 택자’를 반드시 구원해 주시려는 고마운 ‘뜻’을 세워 주셨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을 따라 성부께서 당신께 보내 주시는 자를 단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반드시 살리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은 ‘사람의 종교적 목표에 따른 성취’(religious achievement)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따른 역사’(divine activity)입니다.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절대주권자께서 ‘택자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해 놓으신 계획’이 어떻게 단 한 명이라도 빠뜨리는 착오를 낼 수 있겠습니까?
  ‘내게 오는 자를 마지막 날에 반드시 살리리라’는 약속을 성취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대신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가 어떻게 ‘아버지를 잠시 떠난 탕자’라고 해서 그 효력이 사라져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실로 ‘죄인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완벽하게 이루어진 계획인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이 아낌없이 동원된 사상 최고의 기적이며,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그야말로 이 구원을 탄탄한 ‘만세반석’처럼 의지하고 소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두고 ‘하나님은 잠시 옆으로 물러나서 무력하게 관망하는 동안에 사람이 자유의지로써 결정을 내려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평생토록 스스로 도를 닦아서 위대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면서도 정작 죽기 직전에는 “한평생 남녀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須彌山)보다 더 크구나. 산 채로 불의 아비지옥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나 된다.”라고 횡설수설한 중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구원을 두고 ‘하나님 편에서 어떤 조건을 제시해 주시고 사람 편에서 그것을 충족시켜야만 성립될 수 있는 거래’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평생토록 그렇게 많은 선행을 했다고 하면서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속에 없었던’ 까닭에 죽을 때까지 본인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어느 수녀처럼 그 인생이 허무하게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폴로 13호가 우주 공간에서의 사고로 인해 지구로 무사 귀환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절박한 위기를 당했을 때였습니다.
  당시 우주비행관제본부장이었던 진 크랜츠가 그 세 명의 우주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총동원하면서 NASA의 전 직원들에게 주문(呪文)처럼 계속 반복했던 유명한 말이 바로“실패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Failure is not an option).”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라고 하신 말씀은 그처럼 ‘실패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라는 정도가 아니라 ‘실패란 전혀 불가능하다(Failure is absolutely impossible).’라는 100퍼센트 확신의 선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 아들을 보고 믿는 자는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살리리라’ -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는 구원역사는 단 한 명도 놓치지 않는다.’라고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해 주시는 이 약속을 굳게 믿고 분명히 고백함으로써, 바로 그 예수님께서 반드시 속히 다시 오실 ‘마지막 날’에 영광스러운 ‘영생 부활’의 반열에 꼭 함께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