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12-0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장 1-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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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12-01
2019′경향의 강단(50) (2019년 12월 1일 / 주일 대예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장 1-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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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장 1-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2019′경향의 강단(50) (2019년 12월 1일 / 주일 대예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장 1-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제2차 세계대전 중 ‘최고의 야전사령관’으로 손꼽혔던 조지 패튼(George Smith Patton) 장군의 활약상을 그린 ‘패튼’이라는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연합군이 시실리 섬에 상륙하여 독일군을 압박해 들어갈 때 미군을 지휘하고 있던 패튼 장군은 팔라모라는 요충지를 영국군보다 먼저 탈환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독일군의 맹렬한 반격에 의하여 미군의 공격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패튼 장군은 지프차에 운전병 한 명만 대동하고서 문자 그대로 포탄이 곳곳에 작렬하고 있는 전선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진격하지 않고 지원 타령만 하는 연대장 한 명을 현장에서 즉시 갈아치우기도 하고 도하할 길을 찾느라고 꾸물거리고 있는 탱크부대장에게 당장 강을 건너가라고 호통을 치기도 합니다.
  통상 그런 지휘는 무전이나 전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삼성(參星) 장군이 몸소 최전선에까지 나와서 독려하는 바람에 미군 지휘관들은 정신이 버쩍 들게 되면서 결국 팔라모를 탈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높은 사람’이 ‘현장’에까지 찾아와서 직접 전달해 주는 말은 간접적인 전달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효과적이기 마련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강세’ 역시 바로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한 것이 곧 지고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이라는 천한 몸을 입고 이 땅에 친히 강림’하심으로써 원래는 사람이 깨닫기 어려웠던 진리, 그러나 또한 중요하기 그지없는 사실을 실로 알기 쉽게 선포해 주셨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탄의 달 첫 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저는 바로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우리의 눈앞에 뚜렷이 펼쳐진, 우리의 마음에 아주 쉽게 깨우쳐진 두 가지 진리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자 예수님의 화육강세는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를 뚜렷이 계시해 줍니다.

  1절부터 3절에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구절은 매우 의미심장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 “말씀”이란 바로 본문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구절을 보아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어떤 한 인격체를 가리키는 단어이며 물론 예수님을 두고 한 표현입니다.

  우리나라말 성경에 “말씀”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원문의 헬라어로는 ‘로고스(logos)’라는 매우 유명한 단어입니다.
  이 ‘로고스’라는 단어의 그 기본적인 뜻은 ‘말’(word)이라기보다는 보다 철학적인 용어로서 ‘이성’, ‘원리’, ‘혼’, ‘생각’, 또는 ‘생각의 표현으로서의 말’ 등 여러 가지 복합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헬라인들이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이 ‘로고스’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을 때에는 아마도 ‘우주만물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어떤 보편적인 최고의 원리’ 따위의 개념이 즉각적으로 그들의 머릿속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유대인이 이 단어를 읽게 되었다면 곧바로 ‘말씀’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통해 이미 ‘하나님’과 ‘말씀’을 동일시하는 것이 매우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라는 표현은 적어도 유대인에게는 생소하거나 어색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이런 두어 가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사도요한이 여기서 예수님을 ‘로고스’라고 표현한 이유를 이렇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헬라인에게는, 그들이 평소에 궁금해 하고 철학적 연구와 토론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지만 끝내 찾지는 못하고 있던 ‘로고스’, 즉 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최고의 원리와 이성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 수 있음을 알려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에게는, 그 예수님이 곧 그들이 구약을 통해 이미 알고 믿고 있는 세상의 창조주와 똑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해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화육강세하신 예수님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공히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를 사람에게 알려 주시는 분이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에게 보여 주시는 분이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로고스’라는 단어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사람에게 계시해 주실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성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의 창조사역에 성부 하나님과 동역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2절에서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증언하고 있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어지는 3절의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는 말은 ‘그를 통하여 지은 바 되었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성자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나타낼 때 특별히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즉 창조사역의 주체이신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성경이 표현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를 통하여’ 창조되었다고 표현함으로써 모든 성부 하나님의 의지는 반드시 성자 하나님 즉 예수님의 ‘대리적인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처럼 창조사역에 친히 동참하셨던 예수님께서 이 땅에까지 내려오심으로써 사람은 우주와 세상의 창조주가 누구신지를 바로 그 성자 하나님을 통해 더 없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18절의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는 말씀이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해 줍니다.
  여기서 ‘나타내다’라는 말이 바로 ‘설명해 주다, 알게 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것은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서 변할 수 없는 근본적이고도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목수가 의자라는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 내면 그 목수는 그 의자를 인식할 수 있지만 의자는 목수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을 하나님께서 창조해 내셨으니 지음 받은 사람 쪽에서는 자신을 지은 하나님을 원래는 볼 수 없었던 것이 너무도 당연한 원리입니다.
  하지만 성부의 “품 속에 있는” 독생성자, 즉 같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람의 눈에 비로소 그 창조주가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 것은 실로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눈은 가시광선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자외선이나 적외선 역시 존재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비가시광선도 특수감광 사진이나 특별한 망원경 따위를 사용하면 우리 눈에도 나타나게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와 같이, 사람이 원래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하나님,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사람으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나타내” 주시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이 그야말로 최첨단에 이른 현대에 와서도 인류가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질문은 바로 ‘이 존재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주가 제일 처음에 도대체 어떻게 생기게 되었으며 생명이 최초에 어떻게 탄생되었는지에 대하여 온갖 학설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절대적 진리로 인정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뉴턴의 만유인력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같은 것이 발표되었을 당시에는 그야말로 ‘코스모스(우주)의 비밀’을 풀어 주는 불변의 진리 같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불완전한 학설임이 드러나게 되지 않았습니까?
  우주 탄생에 대하여 현존하는 최고의 가설은 ‘빅뱅(Big Bang) 이론’이라는 것인데, 설사 그것이 옳다 하더라도 그 ‘빅뱅’이라는 것이 왜 생기게 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천지창조에 대해 ‘어떻게?’라는 문제에 대해서만 끝없는 가설들을 세울 뿐이지 애당초 ‘누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자 예수님의 화육강세만이 이 ‘누가 천지만물을 창조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유일하고도 확실한 답을 알려 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천지창조 때에 ‘말씀’으로서 ‘창조주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천지창조의 ‘주체’이신 동시에 ‘산 증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이 우주와 세계의 창조주가 누구이신지에 대해 대답할 길은 이제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이’라고, ‘언제?’라는 질문에 대하여 ‘태초에’라고, 그리고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하여 ‘말씀으로’라고 대답해 주시는 이 ‘로고스’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제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우주창조의 비밀을 풀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196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아폴로 8호’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달 궤도를 돌면서 지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장면은 또한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가운데 전 세계에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순간에 아폴로 8호의 승무원들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기막힌 일을 했습니다.
  달의 지평선 너머로 깜깜한 우주 공간에 떠 있는 ‘푸른 행성’ 지구를 바라보면서 윌리엄 앤더스, 짐 러벨, 프랭크 보먼 이 세 명의 우주인들이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으로 창세기 1장 1절부터 10절까지를 나누어 봉독했던 것입니다.
  미국의 공교육에서 기독교와 창조론을 가르치는 것이 위헌이라고 반대운동을 펼쳤던 것으로 악명 높은 매덜린 머레이 오헤어라는 여인은 이 사건에 대해서도 소송을 제기했지만, 미 연방대법원에서 사법권이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기각당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기독신자들에게는 그 첫 구절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이 전파를 타고 온 지구의 오대양육대주에 퍼져나간 순간은 정말이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바로 화육강세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로고스’로 영접한 성도들의 심령에 ‘창조주 하나님’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실로 성자 하나님이시면서도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야말로 태초의 천지창조 때부터 이미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셨음을 깨달음으로써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고도 참된 창조주이심을 확실히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자 예수님의 화육강세는 ‘사람이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을 밝히 계시해 줍니다.

  4절 이하 13절에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먼저 4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은 그처럼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의 영적 어두움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함은 생명을 만드신 창조주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 바로 예수님에게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 생명이 “빛”으로 나타났다는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누구나 그 생명의 진리를 쉽게 깨달을 수 있도록, 그 생명의 구세주께서 사람의 눈에 제일 잘 보이는 빛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빛이 어둠에 비취었을 때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햇빛이 환한 곳에서는 아무리 밝은 등불이라도 별 표도 나지 않지만, 깜깜한 밤중에는 아주 작은 불빛 하나도 먼 곳까지 잘 보이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가로등이 환한 도시에 살 때에는 별빛이나 달빛이 밝은 줄을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도, 어쩌다 시골길 같은 깜깜한 곳을 걷게 되면 그제야 밤하늘의 달빛은 말할 필요조차 없고 그저 별빛만 있어도 길을 찾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됨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그처럼 빛이 잘 드러나고 잘 인식될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앙인들의 마음은 얼마나 어두운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할” 정도입니다.
  실로 빛처럼 밝은 생명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 분을 구세주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심령이란 답답하기 짝이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인 것입니다.

  게다가 9절에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님은 그냥 하늘 높은 곳에서 밑으로만 비취는 빛이 아니라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셨습니다.
  즉 그분은 33년 동안 “세상에 계셨던”, 그야말로 ‘지근거리에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과 같은 땅을 밟고 다니셨고 서로의 호흡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직접 보여 주셨지만,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는 구절은 특별히 유대 땅, 이스라엘 민족에게 직접 찾아오셨음을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다른 민족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이며 구약 성경을 통하여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선지자들로부터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까지 받았던 바로 그 “자기 백성”조차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답답하기 그지없는 심령들을 두고 성령께서는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한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불신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그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는데, 바로 그 예수님의 “이름을” ‘그리스도로 오신 성자 하나님’으로 “믿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즉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영생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은 이런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권세”라고 번역된 말은 ‘힘’(power)이 아니라 ‘권리’(right)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될 권리라는 것은 원래 전혀 없었던 권리이며 또한 얻을 길도 전무한 권리였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로 그 귀중한 권리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생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공로나 노력에 당연히 따라오게 되는 권리가 결코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짜로 주신 ‘특권’일 뿐인 것입니다.

  이처럼 놀랍고도 고맙기 짝이 없는 ‘특권적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데, 그것이 이어지는 13절이 자세히 밝혀 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혈통으로나” 즉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소위 ‘모태신앙’ 따위의 조건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육정으로나” 즉 우리 자신이 간절히 소원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사람의 뜻으로” 즉 우리의 의지가 강해서 성취해낸 결과도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빛을 보고 믿게 된 것은 오로지 우리가 원래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창세 전부터 이미 ‘선택 받았던 자’이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일입니다.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로지 부모의 뜻에 달려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중생함을 얻느냐 못 얻느냐 하는 것 역시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달려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16절과 17절에서 바로 이 사실을 두고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표준 혹은 기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이 스스로는 그 기준을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음을 아시고 그 대신 예수님을 보내시어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한 죄값을 대신 충족시켜 주신 것이 곧 “은혜”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화육강세를 통해 주어진 복음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과는 비교도 안 될, 참으로 고마운 “은혜 위에 은혜”요 놀라운 구원의 “진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빛을 깨닫지 못하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오늘날의 유대인들 역시 구약은 믿고 있으면서도 그 구약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오실 메시아’가 곧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여전히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신구약이 완성되었고 성경이 각 나라 언어로 다 번역된 실로 특권적인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말씀 속에 계시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시간에도 우리 예수님은 지상의 수많은 교회들과 전도자들의 복음선포를 통하여 정말 빛처럼 뚜렷하게 당신의 성자 하나님 되심을 증언해 주고 계시는데도, 그 영혼이 어두운 사람들은 그토록 뚜렷하게 밝은 빛을 정말 이상하게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어떻게 해 주셔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친히 보내’ 주셨습니다.
  게다가 그 성자 하나님께서는 그냥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시면서 죄인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보여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이 예수님의 화육강세를 통해 최대한으로, 문자 그대로 더 이상 보여 주실 길이 없을 정도로 다 보여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는 오직 양자택일의 결단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즉 예수님의 화육강세로 인하여 모든 사람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이 구세주를 믿고 구원을 받든지 아니면 끝내 영접하지 않음으로써 영벌을 받든지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기로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 후자에 속하게 되는 사람은 나중에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지옥에 떨어지게 될 때 그 어떤 항의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요 3:16) 수 있는 기회를 당신의 독생자까지 친히 세상에 보내 주심으로써 이미 충분하게 제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요 3:18)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정말 감사하게도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세 전에 이미 ‘구원인’으로 ‘택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선택의 은혜’ 덕분에 우리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거부하고 있는 이 예수님을 기꺼이 영접하고 확실히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거저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빛 앞에서도 자기의 어두움을 깨닫지 못하는 진짜 어두운 인생으로 남지 말고, 당신이 ‘온 세상의 구세주’로 화육강세하셨음을 빛처럼 뚜렷이 보여 주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신앙고백함으로써 이 ‘은혜 위의 은혜’인 구원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14절에 결론적으로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선포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became)”라는 말씀은 원래는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이 육신으로 바뀌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볼 줄 아는 눈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신가를 진지하게 찬찬히 살펴보면 그 주님의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비취는 영광으로 인하여, ‘아! 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시구나.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라고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바로 그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육안으로 뵙듯이 알 수 있고 또한 ‘구원의 길’을 간단하고도 명백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화육강세하신 예수님’에게는 바로 이런 ‘창조주에 대한 진리’와 ‘죄인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가 그야말로 “충만”한 것이며, 그런 까닭에 자연계를 통해 나타나는 ‘일반계시’와는 달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빛처럼 거하신’ 것은 그야말로 ‘특별계시’가 아니겠습니까?
  ‘로고스의 화육(化肉)’으로 인하여 창조의 신비가 밝히 드러났습니다.
  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는 이제 더 이상 ‘이 우주와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나?’ 하는 의문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또한 이 ‘성자의 강세(降世)’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지를 어두움에 비취는 빛처럼 명백하게 계시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자는 그저 더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복이 아니라 ‘영생구원’을 유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인생 최고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된 것입니다.

  아무도 풀지 못할 영원한 비밀처럼 보였던 우주의 시작,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이것 역시 모든 사람에게 끝없는 미로와도 같았던 인생 문제 -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강세는 이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난해하기 짝이 없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명쾌하고도 간단한 정답을 보여 주었습니다.
  최고의 ‘진리’가 ‘육신’이라는 이 가장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가장 심오하고도 중요한 진리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유일한 ‘빛’처럼, 그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게 보일 수 있고 그 누구의 마음에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계시로 우리에게 나타난바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 친히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까지 찾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이 깊고도 놀랍고도 고맙기 짝이 없는 예수님의 화육강세의 의미를 이번 성탄의 달 내내 묵상하는 가운데 세례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