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11-24 “히브리 사람 아브람” 창세기 14장 13-24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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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11-24
2019′경향의 강단(49) (2019년 11월 24일 / 주일 대예배)
“히브리 사람 아브람” 창세기 14장 13-24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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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사람 아브람”

창세기 14장 13-24절 / 석기현 담임목사
2019′경향의 강단(49) (2019년 11월 24일 / 주일 대예배)
“히브리 사람 아브람” 창세기 14장 13-24절 / 석기현 담임목사
요즘 심리학에서는 어릴 때 부모와의 관계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맺는 정서적 유대관계를 ‘애착’(attachment)이라고 하는데, 좀 더 세분하면 ‘안정 애착’, ‘불안정 애착’, ‘회피 애착’, ‘저항 애착’ 등으로 나누어집니다.
  이 중에 어떤 형태로 부모와 유대관계를 나누느냐에 따라서 나중에 친구와의 관계부터 시작해서 직장 동료와 상사와의 관계, 심지어는 결혼 후의 부부관계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법정에서 변호사들이 중범죄자를 두고 ‘피고가 어릴 때 부모에게서 학대를 받고 자랐기 때문에’라는 변호를 흔히 내세우는 것도 바로 이런 이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 사람의 사회적 관계나 행동의 근본적 원인을 100퍼센트 다 부모와의 관계에 돌릴 수는 없지만, 그 사이에 상당히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이런 원칙은 기독신자의 신앙생활에서도 적용되는데, 바로 ‘하나님과의 대신관계(對神關係)’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타인과의 대인관계(對人關係)’에서 그대로 반영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절대주권자와의 관계가 ‘안정 애착’으로 정립되어 있는 신자는 자연히 사람 앞에서도 항상 올바른 자세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른 ‘대신관계’에 근거하여 ‘대인관계’를 영위하는 신자를 가리켜 우리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신전인격자(神前人格者)’라는 아주 멋있는 표현을 쓰는데,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그에 대한 모범을 실로 완벽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1절 이하 12절의 말씀에 아홉 명의“왕”들이 등장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부족장’ 정도 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 중에“그돌라오멜”이 가장 강력한 군주였는데, 1절에 기록된 것이 그를 중심으로 한 ‘네 왕들의 동맹’이며 나중에 바벨론이 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부족들이었습니다.
  2절에는“소돔 왕 베라”를 중심으로 한 ‘다섯 왕들의 동맹’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다 가나안 지역에 살던 부족들이었습니다.
  4절에 나오듯이, 이 다섯 왕들도 처음에는“십이 년 동안”이나 조공을 바치면서 그돌라오멜 왕을 섬기다가“제십삼년에” 배반하게 됩니다.
  그돌라오멜 왕은 이들의 괘씸죄를 다스리기 위하여 ‘4국 동맹’을 이끌고 그 ‘5국 동맹’을 공격해 왔습니다.
  그래서“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사해(死海)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소돔 왕의 연합군이 대패하면서 그돌라오멜 왕의 연합군이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을“사로잡고” 그 재물을“노략”해 갑니다.
  바로 그 때문에 당시 소돔성 안에 거주하고 있던“아브람의 조카 롯”도 꼼짝없이 노예로 팔릴 신세가 되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참으로 멋있는 ‘신전인격자’의 자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에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는 기독신자가 과연 어떤 훌륭한 대인관계를 발휘하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인자(仁慈)를 체험하는 신전인격자는 신앙이 약한 교우에게도 사랑을 베풉니다.

  13절부터 16절에“13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14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16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고 기록했습니다.

  “히브리 사람”이란 명칭은 성경의 이곳에서 제일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셈 자손을 대표하는 ‘에벨’이란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견해와, 히브리어의 ‘아발’(건너오다)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어 ‘외부에서 들어온 자’란 뜻으로 쓰인 말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은 아직까지는“아브람”이었지만, 오늘 설교에서는 편의상 ‘아브라함’으로 부르겠습니다.

  하여튼 아브라함은 자기 조카 롯이 사로잡혀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출병을 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예비군이나 부족의 정규군을 소집한 것이 아니라“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들을 총동원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병(私兵)을“삼백십팔 명”이나 거느리고 있었던 것을 보아서도 아브라함이 이미 엄청난 부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들을 이끌고 자기 거주지였던“마므레의 상수리 수풀”에서 출발하여 적군이 머물고 있던“단”까지 단숨에“쫓아”갔는데, 그것은 직선거리로만 따져보아도 약 200킬로미터나 되는 길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거기서부터 또“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추격했는데 이곳은 150킬로미터 가량 더 북쪽이었습니다.
  실로 평소부터 잘“길리고” 철저히“훈련”시킨 덕분에 그의 사병들은 그런 대단한 기동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5절에는 아브라함의 치밀한 전술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가신” 즉 사병(私兵)들을“나누어” 공격했습니다.
  적은 숫자로 많은 연합군을 상대해야 하는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병력을 분산 배치함으로써 적군으로 하여금 마치 대군에게 공격을 받는 듯한 오판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게다가“밤에” 기습공격을 가했습니다.
  전술의 기초 중에 하나가 승리한 직후에 적군의 반격을 조심하는 것인데, 이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은 승전 분위기에 도취하여 방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의 기습작전은 소돔왕의 5국 동맹군도 이기지 못했던 4국 동맹군을 단숨에 격파하는 대승리를 거두고, 자기“조카 롯”“부녀와 친척”들을 구출했을 뿐 아니라 그 외의“모든 빼앗겼던 재물”까지 되찾아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앞장에 나오듯이 롯은 아브라함에게 버릇없는 조카였으며 결국 골칫거리가 되고 만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너 이놈, 제 욕심만 차리고 소돔으로 가더니 꼴좋다.’라고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저 녀석을 징계하시는데 정신 차리도록 혼 좀 나야지.’ 하고 팔짱만 끼고 앉아 있지도 않았습니다.
  비록 분명히 잘못을 저지른 조카였고 그 때문에 당하는 인과응보임이 명백했지만, 아브라함은 그를 비난하기 전에 당장 일어나 전력을 쏟아서 일단 자기 조카 롯을 도와주고 살려 주었던 것입니다.

  평소에는 예수님 안에서 형제자매 된 사이 운운 하다가도, 누가 조금만 잘못하면 금세 욕하고 약간만 실패하면 당장 등을 돌리는 교인들이 꽤 많습니다.
  그동안 나누었던 성도의 교제라는 것은 봄눈 녹듯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면서 언제 보았느냐는 듯이 하루아침에 남남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일반 교인 사이에서도 그렇고 목사와 장로 사이에서도 그렇고 목사들끼리도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피차 진짜 기독신자라면 끝까지 서로 사랑할 줄 아는, 정말 어려울 때 도울 줄 아는 ‘의리’ 있는 형제자매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한테 좀 기분 나쁜 일을 저질렀다고 해서 마치 철천지원수처럼 대하지 말고 자기 쪽에서 먼저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자기의 조언을 듣지 않고 본인의 고집대로 하다가 크게 실패한 성도가 있을 때 속으로 ‘꼴좋다’라고 비난만 퍼붓지 말고, 그래도 같은 교회 교인이고 함께 동역하는 직분자라면 일단 동정해 주는 마음과 도와주는 손길부터 내밀어 주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교우 사이에서 그런 진정한 사랑과 의리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야단부터 치시고 용서해 주셨습니까?
  우리가 장망성의 죄악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난하시면서 불러 주셨습니까?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결코 그런 식으로 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꾸중도 하지 않으시고 일단 우리를 사망의 저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아무 따지는 말씀도 없이 그냥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시면서 ‘너는 이제 완전히 죄 사함을 받았고 이미 내 양자가 되었다.’라고 우리에게 무한정의 사랑부터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정말 이런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자녀라면, 비록 신앙이 약하고 시험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된 교우를 어떻게 비난하거나 멀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무한정으로 받아 누리고 있는 신전인격자답게 형제 교우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도 깨끗이 용서해 주는 사랑, 자매 교우가 스스로 실족하여 어려움에 빠졌을 때에도 나무라기 이전에 일단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의리를 꼭 발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외하는 신전인격자는 하나님만 높이는 전도자를 지극히 존중합니다.

  17절부터 20절에“17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대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던 아브라함은“소돔 왕”“살렘 왕 멜기세덱”의 환영을 받게 되는데, 아브라함은 그 두 사람 중에서도 멜기세덱에게만 극진한 경의를 표했습니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은“살렘 왕” 즉 나중에 예루살렘이 된 그 성읍의 왕인 동시에“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살렘은 이처럼 정치와 종교가 일치되어 있는 통치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멜기세덱 제사장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면서“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의 창조주 되심과 지극히 높은 절대주권자 되심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또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의 승전을 두고“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싸움을 잘해서 이겼다고 칭찬해 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그런 능력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만을 높였던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만을 지극히 높이면서 모시는, 참된 제사장다운 면모가 이 짧은 두 문장 속에서 충만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 역시 그와 똑같이 하나님을 천지의 대주재로, 높고 위대하신 절대자로 믿고 있었던지라 그 말만 듣고서도 당장 멜기세덱이 진짜 제사장인 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바로 그 자리에서“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게 됩니다.
  십일조는 애당초 하나님께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활비를 위해 제정하신 것인데, 나중에 모세 오경에서 성문화되기 훨씬 이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에서부터 이미 그와 같은 십일조의 의미와 실천이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목사는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게 되어 있고, 진짜 성도는 바로 그런 목사를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원로목사님께서 언젠가 제게“내가 지금까지 목회를 해 오면서 교회의 어떤 중대한 문제에 대해 결단의 기로에 설 때마다, ‘이렇게 하면 장로나 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 대신 항상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라고만 생각하면서 최종 결정을 내렸다.”라고 간증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원로목사님은 교인들로부터 인기를 얻으려 하는 목사가 아니셨고, 장로나 집사를 높여서 그 덕을 보려고 한 목사도 아니셨습니다.
  그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주권을 지극히 높이는 목사님이셨고, 바로 그 때문에 절로 교인들에게도 존경받는 목사님이 되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경외할 줄 아는 성도는, 그처럼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벌벌 떨 줄 아는 목사가 진짜 목사인 줄을 당장 알아챌 수 있습니다.
  반면에 교인들의 기분을 맞추어 주는 일에 모든 정성을 다 쏟고, 교인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데에만 온갖 신경을 다 쓰고, 교인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 주는 말’로 설교를 다 채우는 목사를 훌륭한 목사라고 생각하는 교인은, 미안하지만 ‘눈 먼’ 사람입니다.
  소위 ‘사람 좋은 목사’로 교인들 앞에 보이기 위해서만 애쓰는 목사와 그런 목사를 ‘양의 형편을 잘 이해해 주는 목자’라고 추켜세워 주는 교인이란, 사실상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과 ‘소경에게 인도받고 있는 소경’일 뿐인 것입니다.
  매사에 그저 하나님만 무조건 높이면 자신은 그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절로 존경과 대접을 받을 수 있는데도, 목사라는 사람이 그저 사례비부터 밝히는 치졸한 모습이나 교인들 앞에 보여 주고 있으니 ‘삯꾼’이라는 치욕스러운 별명을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붙여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도라면 이미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라고 사도 바울이 그렇게 강조한 사실은 신실한 목사와 분별력 있는 성도에게는 그야말로 상식에 불과합니다.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만이 지극히 높으신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분을 경외하는 신전인격자답게, 그 하나님의 절대주권 앞에 벌벌 떨 줄 아는 목사만이 진짜 ‘주의 사자(使者)’인 줄을 알고 지극히 귀히 여기며 받들어 모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앞에서 바로 사는 신전인격자는 불신세상 앞에서도 신자의 명예를 깨끗하게 지킵니다.

  21절 이하 24절에“21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22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24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개선하는 아브라함을 대하는 소돔 왕은 실로 낯 뜨거운 입장이며 머쓱한 처지였습니다.
  그래도 평소에는 내로라하면서 왕 노릇하던 자기네들 다섯 명이 다 합쳐서도 못했던 일을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알 수 없는 외국인’인“히브리 사람”이 간단히 처리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돔 왕은 그런 창피함을 조금이라도 무마하려고“사람은 내게 (돌려)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고 자기 딴에는 호의를 베풀어 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런 제의를 거절하고 모든 재물까지 다 소돔 왕에게 돌려줍니다.
  적군에게 빼앗겼던 것은 물론이고 적군에게서 탈취한 것까지 다 포함해서 소돔 왕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그 대신 자신을 위해서는 오직“젊은이들이 먹은 것” 즉 자기의 사병 318명이 그 며칠 동안의 전투 중에 소비했던 식량만큼만 취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소돔 왕에게서 받아내야 할 지극히 당연한 대가뿐 아니라 합법적인 전비(戰費) 청구까지 깨끗하게 양보했던 것입니다.

  그런 중에도, 24절 하반절에 보면, 자기와 그 전투에 동행했던“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에 대한“분깃”은 따로“제하여” 그들로 하여금 취할 수 있도록 조처해 주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13절에 있는 대로 아브라함과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이웃들이고 아브라함과 함께 그 전투에 동참해 준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소돔 왕과 마찬가지로 역시 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당시 사회에서 행하던 관습과 규례를 따라 자기네가 싸우고 얻은 전리품에서 합당한 분깃을 떼어가도록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본인이 신앙적으로 지키는 원칙을 그 세 사람에게는 억지로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나중에 그 어떤 비난이나 오해가 생길 여지가 조금도 없도록 미리 방지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왕과 자기를 도왔던 세 사람에게 그처럼 모든 전리품을 양보하는 자세를 보여 준 이유는, 그가 지금 상대하는 사람들이 원래 악명 높은 도시인 소돔의 왕이며 불신자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지금의 처지와 입장에서는 일단 저자세로 나오고 호의적으로 대해 주지만, 23절에서 아브라함이 말하고 있는 대로 나중에 가서는 ‘아브라함은 내가 가져야 할 전리품을 몽땅 독차지해서 부자가 되었다.’라고 충분히 딴소리를 하고도 남음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자의 명예를 더럽히게 될 말을 불신자에게서 듣지 않도록 아예 원천봉쇄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기가 그들에게 하는 말을 두고“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라고 아까 18절에서 멜기세덱 제사장이 불렀던 하나님과 똑같은 이름을 부르면서, 그들 앞에서 신자로서의 처신에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거나 흠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성도나 교역자 앞에서는 나름대로 조심하지만 교회 밖에 나가서는 전혀 다르게 사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즉 불신자들과 만날 때에는 순전히 불신자 식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저들과 말이 통하려면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으니 그런 자리에서는 같이 한 잔 하는 게 어떠냐고 합니다.
  저쪽에서 속이니 나도 속이고, 저쪽에서 욕하니 나도 욕으로 맞받아치면서 기죽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무슨 문제에 봉착할 때 그것을 신자답게 판단하고 처신하려 하지 않고, 그저 불신사회의 원칙과 관습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단 교회 밖에 나가면 불신자 앞에서 아무 차이가 보이지 않는, 아무 성별된 모습이 없는 교인이야말로 신자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고 짓밟히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저 친구가 예수를 믿는다 하지만 우리하고 아무 다른 것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얼마나 전도의 문을 막아버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교회 나간다는 사람이 불신자와 똑같이 음주흡연을 하고 똑같이 상스러운 소리를 하고 똑같이 사기치고 탈세하면서 살고 있으니, 그들 생각에 기독신자가 된다는 것이 아무 흠모할 만한 일이 안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런 이중적인 삶은 불신자의 전도를 막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자 전체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며 교회를 욕먹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성호에까지 먹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를 지키는 것은 결코 주일에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주중에 사회에 나가서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도 그 하나님을 성일에 하는 것과 똑같이 오직 경외함으로 의식하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예배시간에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그 경건한 자세가, 불신자와 대화 한마디를 나누고 거래 한 건을 진행할 때에도 그대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전 안에 임재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바깥 사회라고 달라지실 수 없는 것처럼,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는 신전인격자의 모습이 바깥 일상생활에서라고 바뀔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2장 24절에서“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라고, 불신자 앞에서 신자의 명예를 지키지 못하는 교인들을 향해 따가운 책망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전인격자’라는 이 귀한 이름의 명예를 하나님 앞과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불신사회와 불신고객과 불신이웃과 불신가족 앞에서도 더욱 주의하여 깨끗하게 지킬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앞서 말씀 드렸듯이 이 당시는 아브라함이 아직 ‘히브리 사람 아브람’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창세기 17장에 가서 그가 99세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장차“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언약과 함께 받은 새 이름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요즘으로 치자면 아직 신앙생활의 연륜이 그리 오래 되지 않고 교회의 중직을 맡지도 않고 있을 때부터 이미 ‘신전인격자로서의 대인관계’가 아예 몸에 배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믿음의 조상’이라는 멋진 별명은 그냥 ‘하나님만 잘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철두철미했던 만큼 자기 주위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 신행일치를 고스란히 나타냈던 까닭에 주어졌던 것이었습니다.

  비록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고는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자기 민족은커녕 아들 하나도 없던, 사실상 외톨이나 다름없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큰 민족의 아버지다운 면모를 매사의 대인관계에서 여지없이 발휘했습니다.
  피붙이라고 하나 있는 조카 롯이 끝까지 말썽만 부리고 문제를 일으켰지만, 그는 끝까지 혈육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었습니다.
  생전 처음 만난 제사장이었지만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천지의 대주재로 높이는 것을 보는 순간 그 멜기세덱이 진짜 하나님의 제사장인 줄로 바로 알아보고 극진히 모셨습니다.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이웃조차 불신자들이었고 주변의 모든 사회가 다 불신권력이 통치하고 있었지만, 그 불신세상으로부터도 티 하나 걸릴 것 없는 깨끗한 처신으로 오히려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격이 남달리 훌륭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의 대신관계(對神關係)가 먼저 제대로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대인관계(對人關係) 역시 그처럼 훌륭하게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어떻게 받들어야 하는지를 아는 신실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세상 사람들 앞에서도 인정받고 칭송 받는 사회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한구석에서 자기 땅 한 평 없이 살던 ‘히브리 사람 아브라함’처럼 오늘날의 우리 역시 ‘나그네’요 ‘우거하는 이방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사람 앞에서 깨끗한’ 참된 신전인격자(神前人格者)는 ‘나’라는 존재가 표도 안 날 것 같은 이 거대한 현대사회 속에서도 그야말로 ‘별’처럼 뚜렷이 돋보이는 생을 살게 됩니다.
  불신자의 눈에는 소자(小子)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대인(大人)이 되고, 세상 앞에서는 무명인(無名人)으로 살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에 그 이름을 남기는 큰 위인(偉人)이 될 수 있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인자를 입고 있는 자녀답게 교우에 대한 사랑과 의리를 지키는 신자, 절대주권자를 경외하는 만큼 오직 하나님만을 지극히 높이는 목사를 참된 주의 사자로 알아보고 존중하는 신자, 언제 어디서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있는 까닭에 불신사회 속에서도 크리스천의 이름을 명예롭게 지키는 신자 - 이처럼 진정한 신전인격자로서 사람 앞에서도 늘 빛처럼 밝고 소금처럼 맛을 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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