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11-17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로새서 3장 15-17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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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11-17
2019′경향의 강단(48)(2019년 11월 17일 / 추수감사주일 대예배)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로새서 3장 15-17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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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로새서 3장 15-17절 / 석기현 담임목사
2019′경향의 강단(48)(2019년 11월 17일 / 추수감사주일 대예배)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로새서 3장 15-17절 / 석기현 담임목사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은 원래 레슬링 선수였지만 시합에서 단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고, 그 후에 시인이 되었지만 시로써도 역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네 가지 사실을 두고 늘 감사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짐승이 아니라 인격과 이성을 갖추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고, 둘째는 야만인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이 있는 문명국 그리스의 자유민으로 태어난 것이며, 셋째는 소크라테스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이었는데, 이것은 여성의 인권이 전혀 존중 받지 못했던 그 시대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여튼 플라톤은 무슨 ‘좋은 일’이 생겨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상황’ 그 자체를 두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기독신자는 구체적인 감사 제목에 있어서는 플라톤과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런 감사의 마음자세는 꼭 가져야 합니다.
  본문에서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매 절마다 명령하고 있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앞의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이라는 말씀으로 이 문단이 시작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거룩함을 입은 자답게’라는 뜻입니다.
  즉 진짜 신자는 신자다운 그 무엇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말인데, 우선 12절 하반절부터 14절까지는 신자가 ‘사람 앞에서 반드시 나타내게 되어 있는 신자다움’이 곧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의 본문 15절 이하 17절까지는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나타내게 되어 있는 신자다움’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참된 기독신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절로 나오게 되어 있는 감사는 과연 무엇입니까?
  이제 2019년 한 해 전체를 두고 큰 감사의 절기로 지키는 오늘 추수감사절에 저는 ‘하나님께로부터 택하심을 입고 그 사랑을 받게 된 성도’가 반드시 감사드려야 할 가장 본질적인 감사 제목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독신자는 교회를 중심으로 평강의 신앙공동체 안에 거하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본문 15절에 “15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의 “평강”이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평강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사람에게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평강이 주어졌습니다.
  즉 십자가의 대속 덕분에 이제 죄의 결과로 생기는 좌절이나 불안감에서 완전히 해방된,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심령의 상태가 바로 ‘그리스도의 평강’인 것입니다.

  “마음”이란 문자적으로 ‘심장’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유대인들은 이 심장을 사람의 의지 작용이 일어나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즉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 향방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 마음을 “그리스도의 평강”“주장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즉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은 이 영적 평강이 이제부터는 신자의 모든 마음 작용, 다시 말해서 모든 판단과 의지를 이끌어가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이미 예수님의 보혈 공로로 용서받고 구원 얻은 사람이다.’ - 이 확신을 가진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세상이 복잡하고 인생이 어렵다 하더라도 그런 성도의 마음에 있는 안심과 평화를 어떻게 빼앗아 갈 수 있겠습니까?
  “내 맘 속에 있는 참된 이 평화는 누구도 앗아갈 수 없네 / 주님은 내 맘에 구주 되시었네 오 주 없인 살 수 없네”라는 복음성가의 가사는 바로 그런 심정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인하여 주어진 심령의 평강 - 이것이 있으면,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감사할 일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끊임없는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누릴 수 있는 것이지만 본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자면 ‘이런 평강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너희를 한 몸으로 부르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의 “한 몸”이란 물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 곧 ‘교회’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구원인으로 부르심을 받고 교회의 한 일원이 된 것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평강’을 함께 나누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얻게 되는 평강이란, 그저 복잡한 세상일을 잊고 조용히 묵상하면서 마음이 잔잔해지는 따위의 ‘수도자의 평안’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나누는 평강이란, 그저 사람 사이에서 모든 불신과 미움을 씻고 분열이나 싸움이 없는 어떤 이상적인 관계를 누리는 따위의 ‘사회적, 정치적 평화’가 아닙니다.
  변명할 길이 전무했던 나의 죄를 무조건 용서받고 피할 길 없었던 무서운 지옥 영벌로부터 자유하게 된 이 놀라운 구원을 확신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평강,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주실 수 있는 이 ‘마음과 영혼의 평강’을 마음껏 누리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그리스도의 평강을 교회를 통해 서로 나누고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삶을 살고 있는 성도에게는,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 항상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는 날마다의 감사 제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바로 그런 평강을 알게 하시고 누리게 해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치 야만인이 아니라 문명국 아테네의 시민이 된 것을 감사했던 플라톤처럼, 저와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의 신민’으로 살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온 지구촌은 자연계의 종말 현상 중에 하나인 공해와 오염으로 점점 더 찌들어가고 이 나라는 갈수록 악화되는 안보 약화와 경제 파탄의 늪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그런 장망성으로부터 완전히 성별시켜 주시는 이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신비한 평안,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완벽한 평화’를 누리고 있으니, 이것만 생각해도 어찌 감사가 터져 나오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교회를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마음껏 누리고 있는 이 ‘그리스도의 평강’을 인하여 진정 뜨거운 감사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신자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16절에 기록하기를 “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가장 특징적인 생활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기서는 그 예배의 두 가지 대표적인 요소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말씀을 성도가 나누는 것’이며 또 하나는 ‘성도의 심령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사도들의 입을 통해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전해졌던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가리킵니다.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는 말은 ‘너희 마음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명령형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신약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예배 중에 구두(口頭)로 전해진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기억하여 심령에 간직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처럼 자기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항상 간직하고 있는 자만이 교회 안에서의 “피차 가르침” 즉 교육이나, “권면” 즉 상담 등의 사역에 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배의 두 번째 요소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통한 찬양이었습니다.
  “시”는 구약의 시편, “찬송”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부르던 찬송, 그리고 “신령한 노래”란 어떤 즉흥적 영감에 따라 부르던 노래라고 구별할 수도 있지만, 꼭 그렇게 차이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하여튼 이런 다양한 형태의 음악을 동원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의 찬양을 드리는 것은 이미 초대교회의 예배에서부터 필수적인 순서였습니다.

  우리는 지, 정, 의를 다 동원하여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그 중에서 말씀을 듣는 것은 지적인 요소가 가장 활발하게 작용되는 순서라 할 수 있습니다.
  예배 중에 선포되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이성적 지각이 가장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이며 그것이 곧 진짜 성령 충만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찬양은 바로 우리의 정, 즉 감정이 동원되는 분야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감정, 감사의 감정이 용암이 분출되듯이 뜨겁게 흘러 넘쳐서 찬양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기도는 우리의 의지 작용이 가장 활발한 예배순서라 하겠습니다.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소원으로 아뢰는 중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예배 시간에 우리의 ‘감정’이 최고조로 작동되는 순간입니다.
  ‘감사’야말로 성도로 하여금 소리 높여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동기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감사’가 없는 찬송이란 그저 저질 수준의 자기 감정분출에 머물 수밖에 없으며, 세속적인 연가나 제 흥에 겨워 부르는 타령과 같은 노래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진정 하나님을 향한 뜨겁고 진실한 감사가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고 그것을 찬양으로 표출하게 되면 그야말로 가장 순수하고도 뜨거운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사인을 해 주면서 이름이 뭐냐고 물어오면 너무 좋아서 거의 까무러칠 지경일 것입니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치하의 말씀을 듣게 되면 아마 평생 그들의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높은 사람이 내게 다가와서 먼저 말을 건네주는 것은 정말 황공무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말씀해 주신다는 것이 정말 보통 일이겠습니까?
  그것도 우리 쪽에서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기만 한데,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이런 죄인에게 먼저 말을 걸어와 주시니 이 얼마나 고맙기 짝이 없는 일입니까?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저와 여러분이 매주일 예배 시간마다 이 신구약 66권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육성과 같은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을 결코 범상히 여길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 편에서 이처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데도 만약 우리 쪽에서 오히려 아무 반응도 없이 무덤덤하게 앉아 있다면 그 얼마나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이겠습니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스승으로 모신 것’을 두고 감사했지만, 그런 감사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권자로 모시고 영원한 아버지로 교제하게 된 것’을 두고 드리는 감사와는 비교조차 될 수 없습니다.
  예배 시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말씀’, 그 사랑의 말씀, 은혜의 말씀, 축복의 말씀이 자신의 심령 속에 풍성히 거하게 될 때마다 절로 넘치게 되는 뜨거운 감사의 반응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써 올려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독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인으로 새롭게 살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17절 말씀에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성도의 감사 생활이란 비단 ‘교회’ 안에서나 ‘예배’ 시간 중에만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항상 나타나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말”을 하는 때든지, 무슨 “일”을 하는 때든지 간에 성도가 감사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우리가 그런 것들을 다 이제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 예수의 이름을 대표하는 자로서’라는 뜻입니다.
  신자 각 사람은 자신의 언행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앞에 나타내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것을 자각하는 신자라면 무슨 말, 무슨 일을 하든지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은 당연합니다.
  즉 자신의 모든 언행 하나하나를 통하여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결과가 나오도록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한다.’는 말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바로 모든 일을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한다.’는 말이 됩니다.
  잘 알다시피 이것이야말로 신자의 생애에 있어서 ‘제일 되는 목적’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실제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말과 행동에도 실수하지 않고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여기 “그를 힘입어”라는 말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말 바로 뒤에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 이름을 위해 사는 것 그것조차도 오직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주실 때에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요 14:13)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도우심을 입어야만 우리는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신자가 경건한 삶을 살고 충성된 봉사를 한다 해도, 그런 중생인으로 불러 주신 분도 예수님이시며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힘주시는 분도 오직 예수님이실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스스로 자랑할 것이나 내세울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저 감사, 감사할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기독신자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변화된 삶 그 자체조차 매일의 감사 제목이 됩니다.
  더 잘 먹게 해 주셔서, 더 많이 벌게 해 주셔서 감사하는 것보다 훨씬 크게, 훨씬 먼저 우리는 내 삶의 근본적인 질이 바뀌게 된 것을 두고 감사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 생각해 보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요 한량없는 은혜입니까?
  나같이 못난 인간이 이제부터는 썩을 양식, 없어질 재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에 쓰이게 되었습니다.
  나같이 악한 죄인이 이제부터는 내 한 목숨 위해 버둥거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높고 귀한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되는 거룩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정말이지 감사, 감사, 또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나 자신의 자질이나 능력만을 본다면 그렇게 살고 싶어도 사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 뻔한데, 놀랍게도 그런 ‘거룩한 도구, 의의 병기’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는 힘까지 주님께서 다 내려 주십니다.
  입에서 기도가 터지고 간증과 전도의 말이 담대히 나오는 것은 나라는 사람 그 자체만 보면 도저히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는데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셔서 보혜사를 통하여 내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증거입니다.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생활을 하면서 산다는 것도 내 처지만 보면 전혀 할 수 없는 일 같은데도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오직 ‘그를 힘입어’ 살고 있는 이런 새 생활 때문에 더더욱 감사가 넘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짐승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플라톤의 감사 제목 중 첫 번째였지만,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서 거듭 난 중생인’이 된 것이야말로 단연 최고의 감사 제목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그처럼 ‘그를 힘입어 나의 나 된 것’을 두고 하나님 아버지께 진심으로 항상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올해는 특히 경제적으로 참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추수감사절의 감사가 조금이라도 약해지거나 아예 감사 대신에 불평 원망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불경기라고 해서 천당 문이 더 좁아졌습니까?
  장기적인 경기 침체라고 해서 십자가 보혈까지 말라서 잘 흐르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혹시 실직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기라도 했다는 것입니까?

  지금 당장 육신이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주신 구원의 평강, 죄와 사망에서 자유하게 된 이 영적 평강이 보장되어 있는 한 우리는 그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주중에 아무리 매상이 형편없다 해도,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여 말씀과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과 진정 인격적으로 교통하는 성도는 뜨거운 감사가 끝없이 솟아오르게 됩니다.
  아무리 돈은 좀 못 번다하더라도, 모든 일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도와주시는 힘으로만 행해 나가면 저와 여러분의 매일 매사는 빠짐없이 감사로만 채워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맞이하게 되는 감사절일수록 오히려 이런 감사, ‘무슨 좋은 것’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저 ‘내 인생에 본질적으로 항상 충만한 감사제목’들 때문에 넘치는 감사를 꼭 드려야 합니다.

  신자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정말이지, 감사할 줄도 모르는 교인이 어떻게 진실한 신자일 리가 있겠습니까?
  주일마다 드려야 할 감사는 고사하고 감사절을 맞이해서도 ‘이번에는 감사할 일이 별로 없다.’는 핑계거리를 둘러댄다면, 솔직히 말해서, 정말 ‘교인 같지도 않은 교인’일 뿐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의나 요청이나 권면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명령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거룩하게 된 사람다운’ 신자라면 예외 없이 나타내야 할 필수적 기본자세이며, 따라서 ‘감사하라’는 말씀은 무슨 선택사양 사항이 아니라 오직 ‘절대명령’일 뿐인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감사하는 것은 ‘세리나 이방인들도’ 할 줄 아는 감사입니다.
  하지만 참된 기독신자의 감사는 ‘항상 감사’이며 ‘무조건 감사’입니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교회를 통해 누리게 하시는 평강을 인하여 늘 감사하며,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신령한 교제를 나누게 됨을 뜨겁게 감사하고, 또한 나의 남은 전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살게 된 것을 가장 크게 감사드림으로써,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이 2019년에 주님께서 예비해 두신 유종지미의 복을 끝까지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