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11-10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말라기 3장 7-18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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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11-10
2019′경향의 강단(47)(2019년 11월 10일 / 주일 대예배)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말라기 3장 7-18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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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말라기 3장 7-18절 / 석기현 담임목사
2019′경향의 강단(47)(2019년 11월 10일 / 주일 대예배)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말라기 3장 7-18절 / 석기현 담임목사
어느 교회의 집사가 기도를 하면서 “주여, 돈 10불이 제 지갑 속에서는 아주 작게 보이는데 어찌하여 헌금접시 속에서는 그렇게도 크게 보이나이까?”라고 했다는 유머가 무슨 미국 잡지에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 교인들에게도 10불 즉 1만 원은 본인이 쓰기에는 정말 별 것 아닌 액수인데 막상 헌금으로 바치려 하면 그토록 하기 어려운 많은 액수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누가 만들어낸 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독신자의 헌금생활에 대한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말입니다.
  헌금이라는 것이 일부 교인에게는 아주 거북하고 부담스럽다는 사실은 그처럼 세속 잡지에 실리는 농담의 재료가 될 만큼 잘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여러 가지 신앙생활 중에서 다른 것들은 다 은혜로운데 유독 헌금만 부담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놓으셨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나 기도나 성도교제나 봉사 등과 꼭 마찬가지로 헌금생활 역시 신자에게는 은혜 받는 수단 중의 하나로 주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성경책에 다른 교훈들과 마찬가지로 헌금에 관한 말씀들을 신구약 곳곳에 정말 많이 기록해 두신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펼쳐 놓고 있는 말라기의 본문은, 신자의 헌금생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강하게 명령하시고 간절하게 권고하신 말씀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주신 말씀을 따라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독신자에게 어떻게 헌금생활을 하라고 명하시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독신자는 자신이 얻게 된 재물이 원래 다 하나님의 것인 줄 알고 당연한 마음으로 헌금을 바쳐야 합니다.

  8절과 9절에 “8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헌금생활을 어려워하는 교인들의 대표적인 오판은 자기가 벌어들인 재물은 다 자기 것인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처럼 생각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그야말로 따끔한 책망을 하셨습니다.

  우선 여기서 “십일조”가 무엇인지는 다시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봉헌물”이란 그 십일조 외에 또 따로 드렸던 서원제, 낙헌제, 거제물 등을 가리키는데, 이것들은 주로 제사장들과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을 위한 양식으로, 또한 성전 관리를 위한 상비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십일조와 봉헌물을 가리켜 바로 “하나님의 것”, “나의 것”이라고 딱 잘라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만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밖에 다른 헌금 역시 원래는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못 박으시는 말씀이 바로 본문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마치 자기 것처럼 여기고 제멋대로 쓰는 사람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공금을 개인 용도로 함부로 쓰고 남의 물건을 제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도둑’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도 똑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8절과 9절 이 단 두 절 속에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봉헌물을 자기 것처럼 여기는 행위를 가리켜 “도둑질”이라고, 무려 네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도둑질을 잘해서 소위 ‘대도(大盜)’라고 불리며 유명해진 사람도 있지만, 감히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간 큰 도둑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간이 큰지 그런 엄청난 도둑질을 해 놓고도 오히려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라고, 하나님 앞에서 시치미를 뚝 떼면서 오리발까지 내미는 것입니다.

  보통 헌금을 두고 ‘자기 자신의 것’ 중에서 일부를 떼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크나큰 착각입니다.
  세상의 무슨 자선단체에 기부금을 내는 따위의 경우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신자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은 ‘내 것 중에 일부를 하나님께 나누어 드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원래 하나님께 속한 것을 바치는 행위, 즉 당연히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것을 돌려드리는 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헌금생활이란 ‘전부 내 것인데 그 중 얼마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될 수 없으며, 또한 ‘십분지 구는 내 것이고 십분지 일은 하나님의 것이니 그것만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내게 허락해 주신 재물 전부가 다 원래 하나님께 속한 것인 줄 알고 그 중에 특별히 정하신 십일조와 봉헌물을 당연히 바치는 행위가 곧 온전한 헌금생활인 것입니다.

  A. A. 하이디라는 백만장자가 한 때 사업에 실패해서 십만 달러의 빚을 지게 된 후에 그전까지는 하지 않던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부하 직원들이 그에게 “은행 부채가 있는 사람이 그 빚부터 갚고 나서 십일조를 해야 윤리적으로도 정당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하이디는 대답하기를 “나는 빚을 갚는 것보다는 도둑질한 것부터 먼저 갚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놀란 직원들이 “사장님이 무슨 도둑질을 했다는 말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바로 이 말라기 3장을 펴 놓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십일조를 훔친 도둑이기 때문에 이것부터 상환하고 나서 은행 빚을 갚아야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봉급을 받을 때 나라에 바치는 세금을 먼저 공제당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러므로 공제당할 세금까지 포함된 전체 봉급 액수를 가지고 한 달의 가계부 예산을 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세금은 안 떼는 줄로 알고 그렇게 생활비를 잡아 놓았는데 어떻게 날 보고 세금을 내라고 합니까?’ 하고 세무서에 항의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바보 취급을 당할 것이고, 끝까지 세금을 내지 않으면 나라의 돈을 훔쳐 먹은 탈세의 죄로 쇠고랑을 차게 될 것입니다.
  세금은 이미 본인의 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마치 내 돈인 것처럼 계산했다가는 당연히 가계부에 차질이 생길 것이고, 그런 것을 마치 내 돈처럼 마음대로 썼다가는 누가 보아도 벌을 받아 마땅한 도둑이 될 뿐인 것입니다.

  헌금생활, 특별히 십일조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재물이 원래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 사실만 일단 확실히 해 두고 나면 십일조든지 다른 무슨 헌금이든지 결코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반면에 십일조까지 다 포함해서 생활비를 미리 짜 두었다면 나중에 차질이 생기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남의 돈, 아니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마치 내 것인 양 미리 잡아두고 있으니 자연히 바보의 계산이 되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철면피의 범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재물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줄을 깨닫고, 어렵게 기부하는 자세가 아니라 십일조를 비롯한 모든 봉헌물을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당연한 마음으로 바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신자는 십일조가 하나님께 바쳐야 할 헌금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임을 기억하면서 온전히 바쳐야 합니다.

  본문 10절 상반절에 “10a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헌금생활에서 시험을 받는 교인들이 가지는 두 번째 착각은 ‘십일조는 실천하기 제일 어려운 큰 헌금’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십일조야말로 헌금 중에서 가장 작다고 할 만큼 기본적인 헌금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우선 “온전한”이란 수식어를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다른 헌금과는 달리 유독 십일조에만 이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 “온전한 십일조”란 ‘속임이 없는 정확한 십분지 일의 헌금’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자기 수입의 십분지 일의 액수가 얼마가 되는지를 계산기가 없다고 알지 못할 사람은 없지만, 정확하게 십분지 일을 다 내는지 아닌지는 오로지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악한 본성은 여기에서도 또 한 번 발휘되어서, 그 액수를 적당히 속이는 일이 이스라엘 백성 중 그래도 십일조생활을 한다는 사람 가운데서 빈번히 저질러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이야 쉽게 속일 수 있었겠지만, 하나님께야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의 지극히 얕은 수를 훤히 내려다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신지라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라’고, 또 한 번 우리 양심의 정곡을 찌르고 계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십일조 봉투에 담아 바쳐도 그것이 ‘온전하지’ 않을 때에는 이미 ‘십일조’가 아니라 ‘이십일조’든지 ‘삼십일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직 ‘온전한 십일조’만이 십일조를 바치는 유일한 방법이며 반드시 지켜야 할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 뒤에 이어 하시는 말씀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그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창고”란 물론 개인 집의 창고가 아니라 성전의 창고를 가리킵니다.
  ‘너희들이 십일조만 바치면 나의 집에 필요한 물질이 풍성하게 넘치겠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바쳐야 나의 집에 꼭 있어야 할 양식이 채워지겠다.’라고 실로 우리의 마음을 짠하게 만드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양식’이란 사람의 생활을 위한 필수품 중에 정말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치품목이 될 수 없으며 무슨 재산목록이나 투자가치가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사람이 생존하기 위에서는 세상없어도 반드시 있어야 할 첫째요 필수적인 것이 곧 양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최소한 십일조는 바쳐야 당신의 성전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이 유지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밥을 차려서 먹여 주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에게 매일 삼 세끼 봉양하는 것이 무슨 특별히 칭찬받을 만한 수고가 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로 무슨 ‘장한 어머니 상’이나 ‘효성상’ 따위를 받게 될 리가 만무합니다.
  반면에 자식에게나 부모에게 양식조차 제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온 세상 사람이 다 손가락질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더 좋은 옷은 못해 입히고 더 좋은 집에 살게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양식만큼은 그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제공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의무요 상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당신의 집’에 그와 같은 ‘기본 양식’이 있게 하기 위하여 십일조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십일조는 교회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정말이지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헌금인 것입니다.
  사실 모든 교인들이 십일조생활만 하면 아무리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경상비 유지는 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 헌법에 세례교인 15명이 모이면 정식으로 교회를 창립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도, 그 15명이 십일조만 드리면 그것만 가지고도 교회가 자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헌금은 혹 못할지라도 십일조만큼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처럼 그 십일조를 드려야만 ‘하나님의 집이 적어도 삼 세끼는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신자의 헌금생활이 성숙하여 최고 수준에 올랐을 때 할 수 있게 되는 ‘큰 헌금’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진짜 큰 헌금, 즉 절기헌금이나 건축헌금 혹은 특별선교헌금 등을 드리기에 앞서서 가장 먼저 배우고 실천해야 할 지극히 ‘작은 헌금’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코 십일조를 어려운 헌금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집에 꼭 있어야 할 양식을 채우는 이 기본적인 십일조를 온전하게 바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독신자는 십일조와 헌물을 바침으로써 더 큰 복을 받게 되는 것을 체험하면서 기쁘게 바쳐야 합니다.

  10절 하반절 이하 15절에 “10b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3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4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15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헌금생활을 어려워하는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큰 오산은 ‘헌금을 내면 나는 그만큼 가난해진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깨끗이 없애버려야 할 착각이요 선입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헌금을 기쁨으로 바치는 성도에게 정말 큰 축복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과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대조적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 가운데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예수 잘 믿는다고 해 봤자 말짱 헛일이고 성경 말씀을 순종해 보았자 아무 득 될 것 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한술 더 떠서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라는 소리까지 덧붙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안 믿고 교만한 사람, 제멋대로 악을 행하고 사는 사람, 하나님이 있나 없나 하고 의심하는 사람, 이런 불신자들이 얼마든지 복 받고 오히려 운수 대통하더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일조와 봉헌물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안 지키고 사는 불신자들이 신자들보다 얼마든지 더 잘 살고 있는데...’라는 불평인 것입니다.

  입이 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어떻게 들리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불평을 가리켜 실로 “완악한 말”이며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이라고 진노하셨습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당신을 잘 섬기는 자를 더 가난하게 만드실 수가 있겠습니까?
  어찌 사람이 하나님 믿는다 하면서도 물질 문제에 가서는 그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그처럼 하나님을 치사한 존재처럼 함부로 격하시키는 말을 겁도 없이 내뱉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헌금하라고 명하신 것은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짜로 축복하시기 위함일 뿐입니다.
  그 복은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는” “메뚜기”를 막아 주시는 복, 즉 이미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재물을 순식간에 잃을 수 있는 큰 재난으로부터 미리 보호해 주시는 복으로 나타납니다.
  그 복은 “땅이 아름다워지는” 복, 즉 우리가 지금 종사하고 있는 직장생활이나 사업이 더욱 번성하게 되는 복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 복은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는” 복, 즉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참으로 부러워할만한 만사형통의 복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여튼 어떤 과정으로든지, 당신께 온전한 헌금을 바치는 자는 그에 따른 온갖 복들을 반드시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확고하게 단언하셨습니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까지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사실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감히 ‘시험’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온전한 십일조생활을 통해서 어디 한번 나를 테스트해 보아라.’고까지 말씀하시니, 십일조생활에 따라오는 축복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보다 더 확실히 보증해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어느 청년이 목사에게 찾아와서 “하나님께서 저를 크게 축복해 주시면 제가 꼭 십일조를 바치겠으니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렇게 기도해 주었고 그 청년은 큰 물질의 복을 받으며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에 그 청년이 다시 목사를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목사님, 제 십일조 액수가 너무 많게 되어 바치기 어렵습니다.
  제가 더 이상 그 서약에 매이지 않기를 원한다고 저 대신 좀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즉시 기도하기를 “주님, 이 청년이 십일조 액수가 너무 많아져서 그 서약을 지킬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이 청년의 수입을 그가 십일조를 제일 처음으로 시작했을 때의 수준으로 다시 낮추어 주셔서 십일조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목사의 기도를 중단시키면서,“아이구, 목사님. 그렇게 기도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십일조생활을 계속할 테니 제발 하나님께서 제게 계속해서 축복해 달라고만 기도해 주세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신자라는 사람이 ‘나는 십일조를 내면 못 산다.’라는 말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세금을 내는 바람에 내가 가난하게 되었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세금을 내게 된다면 그만큼 번 수입이 있다는 것은 뻔한 사실인데, 어떻게 그처럼 마음껏 돈을 벌 수 있는 사회를 보장해 준 국가의 공로는 완전히 망각하면서 그런 궤변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십일조를 바쳐야 할 의무가 생겼다면, 그만큼 벌써 받아 놓은 물질의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건강을 지켜 주시고 직장을 잃지 않게 해 주시고 사업을 유지하게 해 주신 복이 없었더라면, 아예 십일조를 드릴 수입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억만장자 록펠러는 “만일 내가 가난한 소년이었을 때에 십일조 드리는 것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지금 수백만 달러의 십일조를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물론이고 모든 종류의 헌금생활은 우리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우리의 물질생활에서 복이 계속 이어지고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확고부동한 보장이 됨을 깨닫고 항상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의 서두인 7절을 보면 “7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신 말씀이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말씀 즉 8절 이하에 이어진 십일조와 봉헌물의 교훈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예배생활, 말씀생활, 기도생활 등을 통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헌금생활을 통해서도 역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로 돌아오시는’ 이 친밀한 교제를 더 깊이 나눌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이제 16절부터 18절에 결론적으로 기록하기를 “16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17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18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봉헌물’을 바치는 성도를 가리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 “나의 특별한 소유”라고 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온전한 헌금생활 역시 하나님과 진정한 ‘인격적 교제’를 나누기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시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 ‘하나님을 헌금생활을 통해 구체적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은 아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악인과 오십보백보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이 교제하는 이 고귀한 신앙생활에 왜 헌금이 문제가 되나?’라고, 헌금생활을 무슨 말하기 부끄러운 일처럼 여기는 못난 꼴을 제발 벗어버려야 합니다.
  애인을 위해 기꺼이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비싼 선물을 사는 것이 저질적인 일입니까?
  여러분이 어렵게 번 그 귀한 돈을 자신의 부모와 아들딸을 위해 사용하는 일이 낯부끄러운 일, 언급하기 어색한 일입니까?
  오히려 그처럼 기쁜 마음으로 돈을 쓰는 일을 통해서 그런 관계들이 더욱 뜨거워지고 긴밀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신자와의 관계 역시 우리의 헌금생활이 올바로 정립될 때 더욱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헌금은 내 것 중에서 아깝게 떼어 바치는 일이 결코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하나님께 도로 바치는 일일 뿐입니다.
  무슨 대단히 어렵고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집에 양식 정도를 채우는 가장 작고 기본적인 헌금이 십일조입니다.
  헌금을 하면 못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지독한 착각에 불과하며, 오히려 헌금생활이야말로 우리의 막힌 물질 축복의 문을 활짝 여는 길이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보증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고 하신 말씀은 정말 우리 양심의 정곡을 찌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봉헌물’이야말로 ‘당신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이 명령에 따라 당연히 드리는 자세, 온전한 액수,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집의 창고’를 채우는 헌금생활을 준행함으로써,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며 존중하는 신전인격자’임을 나타내고 또한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는 복’까지 풍성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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