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11-03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 신명기 12장 1-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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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11-03
2019′경향의 강단(46)(2019년 11월 3일 / 주일 대예배)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 신명기 12장 1-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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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

신명기 12장 1-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2019′경향의 강단(46)(2019년 11월 3일 / 주일 대예배)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 신명기 12장 1-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예전에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던 멜 깁슨이 “나는 신은 믿지만 교회는 믿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함으로써 큰 물의를 빚은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은 원래 저 유명한 마하트마 간디가 했던 것입니다.
  간디는 힌두교도였는데 왜 자신이 믿는다는 신을 하필이면 기독교의 ‘교회’와 연관시켜서 그런 말을 했는지 그 이유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이 말은 교회를 외부에서 욕하거나 혹은 내부에서 스스로 깎아내리는 비판자들에게 공히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은 믿지만 교회는 믿지 않는다.’라는 말이 ‘교회라는 조직이 오히려 참된 신앙에는 가장 큰 방해물이 된다.’는 의미를 자기네 딴에는 아주 멋있게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개인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와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 이 둘 사이의 필연적인 연관관계를 부인하고, 오히려 교회야말로 참된 신앙을 찾는 길에 최대의 걸림돌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광야행군이 끝나고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둔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아주 특별한 지시를 하나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여러 번 강조되고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일단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오직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예배드리라고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예배처소, 한 성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지켜야 한다고 엄중히 명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을 따라서 우리 개혁주의 신자가 지키는 생활원리 중에 하나가 바로 ‘교회중심’입니다.
  이 시대의 불신자들이나 이단적인 기독교인들이 그토록 입을 모아 비난과 욕을 퍼붓고 있는 교회를, 저와 여러분은 기독신자가 참된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결코 떠나서는 안 될 ‘집’이요 ‘산성’이요 ‘방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 개혁주의 신자는 그렇게 생각합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처럼 가나안 땅에서 오직 ‘한 곳’을 택해 주시고 반드시 그곳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명령하셨습니까?
  이 시간 저는 왜 참된 개혁주의 기독신자는 그처럼 안팎으로 비난을 받는 ‘교회’를 중심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지 그 이유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교회중심으로 살아야만 우상숭배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고 ‘바른 신앙’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1절부터 7절에 기록하기를 “1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2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3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 4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5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6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7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차지하게 하신 땅”이란 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가나안 입성이 이미 이루어진 약속이나 다름없이 확실하다는 의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얻게 하실 땅에서 그들이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라고 했으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그 명령은 우선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 즉 가나안 족속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 즉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던 장소들을 전부 다 “마땅히 파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섬기는 곳”이란 말은 바로 ‘예배 장소’라는 뜻인데, 오늘 본문 전체에 걸쳐서 핵심 단어이자 주요 관건이 됩니다.
  그처럼 우상숭배에 사용되던 예배 장소들을 파괴함으로써 “그(우상의)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종교’와 그 ‘예배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바른 신앙을 지키려면 필연적으로 그 곳에 만연해 있던 우상숭배를 깨끗이 진멸시켜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일이 곧 그 우상들을 숭배하던 장소들을 척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꼭 예배를 드려야 할 새로운 장소 한 곳을 지정해 주셨습니다.
  4절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라는 말은 ‘가나안 족속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던 방식으로 하지 말고’라는 뜻입니다.
  가나안의 우상숭배자들은 그들의 예배처소를 순전히 자기네에게 편리한 곳에다 임의로 만들었습니다.
  가까운 뒷동산 즉 “높은 산”이나 “작은 산”에다가 “제단”을 쌓는다든지, 마을 입구에 있는 “푸른 나무 아래”“주상” 즉 돌기둥 같은 것을 하나 세워 놓는다든지, 자기가 농사를 짓는 밭 어귀에다가 “아세라 상” 즉 풍요를 기원하는 여신의 목상을 하나 세워 둔다든지, 혹은 그저 집안 선반 위에 “조각한 신상” 즉 가정의 수호신 하나만 올려놓아도 바로 그곳이 곧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 즉 우상숭배자들의 예배 장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는 “그처럼 행하지 말고” 그 대신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만을 예배 장소로 삼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두신다’는 뜻은 바로 그곳에 와야만 참 하나님을 뵈올 수 있다는 뜻이며,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이란 말은 사람이 자기 멋대로 정한 장소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편에서 특별히 지정해 주신 장소임을 강조합니다.
  계속 이어지는 “그 계실 곳”이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 지정한 장소에 항상 임재하셔서 그 곳을 찾아오는 예배자를 만나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한 곳’으로 택해 주신 예배 장소는 소위 ‘중앙 성소의 단일화’라는 개념으로 요약되는데, 훗날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후에 실로에 회막을 세운 것이라든지 더 나중에 가서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함으로써 실현되었습니다.
  하여튼 어떤 장소이든지 간에 그 요점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장소’라야만 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뚜렷이 강조하고 있는 대로, 바로 그 정해진 한 장소에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찾아 나아가서” 예배를 드려야만 했고, 그 각종 제물도 반드시 “그리로 가져다가” 바쳐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민족처럼 자기의 편리에만 따라서 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장소에 모여서 오직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대로 예배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우상들과는 전혀 다른,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의 성호를 정확하게 알고 그 여호와의 임재를 항상 체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자기의 이름을 두시고’ ‘항상 계시는’ 유일한 ‘그 곳’으로 지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진정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성도는 반드시 그리로 ‘찾아 나와서’ 그 성호에 영광을 돌리고, 또한 예물을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면서’ 그곳에 임재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만 합니다.
  한마디로 교회에 나아오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신령하고도 체험적인 교제를 제대로 누릴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믿는 것’은 아주 고상해 보이고, 반면에 ‘교회에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은 참된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망언입니까?
  자기 스스로 끙끙 앓으면서 도를 닦으면 참 신을 찾을 수 있고, 반면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순수한 신앙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제아무리 지혜롭고 스스로 선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신을 찾으려 하면 여지없이 ‘자기에게 편리한 신’만 찾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학문과 일치하는 신, 자기 돈벌이에 도움이 되는 신, 자기 자식 교육에 유익한 신, 자기 여가선용에 편리한 신만을 찾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신은 망원경 속에 보이는 우주에 그 ‘제단’을 두게 되고, 회사나 공장 입구에 그 ‘주상’을 세워 놓게 되며, 혹은 바로 자기 마음속에 ‘스스로 조각한 신상’ 하나를 갖다 놓고 섬기는 ‘현대판 우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처럼 사람의 눈으로 찾아서 발견되거나 사람의 상상력의 결과로 빚어지게 되는 신이 어떻게 참 신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진짜 신이라면 애당초 사람이라는 존재와는 상관없이 영원 전부터 자존하고 계시는 신이어야 마땅하고, 바로 그 사실을 신의 자기계시를 통하여 스스로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지상교회의 ‘3표식’ 중 제일 첫째 표식인 ‘말씀 선포’를 통해 오늘도 행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직 ‘교회중심’으로 살아야 ‘성경중심’이 될 수 있고, 그처럼 ‘성경중심’의 삶이 되어야 진정 ‘하나님중심’의 바른 신앙을 찾고 깨닫고 믿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 집에 앉아서 자기 혼자 설교하고 자기 스스로 은혜를 받겠다는 것입니까?
  오직 교회중심으로 살아야만 우리를 노리는 온갖 우상의 미혹과 이단의 사설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항상 계신다고 일러 주신 곳, 만나자고 지정해 주신 ‘그 곳’인 교회에 더욱 부지런히 모이기를 힘씀으로써 이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바른 진리를 깨닫는 참된 신앙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중심으로 살아야만 육신적 방종에 빠지지 않고 ‘충성된 생활’을 지킬 수 있습니다.

  본문 8절 이하 12절에 “8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9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10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주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너희 주위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를 평안히 거주하게 하실 때에 11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12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모세가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라는 말은 지금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광야의 신세대’ 바로 앞에 살았던 ‘출애굽의 구세대’ 이스라엘 백성이 저질렀던 치명적인 잘못을 되새기는 말입니다.
  물론 그 구세대는 바로 그 죄로 인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광야 40년 생활 중에 다 죽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우리는 여기서 그랬지만’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고, 못난 부모 세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각기 소견대로” 즉 ‘제멋대로’ 행동했던 과오를 반복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신세대가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지만” 그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입성하게 되면 곧 누리게 될 복스러운 생활을 가리켜 “안식과 기업”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안주할 땅을 찾아 방황할 필요도 없고, 대적과 싸워야 할 위험도 없이 “평안히 거주하는” 복, 즉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또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찾기 어렵던 광야와는 달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안정된 ‘기업’을 통하여 더 이상 결핍될 것이 없는 물질적 풍요의 복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안식’과 ‘기업’을 누리며 ‘평안히’ 살게 될 가나안 땅인지라 특별히 주의해야 할 사실이 있었습니다.
  바로 앞의 10절 하반절에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를 평안히 거주하게 하실 때에”라고 가나안 땅에서 육신적으로 복을 받고 잘 살게 될 것을 말씀해 주신 직후에 곧 이어지는 11절에서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라고 또다시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처럼 ‘안식과 기업’을 누리고 있는 그 자리가 그들의 생활 중심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추수를 해서 곡식을 거두고 짐승을 잡아 고기를 얻었으면 그것을 가지고 바로 그 자리, 즉 자기 집 안, 자기 동네 안에서 그대로 잔치를 벌이지 말고, 반드시 그 음식들을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모두 가지고 가야” 한다고 엄명을 내리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서 육신적으로 좋은 것들을 마음껏 누리게 해 주시는 목적은 그것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 자기네끼리만 즐기며 살게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그 모든 축복의 소산물을 ‘그 곳’ 즉 예배 장소로 가지고 와서 “번제”“희생”“십일조”“거제”“서원물”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 각종 예물을 바치면서 예배를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안식’은 그저 놀고 즐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더욱 부지런히 하나님 앞에 모이라고 주어진 것이요, 그들에게 주어진 ‘기업’은 그저 자기만을 위해 모으고 소비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제단에 더욱 풍성히 바치라고 허락하신 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까 7절도 다시 보시면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얻은 물질을 가지고 그것만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은 오로지 육신적 향락의 죄가 되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갖다 바치면서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할 줄 아는 것은 오직 참된 신자만 예배를 통해 체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은혜입니다.
  가나안 정착은 안식을 주는 동시에 게으름의 위험이 도사리는 것이며 부요를 보장해 주는 동시에 방종으로 흐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처럼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으로 그 받은 축복의 소산을 가지고 나와서 “자녀”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레위인”들과 같이 기쁨을 나눔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가정생활과 사회생활 역시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섬기는 충성의 수단으로 선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중심으로 살지 않고 자기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구세대가 저질렀던 잘못, 즉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결국 종교를 자기 원하는 대로 이용해 먹자는 심보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거부하면서 교인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참으로 무례하고 패역하기 짝이 없는 신성모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자기 소견’을 제일 앞세우게 되는 분야가 바로 예배생활과 헌금생활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기가 누리는 육신적인 편안함에 방해가 되는 주일 오후의 행사나 주일 밤 예배, 주중의 수요예배와 금요기도회 시간들은 아주 꺼려하면서 그저 자기 편리에 맞는 주일 오전 예배시간 하나만 겨우 선택합니다.
  자기가 마음껏 돈을 쓰면서 즐기고 싶은 유흥에 지장을 주는 헌금이 늘 마음에 시험거리가 되어서, 그저 간신히 십일조만 하든지, 십일조 한다고 하면서도 속여서 하든지, 아니면 아예 십일조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그저 ‘자기 소견에는’ 그것을 합리화하는 핑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런 ‘자기중심’이 아니라 ‘교회중심’으로 살아야만 그와 같은 나태와 방종에 빠지지 않고 정말 신실하고 충성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학교를 빼 먹은 학생이 집에 앉아서 더 열심히 공부를 할 리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고 집안에 앉아 있으면, 기껏해야 텔레비전이나 보든지 낮잠을 자든지 하는 게으름에 빠지거나 혹은 온갖 악한 유혹에 이끌릴 뿐이지, 혼자서 텔레비전 방송으로 더 경건하고 뜨겁게 예배드린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기가 소속된 부대에서 탈영한 군인이 어떻게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지키고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를 통하여 헌금생활을 비롯한 신자로서의 여러 가지 선한 봉사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도 개인적으로 더 많이 희생하고 더 자발적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겠습니까?
  기독신자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하는 일보다 사회에서 직접 해야 할 선행이 더 많다고 하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망언일 뿐입니다.

  신자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우리의 생존 의의 자체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 한 가지에만 있습니다.
  그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단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 곳’으로 가지고 나와서 바치면서 시작해야 할 뿐입니다.
  혼자 집안에서 ‘자기 소견’을 따라 제아무리 잘하려 한다 해도 필연적으로 안락과 방종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중심으로 사는 것은 결코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속에 있는 고질적인 나태와 불충의 본성을 이겨내게 해 주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고, 자신의 가정생활과 사회생활까지도 늘 교회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즐겁게 바치며 충성하는 일에 선용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13절과 14절에서 결론적으로 “13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14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라”는 것은 신앙생활을 자기 편리한 대로,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뜻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오직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방법을 따라서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만 할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1절 서두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라고 선포한 대로 신자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의 산물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과 필연성과 중요성은 교회를 함부로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어떤 교권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 결코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창립하심으로써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신앙의 방해물이 될 수 없고 오직 신앙고백자들의 집결지, 신앙진리의 사수지, 신앙생활의 중심지일 뿐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 있는 개인 신자, 개인 목사도 실족하고 죄를 짓는 일이 분명히 많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 전체를 함부로 비난하고 거부하고 모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대통령이 잘못한다고 무정부주의자가 되려는 것이나, 국민 중에 범죄자들이 있다고 해서 자기 조국 전체를 부인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두말할 것 없이 매국노이며 반역자가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아무리 교회를 비난하는 말들이 그럴 듯하게 들려도 그처럼 ‘모이기를 폐하는 자’의 소리는 여지없는 사탄의 선동이요 미혹일 뿐인 것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참된 진리를 찾는 데에 방해물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교회가 없으면 참된 하나님중심의 신앙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해집니다.
  교회가 어떻게 개인 신앙의 순결을 저해하는 단체가 된다는 말입니까?
  교회가 없으면 온갖 향락들이 유혹하는 인생살이에서 우리의 생활을 거룩하게 지키고 충성스럽게 자극할 길이 원천적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출한 자녀가 부모를 공경할 수 없고 온갖 신변의 위험과 사회악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 동안 온갖 우상숭배 사상과 불신문화에 둘러싸여 살다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성호만 높이고 찬송하는 이 교회에 모이게 될 때 여러분은 정말 행복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교회는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을 저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이 거룩하고도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친히 만나 주시마고 약속하시며 기다려 주시는, 이 지상의 유일한 ‘하나님께서 계신 그 곳’이기 때문입니다.
  매일같이 사는 걱정, 노동의 피곤, 인간관계의 복잡한 것에 찌들려 살다가, 이 성전의 문지방을 넘고 들어오는 순간 성도들을 만나고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길 때 정말 영육 간의 안식과 평안에 휩싸이게 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이 교회는 악인과 오만한 자들이 모인 자리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나님 앞에서 모여 즐거운 잔치를 하는 자리이며 성도들이 한 주간 동안 받았던 축복의 열매를 제물로 가져 와서 ‘성전의 레위인’들과 함께 기쁨과 감사를 나누는, 이 지상의 유일한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체험도 없이 교회에 몸만 출석하는 교인은 정말 불쌍한 자들일 뿐이며, 그런 은혜도 전혀 모르면서 교회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람들은 실로 어리석은 자들일 뿐입니다.
  바른 신자라면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인 교회중심의 신앙생활, ‘여호와께서 친히 택하시고 항상 계시는 그 곳’에서 참 신이신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선한 일에 함께 봉사함으로써 더욱 신실하고도 충성스러운 개혁주의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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