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10-27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장 14-26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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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10-20
2019′경향의 강단(45)(2019년 10월 27일 / 종교개혁기념주일 대예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장 14-26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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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장 14-26절 / 석기현 담임목사
2019′경향의 강단(45)(2019년 10월 27일 / 종교개혁기념주일 대예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장 14-26절 / 석기현 담임목사
‘천주교와 기독교가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을 하는 교인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런 질문의 내면에는 ‘같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걸고 있는데 굳이 천주교를 가리켜 다른 종교라고 말할 필요가 무엇인가? 그냥 서로 조금씩만 이해해 주고 화해해서 하나의 종교로 통일하는 것이 세상사람 앞에서 모양새가 훨씬 좋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깔려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천주교는 명백한 ‘이단’입니다.
  만약 천주교가 이단이 아니라면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종교개혁기념주일’이라는 자체부터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단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단정하면서 그들과 분리되어 나왔던 종교개혁자들이야말로 멀쩡한 기독교를 둘로 나눈, 천하의 나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천주교는 ‘하나님’과 ‘예수님’, ‘십자가’와 ‘구원’ 등 몇 가지 주요 명칭과 단어만 같이 사용하고 있을 뿐이지, 신학적으로 보면 거의 모든 면에서 기독교와 완전히 다릅니다.
  예를 들자면, 신론(神論)에서는 기독교가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는 반면에 천주교는 ‘성모 마리아’를 ‘제4위 하나님’처럼 추가하고, 계시론(啓示論)에서는 기독교가 ‘신구약 66권’만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천주교에서는 ‘9권의 위경’을 첨부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기독교와 천주교의 다른 점을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정말 끝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구원론(救援論)에서 나타납니다.
  기독교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입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따르는 반면 천주교는 ‘선행의 공로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이행득구’의 교리를 주장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 차이에 있었으니만큼, 이 교리가 다른 이상 기독교와 천주교는 여전히 ‘서로 다른 종교’인 것입니다.

  이 교리를 두고 논쟁을 할 때 천주교 쪽에서 그야말로 ‘전가의 보도’처럼 들고 나오는 성경 구절이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성경 곳곳에 ‘이신칭의’의 교리가 정말 무수히 등장하고 있지만, 신구약 전체에서 ‘이행득구’ 교리를 뒷받침해 주는 듯이 보이는 딱 한 군데가 바로 이 야고보서 2장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14절의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는 말씀을 보면, 일견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천주교의 주장에 반박할 여지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우선 우리가 확실히 믿어야 할 것은 성경의 원저자 되신 성령께서 한 성경책 속에 서로 모순되는 말씀을 하실 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신구약 전체의 수많은 구절들을 통하여 ‘이신칭의’를 분명히 선포하신 성령님이시니 유일하게 마치 ‘이행득구’를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딱 하나의 이 구절 역시 실제로는 결코 ‘이행득구’를 가르치는 말씀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는 이 말씀의 참 뜻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종교개혁 502주년 기념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저는 이 본문이 결코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이행득구’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 개혁주의 기독교가 따르는 ‘신행일치’의 교리를 강조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이유는 ‘행함이 없음’은 곧 ‘참된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15절부터 19절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먼저 15절부터 17절의 말씀은 행함이 없이 ‘아름다운 말’만으로는 ‘믿음이 있음’에 대한 증거가 결코 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16절에 나타난 “평안히 가라”는 말은 유대인의 상용 인사말입니다.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는 말은 수동태로 해석하면, ‘나는 너를 도와줄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라.’는 뜻이 됩니다.
  혹은 중간태로 해석해서 ‘네 스스로 노력해서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고 배부르게 하라.’는 뜻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어쨌든 이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는 말은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을 앞에 두고 그를 돕는 일을 남에게 미루든지 아니면 그 사람 자신이 게으른 탓에 스스로 사서 하는 고생이라고 야단치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이처럼 상투적이고 체면치레에 불과한 미사여구만을 가지고 신자 행세를 하려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런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이 ‘죽은 믿음’이란 표현에 우리가 유의해야 합니다.
  ‘죽은 믿음’이니 이것은 ‘어떤 다른 종류의 믿음’이 결코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요 13:34)을 지키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초대교회의 신실한 신자들은 이웃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습니다(행 6:2-4, 딤전 5:9-10). 그러므로 믿음의 당연한 열매인 선행이 전혀 따르지 않는 믿음이란 곧 ‘죽은 믿음’이며, 다른 말로 하자면 ‘없는 믿음’ 즉 결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어지는 18절과 19절은 행함이 없이 그저 ‘하나님에 대한 지식적인 인식’만 가지고서 자신의 ‘믿음 있음’을 증명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 19절의 “귀신들도 믿고”라는 말은, 귀신들도 기독신자와 같은, 혹은 비슷한 ‘어떤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귀신들도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즉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알고는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귀신병 들린 사람들을 고칠 때 자주 나타났던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라는 이른바 ‘쉐마’는, 유대인이라면 어릴 때부터 아침저녁으로 반복 암송하는 요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선생은 그의 수신자인 유대인 기독신자들을 향해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단순한 지식적 자각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구원에 이르는 참된 신앙을 소유했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지적 인식은 귀신의 것과 비교해서 전혀 나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참된 믿음이란 결코 불가시적인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18절의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처럼 가시적인 행위로써 증명될 수 있는 구체적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두 가지 예를 통해서 성령께서 강조하시고자 하는 바는 너무나 명백합니다.
  그것은 곧 행함이 결여된 상태에서 그저 좋은 말만으로, 혹은 지식적인 인식만으로는 자신의 ‘믿음 있음’을 결코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처럼 증명될 수 없는 믿음을 가리켜 아까 14절 하반절에서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기 “그 믿음”이란 ‘such faith’(그런 믿음)라고 일부 영어 성경에서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 믿음 같지도 않은 믿음’, ‘그런 믿음이라고 불릴 수도 없는 죽은 믿음’이라는 뉘앙스가 강하게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이처럼 ‘행함 없음’은 곧 ‘죽은 믿음’을 의미하며, ‘믿음이 없으니 따라서 구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 본문의 진정한 논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을 통해 알고 있습니까?
  ‘감사, 은혜, 축복’ - 혹시 이런 거룩해 보이는 단어들이 내 입에서 나오는 것만을 두고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고 성급히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점잖고 멋진 말이야 세상의 예의 바른 불신자들도 할 줄 압니다.
  어려운 성도를 보면서도 구제의 손길을 내어 줄 줄은 모르고 그저 “믿음으로 살아야지요.”라는 말 한 마디 해 주는 것으로만 자기 할 일 다 한 것이라고 치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교인은 불신사회에서 착하다는 소리 듣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못한 사람입니다.
  혹은 주일 아침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신앙고백을 함께 외우고 있으니 자신의 신앙은 분명하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정도라면 귀신조차 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과 ‘지적 인식’만 남아 있는 신앙이란 곧 ‘죽은 믿음’이라고 성령께서는 단호하게 잘라 선언하십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무엇이 약간 부족한 믿음’이 아니라 ‘아주 없는 믿음’이며 그러니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이 엄중한 경고를 꼭 새겨듣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다시 살펴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행함이 있는 믿음’만이 구원을 얻게 해 주는 이유는 ‘행함이 있음’만이 곧 ‘참된 믿음이 있음’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20절 이하 26절에 “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아까 ‘하나님에 대한 지적 인식’만 있는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증명된 참된 믿음의 예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믿음이란 결코 무생산적인 추상적 개념이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하여, 유대인에게 단연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되고 있던 “아브라함”을 먼저 예로 들었습니다.
  비록 그가 이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1절)라는 말을 하고는 있지만, 이 표현의 참된 의미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명백히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23절에 있는 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라는 사실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 ‘행위를 통하여’ 그의 ‘믿음을 증명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신앙고백만 하고 끝나는 수준과는 비교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진짜 믿음’이 필요했었습니다.
  그것이 곧 자기의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도 결코 의심을 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는”(히11:19) ‘절대적 신뢰’의 믿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앞서 19절에 묘사된 ‘단순한 지적 인식’ 차원의 믿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이런 절대적 신앙이 아브라함에게 있다는 사실을 바로 그의 행위가 증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또한 참된 믿음은 ‘이웃에 대한 선행’으로도 증명되었는데, 바로 25절과 26절에 기록된 사실로서 이 역시 앞서 나온, 좋은 말만 가지고 베푸는 사랑과 대조되는 정반대의 선행입니다.
  “기생 라합”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런 행위를 보여 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국을 배반하고 적국의 스파이를 돕는 일이었으니 그야말로 목숨을 건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 하나님을 자기도 믿고 싶다는 신앙의 힘으로써 그 두려움을 극복해내었습니다.
  앞서 15절과 16절에 나오는 말로만 믿음 있는 체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라합은 자기 동족으로부터 배신자로 처벌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도와주는 구체적인 선을 행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진실하며 확고부동한지를 뚜렷이 증명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행함이 곧 믿음 있음의 증거’라는 예를 비단 그들의 훌륭한 믿음의 조상에게서만 아니라 아브라함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천한 이방 여인, 그것도 기생 출신인 라합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음을 예로 들었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오직 그리고 반드시 ‘그 믿음에 따른 행위’를 통하여 증명될 수 있다는 원리는 언제 어느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이 적용됨을 보여 준 것입니다.
  즉 이상의 두 가지 사실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의 삶에는 반드시 그 믿음이 생산해내는 행위가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24절에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고 경고하신 진정한 의미는, ‘행위가 결여된 믿음’은 참 믿음이 결코 아니며 따라서 ‘믿음이 없으므로 당연히 구원에 이르는 칭의도 받지 못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진짜 믿음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야말로 진짜 믿음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행하시는 일이 아무리 내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힘든 것이라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을 의심치 않고 그저 의지하고 오로지 순종하는 신행일치야말로 우리의 믿음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 장면입니다.
  옆의 사람이 보기에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 인생이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그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자세를 지킬 때, 바로 그것이야말로 그 성도의 ‘믿음이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는’ 최고로 멋진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 줄 아는 것이 우리 믿음의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자신에게 조금도 부담이 되지 않는 정도 내에서만 남을 돕는 것은 불신자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선행은, 그것을 실천하기에 어렵고도 불리한 조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푸는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바쁜 시간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몸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주님께서 내게 먼저 베풀어 주신 사랑을 생각하며 남에게 먼저 주기를 힘쓰는 사랑이 곧 진짜 믿음을 가진 성도가 그 내면의 믿음을 밖으로 드러내어 보여 주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정도의 수준에 이른 신자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발뺌해서는 안 됩니다.
  ‘기생 라합’조차 보여 줄 수 있었던 신행일치, 진실한 ‘여호와 경외’의 신앙에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증거였습니다.
  참된 신자라면 성별, 연령, 능력, 지위고하, 신앙연륜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꼭 발휘해야 할 이런 신앙의 증거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성도를 돕는 선한 희생과 봉사’를 통하여 꼭 나타내 보일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 명백히 확인할 수 있었듯이 본문은 ‘구원 얻기 위한 조건이 믿음과 행함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하는 데에 있다.’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믿음이 있으니 이미 구원의 길을 반은 확보해 놓았다. 이제 행함만 덧붙인다면 나머지 반의 조건을 채울 수 있다.’라고 가르치는 말씀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성령께서 야고보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강조하시는 것은,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믿음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믿음은 단 한 가지 종류의 믿음, 즉 ‘행함으로 인하여 그 실존과 진실성이 증명된 믿음’밖에 없으며, 바로 그 단 하나의 진짜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믿음입니다.
  자신으로 하여금 어떤 선행을 행하도록 자극할 수 없는 죽은 믿음,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신뢰와는 전혀 무관한 철학적 사색에 불과한 믿음 - 이런 믿음들은 ‘어떤 다른 종류의 믿음’이 아니라 오로지 ‘죽은 믿음’이며 ‘아예 믿음이 아닌 것’일 뿐입니다.

  요즘은 위조를 방지하기 위하여 지폐의 표면이 아닌 종이 속에 어떤 형상을 인쇄해 넣습니다.
  제가 그런 지폐를 제일 처음으로 보게 되었을 때에 무척이나 신기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아무 것도 없는 백지 부분이지만, 그것을 들고 햇빛에 비추어 보면 그 속에 무슨 그림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숨어 있는 형상이야말로 아무리 컬러 복사를 해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진짜 지폐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저 겉면에 ‘액면 가격’과 ‘발행 조폐국’의 이름만 찍혀 있다고 해서 진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뜻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비추어 보면 보이게 되는 형상’이 그 속에 있어야만 진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자신의 참된 신앙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삶’ 간단히 말해서 ‘신행일치의 신앙생활’입니다.
  이것만이 가짜 교인이 아무리 복사를 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아무리 진짜 신자인 체 해도 결국 드러날 수밖에 없게 만들어 주는 ‘진짜만의 증거’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가 말하는 ‘행함’과 천주교에서 말하는 ‘행함’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자면, 개혁주의 기독교의 ‘행함’은 ‘참된 신앙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선행’이고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행함’은 ‘신앙과 동떨어진 선행’입니다.
  즉 ‘참된 신앙’은 필연적으로 ‘선한 행위’를 낳게 되지만 ‘선한 행위’가 ‘참된 신앙’으로 이끌어 주는 것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믿음이 없는 선행’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오늘의 요절을 다시 보십시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말씀했습니다.
  ‘행함이 없이 구원을 받겠느냐?’라고 한 것이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이 구원하겠느냐?’라고, 어디까지나 ‘믿음’이 주체가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인데, ‘행함으로써 증명되지 못하는 가짜 믿음, 없는 믿음, 죽은 믿음’ 가지고서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은 사실상 이 본문에서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구원에 직결되는 요점은 어디까지나 ‘믿음’이지 결코 ‘행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해서, 오늘 야고보서의 본문은 결코 ‘선행의 공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행일치’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천주교 신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리아 테레사 수녀입니다.
  그녀는 평생을 빈자와 병자들을 위하여 헌신적인 선행에 바쳤던 까닭에 천주교 안에서는 명실 공히 금세기의 최고 성녀로 추앙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생전에 몇몇 신부들에게 “주께서 제 안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둠, 냉담, 공허의 현실이 너무도 커서 제 영혼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합니까?
  신이 없다면 영혼도 없고, 영혼이 없다면 예수님 당신도 진실이 아닙니다... 주께서 계신다면 부디 용서해 주소서.”,“예수님은 당신(그녀의 고해신부)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나 커서 (예수님을)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기도하려 해도 혀가 움직이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습니다.”라는 등의 내용으로 편지를 보내었던 것이 공개되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이런 충격적인 고백이 전해지자 그녀를 옹호하기 위해서“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신앙 속의 어두움(darkness within faith)’을 평생 껴안고 살면서도 결국 믿음으로 충만한 견인(perseverance)을 이루어내었다.”라는 구차한 변명이나 “신을 부정했다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고백이라고 본다.”라는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변호들이 뒤따르면서, 어떤 수녀는 아예 “테레사 수녀 자신이 살아있는 신이었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잡다한 ‘부연설명’들은 제쳐놓고 테레사 수녀 자신의 육성을 한 마디 한 마디 그대로 읽어 보십시오. 그녀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는 것과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 두 번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너무나도 명약관화하지 않습니까?
  테레사 수녀가 ‘선을 행함’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완벽했을지 모르지만 그녀가 ‘구원을 얻게 해 주는 믿음’은 전혀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일고의 여지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면 다른 천주교 신자들은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모든 것은 천주교가 바른 구원관 즉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써 구원 얻는다.’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떠나서 ‘사람은 선행의 공로를 쌓아서 구원 얻는다.’는 이단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함’은 결코 ‘구원의 빙거’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행함’은 ‘믿음의 증거’이며 또한 ‘참된 믿음에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들은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주장은 어디까지나 이단의 소리일 뿐이라고 경계해야 하지만, 또한 반면에 ‘자신에게 참된 믿음이 있음을 증명해 주는 신행일치의 삶’은 반드시 밖으로 보여 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아무도 숨길 수 없는 하나님의 눈앞에 자신의 ‘신앙에 따른 행위’를 나타내고 계십니까?
  불신자의 입에서도 ‘어쨌든 저 사람이 진짜 기독신자인 것만은 분명하다.’라는 인정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생활을 그들의 눈에도 보일 수 있도록 드러내고 있습니까?
  아니 스스로 ‘내가 그래도 구원받을 수 있는 신앙 하나만큼은 분명히 붙잡고 있구나.’라고 확신할 수 있게 해 주는 삶의 증거가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도 분명히 보이고 있습니까?
  진짜 신앙이라면 꼭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행위의 실상’들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반드시 비추어져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을 가장 앞세우는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들이 인간의 행위를 가장 강조하는 천주교 신자들보다 선행 역시 실제로는 더 많이, 더 신실하게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어서 움직이며 활동하는 ‘진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과 머리로만 하는 가짜 신앙’이 아니라 ‘사랑의 손길과 뜨거운 가슴으로 행하는 진짜 신앙’, 이처럼 ‘눈에 보이는 신행일치의 신앙’을 지키고 발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