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9-29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하박국 1장 1절 -2장 4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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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9-29
2019′경향의 강단(41) (2019년 9월 29일 / 주일 대예배)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하박국 1장 1절 – 2장 4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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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하박국 1장 1절 - 2장 4절 / 석기현 담임목사
최근에 제가 아주 좋은 영화를 하나 보았는데, ‘비커밍 제인’(Becoming Jane)이라는 제목의 미국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는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 등의 유명한 소설을 썼던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이라는 실제 인물이 온갖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꿋꿋이 여류소설가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특히 ‘제인 오스틴’ 역을 맡은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가 너무나 연기를 잘해서 저는 첫 장면부터 푹 빠졌었습니다.
  그 영화 속에서 ‘제인 오스틴’은 역시 실제 인물이었던 ‘톰 리프로이’라는 법대생과 애틋한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이 둘 사이에 스캔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의 나머지 스토리는 대부분 다 ‘만약 그랬더라면’(what if)이라는 상상에 의한 각색입니다.
  매우 오만하고 무례하기까지 한 ‘톰 리프로이’는 ‘제인 오스틴’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쓴 소설이 ‘여성적 취향’에만 머물러 있다고 혹평을 하면서 ‘남자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는 책을 한 권 추천해 줍니다.
  그 다음 주일에 ‘톰 리프로이’를 만나게 된 ‘제인 오스틴’은 그 책에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합니다.
  ‘톰 리프로이’가“그래도 마지막에 가서는 권선징악으로 끝나지 않아요?”라고 반박하자, ‘제인 오스틴’은 “그게 문제예요. 현실은 나쁜 사람이 잘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거든요. 바로 당신같이.”라고 톡 쏘아대는 것입니다.

  ‘권선징악’이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윤리적 이상향(理想鄕)’에 불과하며 오히려 악한 사람이 잘되고 선한 사람이 불행하게 된다는 딜레마는 옛날 구약 시대에 하박국 선지자 또한 똑같이 겪었던 일이었습니다.
  그가 살고 있던 남조 유다 전체의 현실이 그로 하여금 그런 갈등 속에 깊이 빠지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박국은 그 딜레마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무슨 고행이나 수도 따위의 헛수고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직접계시를 통해 그 명백한 정답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스스로의 지혜나 판단으로써는 결코 풀리지 않는 이 난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명쾌한 해법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 시간 저는 선과 악 사이에 흔히 벌어지는 딜레마를 우리 기독신자들은 과연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악인의 형통’이라는 딜레마는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심판’이 깨끗하게 해결해 줍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가졌던 첫 질문은 ‘왜 악인이 이렇게 활개를 치면서 잘 살고 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1절부터 4절에 “1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2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라고 기록된 것이 그의 첫 번째 의문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지금 자기 조국 유다에서 일어나고 있던 온갖 부조리와 악행에 대하여 치를 떨고 있었습니다.
  당시 여호야김은 남조 유다의 군주들 중에서 악명 높은 왕들 중의 하나였고 그로 인하여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공평이란 간 곳 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강포”가 공직자들의 행정 처리 수단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직은 오히려 무능력한 것으로 치부되고 그 대신에 약자를 “겁탈”하는 것이 성공수단으로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율법”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직 “변론과 분쟁”을 잘하는, 소위 ‘말발 좋은 사람’이 항상 의롭고 옳은 것처럼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악인들로 인하여 고생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을 위하여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외치면서”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치 “듣지 아니하시며” “구원하지 아니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2절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어느 때까지리이까”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은 그처럼 악인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시절이 이미 오래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그런 상태가 계속 지속되고 있으니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는”, 즉 악인이 ‘절대다수’의 힘을 등에 업고서 의인을 압제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사회의 주류로 굳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악인이 제멋대로 악행을 저지르고, 그런 악인이 오히려 더 잘 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인이 무슨 벌을 받기는커녕 점점 더 그 세력만 더해가고 있는 현실이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풀 길이 없는 딜레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난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5절부터 11절에 기록하기를 “5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6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7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8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9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같이 많이 할 것이요 10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 11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고 했습니다.

  악인들이 형통하고 있다는 딜레마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갈대아 사람” 즉 바벨론 사람들을 일으켜서 유다를 공격하여 정복하게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유다의 악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해 놓으시고 곧 이루고야 마실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바벨론 군대는 당시 고대 근동지방에서 그야말로 “두렵고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표범”의 위력과 “저녁 이리”의 사나움과 “독수리”의 탈취 근성을 다 모아 놓은 민족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단 바벨론 군대가 공격하기로 작정한 대상은 살아날 길이 없었습니다.
  “모래같이 많은” 백성이 있는 나라도, 내로라하는 “왕”들과 “방백”들도,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견고한 성”들도 일단 바벨론 군대에게 걸리면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바벨론 군대의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과 불가피성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그 임박한 심판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놀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방심만 하고 있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막상 당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깜짝 놀라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아무리 경고를 해 주어도, 즉 5절 하반절에 있는 대로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믿지 아니하는” 것이 그 안이한 유다 백성의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만연하고 있는 온갖 악한 일과 악한 인생에 대한 결말은 오로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있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최후심판이 없다면 이 모순은 해결될 길이 없습니다.
  선동자들이 ‘변론과 분쟁’으로 여론을 조장하고 ‘강포’한 자들이 출세하고 ‘겁탈’하는 자들이 축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악인들이 오히려 죽는 날까지 아무 일 없이 잘 사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철학이나 윤리로써는 대답할 길이 없는 너무나도 심한 딜레마인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만이 이 ‘악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이요 유일한 정답이 됩니다.
  반드시 속히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백보좌 심판대’에서 집행하실 최후의 대심판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지구상에 벌어졌던 모든 악한 일들을 단 하나도 빠뜨림 없이 엄중히 처벌할 실로 공정한 ‘징악(懲惡)’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이 심판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맹렬하고 엄한 것인지에 대해서 아주 태평스러운 마음을 가지고들 있습니다.
  배고픔과 추위가 무서운 줄은 알고 부자와 권력자 앞에서는 설설 기면서도, 정작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실 심판이 그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이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이토록 분명하고도 강력한 톤으로 경고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오로지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 하면서 제멋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야 무서운 줄 모르고 믿지도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변치 않을 엄연한 사실은 바로 그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속히’ 이루어지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악인들이 막상 당하게 될 때 정말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깜짝) 놀라게” 될 그 한 날은 이미 아주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한번 하시기로 일단 작정하시면 유다 백성에게 결코 피할 길이 없는 것이었고 또한 그 이후 모든 ‘여러 나라’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악인이 제멋대로 살고 그래도 만사형통한 것처럼만 보인다 해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마지막 한 날이 반드시 올 것을 깨달음으로써, 지금 의인을 에워싸고 있는 악인의 압제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끝까지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의인의 고난’이라는 딜레마는 끝까지 믿는 자를 꼭 살려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완벽하게 해결해 줍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가졌던 두 번째 질문은 ‘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의인이 오히려 고난을 당하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1장 12절부터 2장 1절에 그 의문을 기록하기를 “12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13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14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15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16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17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1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백성 가운데 설치고 있는 이 악인들을 왜 그냥 두고 계십니까?’라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내가 바벨론 사람들을 들어 그들을 징벌하겠다.’는 하나님의 대답을 듣게 된 하박국 선지자는 또 하나의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와 같은 바벨론의 침공이 있으면 유다 백성 가운데서 악인들뿐 아니라 의인들도 함께 고난을 당할 것이게 될 것인데, 그것이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불공평한 처사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바벨론의 침공이 “악”“패역”“차마 보지 못하시며” “거짓된 자들”을 결코 “방관하실” 수 없는 “정결”하신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심판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행하실 일이라는 사실은 하박국 선지자도 물론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모든 유다 백성이 “바다의 고기”“다스릴 자 없는 벌레”처럼 떼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벨론 군이 침공해 온다면 그들이 유다 백성들 중 의인과 악인을 구별해서 처리할 리는 만무했습니다.
  그야말로 그물에 걸리는 고기처럼, 발에 밟혀 죽는 벌레처럼, 의인들까지 악인들과 함께 닥치는 대로 죽임을 당할 것이 뻔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비록 유다 민족이 악하다 해도,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바벨론 민족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악한 민족임이 자명했으니, 그것 역시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런 의문을 품으면서 ‘그런데도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 일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두고 보고만 계실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던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 있어서 이 두 번째 질문, ‘의인들이 왜 악인처럼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첫 번째 질문보다 더욱 난해한, 거의 불가해한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질문을 하나님께 드린 후 자신은 “파수하는 곳”“성루”에 서서 무슨 전갈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자신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기다리고 바라보며” 있었습니다.
  하박국은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그 난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실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2장 2절 이하 4절에 기록하기를 “2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지금 하박국 선지자에게 내려주시는 “묵시” 즉 계시가 비단 그에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꼭 알려져야 할 실로 중요한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판에 명백히 새겨” 영원히 남겨져야 할 것이며, 또한 전달자가 그 판을 들고 “달려가면서” 보여 주어도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크고 똑똑히 기록되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는 “정한 때”가 이르면 “반드시 응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계시의 실현은 비록 “더디게” 보일지라도 “속히 이를” 것이며 “지체되는” 것 같아도 “결코 거짓(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약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 약속의 계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이어지는 4절에 기록된, ‘의인의 궁극적인 구원’이었습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참된 의인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아무리 주위 상황이 부조리하게 보이고 자기에게 벌어지는 일이 불공평하게 여겨진다 하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을 것이며, 바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비록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 백성을 징벌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그들이 사실에 있어서는 “교만하며 정직하지 못한” 백성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잘 아시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악한 민족으로부터 고난을 당한다는 것은 여기서 하박국 선지자가 탄원하듯이 의인으로서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임에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의인의 구원은 세상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며, 그 모든 난해하고 수긍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의인이 그런 구원을 얻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대답이요 또한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얼마나 놀라운 대답, 그러나 또한 명쾌하기 짝이 없는 정답을 하박국 선지자에게 들려주셨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로서는 실로 스스로는 풀 길이 없는 정말 어려운 질문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의인이 악인이 벌을 받을 때 같이 휩쓸려 들어가게 되고 의인이 악인이 받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함께 당한다면 누가 과연 그런 불합리해 보이는 일을 견디면서 신앙을 지켜 낼 수 있겠느냐고 고민했습니다.
  악인이 잘되는 것을 보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의인이 오히려 악인처럼 재난을 당하고 화를 겪게 된다면 세상에 그 누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려 하겠느냐고 의문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 하박국 선지자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런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아라. 의인은 믿음만 가지고도 넉넉히 살 수 있다!’라고 큰 소리로 선포하셨습니다.
  아무리 나라의 임금과 관원들이 못살게 굴어도, 아니 자기 자신까지 이방인의 침략 앞에서 악인들과 똑같은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진짜 의인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 하나만 가지고도’ 그 모든 것들을 넉넉히 견디어 낼 수 있으며 또한 ‘바로 그 믿음으로 인하여’ 마지막 심판 날에도 영생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참 얼마나 시원스러운 대답이며 또한 든든한 약속입니까?

  성도의 생애에 있어서도 이 땅에서는 다 해결 받을 수 없는, 아니 이해조차 잘 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인생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죄로 물들어 있고 그 죄의 영향력과 응보가 연이어지는 까닭에 그것은 피할 길 없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믿는 자가 마지막에 가서 반드시 얻게 될 영생구원은 그 모든 현세에서의 미결문제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고도 시원한 정답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들 중에서도 그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일이 생기는 것은 목사에게도 참 난감한 일입니다.
  남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고 더 열심히 섬기는 성도가 육신적으로는 잘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신실한 신앙인인데 그런 성도가 오히려 세상 불신자에게 많은 빚을 지고 고통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고3 수험생 중에서도 주일 예배까지 빼먹던 학생은 합격하는데 오히려 충성스러운 직분자의 자녀가 대학 입시에서 떨어지는 일들도 가끔 생깁니다.
  그런 현실은 본인에게도 시험이고 목사에게도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딜레마처럼 보이는 일들에 대하여 우리 모두에게 확실한 정답을 선포해 주고 계십니다.
  그 모든 난제에도 불구하고 오직 ‘믿음이 있는’ 성도는 그 믿음 하나만 가지고도 ‘넉넉히 살 것’이라고 대답해 주십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교회생활이고 직분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말 것처럼 보이는 일을 당해도,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신기하게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자신 있게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그 인애와 자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며 아무리 당장은 나빠 보이는 일을 당해도 결국 합력하여 당신의 자녀를 위하여 선을 이루고야 마실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는 신자는, 그야말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백전백승의 인생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신자의 인생에 부분적으로 불공평하고 당장은 이해할 수 없어 보이는 일이 혹 생긴다 하더라도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당신을 변함없이 의지하는 자에게 끝내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실 뿐 아니라 그 생명을 모든 현세의 환난과 내세의 멸망으로부터 영원히 구원해 주실 하나님만 끝까지 믿고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과 인생은 우리가 평생토록 고민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난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악인이 득세하면서 의인을 에워싸고’ 있는 현실은 가장 풀기 어려운 딜레마입니다.
  사마천은 중국의 ‘이십사 역사서’의 하나이자 정사(正史)의 으뜸으로 꼽히는 ‘사기’(史記)의 저자입니다.
  그 사마천이 역사를 모으고 정리하던 가운데 바로 그런 모순을 수없이 보면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늘은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지 않았던가? 그러나 백이와 숙제 같은 어진 사람은 결국 굶어 죽고, 반면에 자기가 죽인 사람의 간을 날로 먹었다고 할 정도로 악명 높은 도적이었던 도척은 천수를 다했다. 도대체 ‘하늘의 도리’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사마천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똑같이 고민했던 이 딜레마는 만약 공의의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영원히 풀릴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 수도를 해도, 아무리 공정한 정치가가 행정을 집행해도, 아무리 덕망 높은 사람이 도덕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도저히 풀 수 없는, 엉켜 있는 실타래와도 같은 것입니다.
  눈앞의 현실이 불합리한 것투성이인데 그것을 제아무리 온갖 미사여구로 합리화시키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악한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 부와 명예를 누리고 의롭게 사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병과 가난이 닥치는데, 그 모순을 도대체 어떤 ‘득도(得道)’로 이해시키며 어떤 ‘법’으로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공의만이 그 해결책이 될 수 있으며, 그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진짜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실존하시고 또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전제가 될 때 이 모든 딜레마들은 실로 간단하면서도 깨끗하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제멋대로 살더라도 결국 악인은 심판을 받게 되고, 이 금세에서는 그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결국 의인은 구원받고야 말 것이라고, 그 하나님께서 ‘판에 새긴 명백하고도 큰 글자’로 우리에게 뚜렷이 선포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간과하고 무시하는 악인에게는 깜짝 놀랄, 정말 무섭고도 두려운 한 날이 반드시 닥쳐오고야 말 것입니다.
  반면에 그 어떤 괴로운 상황과 모순된 현실 속에서도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 선하고 의로우심만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는 이 땅에서의 모든 시험과 환난에서도 넉넉히 살아남을 뿐 아니라 결국 저 천국의 영생을 쟁취하고야 말 것입니다.
  ‘의인을 에워싸고 있는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잠시 잘되는 것을 결코 부러워하지 말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격려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금세에서도 매사에 승리하며 내세에서 영원한 구원을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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