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9-22 “네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미가 7장 11-13절 / 석기현 담임목사

More videos
193
Views
   

WMA음성받기MP3음성받기동영상다운받기동영상다운방법

주일낮예배 2019-09-22
2019′경향의 강단(40) (2019년 9월 22일 / S.F.C.주일 대예배)
“네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미가 7장 11-13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경향교회 카톡친구
http://pf.kakao.com/_HxdvSd

(193)

“네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미가 7장 11-13절 / 석기현 담임목사
소위 ‘7080세대’를 주름잡았던 가수들 중에 한 명이었던 양희은 씨의 노래 중에 ‘네 꿈을 펼쳐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거의 매 구절마다 반복되는 ‘네 꿈을 펼쳐라’는 말은 자신의 인생을 더 크고 더 넓게 개척해 나가라는 의미입니다.
  ‘네 창을 열어라’, ‘네 맘을 열어라’로 이어지는 가사는, 그렇게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에 갇혀 지내지 말고 먼저 창문을 열어서 자신의 마음부터 그 제한된 공간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양희은 씨가 정말 그런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 노래를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나름대로 주석을 해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사람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좁은 영역 안에서 한정된 인생을 사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 항상 개방적인 의식과 진취적인 행동이 있는 삶을 추구해야 더 발전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은 특히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그런 ‘인생의 영역’을 “지경”이라고 표현하면서 그것을 “넓혀라”고, 즉 그런 인생의 꿈을 펼치고 그런 축복의 공간을 확장시키면서 살라고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이 미가서가 기록될 당시 북조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은 실로 암울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 때 잠시 누렸던 태평성세는 북방의 신흥 강대국 앗수르의 본격적인 남진 정책과 함께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처럼 불안한 국제 정세에도 불구하고 북조 이스라엘의 정치가들은 오히려 백성을 압제하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착취했으며, 거짓 선지자들은 애굽의 우상숭배를 모방한 혼합종교를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런 망국의 징조들을 통해 그토록 극도로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 결과 남북조의 멸망은 이미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된 것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미가는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가 된 이후에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때부터 다시 민족의 ‘지경이 넓혀지는’ 소망의 기회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고자 했습니다.
  이 시간 저는 비록 현실은 힘들고 불안하기까지 해도 기독신자에게 약속된 더 크고 넓은 미래의 복이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축복의 시발점은 철두철미하게 ‘교회중심’으로 충성하며 헌신하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에 “11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 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이란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온 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일을 가리킵니다.
  비록 몇 만 명의 사람들이 고토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예루살렘 성이 잿더미로 변한 허허벌판에서 그 숫자만 가지고서 조국을 재건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단 성벽이 세워져야 그것을 중심으로 국가의 안보와 치안이 유지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국제 무역로의 중간 기지로서의 이점을 발휘하면서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즉 ‘예루살렘 성벽’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지경”이 더 확장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출발점이요 기반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그런 국부적인 역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벌어질 사건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건축하기는 했지만,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이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 성벽의 강도와 질이 이전보다 훨씬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국력 또한 다윗과 솔로몬 시절의 최대판도와 비교할 때에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벽을 건축하는 날’이란 궁극적으로는 신약교회 운동의 시작을 의미하며, 새 이스라엘의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는 약속 또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온 세상으로 뻗어나가게 될 것을 가리키는 말씀임에 분명합니다.

  이처럼 신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영역은 바로 교회를 중심으로 충성하면서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교회야말로 기독신자의 전 인생에 대한 유일하고도 확고한 ‘성벽’입니다.
  일단 바른 교회부터 찾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구원의 확신에 거해야만 ‘영적 안전보장’ 가운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아무 은혜나 힘을 받지 못하는 교회에 그저 출석만 하고 있거나, 교회에 등록은 되어 있지만 ‘주일 신자’로 끝나 버리는 교인은 축복의 확장은커녕 아직 인생의 중심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교인은 ‘엿새’ 동안에는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자기 혼자 끙끙거리면서 인생을 헤쳐 나가려 하니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매일 동행함으로써 누리는 도움과 힘을 받을 길이 없으며, 그 결과 ‘말씀을 생활에서 실천할 때 따라오는 복’도 전혀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의 기점을 과연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미래를 활짝 펼쳐나갈 수 있게 해 주는 든든한 근거지가 과연 무엇입니까?
  대학 졸업장이나 학위 증명서가 그런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을, 한밑천이 될 만한 유산에 자기 인생의 전부를 걸고 있는 것은 참 어리석고도 부끄러운 꼴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야말로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처럼 인생의 모진 비바람이 닥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다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자신의 인생을 철두철미하게 ‘교회중심’으로 기반을 잡을 때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성벽을 건축하는 일’에 자기에게 맡겨진 ‘한 사람의 몫’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다른 성도들이 온 힘을 다해 ‘성벽’을 쌓는 것을 그저 곁에서 구경만 하다가 완성된 후에 그 성 안에 들어와서 온갖 혜택만 같이 누리겠다는 자세는 정말 염치없는 일이며 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얌체 교인을 축복하실 리도 만무합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교회운동에 자신의 온몸으로 뛰어들고 땀과 눈물로 동참하면서 ‘벽돌’ 하나하나를 같이 쌓아 올리는 ‘동역자’가 되어야 그 ‘장래의 영광’ 또한 똑같이 누릴 수 있습니다.
  매주일 주일학교나 찬양대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몸을 바쳐 봉사하고, 온전한 십일조는 말할 것도 없고 시마다 때마다 감사헌금을 비롯하여 ‘희년맞이 비전헌금’까지 기쁨과 정성으로 바치는 등 이 ‘경향교회의 성벽을 건축하는 역사(役事)’에 스스로 ‘한몫’을 해 낼 때 비로소 그 인생의 판도도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매사가 다 일단 중심이 바로 잡혀 있고 근거가 든든해야 확장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면 확장 자체가 어려울 뿐 아니라, 조금 확장된다 해도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더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의 축복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계를 받은 교회’가 실로 자신의 전 인생을 걸 수 있는 믿음직하고도 자랑스러운 ‘예루살렘 성벽’임을 확신하면서 더욱 철저한 ‘교회중심’의 충성과 헌신으로써 이미 약속되어 있는 미래의 지경을 활짝 넓혀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축복의 전성시대는 ‘전도와 선교’를 통해 많은 구령의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2절에 “12그 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강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이 끝난 후에 곧 뒤따라오게 될 사건인데, 인간적인 예상을 완전히 넘어서는 실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는 성벽 재건이 끝나면 국가가 안정되고 개인의 행복이 시작될 수 있는 정도로만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그 기대조차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지경의 확장’은 그런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 날”이 이르면 “앗수르”“애굽” 같은 대제국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애굽에서 강까지”라는 말은 ‘애굽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라는 의미로서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두 나라 다 과거 역사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강대국들인데, 그 ‘정복자’들이 오히려 ‘패전국’이요 ‘포로’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의 품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실제 역사상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한술 더 뜨셨습니다.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근동지방’을 넘어서서 ‘전 세계 방방곡곡’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새 이스라엘에 속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 실제로 벌어진 적도 없고 또한 앞으로 실현될 가망성도 전혀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명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고국 귀환과 민족 회복을 누리게 해 주신 이유는 결코 그들만 잘되게 해 주시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장차 이스라엘을 통해 ‘메시아’가 탄생하게 하시고, 그 구세주를 통하여 비단 이스라엘이나 근동지방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당신의 택자들을 부르시고 모으시는 데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속사 운동’이 땅 끝까지 펼쳐지는 것이야말로 ‘이스라엘 지경의 최대 확장’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신자의 ‘축복의 지경’ 또한 바로 이 최고의 전성시대를 바라보고 또한 성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한 사람이 잘되어 보았자 얼마나 잘되겠습니까?
  내 가정 하나 제대로 세우는 것쯤이야 세상의 대부분의 가장들이 다 성취하는 인생입니다.
  그렇다고 내 자녀가 좋은 대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정도를 두고 자기 인생의 지경이 꽤 넓어졌다고 만족한다면 그 얼마나 통이 작은 생각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교회중심으로 인생의 출발점과 기반을 바로 잡게 되면 그 결과 나 한 사람을 통하여 구원 받을 사람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는, 참으로 기가 막힐 정도로 엄청난 일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신자라 하면서도 주위 이웃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지 않으면, 여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방안에 틀어박혀서 창문조차 열지 않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해도 그저 신앙생활을 자기 개인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나 장식품 정도로만 여기는 ‘기복종교인’일 뿐입니다.
  아무리 ‘인간사회에서의 지경’은 넓어진다 해도 구령의 열매를 거두는 이 가장 귀중한 일에 사용되지 못한다면, 그런 신자의 인생이라는 것은 실상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나 교인들이 자기 교회의 부흥만으로 만족하면 그 순간 그 교회가 받을 수 있는 ‘지경의 경계선’은 끝나버리게 됩니다.
  자기네 배만 두드리면서 자화자찬하는 ‘비만증 교회’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립하게 되면 즉시 개척교회 운동과 세계선교 운동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그 교회 전체와 거기에 속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영역을 최대로 확장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경향교회를 통해 ‘세계를 받은 교회’의 사명을 수행해 나가고 있는 것은 얼마나 특권적인 축복이겠습니까?
  우리가 자체 예배당을 짓기 훨씬 전부터 ‘신학교 운동’을 시작하여 전도자를 양성하고 ‘개척교회 운동’을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교단의 모교회로서 힘을 다해 지원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이처럼 큰 복을 받고 있는 이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경향선교회’라는 사령부를 세우고 명실 공히 오대양육대주의 곳곳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를 세우며 또한 선교지 신학교까지 운영하고 있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수많은 택자들을 모으는’ 이 미가서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은 결코 개혁주의 기독신자들이 추구하는 ‘축복의 최대판도’는 아닙니다.
  오직 ‘가든지 보내든지’ 땅 끝까지 이르도록 복음을 전파하여 각 ‘나라’와 ‘성읍’에 더 많은 교회들을 세우는 가운데 구원 받을 ‘십사만 사천 인’의 숫자를 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가득 채워감으로써 실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최고 전성시대를 마음껏 구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축복의 최고 정점은 장망성과 구별된 천당에 ‘영생구원’의 자리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13절에 기록하기를 “13그 땅은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기독신자가 ‘교회중심’의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해 나갈 때 그 뒤에 따라오게 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그 땅” 즉 이 세상은 “황폐”하게 되는 결과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원래 ‘그 땅’은 천하 만민들이 함께 살고 있던 곳입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택자’들은 쏙 빠져나와서 ‘교회’라는 새로운 나라에 들어와 ‘천국시민’으로 살게 되었으니 이제 세상에는 오직 ‘불택자’들만 남게 됩니다.

  그 결과 그 세상에서는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망할 일만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구원받을 신자’들은 다 ‘교회’에 모여 있으니 오직 ‘불신자’들만 남아 있는 인간사회는 그들의 ‘악한 행위’만 점점 더 가중될 것이고 그 끝은 곧 하나님의 심판에 따른 멸망일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인생 결말은 그처럼 ‘황폐하고 말 땅’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중심’으로 사는 성도는 이 ‘장망성’으로부터 ‘천당’으로 그 본적을 이미 옮겨 놓은 자이며,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해 살던 기독신자는 결국 ‘악인의 무리’와 완전히 성별된 ‘의인의 회중’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기독신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하이라이트’가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구속사는 실로 완벽하고도 정확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옛날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반드시 이렇게 되리라고 하나님께서 예언하셨던 그대로 그 구속사의 중심부에서 ‘교회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흥망성쇠의 롤러코스터 같은 역사를 반복하는 중에도 변함없이 오로지 ‘흥함’과 ‘성함’만을 기록하면서, 그 ‘지경’이 온 세계에 가득 차도록 줄기차게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 본인이나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나라들, 그저 ‘먼 바다 끝, 땅 끝’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던 수많은 나라와 민족으로부터 택함 받은 자들이 이 교회 속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없는 이 땅의 국가, 신자가 없는 이 세상의 사회란 자연히 나날이 더 황폐해지면서 결국 영원한 심판의 한 날만 남아 있을 뿐인 것입니다.

  반면에 교회를 중심으로 구령의 사명에 충성하며 사는 신자의 인생은 자기 자신 역시 바로 그 신앙고백과 신행일치의 삶을 통하여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불신사회 속에서 ‘신앙인의 영역’을 지키고, 이 죄악이 관영한 소돔성에서 ‘거룩한 공동체의 공간’을 사수하면서 살고 있다는 자체가 곧 저 멸망 받아 죽을 백성들과 장차 불에 타 없어질 장망성과 벌써부터 완전히 구별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구원의 도피성’ 안에 살고 있는 성도에게는 금세뿐 아니라 ‘내세의 부동산’까지 확보되어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기독신자에게 주어진 ‘축복의 지경’은 이 세상의 땅을 쪼개어 분할 받는 것이 아니라 결코 없어지지 아니할 저 ‘영원한 기업’을 약속받고 그것을 결국 상속받고야 마는 영생구원에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로 이 ‘축복의 최고 정점’에 꼭 도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결승점을 통과할 때까지 ‘좌우로 치우치거나 뒤를 돌아보지 말고’ 오직 ‘푯대를 향해 똑바로 전력질주’해야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스스로 경계했던 것처럼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하는”(고전 9:27하) 어처구니없는 일이 실제로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나름대로 교회생활을 하고 남을 전도까지 해 놓고도 나중에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실족하고 탈선하여 끝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분명히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이지 그냥 불신자로 평생 사는 것보다 더 못한, 그야말로 ‘슬피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결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저와 여러분은 그 마지막 결승 테이프를 끊는 순간까지 “내 몸을 쳐 복종하게”(고전 9:27상) 만드는 ‘신앙생활의 주마가편’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비록 금생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은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낙심하거나 도중하차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기”(롬 8:18)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따라오는 축복의 지경은 내 인생 안에서 제한되거나 교회 안에서 끝나는 것도 결코 아니며, 결국은 천당까지 이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저 잠시 동안 흥하고 성해 보이는 ‘이 불신세상 주민의 땅’은 결국 다 황폐해지고 말 그날이 오고야 말 것을 명심하면서, 저 ‘진동하지 아니할 도성’ 천당에 자신이 영원히 거주할 자리를 이 지상의 그리스도 왕국인 교회를 통하여 틀림없이 확보해 두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기업이 불경기로 인해 위기를 맞이하게 될 때 보통은 그저 ‘사업 축소’만 생각하지만 오히려 ‘사업 확장’을 통해 그것을 돌파해 나가는 경영인들이 있습니다.
  어려울 때라고 해서 위축되기만 하면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며, 그럴수록 ‘더 멀리 보고 더 큰 꿈을 키우는’ 것이 최상의 전략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자와 교회는 더욱 이 원리를 깨닫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가안보부터가 흔들리고 경제 또한 내리막길로만 치닫고 있습니다.
  모든 현실적 상황은 그저 불안과 두려움만 날이 갈수록 가중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독신자에게 주시는 ‘인생의 지경’은 그처럼 쉽게 요동치는 ‘이 땅’과 ‘그 주민’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오로지 ‘교회중심’으로 사는 가운데 ‘구령운동의 열매’를 차곡차곡 쌓으면서 저 ‘하늘나라 장자의 회중’에 들어가게 될 날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우리 성도에게만 주어진 놀랍고도 특별한 ‘축복의 영역’입니다.
  경제성장지수가 아무리 곤두박질쳐도 누가 이 ‘유업’을 빼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국난이 저와 여러분이 이미 확보하고 있는 이 요지부동의 ‘영적 부동산’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떨어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특히 저와 여러분은 이 경향교회를 중심으로 자신의 ‘지경을 넓혀 가는’ 생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 정말 특권적인 복인 줄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계를 받은 교회’를 인생의 구심점으로 삼지 못했더라면, 우리의 영역이란 강서구나 서울, 기껏해야 대한민국 땅 안에 한정되었을 것입니다.
  ‘가든지 보내든지 복음 전파에 힘쓰는 사명’에 헌신하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오대양육대주’ 전체를 각자의 가슴 속에 품고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숱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별 같은 삶을 살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반드시 천당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더라면, 저나 여러분 모두는 그저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라는 말초신경적인 요구만 추구하면서 ‘멸망하는 짐승’처럼 죽어갔을 것이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아파트 평수가 늘어나는 것이나 빌딩 전세를 살다가 자체 공장이나 회사 건물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 신자가 기대하는 ‘지경의 확장’은 결코 아닙니다.
  자기만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복이란 그저 ‘이방인과 바리새인’도 추구하는 욕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 이스라엘의 선민에게 약속해 주신 이 놀랍고 엄청난 진짜 ‘축복의 영역’을 더욱 ‘넓혀’ 가야 합니다.
  함께 더 견고하게 세워 가고 있는 이 경향교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고, 조국과 세계의 무수한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사명에 더 많은 열매를 거두며, 이처럼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공동체를 통하여 끝내 천당의 영생구원의 반열에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함께 서는 모든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Ta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