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9-08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에 이르러” 에스겔 41장 1-20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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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9-08
2019′경향의 강단(38)(2019년 9월 8일 / 주일 대예배)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에 이르러” 에스겔 41장 1-20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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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에 이르러”

에스겔 41장 1-20절 / 석기현 담임목사
역사의 흐름 속에는 ‘형식과 내용’, ‘외면과 본질’이라는 대조적인 개념이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이것은 문학이나 예술, 관습과 사회규범 등의 분야에서 돋보이는 것이지만, 특히 종교에서는 더욱 예민한 대립을 이루게 됩니다.
  원칙적으로는 ‘내용과 본질’이 ‘형식과 외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를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반대 현상이 흔히 일어나고 있으며, 이것은 교회를 두고 논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는 말씀입니다.
  앞의 40장부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장차 베풀어 주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새 성전에 대한 환상’을 통해 미리 보여 주고 계셨습니다.
  그 환상은 먼저 ‘성전 외부’에 대한 설계도로 시작되었다가 이제 본 장에서는 ‘성전 내부’에 대한 묘사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런 모양의 성전이 실제로 지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온 이후에 새로 건축했던 ‘스룹바벨의 성전’을 비롯해서 그 이후로 ‘헤롯 성전’ 등 여러 차례 재건되었던 성전들 가운데 어느 것도 본문에서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하나, 구석구석 자세하게 “측량”하고 있는 모양과 크기 그대로 세워진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성전의 양식들은 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에스겔에게 보여 주신 성전의 환상’을 통해 장차 ‘메시아께서 세우실 새 성전’ 즉 ‘신약교회’의 모습을 미리 예언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바로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교회의 내용과 본질’은 동일함을 알려 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의 형식과 외면’은 시대마다 바뀌어져 왔습니다.
  아주 간단히 예를 들자면, 모세 당시에는 ‘성막’이 있었고, 솔로몬 이후에는 ‘성전’이 세워졌으며,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는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곧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헌법이나 직분자, 조직이나 교단 등 교회의 겉모습은 아주 다양하게 변화되었습니다.
  역사의 흐름과 함께 인간사회가 바뀌고 문화가 발전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역시 계속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시간 저는 이처럼 급변하는 시대와 상황으로 인하여 외면적으로는 바뀔 수밖에 없는 가운데서도 교회가 그 ‘내용과 본질’만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지킬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중심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1절부터 4절에 “1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에 이르러 그 문 벽을 측량하니 이쪽 두께도 여섯 척이요 저쪽 두께도 여섯 척이라 두께가 그와 같으며 2그 문 통로의 너비는 열 척이요 문 통로 이쪽 벽의 너비는 다섯 척이요 저쪽 벽의 너비는 다섯 척이며 그가 성소를 측량하니 그 길이는 마흔 척이요 그 너비는 스무 척이며 3그가 안으로 들어가서 내전 문 통로의 벽을 측량하니 두께는 두 척이요 문 통로가 여섯 척이요 문 통로의 벽의 너비는 각기 일곱 척이며 4그가 내전을 측량하니 길이는 스무 척이요 너비는 스무 척이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지성소니라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앞 장에서 에스겔을 새 성전의 사방에 있는 “안뜰”“문”으로 안내했던 하나님의 사자는 이제 그를 “성전” 본채로 이끌어갔습니다.
  그 사자는 먼저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벽”“두께”“문 통로의 너비”를 측량해서 보여 주었는데, 앞서 말씀 드렸듯이 여기서 나오는 치수대로 실제로 지어진 성전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문을 통과하면 “성소”가 있었는데, 이것은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의 성전’에도 있었던 중요한 공간입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사자는 더 “안으로 들어가서 내전”에 이르렀는데, 그 곳을 측량한 후에 에스겔을 향해 “이는 지성소니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성소 안쪽에 ‘지성소’가 있었던 것 역시 ‘모세의 성막’ 및 ‘솔로몬의 성전’과 동일한 구조입니다.
  이처럼 ‘에스겔의 성전’이 비록 ‘식양’은 다르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같으며 특히 ‘지성소’가 항상 가장 중요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명칭 그대로 ‘성소 안에서도 가장 거룩한 곳’이었는데, 거기에는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물론 그 안에 들어 있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의미 있는 것이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덮고 있던 뚜껑이었습니다.
  그것은 ‘속죄소’ 혹은 ‘시은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었는데,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희생제물의 “피를”“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려서” 이스라엘 백성의 “부정”“죄”를 위해 속죄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에스겔의 성전’ 역시 그 가장 중심에는 이전의 성소와 성전과 꼭 마찬가지로 ‘지성소의 속죄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약교회에서 그 ‘속죄소’에 해당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두말할 필요 없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된” 사건이 이 사실을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이 명백하게 선포해 줍니다.
  그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인은 ‘지성소의 속죄소’를 통한 ‘죄 사함’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지성소의 속죄소’는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예표였다는 사실이 더없이 명백해졌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성소부터 신약의 교회까지 똑같이 이어지는 ‘본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만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면서 모든 교회의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중심이며 핵심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복음이 나오고, 이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 구원이 주어지고, 이 십자가의 은혜를 먼저 체험한 신자들이 이제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교회를 중심으로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완수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그렇다면 경향교회 제1성전의 강단에는 왜 십자가가 걸려 있지 않습니까?’라는 의문이 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그런 ‘가시적인 십자가’가 예배당의 중심에 달려 있으면 그 ‘형상’ 자체를 숭배하거나 그 ‘십자가 모형’ 자체에 무슨 신비한 힘이 있을 것처럼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천주교에서 실제로 써 먹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강서성전 밖에는 왜 십자가 탑을 높이 세웠습니까?’라고 또 질문하고 싶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불신자의 눈에는 이곳이 교회라는 사실과 또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십자가 대속’에 있다는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비록 이 성전 안에는 ‘십자가 형상’이 달려 있지 않다 해도 늘 각자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시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 시대에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이 곧 ‘성령의 전’이며, 그 성전의 한가운데에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없이 ‘지성소의 속죄소’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구약 시대의 ‘광야교회’ 때부터 시작해서 ‘초대교회’와 오늘날의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참된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만을 유일한 구심점으로 삼고 우뚝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는 항상 ‘당회의 관할과 치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합니다.

  5절부터 7절에 “5성전의 벽을 측량하니 두께가 여섯 척이며 성전 삼면에 골방이 있는데 너비는 각기 네 척이며 6골방은 삼 층인데 골방 위에 골방이 있어 모두 서른이라 그 삼면 골방이 성전 벽 밖으로 그 벽에 붙어 있는데 성전 벽 속을 뚫지는 아니하였으며 7이 두루 있는 골방은 그 층이 높아질수록 넓으므로 성전에 둘린 이 골방이 높아질수록 성전에 가까워졌으나 성전의 넓이는 아래 위가 같으며 골방은 아래층에서 중층으로 위층에 올라가게 되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는 성전의 남쪽, 북쪽, 서쪽 등 “삼면”을 돌아가면서 성전의 “벽 밖으로 그 벽에 붙어”서 지어진 “골방”들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우선 5절 서두에서 “성전의 벽을 측량하니 두께가 여섯 척이며”라고 했는데, 여기서의 “두께”란 ‘외벽’ 바깥부터 ‘내벽’ 안쪽까지를 가리킵니다.
  그처럼 “여섯 척”이 되는 외벽과 내벽 사이의 공간에 “너비”“각기 네 척”씩 되는 “골방”들이 지어졌는데, 이것은 ‘솔로몬의 성전’에도 있었던 것으로서 제사장의 의복을 위시하여 성전에서 사용되는 기구나 귀중품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활용되었습니다.

  6절 상반절에 보면 그 성전의 벽은 “아래층”, “중층”, “위층”“삼 층”으로 구분되었는데, 각 층마다 “서른” 개씩의 ‘골방’이 남쪽, 서쪽, 북쪽으로 빙 돌아가면서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6절 하반절에 보면 “그 삼면 골방이 성전 벽 밖으로 그 벽에 붙어 있는데 성전 벽 속을 뚫지는 아니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 6절만 가지고서는 얼른 이해하기가 좀 어렵지만, 그 다음 7절의 “이 두루 있는 골방은 그 층이 높아질수록 넓으므로 성전에 둘린 이 골방이 높아질수록 성전에 가까워졌으나 성전의 넓이는 아래 위가 같으며 골방은 아래층에서 중층으로 위층에 올라가게 되었더라”는 말씀과 연관시켜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우선 성전 벽의 두께는 1층부터 3층까지 일정하게 아까 5절에 나온 대로 ‘여섯 척’입니다.
  그런데 그 외벽과 내벽 사이에 만들어지는 골방의 공간은 “그 층이 높아질수록 넓어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1층에서는 외벽과 내벽이 두꺼워서 골방의 공간은 가장 작게 되고, 그 다음 2층에서는 그 외벽과 내벽이 조금 더 얇아지면서 2층의 바닥을 지지해 줄 턱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2층 골방은 조금 더 커지게 되며, 똑같은 식으로 해서 3층에는 가장 넓은 골방이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즉 모든 골방이 다 ‘너비’는 동일하게 ‘각기 네 척’이지만 그 ‘길이’가 층마다 다르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아까 6절에 나온 대로 “그 삼면 골방이 성전 벽 밖으로 그 벽에 붙어 있는데 성전 벽 속을 뚫지는 아니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 3층 전체에 똑같은 크기의 골방을 만들면 자연히 각층마다 들보를 걸치기 위해서 외벽과 내벽에 구멍을 뚫어야 했겠지만, 벽 자체를 일정한 폭으로 매 층마다 더 얇게 만들면 들보 가장자리를 그 아래층의 벽의 튀어나온 부분에 걸칠 수 있고 그 결과 ‘성전 벽 속을 뚫을’ 필요는 없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골방’들을 만들 때 ‘성전 벽’을 뚫지 않도록 그토록 특별히 신경을 써서 지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성전은 예배를 위한 처소이지만, 골방은 그런 성전의 주요한 기능을 돕는 데 필요한 방일 뿐입니다.
  그러니 만약 ‘골방’이 ‘성전의 벽’을 뚫고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주객전도가 되는 셈인 것입니다.

  신약교회에 있어서의 ‘골방’은 예배와 전도 등 교회의 주된 기능을 돕기 위해 세워진 교회 내의 봉사기관이나 부속조직에 해당됩니다.
  예를 들면, 바로 각 전도회를 비롯하여 각종 위원회 및 소모임 등입니다.
  그런 기관과 조직들은 성전의 골방들과 마찬가지로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지만, 꼭 명심해야 할 점은 그 어떤 규모나 그 무슨 용도의 ‘골방’이든지 간에 절대로 ‘성전의 벽 속을 뚫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교회 내의 모든 모임은 철저하게 ‘교회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그 모든 활동은 오로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만 운용되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교회 내의 무슨 모임이나 활동이 사사로운 목적으로 운용되거나 그 교회의 방침에 어긋나는 것이 되면 그것이야말로 ‘지회가 교회의 벽을 허무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 내의 모든 부속기관과 조직은 철저하게 ‘당회의 관할과 치리’에 따라서 운영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경향교회와 같은 장로교회는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을 오직 ‘성경’에만 두고 있으며, 당회가 바로 그 ‘성경중심’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치리기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집사회, 권사회, 남녀전도회 및 청년회 등이 봉사활동에 있어서는 ‘자율적인 단체’의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관들이 세워져 있는 이유가 무슨 세상 정치계의 ‘삼권분립’ 원칙을 모방하거나 ‘압력단체’의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 내의 모든 기관과 조직은 기본적으로 어디까지나 ‘교회 전체의 화평과 질서’를 지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당회의 지도’를 벗어나는 일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셔서 세우실 ‘새 성전’ 안에는 90개의 크고 작은 ‘골방’들이 있었지만 그 성전 전체의 외벽과 내벽의 두께는 일정했으며 그 벽에 구멍 하나도 내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경향교회 안의 수많은 ‘지회와 모임의 골방’들 역시 그 어떤 경우에도 교회에 해를 끼치지 않고 오직 유익만 될 수 있도록, 항상 당회를 중심으로 시행되는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함으로써 ‘성경중심’의 바른 교회의 모습을 함께 견지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목적을 완수해야 합니다.

  15절 하반절 이하 20절에 “15b내전과 외전과 그 뜰의 현관과 16문 통로 벽과 닫힌 창과 삼면에 둘려 있는 회랑은 문 통로 안쪽에서부터 땅에서 창까지 널판자로 가렸고 (창은 이미 닫혔더라) 17문 통로 위와 내전과 외전의 사방 벽도 다 그러하니 곧 측량한 크기대로며 18널판자에는 그룹들과 종려나무를 새겼는데 두 그룹 사이에 종려나무 한 그루가 있으며 각 그룹에 두 얼굴이 있으니 19하나는 사람의 얼굴이라 이쪽 종려나무를 향하였고 하나는 어린 사자의 얼굴이라 저쪽 종려나무를 향하였으며 온 성전 사방이 다 그러하여 20땅에서부터 문 통로 위에까지 그룹들과 종려나무들을 새겼으니 성전 벽이 다 그러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성전의 내부 장식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이어집니다.
  그 중에서 이 다섯 구절은 성전의 “내전과 외전의 사방 벽”이 어떻게 꾸며져 있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 벽들은 “널판자” 즉 나무판자로 덮여 있었는데, 20절 끝에 “성전 벽이 다 그러하더라”라고 되어 있는 것처럼 성전의 모든 벽이 다 빙 둘러가면서 똑같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그 ‘널판자’에는 두 종류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그룹”들과 “종려나무”였습니다.
  ‘그룹’이란 쉽게 말하자면 천사인데, 특히 ‘하나님의 보좌를 받드는 영광스럽고도 아름다운 천사’를 가리켜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그 에스겔의 성전 벽에 그룹들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던 것은, 성전은 바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찬양을 올리며 영광을 돌리는 장소임을 단적으로 천명하는 것입니다.
  ‘종려나무’ 역시 그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맞이했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여기 성전 벽의 종려나무도 왕에게 환호를 올리는 백성처럼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성도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에스겔의 성전’ 벽에 새겨진 이 두 가지 상징적인 그림은 곧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모든 영광과 찬송을 홀로 받으실 유일한 참 신이심을 실로 완벽하게 보여 줍니다.
  단지 이 둘 사이에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룹’은 ‘하늘에서 천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나타내는 반면에, ‘종려나무’는 ‘땅에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를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의미 깊은 ‘그룹’들과 ‘종려나무’들을 성전 벽판에 새겨 그릴 때, 약간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우선 18절 하반절에 보면 “두 그룹 사이에 종려나무 한 그루가 있으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룹과 종려나무의 숫자가 2대 1일의 비율로 되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룹과 종려나무를 하나씩 교대로 배열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두 그룹들 사이에 종려나무가 한 그루씩 들어가도록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18절 끝에서부터 19절에 보면 “각 그룹에 두 얼굴이 있으니 하나는 사람의 얼굴이라 이쪽 종려나무를 향하였고 하나는 어린 사자의 얼굴이라 저쪽 종려나무를 향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즉 각 그룹마다 ‘사람의 얼굴’ 하나와 ‘어린 사자의 얼굴’이 하나씩 붙어 있어서 그 얼굴들이 각각 그룹의 좌우편에 있는 종려나무를 향하도록 새겨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지혜’를 가리키며 ‘사자의 얼굴’은 ‘힘’을 뜻하기 때문에, 이 두 종류의 얼굴은 천사의 생김새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에게 부여된 지혜와 힘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성전 벽에 새겨져 있는 그룹의 그 얼굴들이 각각 그룹의 좌우편에 있는 “종려나무를 향하도록” 새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룹’ 즉 ‘하늘 보좌 주위의 천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종려나무’ 즉 ‘이 땅에 사는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보다는 더 멋지고 중요할 것 같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룹’은 ‘보좌 곁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천사’인 만큼 당연히 그 얼굴이 ‘하늘’ 쪽을 향해야 어울릴 것 같은데, 의외로 ‘에스겔 성전’에 새겨진 그룹들의 모든 얼굴들은 하나같이 ‘종려나무’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땅의 성도’들이 ‘에스겔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데, ‘하늘의 천사’들이 오히려 그 ‘에스겔의 성전’에 모여 있는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참 이상한 광경 같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이것이 제대로 된 순서이며 또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천사나 성도나 둘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피조물인 것은 동일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천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보다는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더 중요하고 더 아름다운 일이며, 그래서 성도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을 천군천사들 쪽에서 오히려 흠모하며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에서 천사를 하나님과 성도 중간의 위치에 두고 있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인 동시에 ‘성도의 수종자’이지 결코 성도보다 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찬양보다는 이 지상교회의 성도들이 올리는 찬양을 훨씬 더 기쁘게 받고 계시며 훨씬 더 귀중히 여기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하늘의 천사들이 오히려 그런 우리 성도들의 찬양에 화답하면서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우리 성도들이 주체가 되고 천사들은 우리의 보조자가 될 뿐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원래 사람이 지음을 받은 목적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된 성도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는 더욱 그러해야 마땅합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무슨 ‘서비스’를 제공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단체가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죄인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워진 것이며, 그 구속사의 계획이 성취되어감으로써 궁극적인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 경향교회에 모일 때마다 이처럼 각자의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서 ‘하늘의 그룹’들이 우리를 흠모하며 화답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송과 존귀가 돌아가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함께 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형식과 내용’, ‘외면과 본질’을 논하면서 ‘보수주의는 형식과 외면을 지키려 하고 진보주의는 내용과 본질을 중요시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수주의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것을 지키려 하는 것이고, 진보주의는 ‘본질 자체를 비판하고 바꾸려 하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보주의 즉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복음의 정의’부터 뜯어 고치려 하며 아예 ‘신앙의 의미’부터 달리 생각합니다.
  ‘옛날 아직 지성이 발전되지 않았던 시대의 사람들이 믿었던 신과 따랐던 종교관은 현대에서 통할 수가 없다.’는 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대해서도 그 ‘외면’이 아니라 ‘본질’ 자체를 바꾸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수주의 즉 개혁주의 기독신자는 ‘신앙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바뀐 것이 없으며 또한 앞으로도 결코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예수님을 따르고,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자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은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교회’ 역시 비록 ‘형식과 외형’은 변화되어도 그 ‘내용과 본질’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앞으로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도 전혀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천당에서 완성될 ‘우주적 교회’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본질이 다른 교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구약교회’가 곧 ‘신약교회’의 모형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교회’가 예수님 승천 이후에 ‘초대교회’로 이어지고 그 이후 오늘날의 ‘개혁주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그 ‘본질’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지성소’에 모시고, 모든 ‘골방’들이 항상 ‘당회의 성경중심의 관할과 치리’를 따라 운영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는(Soli Deo Gloria)’ 궁극적인 목적을 완수함으로써, 이 경향교회를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성전’을 통해 명하시고 예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참된 교회로 더욱 굳건히 함께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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