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9-01“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에스겔 18장 1-32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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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9-01
2019′경향의 강단(37)(2019년 9월 1일 / 주일 대예배)
“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에스겔 18장 1-32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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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에스겔 18장 1-32절 / 석기현 담임목사
존 레논의 ‘Imagine’(상상해 보세요)이라는 노래는 무척이나 감미로운 멜로디 때문에 세계적인 명곡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가사 내용은 무신론,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노래의 첫째 연은 “Imagine there’s no heaven (천당이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 It’s easy if you try (해 보면 쉬워요) /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우리 밑에 지옥도 없고 오직 우리 위에 하늘만 있어요) /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모든 사람이 그저 오늘만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라고 시작됩니다.
  비록 이 노래가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다 부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존 레논 같은 무신론자들이 진짜로 싫어하는 것은 지옥일 것입니다.
  하지만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소위 목사라고 하면서도 그와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당장 인터넷 검색만 해 보아도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지옥에 떨어뜨릴 수 있는가?", “지옥은 마귀를 위한 곳이지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다.
 "라는 따위의 설교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다 백성 역시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 ‘축복과 구원’ 등은 듣기 좋아하면서도 ‘하나님의 진노’, ‘저주와 심판’에 대해서는 고개를 내젓는 자들이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 제국의 제2차 침공 때에 포로로 잡혀 와서 바벨론에 살고 있었는데, 이 에스겔서는 그때 함께 포로가 되었던 유다 백성에게 선포된 말씀이었습니다.
  그 유다 백성의 가장 큰 불만은 본문 29절에 나오듯이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의 길’이란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유다 백성을 바벨론의 포로가 되도록 징계하신 것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이것이 불공평한 처사라고 여겼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기네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억울한 벌을 받고 있다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기가 막히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라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불공평’하다고 여기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 왜 지극히 ‘공의로운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벌은 하나님이 불공평해서가 아니라 오직 사람 자신의 죄 때문에 받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1절부터 4절에 “1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3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4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잘 되면 제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매사에 자기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잘못된 일에 대한 책임은 조상까지 끌어들여서라도 남에게 전가시키고, 반면에 모든 공은 자기에게만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던 유다 백성 역시 그와 똑같은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라는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을 인용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어찌 그렇게 말하느냐?’라고 그 속담의 의미가 잘못된 것임을 책망하셨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어디까지나 신 포도를 먹은 당사자인 아버지의 이만 시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이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의 이가 시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곧 죄는 자기네 조상이 저질렀는데 그에 대한 벌은 자기네가 당하고 있으니 이것은 지극히 불공평한 처사가 아니냐고 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유다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응답하셨습니까?
  이어지는 3절에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그따위)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고 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4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는 원칙 즉 ‘오직 죄를 지은 당사자만 반드시 벌을 받게 하시는’ 원칙을 구구절절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각 개인의 의와 불의를 따라서 판단할 뿐이며, 따라서 아버지의 의 때문에 자식이 구원을 받게 되는 일도 없고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죄 때문에 자식이 벌을 받게 되는 일도 절대로 없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제2계명에 아버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순종하면 그 자손이 ‘수천 대’까지 복을 받고 반면에 아버지가 하나님을 미워하면 그 자손도 ‘삼사 대’까지 저주를 받는다고 선포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복을 두고 하는 말씀이지 각 개인의 구원 여부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는, 지금 바벨론 땅에서 포로 생활하고 있는 유다 백성은 자기 아버지들의 죄 때문에 그 벌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역시 그네들의 조상과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등, 오직 자기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자범죄들을 계속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포로 된 땅에서의 괴로운 생활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유다 백성은 자기 자신의 죄는 전혀 돌이켜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신 포도를 먹은 것은 우리 조상들인데 왜 죄 없는 우리 자식들의 이가 시게 되어야 하느냐?’라고 하나님 앞에서 원망만 늘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부모가 당하던 불행이 자식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해도, 그 책임은 어디까지나 자식 자신에게 있습니다.
  비록 조상이 죄를 지어 받은 징벌이 후손 세대에까지 계속된다 해도, 그 직접적인 원인은 그 후손들의 각 세대와 각 개인이 저지른 범죄 때문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한 나라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 책임은 바로 그 나라 백성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범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우리 기독신자들부터 겸손하게 인정하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가 당하는 고통과 환난을 그저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사람은 바로 그런 교만한 마음가짐 때문에 그 나쁜 상황 속에 더욱 깊이 교착될 뿐인 것입니다.

  나쁜 일은 무조건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은 ‘억울한 피해자’라고만 둘러대는 사고방식이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갈수록 더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청소년이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면 ‘어릴 때 자란 환경이 좋지 않아서’라든지 ‘부모에게 학대를 받아서’라고 변명합니다.
  그 본인을 꾸짖고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그저 사회로만 돌리려 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망할 지경에까지 만들어 놓고서도 ‘전임자들이 이미 망쳐 놓은 일이라서’라고 둘러댑니다.
  만약 경제가 잘 돌아갔더라면 그것도 ‘전임자들의 공’으로 돌렸을까요? ‘아버지가 포도를 먹어서 아들의 이가 시다.’라는 식의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그 악순환에서 결코 빠져나올 길이 없습니다.
  가정에 시험이 생길 때, 조국과 민족이 환난을 당할 때 그저 다른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리려 하지 말고 먼저 자신부터 돌아보며 자기 속에 있는 죄를 찾아 회개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19절부터 22절에 기록하기를 “19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도다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20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21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22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고 했습니다.

  자식을 위한 것이라면 못할 것이 없는 사람이 부모이고, 자기 부모로 하여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생을 보내도록 효도하고 싶은 사람이 자식이지만, 그런 부모자식 간에도 절대로 주고받을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이 곧 ‘구원 얻는 신앙’입니다.
  본문 앞의 5절부터 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악한 아들’, 또 ‘악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의로운 아들’을 대조시키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매 문단 끝마다 “그는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 또는 “그는 그의 죄악으로 죽으리라"는 말씀을 강조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이 의인이든지 악인이든지 간에 자기만 의인이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고, 자기 아버지가 의인이든지 악인이든지 간에 그 자식이 악인이면 죽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절에 보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다 백성은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죄를 많이 지었으면 그 죄 값은 당연히 아들에게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한 것입니다.
  부자관계란 것이 얼마나 가까운데 어떻게 아버지의 의로운 공로가 자식에게 득이 되지 않을 수 있으며, 반면에 아버지가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다면 자식도 그 해를 입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반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엉터리 논리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다시 한 번 결론적으로 선포하십니다.
  ‘사람은 각각 자기의 의로 구원을 받든지 자기의 악으로 저주를 받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아들은 아버지 죄 때문에 벌을 받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 역시 아들 죄를 대신 책임져 줄 수 없다. 의인의 의로움도 오직 본인에게만 구원을 가져다주고 악인의 악함도 오직 본인에게만 사망을 가져다줄 것이다.’라고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 얻는 믿음’은 본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너무 늦은 때’라는 것이 없습니다.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철석같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본문에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이 결코 ‘이행득구’를 가르치는 말씀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신행일치’ 즉 ‘참된 신앙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행위의 열매’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평생을 극악무도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죽기 직전에 그 모든 죄를 회개하는 진심의 신앙고백만 있으면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않고" 반드시 구원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천당 구원을 얻는 것, 이것만큼은 정말 자기 것을 자기가 챙겨야 합니다.
  아무리 자식에게 자기 눈이라도 빼어 줄 수 있는 부모라 하더라도 이것만큼은 대신 해 줄 수 없는 것이고, 아무리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라면 자기 그릇의 밥을 덜어낼 자식이라 하더라도 이것만큼은 결코 나누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부모의 신앙이 좋아도 자식이 그 덕을 볼 수가 없고, 아무리 자식이 교회생활을 열심히 해도 불신앙 가운데 죽은 부모가 그 공로 때문에 지옥에서 천당으로 ‘승급’될 길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귀한 구원의 기회를 각 사람에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여전히 허락해 주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한 편 강도’가 예수님께로부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는 구원의 선포를 듣게 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니겠습니까?
  그 강도는 그저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말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강도는 무슨 ‘선행의 공로’ 따위를 쌓을 기회는 전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신앙고백’ 하나만을 보시고 그를 ‘의인’으로 인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무리 평생을 악한 짓만 하고 살았다 하더라도 이처럼 쉽게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아무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죽을 때까지 ‘자기 죄에서 돌이켜 떠나’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끝내 영벌지옥에 떨어진다고 해서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항의할 수 있겠습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아직은 ‘은혜 받을 만한 때’, 아직은 ‘구원 받을 기회’를 연장시켜 주고 계시는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 더욱 부지런히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은 엄중한 심판 중에도 무한한 인애를 여전히 베풀어 주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9절 이하 32절에 “29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 아니냐 30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31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32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오로지 ‘자기의 죄’ 때문에 벌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여전히 베풀어 주고 계시는 ‘구원의 기회’는 마다하면서 그저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라는 원망과 항의의 목소리만 높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악의 걸림돌"에 스스로 걸려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죄’를 깨달을 줄 모르는 무지와 모든 것을 오히려 ‘하나님 탓’으로 돌리려 하는 교만이라는 자승자박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악한 유다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라고 간곡히 촉구하셨습니다.
  그들을 망하게 하는 것은 오직 ‘그들 자신이 저지른 죄악’ 때문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시거나 무섭게만 대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 백성이 그렇게 오해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그 얼마나 인애하고 자비로운지를 전혀 모른 불신앙의 극치나 다름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스스로 패망과 저주의 길을 자초하는 가운데 오히려 당신의 공의로우심을 비난하고 원망하고 있는 유다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실로 엄청난 사랑을 발휘해 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죽을 자"란 곧 ‘자신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받아 죽게 될 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 죽는 것까지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사회에서는 악인이 벌을 받게 되면 다들 통쾌하고 후련하게 여기기 마련입니다.
  유괴범이나 살인범이 잡혀서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당하게 되면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까지도 하나같이 다 잘 되었다고 기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와는 정반대이신 것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미국의 어느 법정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보았습니다.
  한 여자 판사가 재판장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피고인이 공교롭게도 그 판사의 동창생이었습니다.
  비록 친구였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오직 법에 따라 결국 유죄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선고를 내린 후에 그 판사는 그 피고 동창생에게 따뜻하고 진심 어린 위로와 격려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엄중한 공의’를 시행하면서도 ‘인간적인 사랑’을 끝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더욱 그러하십니다.
  비록 ‘끝내 죄악을 버리지 않는’ 자는 ‘각 사람의 행한 대로 심판’하시고 여지없이 영벌의 선고를 내리시는 엄한 재판장이시지만,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 죄로 죽어가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즉 그 모습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시고 끝까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하나님의 인자’와 상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애와 자비’는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 중에도 여전히 작동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심판을 내릴 때에도 결코 ‘공포의 재판장’이 아니라 본성적으로는 여전히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하나님을 가리켜 불공평하다고,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영벌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은 그 모두가 다 본인이 끝내 죄에서 떠나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제 발로 찾아가는 길일 뿐이며, 우리의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공의로우시며 그 공의조차 어디까지나 사랑으로 충만한 공의인 것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유다 백성이 민족 멸망이라는 벌을 받게 된 것은 순전히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했기 때문에 따라온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 죽이지는 않으시고 그나마 ‘남은 자’를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살게 해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때에라도 회개하고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즉 바벨론의 포로생활은 오히려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었고, 거기에 살던 유다 백성은 ‘특별한 은혜’를 누리고 있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은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라는 불만만 터뜨리고 있었으니, 그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뻔뻔하기 짝이 없는 적반하장이겠습니까?

  세상 사회에서도 ‘악을 심판하고 무죄한 자를 보호해 주는 것’이 곧 ‘정의’입니다.
  범죄자를 체포하는 형사나 유죄가 인정된 피고에게 형벌을 선고하는 판사를 두고 그 누구도 ‘나쁜 경찰’이나 ‘불공평한 재판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공의로운 법이 제대로 집행되어야’ 사회 치안이 유지되고 국가 기강이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죄인을 심판하시고 악인에게 영벌을 내리시는 것을 두고는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라는 궤변을 쏟아내는 것입니까?
  자기 동생을 죽여 놓고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라고 불평했던 가인의 후예들이 날이 갈수록 더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라고 오늘 말씀을 통해 만천하에 공포하고 계십니다.
  ‘지옥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를 위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은 마귀뿐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죄인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벌의 판결을 내릴 수 있는가?’라고 항의하는 자들에게 ‘내가 심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끝까지 구원의 길을 저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구세주를 보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은 믿을 수 있지만 심판주를 재림시킬 공포의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고 대드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처럼 악하고 교만한 자들이 죽게 되는 것조차 조금도 기뻐하지 아니한다.’라고 오히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성부 하나님을 감히 그 누가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구원’이 있으면 ‘심판’도 있어야 하며, ‘천당’이 실존하면 ‘지옥’도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며, ‘영생’을 믿는다면 ‘영벌’ 또한 믿어야 함이 당연합니다.
  실로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며 ‘인자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엄중한 ‘백보좌 심판대’의 날을 아직 연기시켜 주고 있을 동안 자신은 구원의 확신을 굳게 붙잡고 또한 아직 불신앙 가운데 있는 혈육과 이웃을 더욱 부지런히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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