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8-25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 10장 17-24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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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8-25
2019′경향의 강단(36)(2019년 8월 25일 / 주일 대예배)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 10장 17-24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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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 10장 17-24절/ 석기현 담임목사
노벨상 수상작인 ‘이반 제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에 보면, 어느 날 주인공인 ‘슈호프’를 위시한 강제노동수용소 죄수들이 여느 때처럼 이른 새벽에 작업장에 도착한 후 고된 하루의 노역을 시작하기 직전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가시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공사장 너머 아득한 지평선 위에 안개에 싸인 붉고 큰 태양이 솟아올랐다. 슈호프의 곁에 있던 알료시카가 아침 해를 보자 반가운 듯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움푹 패어 들어간 두 볼, 아무런 욋벌이도 하지 않고 그저 배급받는 식량만으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처지에 도대체 무엇이 좋아서 히죽거리는지 모르겠다. 라게리 내의 침례교도들은 일요일이 되면 저희들끼리 모여서 소곤거리곤 한다. 그 친구들에겐 라게리 생활 같은 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다. 작가 솔제니친은 본인이 직접 ‘라게리’ 즉 강제노동수용소에서 8년의 수형생활을 해 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습니다.
  그 수용소 안에서 그는 소련 정부의 기독교 탄압 때문에 잡혀 들어온 침례교 기독신자들도 만나게 되었을 것인데, 그때 받았던 인상과 경험을 이 ‘알료시카’라는 인물을 통해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배고프고 춥고 고통스러운 수형생활을 하면서도 ‘알료시카’는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는 순간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 모습은 당연히 ‘슈호프’를 위시한 다른 죄수들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좋아서 히죽거리는지” 도저히 이해가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솔제니친이 ‘알료시카’를 통해 묘사했던 어느 실제인물, 즉 수용소의 죄수로 살고 있던 어느 침례교 기독신자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해가 그 시베리아의 꽁꽁 얼어붙은 동토를 조금이나마 데워 주면서 떠오르는 것을 보며 그야말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느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그들만의 특별한 기쁨’을 함께 나눈 때가 있었는데, 바로 ‘칠십 인’이 특별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그 제자들은 자기네의 전도여행의 결과를 두고 무척이나 기뻐했는데, 예수님 역시 그 기쁨을 함께 나누어 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기쁨을 갑절로 넘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는 오직 기독신자들만 느낄 줄 아는 기쁨,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오직 예수님만은 전적으로 공감해 주시는 신비한 기쁨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독신자는 전도의 열매를 맺는 가운데 자신의 구원도 확신하게 됨으로써 크게 기뻐합니다.

  17절부터 20절에 “17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칠십 인”의 제자들은 전도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다들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의 이름” 앞에서 “귀신들도” 꼼짝 못하고 그들 앞에 “항복”하는 것을 직접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것처럼만 보였던 귀신이 자기네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만 하면 당장 도망쳐 버리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 벌어졌으니 그들이 그처럼 신이 났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그런 기쁨에 전적으로 공감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보고를 들으셨을 때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신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다른 해석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것을 옛날에 타락한 천사들이 하늘에서 쫓겨났던 사건을 언급하시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옛날 천사들 중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다가 순식간에 땅바닥에 떨어진 일이 있으니만큼 지금 너희들 역시 귀신 좀 쫓아내었다고 교만해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해석은 그 칠십 인의 제자들이 벌이고 있었던 전도활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사탄이 하늘에서 급히 내려오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보고 계셨다는 뜻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맥으로 볼 때 이 말씀은 그 칠십 인의 전도활동에 의하여 사탄이 곳곳에서 패배당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보고 계셨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칠십 인의 전도활동은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할 뿐인 예수님의 제자들이 작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몇 마디 말을 전하고 몇 사람의 병을 고쳐 주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상에 있어서 그들의 전도는 사탄을 곳곳에서 완전히 격퇴시키는 엄청난 승리였다고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해 주셨습니다.
  즉 그것은 마치 ‘번개가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사탄이 급속도로 추락하게 되는’, 실로 압도적이고도 명백한 승리였던 것입니다.

  그 제자들의 기쁨에 그렇게 공감해 주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또한 더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도록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고 곧이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 ‘뱀과 전갈을 밟는다.’는 말은 전도자들이 어떤 독에도 해를 받지 않는 특별한 면역력을 갖게 해 준다는 뜻이 아니라, 뒤에 나오는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얻게 된다.’는 말과 비유적으로 이어집니다.
  즉 귀신을 쫓아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원수의 힘을 압도할 권세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그런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결코 제자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부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보다 더 기뻐해야 할 사실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보다는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두고 더욱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귀신에게 항복을 받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신나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사탄을 이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는, 실로 뿌듯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더욱 기뻐해야 할 이유는 그런 외면적인 승리 그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승리가 ‘그들 자신’에 대하여 확인해 주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그들이 구원받는 택자의 명단에 들어가게 된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 ‘기록되다’라는 단어가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은, 그 구원이 결코 그들 자신의 능력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뜻합니다.
  그 칠십 인의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파송을 받아 전도사역에 승리하는 체험을 지금 막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들 자신도 하나님께로부터 택함 받고 구원을 얻은 확실한 증거가 되었으며, 그것을 생각할 때 그들의 기쁨은 갑절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특별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가게 되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인터넷이 없던 옛날에는 대학교 합격자 명단을 게시판에 공고했는데, 그 명단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펴보다가 자기 이름을 발견하게 된 수험생들의 기쁨이란 그야말로 하늘로 붕 뜨는 듯한 기분일 것입니다.
  불법 체류자가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받게 되어 그 나라에 당당히 거주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면 그 얼마나 살 맛 나는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우리 자신이 천국시민의 명단에 확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때 그 기쁨이 어떠할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어떤 게시판에도 천국 합격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 곳은 없고, 세상의 어느 관공서에서도 천국 시민증이라는 것은 발부하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곧 전도입니다.

  믿지 않던 내 남편, 내 친구, 내 이웃의 영혼을 마귀에게서 빼앗아 구출하는 작전에 성공하는 것은 정말 통쾌하지 않습니까?
  내가 지극히 사랑하던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나와 함께 천당 갈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어찌 기뻐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조차 확신이 없는 교인이라면 그런 기쁨을 알 리가 없고 따라서 전도할 생각조차 들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도를 할 줄 알고 그 전도의 열매를 얻게 될 때 기뻐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그 성도 자신에게 진짜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뚜렷한 증거인 것이며, 그런 까닭에 그 기쁨은 배가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 안에서 바로 그런 기쁨이 매주일 넘쳐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태신자를 갖고 싶어지고 해산신자를 얻게 될 때 뛸 듯이 기뻐하게 되는 것은 바로 본인부터가 천당을 확실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두 명밖에 없던 반을 인수 받은 주일학교 교사가 놀이터와 학교 앞에 나가 전도를 해서 다섯 명, 열 명의 반을 만들게 되었을 때의 기쁨은 정말 체험해 본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새 교우 중에서도 어린이 새소식반을 위해 방제공이나 교사로 봉사하게 되면서 그 신앙이 급속도로 자라게 되는 사례들을 아주 자주 듣게 되는데, 바로 똑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실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러면서도 전도사 못지않은 많은 사역에 희생적으로 충성하고 계시는 우리 교회의 심방장님들이지만, 사역발표를 할 때면 “경향교회의 심방장이 된 것 때문에 정말 행복합니다.
 ”라고 간증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기쁨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항복시키는’ 승리의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성도는 그 기쁨 위에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확신하는 기쁨까지 얹어져 배로 쌓이게 됩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시는 권세를 받아 부지런히 전도함으로써, 사탄은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져 버리고 반면에 자신이 해산시킨 새신자와 자기 자신의 영혼은 함께 천당구원을 받게 되었음을 인하여 크게 기뻐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 것을 진정 기뻐합니다.

  21절 이하 24절에 “2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 주시고 또 그 기쁨을 배가시켜 주셨던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서 스스로 크게 기뻐하시면서 제자들 역시 그 기쁨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본문에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기뻐하게 되신 동기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령께서 그처럼 기뻐하시도록 감동시키셨다는 뜻입니다.
  또한 여기의 ‘기뻐하다’라는 번역은 사실 원문의 뉘앙스에 비하면 오히려 약한 것으로서, 원래는 ‘기쁨이 넘쳐흐르다’ 혹은 ‘기쁨으로 흥분 상태에 이르다’라고 번역해야 할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처럼 성령 충만한 큰 기쁨에 젖게 했습니까?
  그것은 곧 성부 하나님께서 내리신 한 특별한 계시사역 때문이었습니다.

  그 계시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겨지고 반면에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난, 아주 독특한 계시였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 있어서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라 자처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숨겨진” 계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세상에서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바로 그 교만 때문에 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대신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에 지나지 않는 줄 아는 사람, 즉 그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항상 옳다.’는 사실과 또한 ‘그 말씀을 듣는 방법이란 오직 순종뿐’인 것을 아는 자만 이 계시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 것 즉 “이렇게 된 것”은 오직 “아버지의 뜻”이 그랬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특별한 방법으로 당신을 사람 앞에 나타내 주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지금 크게 기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직 겸손한 자만 깨달을 수 있는 특별계시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곧 화육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바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라고 증언하시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화육강세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그 구세주 속에 충만해 있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하여 볼 수 있고 알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게 해 주는 모든 것이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조금도 빠진 것 없이 완전히 넘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완벽한 교통을 나누고 계시는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바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아들...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인식하고 깨닫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존재가 달리 어디 있겠느냐는 말씀은 실로 지당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고귀한 지식, 곧 성자 하나님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되는 자들이 있는데, 바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거기에 덧붙여서 그 ‘성자 예수님의 뜻대로 계시를 받는 자’들 역시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뿐임을 지극히 명백하게 천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단 한 길, 오직 한 길, 유일한 ‘그 길’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바로 그와 같은 특별한 하나님의 계시가 되심을 인하여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스스로 그처럼 크게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를 이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여기 “조용히”라는 말은 ‘개인적으로 은밀하게’라는 뜻입니다.
  즉 앞에 나온 21절과 22절에 기록된 말씀들은 많은 사람들이 듣는 자리에서 공적으로 선언하셨지만, 이 23절 이하의 말씀은 제자들만 있는 자리에서 사적으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그처럼 은근히 제자들에게만 해 주셨습니까?
  그것은 곧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보는 것”이란 물론 지금 제자들이 뵈옵고 있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실로 “많은 선지자와 임금”들이 메시아를 만나고 싶어 했지만 끝내 보지 못했고 그 말씀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던 실로 위대한 선지자들조차도 예수님을 친히 만나지는 못했으며,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 임금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복만큼은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친히 뵙고 그 음성을 제 귀로 듣는 것이 따지고 보면 그 얼마나 엄청난 복인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 특권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인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신기한 기쁨을 가지신 분이 아니셨습니까?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죄악 세상 가운데 친히 내려오신 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조금이라도 불편해 하시거나 기분 언짢아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성부의 선하신 뜻이라고 기꺼이 순종하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그 본성이 하나님이시면서도 이 천하고 더러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들과 함께 사시면서 온갖 괴로움과 고통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그런 비하를 통하여 죄인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고 그처럼 진심으로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직 이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그 ‘말씀과 행하신 일’이라는 이 특별계시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할 나위 없이 분명히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로워서, 혹은 소위 득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선해서 그 공로의 대가로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열린 것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그 길’이 되어 주신 까닭에 나와 같은 죄인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연히 아주 멋진 남자를 만나 사귀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남자가 바로 왕자님이었다는 것은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왕자의 방문을 받게 된다는 것은 원래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특권이며, 심지어 바로 그 왕자의 신부가 되어 자기도 왕가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숨이 멎을 정도로 행복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와 주셨다는 사실 앞에 우리가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예수님을 통하여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면 어찌 기쁨이 넘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예수님을 반가이 영접함으로써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아지는” 행복을 누리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라는 소망을 간직하며, “예수 나의 기쁨”이라는 고백에 “아멘 할렐루야”로 항상 즐거이 화답하며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으로 가는 어느 길목에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그처럼 함께 나누는 기쁨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 길은 십자가의 고난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더 가까워지고 있던 주님의 마지막 여정이었습니다.
  어쩌면 침울한 분위기와 무거운 발걸음으로만 채워졌을 것 같은 그 길에 오히려 스승과 제자가 함께 기쁨을 주고받는 신기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기쁨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된 기독신자들만 누리고 나눌 수 있는 놀랍고 신비한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기독신자만 느낄 줄 아는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느끼는 기쁨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면서 ‘알료시카’가 미소 짓는 모습에 ‘슈호프’가 ‘도대체 무엇이 좋아서 히죽거리는지 모르겠다.’라고 냉소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유머 코드’가 다른 사람이 서로의 유머 감각을 이해할 수 없듯이, 기독신자들끼리만 통하는 ‘기쁨 코드’를 불신자는 도저히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신자의 기쁨이란 불신자처럼 무슨 ‘배부르고 등 따뜻한 인생’이나 ‘마음대로 노는 재미’에서 나오는 것과는 아예 차원이 다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또한 자기가 전도한 사람들이 함께 ‘영혼구원’ 받았음을 확신하는 데서 오는, 뛸 듯이 넘쳐흐르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나 같은 죄인을 먼저 찾아와 주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주님과 사귀게 되는 이 기적적인 ‘영적교통’의 특권을 인하여 감격의 눈물이 절로 쏟아지는 기쁨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교회를 통하여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런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통계를 보아도, 사람이 혼자 코미디 쇼를 볼 때보다는 여럿이 함께 볼 때 훨씬 더 잘 웃고 더 크게 웃는다고 합니다.
  즐거움은 많은 사람이 같이 나눌 때 배가(倍加)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쁨 역시 주님과 함께, 그리고 다른 성도들과 함께 나눌 때 몇 배로 증폭되는 것이며, 바로 교회가 그런 기쁨을 항상 나누는 실로 즐겁고 행복한 공동체인 것입니다.

  주님의 분부를 따라 전도함으로써 사탄을 이기고 영혼을 건져내는 통쾌한 승리를 맛보게 될 때 그로 말미암아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함께 즐거워하는 기쁨 - 이것이 성도가 남아 있는 생애를 통하여 반드시 맛보아야 할 기독신자 고유의 기쁨입니다.
  성자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이 땅에 화육하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고 믿고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신 이 특권을 날마다 감사하면서 ‘성령으로 기뻐하는 것’ - 이것이 곧 성도들이 이 지상천국인 교회에 모일 때마다 뜨겁게 공감하고 넘치도록 공유하게 되는 신령한 기쁨입니다.
  비록 우리의 인생에 무거운 짐이 남아 있고 우리가 지고 따라가야 할 크고 작은 십자가의 고난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구원 확신’과 ‘주님 동행’의 은총을 통하여 오늘도 충만하게 내려 주시는 이 ‘영적 기쁨’을 마음껏 만끽하면서 온 세상 앞에서 크게 자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