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8-11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누가복음 4장 14-30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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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8-11
2019′경향의 강단(34)(2019년8월11일 / 주일 대예배)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누가복음 4장 14-30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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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누가복음 4장 14-30절 / 석기현 담임목사
거리를 다니다 보면 ‘아무개가 행정고시에 합격한 것을 축하합니다.’라든지 ‘아무개가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것을 축하합니다.’라는 등의 플래카드가 ‘아무 동네 주민 일동’의 이름으로 달려 있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좀 작은 동네나 시골에서는 ‘서울의 명문대학교에 입학’한 것을 두고도 그런 축하 플래카드를 내걸기도 합니다.
  어쨌든지 간에 자기 동네에서 그런 인물이 나왔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무언가 큰 성공을 거두고 열렬한 환대를 받으면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을 두고 ‘금의환향’ 즉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오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고사성어의 유래를 따지면 그런 의미로 시작된 말이 전혀 아니라고 하는데, 하여튼 세월이 지나면서 요즘 사용하는 의미로 정착이 되었습니다.
  특히 옛날에는 과거에 급제한다든지 재상이 된 사람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 그야말로 온 마을이 들썩거리는 엄청난 경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와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고 계셨습니다.
  본문 14절과 15절에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갈릴리에 돌아가시니”라고 한 것은, 그동안 예수님께서는 주로 유대 지방 즉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에서 사역하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사역하시다가 이제 고향 시골로 다시 돌아오시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 기간 동안 나사렛 동네의 주민들은 ‘말씀을 잘 가르치시는 랍비’로, ‘불치병을 단번에 치유해 주시는 선지자’로 “소문이 사방에” 퍼져 있던 예수님을 온갖 기대와 설렘 가운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즉 어릴 적의 모습부터 너무나 익히 잘 알고 있던 자기 동네 출신의 예수라는 사람이 지금은 온 나라에 소문난 유명인사가 되어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돌아오시게 되었을 때 그 분위기는 ‘금의환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전국적인 스타가 된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환영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던 고향 동네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께 야유를 던지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려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까?
  이 시간 저는 참된 기독신자가 과연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독신자는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자’에서 머물지 않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6절부터 22절에 기록하기를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당시 “회당”에서의 “안식일” 예배는 어떤 특정 설교자가 항상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회당장이 알아서 그 날의 예배를 진행할 사람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동네에서 방문한 랍비가 있으면 그에게 설교를 부탁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경우는, 이미 갈릴리 다른 지역의 회당들에서 잘 가르치신 것으로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에 그날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이 강단에 서게 되신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기정사실로 예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날 봉독하게 된 “성경”“선지자 이사야의 글” 즉 이사야서였는데, 그 두루마리를 받아 드신 예수님께서는 그 중에서 61장 1절과 2절의 말씀을 찾아 펴셨습니다.
  그것은 곧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에게 복음을 선포해 주실 메시아의 은혜로운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한 유명한 구절이었습니다.
  그 구절을 봉독하신 후에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랍비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일어서서 읽지만, 그 내용을 해석하고 가르칠 때에는 자리에 앉아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지금 저 예수라는 선생이 과연 어떤 설교를 할까?’ 하고 궁금한 마음으로 그를 주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예수님께서 어떤 설교를 하셨는지 그 전체 내용은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확실한 것은 그 말씀의 결론이 21절에 기록된 대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는 말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이 이사야에 기록된 메시아의 예언이 곧 예수님 당신을 통하여 그날 그 장소에서 그 나사렛 사람들 앞에서 성취되었음을 공포하신 것이었습니다.

  고향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첫 설교에 대한 나사렛 동네 사람들의 반응을 두고 22절 상반절은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라는 말은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후에 나사렛 사람들이 다들 예수님에 대해서 한마디씩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긴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처럼 설교를 잘하시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아무 고등교육도 받지 못하면서 성장한 것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삼십 세 쯤 되신 어느 날 갑자기 동네를 떠나셨다가 이제 다시 돌아오신 이 예수님이 설교를 너무 잘하시니까 ‘예수가 언제 어떻게 저렇게 되었나?’ 하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이어서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사실을 상기해 내었습니다.
  지금 막 예수님께서는 구약 이사야서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의 말씀을 봉독하고 은혜로운 설교를 통하여 당신이 곧 그 메시아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렛 사람들은 그들의 귀를 통하여 그 예수님의 전하신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다’는 것까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후에 그들은 ‘이 사람은 우리가 잘 알던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즉 그들이 알고 있던 예수님의 육신적 배경에 대한 지식 때문에 오히려 그 마음이 가리어짐으로써, 예수님께서 지금 그 은혜로운 말씀으로 자증하는 사실 즉 예수님이 곧 그 예언된 메시아임을 믿는 믿음에 이르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참 소문대로 설교는 잘한다마는 우리 동네의 그 별 볼일 없는 목수 아들이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 문을 굳게 닫아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스스로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을 진정으로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데에 있어서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살 동안 ‘주여, 주여’라고 했던 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당신께서 재림주로 오실 때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추상같은 언도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지 않으셨습니까?
  불신자들이야 그냥 ‘두려워하고 떨면서’ 지옥으로 떨어질 뿐이겠지만, 그처럼 ‘울며 이를 갈면서’ 영벌의 심판을 받게 될 사람들이 바로 이 땅에 살 동안 예수님을 그저 ‘잘 알기만 했던 교인’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아마 예상보다는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재림의 그날 어쩌면 우리는 교회에서 장로나 집사나 권사까지 했던 교인들 중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될지 모릅니다.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명색이 신학교수라고 하던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숫자가 지옥의 판결을 받게 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게 될지도 모릅니다.
  양과 염소를 좌우로 나누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목사들 중에도 영벌에 떨어지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기가 막히게 될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일자무식이고 지적장애자라 할지라도 그저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을 순전히 믿었던 참된 신자들은 그 새 예루살렘 성에서 ‘십사만 사천 인의 성도’ 가운데 당당히 서게 되는 아름다운 장면을 우리는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예수님을 ‘알기만’ 했던 목사요 신학자요 장로였던 반면에, 후자는 다른 것은 몰라도 오직 예수님을 믿는 신앙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지켰던 진짜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그냥 알고만 있는 것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과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 석 자를 안다고 방심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원래부터 소위 ‘모태신앙’이고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혹은 꽤 오래 교회에 다녀서 예수님의 행적께나 귀동냥으로 좀 배웠다고 해서 ‘나도 신자이려니’ 하는 막연한 생각에 머물러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진짜 팬은 자기 팀의 선수의 방어율이나 타율에 대한 정보를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수의 능력을 철저히 믿습니다.
  홈팀이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했을 때나 9회 말 마지막 공격 찬스를 잡았을 때에도 ‘저 투수라면, 반드시 막아 줄 거야.’, ‘저 타자라면 지금 한 방 터뜨려 줄 거야.’ 하고 끝까지 신뢰하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예수님의 일생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조금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예수님이 곧 ‘성자 하나님이시며 나를 영벌의 지옥으로부터 반드시 구원해 주실 참된 구세주’라고 철석같이 믿어야 합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약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약이 치료할 수 있는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자유에 대해 아는 죄수가 감옥에서 죽어갈 수도 있습니다.
  사업가는 돈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파산할 수도 있고, 뱃사람은 항구가 어디인지를 알면서도 암초 위에서 표류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인이 그리스도에 대해 알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 그 분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을 알기만 하는데서 머무르면 결코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에 대해 아는 얄팍한 지식만 가지고 있다가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던 ‘나사렛 사람’이 아니라, 이 예수님이 곧 성경의 예언대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진심으로 믿고 영접하는 인격적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신자는 ‘예수님에게 개인적인 소원을 요구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셨음을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3절 이하 30절에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사람들의 분위기가 의심의 그림자로 덮여가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당시의 유명한 속담이었던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당신에게 어떤 기적을 요청할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의 다른 동네들, 예를 들면 가버나움 같은 곳에서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지만 정작 이 나사렛에서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만한 기적을 행하지 않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의사가 정말 용하다면 자기 병부터 스스로 고쳐 보여야 하듯이, ‘이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 주장하는 대로 진짜 메시아라면 다른 동네에서만 기적을 행할 것이 아니라 이곳 고향에서부터 제대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라는 것이 바로 나사렛 사람들의 속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이 가난한 자, 병든 자, 눌린 자를 위해 오신 메시아라면 우선 자기 고향 사람들의 당면 문제부터 해결해 주어야 우리가 믿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겠느냐?’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와 같은 요구를 잘 아시면서도 전혀 들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구약 시대부터 지금까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는” 모순적인 현실을 두고 크게 한탄하시면서, 옛날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일을 예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시절에 “삼 년 육 개월”이라는 오랜 기간 “큰 흉년”이 계속되었고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이방 “시돈 땅”에 살던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만 엘리야가 보냄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렙다의 과부’가 그 어려운 형편에도 엘리야를 대접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에 오직 ‘하나님께서 그 과부를 택하셔서 엘리야를 보내셨다.’라는 사실만 지적하고 계시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나아만”의 경우에도 그가 일국의 군대장관이면서도 엘리사를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이나 그가 선지자의 말을 믿고 요단강에 몸을 담갔다는 점은 전혀 언급도 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병자”들이 있었지만 ‘유독 이방사람 나아만 한 사람만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깨끗함을 얻게 해 주셨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의 그 많은 가난한 자, 그 많은 병자들은 제쳐놓으시고 오직 이 두 이방인만 ‘택하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요점을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밝혀 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예들을 들어서 나사렛 사람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도는 분명합니다.
  ‘지금 너희 이스라엘인들이 만일 나를 메시아로 영접하지 않으면, 옛날 엘리야와 엘리사 때에도 그랬듯이 하나님께서 나를 이방인에게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나를 영접하고 구원받게 하실 것이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하고 많은 나라와 백성 중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동네에 친히 와 계셨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되고 약속된 구세주께서 지금 그들 앞에 몸소 찾아오셔서 그 은혜로운 말씀을 통하여 당신이 곧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이심을 증언해 주고 계셨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그 자체가 이미 엄청난 특권이요 최고의 복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향하여 오히려 자기네를 위해 무언가 다른 일을 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으실 것이 분명해지자, 그들은 “크게 화가 나서” 아예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셨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자기네의 인간적인 요구만 앞세우는 가운데 자기 동네까지 친히 찾아와 주신 구세주를 배척했던 나사렛 사람들은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택함 받은 진짜 선민이 될 수 있는 길을 영영 놓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에게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구세주로 오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돈이 없고 병들어 있고 힘든 인생을 살고 있는 그것이 곧 구원받게 될 권리나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단 한 가지 이유나 동기는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있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사렙다 과부가 ‘가난하고’ 나아만 장군이 ‘병자라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여’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 주신’ 까닭에 구원 얻게 된 것이라고 정확하게 깨우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많은 교인들이 ‘나사렛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대하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것이 곧 나의 돈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나의 병을 고쳐 건강하게 해 주고 나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두고 예수님에게 떼를 쓰고 무언가 얻어 내는 것이 곧 신앙생활인 줄로 크게 착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나를 선택해 주시고 당신의 양자로 삼아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내게 보내 주셨다는 이 엄청난 복음보다는, 내가 원하는 몇 가지 소원을 성취 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고 착각하면서 예수님을 보채는, 실로 못난 꼴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팀 선수가 자기가 원하는 플레이를 못해 준다고 당장 야유를 보내는 것은 저질적인 구경꾼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팬은 그 스타플레이어가 자기 팀에 들어 있는 자기편이라는 그 자체만 두고서도 항상 기뻐하고 만족하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내게 이런 것, 저런 것 해 주면 메시아인 줄로 믿겠다고 하는 것은 정말 수준 낮은 교인입니다.
  진짜 신실한 기독신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나의 구세주가 되게 해 주신 이 사실 하나만 두고도 자다가도 벌떡 깨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소위 ‘낮져밤이’, ‘낮이밤져’, 혹은 ‘낮이밤이’, ‘낮져밤져’라는 희한한 속어가 돌고 있습니다.
  연인의 사이가 어떤 문제를 두고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느냐로 정의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서로 상대방에게 자기요구만 내세우고 상대방을 자기 뜻대로 휘어잡으려고 하는 관계가 어떻게 진정 행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해 주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정말 행복해 할 줄 아는 것이 진짜 연인입니다.

  예수님과의 사랑 관계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은 너무너무 고마운 은혜가 아닙니까?
  그 예수님께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나를 먼저 선택해 주시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은 실로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이 구세주 덕분에 우리가 죄로 인해 야기된 온갖 인생의 눌림과 고통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사탄의 포로요 마귀의 종노릇 하던 옛사람으로부터 해방을 받게 된 것은 그야말로 인생 최고의 복덩어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그저 예수님께 요구만 하다가 끝내 불만과 불신에 빠지고 만 ‘나사렛 사람’이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정말 날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죄인의 친구로 내게 보내 주셨구나.’ 하고 항상 감사드리는 ‘사렙다의 과부’와 ‘나아만’ 같은 구원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에 있어서 예수님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이 교회야말로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 안에도 ‘나사렛 사람’들과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참된 믿음이라고는 전혀 나타낼 줄 모르고 그 대신 조금 아는 것만 내세우는 교인, 진정한 감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그 대신 항상 요구 조건만 내거는 가운데 걸핏하면 불만과 원망의 소리까지 높이는 아주 수준 낮은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만 모여 있는 교회는 실상 예수님에게 ‘화를 내고’ 예수님을 ‘쫓아내며’ 아예 예수님을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 하는 이 시대의 ‘나사렛’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실로 ‘그 선지자께서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교회야말로 예수님께서 항상 ‘금의환향’의 영접을 받으시는 곳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은혜로운 복음이 한 마디 한 마디 선포될 때마다 성도들의 입술에서 ‘아멘’의 화답이 예배당을 진동시켜야 하며, 이 구세주께서 그 몸 된 교회를 중심으로 행하시는 위대한 구속사를 온 성도들이 체험하면서 절로 ‘할렐루야’의 찬송이 힘차게 터져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야말로 예수님을 그저 알기만 하는 ‘머리만 큰 교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종일관 철저하게 믿는 ‘신전인격적인 신앙인’이 모여 있는 곳이며, 교회만은 예수님에게 요구나 하고 야유까지 하는 ‘구경꾼 교인’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내 구주로 모시고 동행하게 된 것을 두고 온 마음과 몸을 바쳐 감사드릴 줄 아는 ‘신행일치의 성도’들이 모인 곳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에 대해 좀 알게 되었다고 해서 자신이 이미 주님을 진정으로 영접했다고 방심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예수님께 기도를 드릴 때에도 그저 자신의 개인적인 요구 사항들만 열거하면서 마치 그것이 신앙생활인 줄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식’과 ‘기복’은 일견 신앙생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나사렛 사람’들이 저질렀던 시행착오와 신성모독의 길로 빠지게 만들 뿐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 뿐 아니라 이 주님이 바로 나의 구세주이심을 굳게 믿는 ‘신앙’과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기 이전에 먼저 이 성자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친히 찾아와 주셨음을 뜨겁게 ‘감사’할 줄 아는 마음과 자세를 지킴으로써, 이 경향교회에 모일 때마다 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함께 고백하고 소리 높여 찬송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