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8-0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욥기 38장 1절 – 39장 30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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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8-04
2019′경향의 강단(33)(2019년8월 4일 / 주일 대예배)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욥기 38장 1절 – 39장 30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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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욥기 38장 1절 – 39장 30절 / 석기현 담임목사
제가 대학생 시절에 ‘피너츠 퍼레이드’(Peanuts Parade)라는 만화 시리즈를 애독했는데, 주인공 ‘찰리 브라운’과 그의 애견 ‘스누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만화입니다.
  ‘피너츠 퍼레이드’는 그냥 웃기기만 하는 만화가 아니라 상당히 의미 깊고 때로는 신학적인 메시지도 담고 있는데, 그 중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찰리 브라운은 ‘리틀 리그’에 속해 있는 자기 동네 꼬마 야구팀의 감독 겸 피처인데, 어느 날 이웃 동네 야구팀과 경기를 하면서 늘 그랬듯이 상대 타자들에게 난타를 당합니다.
  그때 찰리 브라운은 내야수들과 작전타임을 가지면서 “We’re getting slaughtered again, Schroeder... I don’t know what to do... Why do we have to suffer like this?” (슈로이더야, 우리 팀은 또 다시 박살나고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왜 우리는 맨날 이런 식으로 고통을 당해야 하지?)라고 한탄합니다.
  그러자 영재 피아니스트인 동시에 캐처인 슈로이더는 “Man is born to trouble as the sparks fly upward” (KJV)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개역한글)고 대답합니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안이 벙벙해진 찰리 브라운에게 주일학교 모범생이자 유격수인 라이너스가“찰리야, 쟤는 지금 욥기에서 인용을 한 거야. 5장 7절.”이라고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는 “사실 고통의 문제란 아주 심오한 것이야, 게다가...”라고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에, 라이너스의 왈가닥 누나로서 냉철한 현실주의자인 루시가 센터필더에서 피처마운드까지 달려와서 “내가 늘 말했듯이, 만약 어떤 사람에게 불행이 닥친다면 그건 순전히 본인이 뭔가 잘못했기 때문이라구.”라고 냉큼 끼어듭니다.
  그러자 슈로이더가 “그게 바로 욥의 친구들이 욥한테 한 말이야. 하지만 나는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라고 반박합니다.
  하지만 루시는 더욱 언성을 높이면서“하지만 욥의 아내는 어떡하고? 난 그녀가 한 말이 정말 일리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전혀 인정해 주지 않고 있어.”라고 주장합니다.
  슈로이더도 지지 않고 “나는 고난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성숙해질 수 없다고 생각해... 고난이란 실제로 아주 중요한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 말에 루시는 더욱 흥분하면서“고난당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는 와중에 모든 내야수 외야수들이 다 피처마운드 주위에 모여들어서 각자의 의견을 왁자지껄하게 쏟아냅니다.
  항상 지저분한 모습으로 다니는 픽펜이라는 아이는 “하지만 고통은 어쩔 수 없는 인생의 한 부분이야.”라고 제법 철학적인 고찰을 내 놓는가 하면, 라이너스는 아까 언급했듯이 착실한 주일학교 모범생답게 “욥기에서 강조하는 주제가 ‘인내’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야! 내가 보는 관점은 이래...”라고 아주 심오한(?) 분석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갑자기 신학토론회장으로 변해 버린 마운드 한가운데 서 있던 찰리 브라운은 어이없어 하면서 “I don’t have a ball team... I have a theological seminary!” (난 야구팀을 가지고 있는 게 아냐... 나는 신학교를 하나 운영하고 있어!)라고 한탄하게 됩니다.

  슈로이더가 인용한 욥기 5장 7절은 개역개정 4판에는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그냥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는 개역한글의 번역이 훨씬 더 원문의 어감을 잘 전달해 줍니다.
  즉 불을 피우면 불티는 반드시 위쪽으로 날아올라가는 것처럼 사람의 인생에도 반드시 고난이 동반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에 가서는 아까 그 찰리 브라운의 친구들처럼 각양각색입니다.
  루시나 욥의 친구들처럼 ‘고난을 당하는 것은 본인이 무언가 잘못했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라고 인과응보 식으로만 판단하는 사람도 있고, 슈로이더처럼 ‘고난을 통과해 보아야 사람이 더욱 성숙해진다.’라고 긍정적으로 보려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인생에 있어서 필연적이고도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설명해 주고 계십니까?
  이 시간 저는 하나님께서 바로 이 난제에 대하여 욥에게 친히 대답해 주신 말씀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창조주이신 까닭에 피조물인 사람에게 인생의 고난에 대한 이유를 해명해 주셔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욥기 38장 1절부터 4절에 “1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본문에서부터 드디어 욥기 전체의 결론 부분이 시작됩니다.
  이 욥기 38장 앞에는 3장부터 바로 앞의 37장에 이르기까지 장장 서른다섯 장에 걸쳐서 오로지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 오가는 변론만 이어졌습니다.
  비록 그 대화는 길지만 초점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욥기 1장과 2장에서 벌어졌던 일, 즉 욥이 당한 엄청난 시련을 두고 ‘도대체 왜 이런 고난이 욥에게 닥쳤는가?’라는 문제를 두고 욥의 친구들과 욥 사이에 기나긴 논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문제는 비단 욥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구나 다 한번쯤은 가져볼 수 있는 질문이며, 특히 신자에게 일어났을 경우에는 더욱 난해하게만 여겨지는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왜 경건하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신자에게 환난과 재앙이 닥치게 되는가?’ - 이 질문은 목사가 심방을 하면서 교인으로부터 자주 받게 되는 현실적인 질문이면서도 또한 시원하게 대답해 주기 어려운 난제인 것입니다.
  물론 욥의 친구들 역시 욥이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해 줄 수는 없었고, 그 긴 토론을 서로 주고받고 난 후에도 그 어떤 명확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 시작하셨으니, 사실 욥으로서는 기다리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 친구들을 상대로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께 직접 하소연하는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욥처럼 “사람이 아니신”(욥 9:32) 까닭에 직접 만나서 해결을 받을 길도 없고 “(하나님과 욥)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는”(욥 9:33) 까닭에, 그저 혼자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답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시니, 욥은 당장 귀가 솔깃해지면서 과연 하나님께서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이 고난에 대하여 도대체 무엇이라고 시원하게 대답해 주실지 기대에 찬 마음으로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해 주셨습니까?
  그 하나님의 첫 일성은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는, 천만뜻밖의 말씀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욥 네가 누구이기에 이처럼 무식한 말로 참된 이치를 흐리게 만들고 있느냐?’라는, 청천벽력 같은 호통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폭풍우 가운데서” 나타나신 것도 이처럼 첫마디부터 욥을 엄히 꾸짖으신 것과 딱 들어맞는 배경이었습니다.

  사실 지금 욥이 당하고 있는 입장은 제삼자가 보기에도 그저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경건하게 살고 있던 신자가 최악의 끔찍한 재난을 아무 이유 없이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물론 사탄의 시험이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허락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욥은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의심하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을 하면서, 그저 ‘하나님께서 도대체 왜 내게 이런 감당치 못할 시련을 주시나?’라고 궁금해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신실한 욥을 지금까지 보고 계시던 하나님 편에서 이제 드디어 욥에게 무슨 대답을 해 주기 시작하신다면 그 첫 마디는 어떤 칭찬이나, 아니면 최소한 무슨 위로나 격려의 말씀은 되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와 정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욥을 향하여 ‘도대체 네가 누구라고 그런 무지한 말로 진실을 흩뜨리고 사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느냐?’라고 대갈일성을 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님도 너무 심하시지 않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왜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렇게 호통을 치시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고 욥을 다그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땅의 기초를 놓은” 창조주이시며, 욥은 그 천지창조 때에 아직 존재조차 없었다가 나중에 지음을 받은 피조물에 불과함을 일깨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이하 5절부터 38장 마지막 절까지 내내 이어지는 말씀의 주제 역시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8절)에 그 경계를 그으시고 “아침에게 명령하여”(12절) 새벽이 시작되는 시점을 정하실 때에 욥은 그 창조사역에 관여하기는커녕 목격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은 자기가 세상에 태어난 후에도 하나님께서 하늘에 모아 놓으신 “삼성(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의 띠”(31절)를 풀어 버릴 능력이 없으며, “구름”(34절)에게 명령하여 큰 비가 내리게 할 도리도 없고,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해”(39절) 줄 수도 없습니다.
  그 모든 ‘자연계의 운동’과 ‘생태계의 질서’는 100퍼센트 전부 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의해 지금까지 유지되며 작동되고 있을 뿐이지 욥으로서는 털끝만큼도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하나님의 대답의 전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너를 만든 창조주이고 너는 나의 피조물에 불과하지 않느냐? 그러니 내가 너의 인생에 무슨 일이 벌어지게 한다 해도 그것은 순전히 내 마음일 뿐이다. 그런데 네가 감히 어떻게 내게 이런 것 저런 것 따지면서 질문할 수 있다는 말이냐?’라는 뜻이었습니다.
  즉 욥이 자기가 당하고 있는 환난에 대하여 하나님께 해명해 달라고 요구하는 자체가, 이미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와 현실을 도외시하고 있는 실로 ‘어두운 생각’이요 ‘무지하기 짝이 없는 말’일 뿐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욥이 환난을 당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런 것들은 다 덮어 놓고 그저 욥이 하나님 앞에서 항상 나타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서만 이처럼 큰 음성으로 호통을 치시면서 깨우쳐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고난을 당하게 될 때 그 무엇보다도 먼저 이 기본자세부터 꼭 지켜야 합니다.
  자기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논리적’으로 따지고 ‘법적’으로 항의하려 든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미 창조주 앞에서 자기가 더 똑똑하고 정당한 것처럼 여기는 엄청난 교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에게 책잡힐 만한 무슨 부당한 일,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범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말도 안 될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하나님께서도 때로는 내게 무슨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실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왜 저를 이렇게 가난하게 살도록 버려두십니까?’, ‘하나님, 도대체 왜 제게 이런 불치병을 주시는지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이라도 좀 해 주십시오.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라는 불평과 항의를 기도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의 소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가 당하고 있는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참된 기독신자의 입에서는 결코 그런 말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시며 그 하나님은 항상 거룩하고 선하시며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있다면, 어떻게 감히 그 하나님께 꼬치꼬치 따져 들 수가 있겠습니까?
  내 인생에 아무리 설상가상의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겸손의 자세를 끝까지 견지하면서 그 하나님의 선하고 공의로운 섭리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람은 피조물 중에서 영장이기는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께 인생의 고난에 대해 따질 수 있을 만한 자격은 없습니다.

  39장 9절부터 12절에 “9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10네가 능히 줄로 매어 들소가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써레를 끌겠느냐 11그것이 힘이 세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를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12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39장 역시 사람으로서는 근처에도 갈 수 없는 높고 위대한 하나님의 창조 주권을 계속 강조하면서, 그와 동시에 사람은 창조주는 고사하고 다른 피조물들과 비교해 보아도 열등하며 무력한 면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9절에서 “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라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설의법적으로 질문하시는 말씀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들소”는 이름 그대로 ‘들에서 사는 소’로서 집에서 가축으로 키우는 소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른 야생동물입니다.
  소가 주인에게 복종하고 주인을 위해 “기꺼이... 일하는” 것은 송아지로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자랐고 그렇게 훈련을 받으면서 키워졌기 때문이지만, 들소는 물론 그런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들소란 ‘길들여지지 않은 소’이며 또한 ‘길들일 수도 없는 소’인 것입니다.

  그러니 들소에게 무슨 농기구를 메워서 “이랑을 갈거나” “써레를 끌게” 만들 길은 없으며, “외양간”에서 억지로 사육하는 것조차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이어지는 11절과 12절도 그런 야생성을 가진 들소인 까닭에 사람이 자신의 이로움을 위하여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합니다.
  들소는 집에서 키운 소보다 기운은 훨씬 더 세겠지만 그 들소를 이용해서 “곡식을 집으로” 운반한다든지 “타작마당”에서 하는 작업에 도움을 받을 길은 전혀 없습니다.
  분명히 힘은 있는 짐승이지만 사람이 그 들소를 “의지”하여 사람이 하는 “수고”를 대신 시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분명히 사람보다 저급한 동물인 들소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입니다.
  원래 야생으로 태어난 동물, 사람보다 힘이 세고 또 성격도 난폭한 동물은 아무도 다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39장의 나머지 구절들도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의 한계성들을 계속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산(에 사는 야생) 염소”“암사슴”(1절)이 “새끼”들을 낳을 때부터 시작해서 그것들이 성체로 자라가는 전 과정에 그 어떤 간섭도 전혀 할 수가 없습니다.
  “타조”(13절)는 자신의 “알”조차 제대로 간수하지 못할 정도로 “지혜”가 없는 동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길 정도로 주력에 있어서는 사람이 상대도 될 수가 없습니다.
  “매”(26절)와 “독수리”(27절)는 “공중에 떠서” “그 눈이 멀리 보며” “먹이를 살피지만”, 사람의 육안이란 그런 맹금류의 놀라운 시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비록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타공인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동물하고만 비교해 보아도 열등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짐승을 향해서도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짐승조차 제 뜻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어찌 감히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인생들 중에는 감히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자들이 꽤 많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당장 벼락부자로 만들어 주지 않으십니까?’, ‘하나님, 지금까지 제가 고생할 만큼 했지 않습니까? 인제는 제게 기적적인 치유를 베풀어 주셔야지요.’라고, 하나님을 마치 자기 가축 부리듯이 시켜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 또 그것을 기도라고 하는 교인들까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자세입니까?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기본 중의 기본도 안 되어 있는, 실로 건방지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신성모독일 뿐입니다.

  실제로 사람은 ‘특별한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천지만물 중에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해 놓으신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 어떤 동물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코스모스’(우주만물)의 세계를 사람처럼 인식할 수 없으며, 그 무엇보다 오직 사람만 유일하게 ‘신의 존재’를 생각할 줄 아는 ‘고등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오히려 ‘오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가 하면 ‘신이 하는 일에 대한 모순’까지 지적하려 합니다.
  인류역사에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기아, 재앙, 압제, 전쟁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세상에 이런 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인생에 이처럼 고통스러운 일들이 닥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고 계시는가?’라는 따위의 항변을 토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제 잘난 듯이 나오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는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그 만물보다 못한 것만 해도 한둘이 아니지 않느냐?’라고 꾸짖으십니다.
  실제로 동식물들 중 부분적으로 사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기능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들은 이루 다 셀 수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감히 사람이 스스로 창조주와 맞상대할 수 있는 ‘피조물의 대변자’쯤 되는 줄로 착각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요즘 흔히 쓰는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자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른이 버릇없는 젊은이를 야단칠 때도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는 것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이것은 어른과 젊은이의 연령 차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사춘기를 다 지나고 대학 졸업까지 했다 하더라도, 아니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면서 본인 스스로도 부모가 되었다 하더라도 자기보다 한 세대 이상의 차이가 날 정도의 어른 앞에서라면 젊은이로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입조심, 몸가짐조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이 절대주권자 앞에서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별한 피조물’로 지음 받았다 해도, 아무리 사람이 ‘피조물 중에서는 가장 고등한 존재’라 해도 그것이 사람에게 하나님과 맞먹을 수 있는 특권 따위를 제공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조금이라도 ‘오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피조물 중에서는 가장 우수하니까 하나님과 좀 따질 것은 따져 볼 만한, 경우에 따라서는 불만제기나 항의도 해봄직한 위치에 있다고 절대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경우나 상황에도 사람이 감히 항변하거나 자기 소원 성취를 위한 심부름꾼쯤으로 여길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단 한순간도 잊지 말고, 이 하나님을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받들어 섬겨야 할 창조주와 절대주권자로만 경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앞장까지 욥은 내내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질문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라고 말씀해 오셨을 때에는 단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극히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 앞에서 미물의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을 깨닫게 되자 그야말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니 지금까지 감히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는 자체부터가 너무나 무례하고 오만한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종말까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자체는 사람으로서 지극히 고마운, 황공무지한, 그야말로 고소원불감청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만만히 대하면 결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좋게 대해 주신다고 해서 그 하나님을 우리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처럼 착각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없이 자상하고 친근하게 다가와 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그 하나님께 제법 ‘컴플레인’도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그것은 ‘잘해 주시는 아버지한테 버릇없이 기어오르는 자식’ 꼴이 될 뿐인 것입니다.

  ‘신자가 왜 고난을 당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답은 바로 ‘성화’입니다.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성도에게 고난이 닥치는 것은, 그 연단을 통해 더 거룩하고 더 강하게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대답을 들려주십니다.
  그 대답은 한마디로 ‘나는 절대주권자다!’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위대하시기 때문에 당신께서 만드신 피조물에게 일일이 설명해 주실 의무 따위가 전혀 없으십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히 하나님과 나란히 상대할 만큼 똑똑하거나 강한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사람 편에서 볼 때에는 ‘인생의 고난’이란 무언가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셔야 할, 변명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해명은 해 주셔야 할 문제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럴 여지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이 관계만 생각해도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조차 열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 안에 모든 인생의 딜레마나 모순이나 의문이나 불만에 대한 충분한 정답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라는 욥의 질문에 대해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라는 하나님의 대답은 불신자에게는 마치 동문서답처럼만 보일 것입니다.
  아니 기복주의나 인본주의적인 기독교인에게도 이 말씀은 전혀 ‘납득이 안 되는’ 대답에 불과할 것이며 오히려 더 큰 불만까지 유발시킬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에게는 너무나 깨끗한, 명확한, 그러면서도 시원하고도 후련한 정답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그 하나님은 항상 절대적으로 선하시고 절대적으로 공의로우시다.’, ‘그 하나님께서 우주만상과 인류역사의 모든 것을 지금도 다스리신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내 인생 전체 또한 순간순간 완벽하게 주장하고 계신다.’ - 바로 이 믿음만 확실히 붙잡으면 지금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어떤 환난이나 고통도 그저 사소한 문제에 불과함을 간단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왜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가 곧 불신앙임을 깨닫고, 그 어떤 경우에도 ‘창조주의 높고 위대하심’만을 찬양하며 ‘우주와 인생 가운데 충만한 절대주권자의 지혜와 권능’을 끝까지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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