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7-14 “내가 가는 길을 아시며,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욥기 23장 1절 – 24장 25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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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7-14
2019′경향의 강단(30)(2019년 7월 14일 / 주일 대예배)
“내가 가는 길을 아시며,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욥기 23장 1절 – 24장 25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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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을 아시며,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욥기 23장 1절 – 24장 25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라는 영화에는 모든 명화들이 다 그렇듯이 아주 유명한 대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제게 인상 깊었던 것은 남북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끝난 후 남부 농장 지주의 딸이었던 스칼렛이 모든 재산을 다 잃고 문자 그대로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했던 말입니다.
  그녀는 무엇이라도 먹을 것을 찾으려고 밭으로 달려 나가서 무 비슷한 뿌리 하나를 캐내어 그것을 씹어 먹다가 그냥 땅에 뱉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하늘을 향해 손을 들면서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As God is my witness, I’ll never be hungry again.”(신에게 맹세코 내가 다시는 배고파하지 않을 거야.) “If I have to lie, steal, cheat or kill, as God is my witness, I’ll never be hungry again.”(내가 거짓말하고 훔치고 속이고 죽이기까지 해야 하더라도, 신에게 맹세코 내가 절대로 배고파하지는 않을 거야.) 실제로 스칼렛은 그 이후에 자기 여동생들까지 목화밭에서 혹사를 시키고, 주로 남부연맹군 포로 출신이었던 죄수들까지 싼 값에 동원해서 목재소의 힘든 노동을 시키는 등 그야말로 악착같이 돈을 벌기 시작해서 결국 부자가 되고 맙니다.

  스칼렛이 ‘신에게 맹세했던’ 처절한 외침 속에는 ‘착하게 살려는 사람에게는 나쁜 일만 생기고 반면에 악하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 잘 된다.’는 논리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비단 인간 사회에서뿐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자주 피부로 느끼게 되는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엎친 데 덮치는 악재를 연이어 당하고 있던 욥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앞서 욥기 1장 1절에서 그를 가리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욥은 사람 가운데서는 거의 완벽하다고 할 만한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최악의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논리만 따른다면, ‘차라리 악하게 사는 것이 더 낫다.’는 말도 나올 법한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욥이나 욥과 같은 신실한 신앙인이라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불신앙에 불과합니다.
  이 시간 저는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이라는 일견 딜레마로만 보이는 현실을 통해 공의로우신 절대주권자께서 역사하고 계시는 실로 오묘한 섭리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의인이 당하는 고난은 성화의 진보를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연단 과정입니다.

  욥기 23장 10절부터 17절에 기록하기를 “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3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15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16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17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라고 했습니다.

  욥기 1장에 나오듯이 욥은 실로 끔찍한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전 재산과 자녀들을 하루아침에 다 잃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육신까지도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면서”(욥 2:7) 분초마다 고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정말 사람이 아무리 망했다 하더라도 이 욥처럼 철저하게 망한 사람은 없을 것이고, 사람이 아무리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 하더라도 이 욥에 비길 만큼 인생의 최저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된 사람은 역사상 전무후무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더 큰 괴로움은 욥 스스로는 자기가 왜 그런 환난과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납득할 만한 아무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욥기 23장 전반부에서도 욥은 바로 그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서 욥이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즉 ‘억울해서 절로 터져 나오는 탄식’보다 ‘억울하게 당하는 재앙’이 더 크다고 말한 것이 바로 그런 심정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라고 한 대로, 아무리 신앙 좋은 욥이라 해도 그와 같이 불공정한 현실에 대해 절로 반발심이 생기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순으로 인하여 더 깊은 고민에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3절)라고 하면서,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그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 앞에서 자신의 억울한 처지에 대하여 “호소”하며 “변론할 말”(4절)로 아뢰고 싶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계속되는 6절에서 욥은, 자기가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직접 자신을 변호할 수만 있게 되면 하나님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처럼 탄원하는 욥을 그저 당신의 권위로 꽉 눌러 버리시면서 아무 소리도 못하게 하실 분이 결코 아니라, 욥의 변호를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자상하게 들어 주실 분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욥으로서는 자기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8절과 9절에서 그가 연이어 탄식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욥이 “앞으로 가도” 거기 계시지 아니하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시며, “왼쪽” “오른쪽” 어느 쪽을 살펴보아도 결코 만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당연한 것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욥의 육안에 보이는 대상이 결코 아니시며, 또 설사 그렇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의 높고 위대한 영광은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장 그 자리에서 죽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욥 물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까닭에 그는 그저 그러한 안타까움을 구구절절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진퇴양난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욥은 실로 놀라운 신앙을 발휘합니다.
  그것이 곧 오늘 읽은 10절 상반절에 나타나는 대로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라는 고백입니다.
  욥 자신은 지금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를 알아낼 길이 없고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얻을 능력도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만약 하나님이 욥의 탄원과 상소를 직접 만나서 들어야 알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면, 사실상 욥은 아무 솟아날 구멍이 없는 처지에 빠진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기가 막히도록 오묘한 반전이 있습니다.
  바로 비록 욥 쪽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쪽에서는 욥이 가고 있는 길을 완전히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욥은 바로 이 믿음에서 소망의 길을 찾았습니다.
  욥의 하나님은 욥 쪽에서 찾고 만나야만 욥의 형편을 알고 도와주실 수 있는 신이 아니라, 그저 당신 편에서 주도적으로 전지와 전능을 발휘하시고 당신 편에서 먼저 무조건적인 인애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신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철석같이 믿을 때 욥은 그 인생 최악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실로 위대한 소망을 붙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곧 10절 하반절에 이어지는 고백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는 소망이었습니다.
  비록 욥 스스로는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직접 아뢸 길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편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면, 지금 그가 당하고 있는 온갖 재앙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며 그렇다면 그 환난은 결코 악연이나 재앙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의도적인 연단 과정’임이 틀림없다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연단 과정이라면 그 나중에 나타날 결과는 욥 자신이 마치 풀무에 단련된 순금같이 더욱 순결하고도 귀중한 존재로 성화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11절 이하에 이어지는 고백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연단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지금까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며”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했던” 경건생활을 앞으로도 계속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을 반드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작정하신 것” 즉 욥을 ‘순금처럼 성화시키시려는 뜻’ 역시 꼭 “이루실”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고 욥이 고백하고 있는 대로 욥은 자기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오묘한 섭리를 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지각을 얻게” 됨으로써 그 하나님을 이전보다 더 “두려워하는” 경외의 신앙까지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 그 벌로 고난을 주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본인이 회개만 하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고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100퍼센트 다 죄에 대한 징벌로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바로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경건하고 의롭게 살고 있었는데도 환난과 시험의 풍파가 덮쳐 오는 경우도 자주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신앙생활의 모순도 아니며 신자가 해결할 길이 없는 딜레마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과정을 위에서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무슨 수를 쓸 도리가 없어서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발생하게 하시며 그 전 과정을 예의주시하고 계시는 상황입니다.
  그런 까닭에 신자는 아무리 큰 고난을 통과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무슨 ‘재수가 나빠서’ 벌어진 일은 결코 아니며 무엇보다 그 길의 끝이 실패나 패망으로는 절대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무슨 시행착오를 행하시거나 속수무책의 처지에 몰리실 분이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그 고난은 오직 당신의 사랑하시는 택자를 더 거룩하게, 더 경건하게 성화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연단 과정’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군대에 갔다 온 아들을 가진 부모라면 ‘연단’이라는 것이 그 얼마나 훌륭한 교육이 되는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반찬투정을 하고 버릇없이 굴던 아들이 군사기초훈련을 마친 후 첫 면회 때부터 벌써 많이 달라져 있는 것을 부모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2년 어간의 군복무를 다 마치고 제대할 때 쯤 되면 입대할 때와는 완전히 바뀐, 의젓한 어른이 다 된 것을 보게 되면서 부모로서는 대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까지 생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고생’이라는 연단의 과정을 거쳐야만 사람은 육체적으로 뿐 아니라 정신적, 인격적으로도 성숙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큰 고난을 당하게 되더라도 ‘왜 하나님께서는 내가 당하는 이 억울하고 괴로운 처지를 그냥 내버려두고 계실까?’라고 원망하거나 의심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가고 있는 길, 우리가 처한 상황, 특별히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시험과 환난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 어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굳게 확신해야 합니다.
  특히 자신이 당하는 시험과 환난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길어지고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일수록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라는 믿음을 끝까지 붙잡음으로써, 그 연단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이 순금처럼 더욱 아름답고 순결하게 성화되는 은혜를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악인이 누리는 형통은 끝내 영벌 심판을 받게 될 죄악의 산물에 불과합니다.

  욥기 24장 18절 이하 25절에 “18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들의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라 19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빼앗나니 스올이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20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21그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를 박대하며 과부를 선대하지 아니하는도다 22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 23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24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 25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고 지적하거나 내 말을 헛되게 만들 자 누구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욥은 자기 개인사를 벗어나 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욥이 시작한 문제제기라기보다는 욥의 친구들 중에 하나인 엘리바스의 변론에 대하여 욥이 답변하는 내용입니다.
  하여튼 24장 1절부터 17절에서, 욥은 ‘악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잘 되는’ 또 하나의 딜레마를 두고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1절에서 그는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이 1절의 상반절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시는 날을 아직도 잡지 않고 계시는가?’라는 뜻이며, 하반절은 ‘어찌하여 신자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 억울함을 풀 수 있는 날을 아직도 만나지 못하고 있는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왜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권선징악이 실현되고 있지 않는가?’ 하는 문제제기입니다.
  2절 이하 12절까지 이어지는 내용 모두가 다 악인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악한 일을 행하며 약자를 등쳐먹고 있는 사실과,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구구절절 열거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일만 보면 마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않으시는”(12절) 듯이 여겨질 만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13절부터 17절에서 욥이 한탄하고 있듯이, 그런 악행은 “광명을 배반하는 자”들에 의해 “밤에” 저질러지고 있기 때문에 발각되지도 않습니다.
  즉 이 세상 사회는 “사람을 죽이는 자”, “간음하는 자”, “어둠을 틈타 집을 뚫는 자”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공의를 전혀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악인들은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아예 마음을 턱 놓고 악한 짓을 거듭 반복하면서 부정한 재물을 축적하고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만 보면, 이 또한 그저 분통터지고 이를 갈 도리밖에 없는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욥은 여기서도 다시 한 번 놀라운 답을 찾게 됩니다.
  즉 본문 18절 이하에서 그런 악인들이 당장은 괜찮은 것처럼 보여도 끝까지 잘 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악인의 인생이 지금은 아무리 만사형통한 것 같아도 결국에 가서는 “물 위에 빨리 흘러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물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는 힘이란 압도적인 것이며 그 앞에서 제자리에 붙어 있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악인의 인생 역시 망하게 되는 날이 오면 그들의 “소유”는 오로지 “저주”의 대상일 뿐이며 그들의 “포도원”은 순식간에 쓸려가 버리고 다시는 그 악한 주인이 “다니지 못할” 회복불능 상태로 철저히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올” 즉 ‘음부’가 “범죄자”를 집어 삼키고야 말듯이 악인에게 반드시 벌어지게 될 필연입니다.
  그 최후의 날이 오면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를 박대하며 과부를 선대하지 아니하는” 등 온갖 악행만 일삼으며 일견 형통하게만 보였던 악인들은 끝장이 나게 됩니다.
  즉 “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는” 영벌의 자리에 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악인이 그렇게 되고야 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 다음에 이어서 선포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선 22절과 23절 상반절은 이미 앞서 나왔던 내용을 종합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오히려 “강포한 자들을 (위급한 상황으로부터) 끌어내시는” 데에 사용하실 때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악인들 역시 칠전팔기로 “일어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생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살아남을 확신”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시적인 회생’은 악인이 세상에 살 동안에만 하나님께서 잠시 허락하시는 것이지 결코 ‘영원한 구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처럼 악인이 기사회생하며 성공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때로는 하나님이 오히려 강포한 자의 편만 들어 주시고 악인을 도와주시는 것처럼 여겨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욥은 그런 피상적인 현상만 보지 않고 그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짜 중요한 사실을 정확하게 직시했습니다.
  바로 23절 하반절에서 밝히는 내용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삶과 행위를 정확하게 보고 기억해 두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근시안적인 눈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이 악인을 잘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 같고 사람의 얕은 판단으로는 하나님의 공의가 전혀 시행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악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단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훤히 내려다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하나님의 눈과 기억에 그들의 모든 악행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한 그 증거에 근거한 심판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악인들은 그저 이 세상에서 “잠깐 동안 높아질” 뿐이지 그 최후의 심판대에서는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지는 영벌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욥이 ‘악인의 형통’이라는 딜레마를 풀게 된 정답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의 나치는 유태인을 극도로 탄압했습니다.
  결국 6백만 명이나 되는 유태인들이 죽임을 당한 그 비극은 ‘전체를 불에 태워 바치다’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될 정도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 당시 아우슈비츠 같은 수용소에 갇혀 죽어가고 있던 유태인들은 벽에다가 ‘Where is God?’(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글을 손톱으로 새겨서 남겼습니다.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현실만 생각하면 그런 절규가 나올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있다면 세상에 왜 이렇게 불공평하고 부당한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가?’라는 것은 불신자들로부터 흔히 듣게 되는 비방거리입니다.
  심지어 신자에게조차 ‘하나님이 진정 공의로운 분이시라면 어떻게 저런 악인들은 득세하고 의인들은 억울한 일만 당하는 것을 여전히 방관하고만 계시는가?’라는 의문이 불쑥 고개를 쳐들 때가 생깁니다.
  실로 “고통은 참을 수 있어도 하나님이 무관심한 듯이 보이는 것은 견딜 수가 없다.”라는 말이 뼛속 깊이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그 모든 악인의 악행을 ‘하나님께서 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저지르는 온갖 도둑질과 악행과 간음과 살인은 하나님의 눈이 그들을 CCTV보다 더 정확하게 감시하고 있는 한 결코 ‘미제 사건’으로 흐지부지 끝나지 않습니다.
  비록 당장은 그들에게 별일이 생기지 않는 것 같아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계시는 한 그 악한 행위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기소 유예’가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악인들이 “크고 흰 보좌” 앞에서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즉 하나님께서 살피시고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 놓으신 증거에 따라 엄중한 “심판을 받게”(계 20:11-12) 될 마지막 한 날은 반드시, 속히 오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사형수가 집행을 받기 전에 마지막 만찬을 본인이 원하는 대로, 아무리 비싼 것이라 해도 그대로 마련해 줍니다.
  그런데 사형수가 그 만찬을 먹는 것 때문에 자기도 그 자리에 있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제 곧 교수형을 받거나 전기의자에 앉게 될 사람이 죽기 전에 제아무리 진수성찬을 먹고 있다 해도 그것을 부러워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구나 장차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악인이 아직 이 세상에 있을 동안 그저 잠시 잘 먹고 잘 산다고 해서 그것을 부러워할 이유는 조금도 없지 않겠습니까?

  ‘인간사회의 부조리’와 ‘악인의 형통’이라는 딜레마 역시 이처럼 ‘여호와의 눈이 그들의 길을 다 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완벽하게 해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사와 각 인생사의 모든 것들을 다 꿰뚫어 보고 계실 뿐 아니라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하고 계신다면, 결국 끝에 가서는 모든 것이 다 깨끗이 정리되면서 완벽한 공의가 이루어질 것이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악인들이 현세에 누리고 있는 부귀나 영화란 오로지 그들이 얼마나 악하게 살았는지를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똑똑히 드러나게 만들 ‘증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전지하신 눈은 비단 의인뿐 아니라 악인의 인생에 이르기까지 그 길의 시종을 완전하게 파악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악인이 잠시 잘되는 것을 결코 부러워하지 말고 오직 그 하나님의 눈앞에서 자기 자신을 끝까지 바르고 의롭게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착한 사람이 잘 안 되고 나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견 해결될 길이 없는 모순으로만 보입니다.
  즉 사람이 법을 지키고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권선징악’은 도덕 교과서에나 나오는 이상적인 윤리에 불과하고, 현실은 그저 스칼렛이 말한 것처럼 ‘거짓말하고 훔치고 속이고 죽이기까지’ 하면서 악착같이 살아야 남보다 더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요점은 바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전적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실존하지 않으시면 도덕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이 잘 안 되고 나쁜 사람이 형통한 현실을 설명할 길도, 이해할 방법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은 요지부동의 진리요 절대명제요 제1의 대전제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실존’을 믿을 때에 비로소 권선징악은 그 의미를 가지게 되고 합리적인 윤리로 성립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욥이 고백하고 있듯이 그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의인이 통과하고 있는 어려운 길’과 ‘악인이 잘 살고 있는 길’을 둘 다 내려다보며 살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고난을 ‘연단을 통한 성화의 지름길’이 되게 하시며, 반면에 악인의 형통은 ‘반드시 속히 닥쳐올 심판날에 영벌 저주의 나락’으로 이어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의롭게 살다가 고난을 당할 때 결코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떵떵거리는 모습에 조금도 기가 죽을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의인의 가는 길을 아시며’ ‘악인의 길도 살피고’ 계시는 한 진정한 권선징악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고 끝까지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써, 장차 그 주님께서 ‘모든 악인의 길을 망하게 하실’ 그 날 저 영광스러운 ‘의인의 모임에 꼭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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