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7-07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제물을 드리려거든”레위기 22장 26-33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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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7-07
2019′경향의 강단(29)(2019년 7월 7일 / 주일 대예배)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제물을 드리려거든” 레위기 22장 26-33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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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여호와께 감사제물을 드리려거든”

레위기 22장 26-33절 / 석기현 담임목사
아주 오래 전에 제가 어느 교회의 부흥사경회 강사로 초청을 받아 갔을 때였습니다.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제게 양복을 한 벌 선물해 주겠다고 하시면서 어느 양복 가게로 데려가셨는데, 그 가게의 주인 역시 그 교회의 성도로서 꽤 젊은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맞출 양복의 스타일을 두고 ‘요즘은 다들 이렇게 입는다.’고 하시면서 조언을 해 주셨는데 하나같이 제 취향에는 맞지 않는 것들뿐이었습니다.
앞단추를 세 개로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좌우 양 옆에 트임을 하는 것, 게다가 바지의 허리춤을 낮추어서 골반에 걸치도록 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목사님까지도 그 주인의 의견에 동조하시는 바람에 양복에 한해서만큼은 고리타분하다고 할 만큼 ‘전통적 감각’을 가지고 있던 저는 정말 난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동안의 실랑이 아닌 실랑이 끝에 끝내는 제가 원하는 대로 앞단추는 두 개, 트임은 뒤쪽 한가운데에 하나, 바지의 허리춤은 허리 높이로 하고 게다가 바지 끝은 소위 ‘카브라’라고 불리는 단접기 식으로, 즉 바로 오늘까지 제가 조금도 변함없이 고수하고 있는 스타일 그대로 양복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치수를 재고 나올 때까지 내내 저와 그 목사님과 그 사장님 사이에 피차 어색한 기운이 떠나지 않았던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슨 선물을 줄 때에는 무엇이 어찌 되었든지 간에 ‘받는 쪽’이 좋아하는 대로 해 주어야 하는데 그저 ‘주는 쪽’의 마음대로 하려 하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는 더욱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바로 ‘여호와께 감사제물을 드리려거든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려야 한다.’라는 본문의 말씀이 그 뜻입니다.
우리의 감사라는 것이 받으시는 하나님 쪽에서 별로 기뻐하지 않는 것이 된다면 정말 의미 없는, 그야말로 하나마나한 헛수고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2019년 상반기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온갖 귀하고 좋은 은혜와 복들을 되새겨 보는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이 과연 어떤 감사를 어떻게 드려야 정말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감사가 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감사는 먼저 ‘온전한 예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본문 26절부터 28절에 “2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이레 동안 그것의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여덟째 날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기쁘게 받으심이 되리라 28암소나 암양을 막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수소나 양이나 염소”는 여러 종류의 제사에 쓰일 수 있는 대표적인 짐승인데, 이어지는 29절의 “감사제물”로도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께 제물로 바쳐질 수 있는 희생의 종목을 구체적으로 밝히시면서 특히 그것들이 갓난 새끼일 경우에는 “이레 동안 그것의 어미와 같이 있게” 한 후에 “여덟째 날 이후로는” 언제든지 제물로 삼을 수 있다고 명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앞서 출애굽기 22장 30절에 나왔던 명령을 재확인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명기 22장 7절에도 새 보금자리에서 어미새가 알을 품고 있거나 새끼와 함께 있을 때에는 새끼만 취하고 어미새는 잡지 말도록 한 규정이 나오는데, 이것은 짐승이라 할지라도 그 생명을 소중히 여겨주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본문의 명령 역시 그런 인도주의적인 정신의 일환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그 짐승의 새끼를 태어난 지 ‘8일 후’에 잡을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 아이가 출생한 지 8일 후에 할례를 받게 하는 것과 연관이 됩니다.
사실 어차피 짐승의 새끼를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잡는 것이나 8일 후에 잡는 것이나 그것이 인간적이냐 아니냐를 두고 따진다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생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정식으로 언약의 백성이 되었듯이, 그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역시 난 지 8일이 지난 후에 드림으로써 ‘언약의 백성 된 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물’의 격식을 맞추도록 하는 데에 진짜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28절에서 제물로 쓸 짐승을 그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못하게 하신 것도 단순히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만 하신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방 종교에서는 어미 짐승과 그 새끼를 일부러 같은 날에 잡을 뿐 아니라 더 심한 경우에는 어미의 젖에 새끼를 삶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은 그 자체로 잔인한 행위이기도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그런 이방인들의 미신적인 행위를 본뜬대서야 결코 아니 될 일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제사를 드릴 때에는 그 예물을 준비하는 방법에서부터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따라야 했던 것입니다.

어른에게 무엇을 대접하거나 사 드리고 싶을 때에“어떤 것을 잡수시겠습니까?”라든지“뭘 좋아하십니까?”라고 여쭈어보게 됩니다.
그럴 때 어른 쪽에서 그냥 당신의 취향대로 말씀해 주시면 아주 간단하고 쉽습니다.
하지만 “아무 거나 괜찮다.”라고 하시든지“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하시면 대접하려는 쪽에서는 오히려 훨씬 더 어려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 거나 너희가 알아서 해라.’라고 우리를 더 어렵게 만드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물을 바쳐야 할 절기가 무엇인지를 조목조목 정해 주셨으며, 그 예물의 종류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까지도 아주 상세하게 일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야만 그 예물이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만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라 명하셨고 또한 맥추감사절 역시 지켜야 한다고 분명히 명하셨습니다.
그것은 불신자의 풍습과는 전혀 다른 절기입니다.
불신자들은 추수 때에 추석이라는 명절을 가지고는 있지만 맥추 때에는 아예 명절 자체도 없습니다.
아니, 오늘날 명색이 기독신자라 하면서도 ‘보리 추수가 사라진 지 이미 오래 지난 현대에 왜 그런 절기를 지켜야 하는가?’라고 맥추절의 의미 자체를 부인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신자라면 그런 불신적인 풍조를 본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명백히 명령하시는 대로 ‘맥추절’ 역시 ‘추수감사절’ 못지않은 중요한 감사의 절기로 꼭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 때와 꼭 마찬가지로 이 맥추감사절 역시 무슨 ‘먹고 노는 날’이 아니라 적어도 ‘구원의 언약’ 안에 있는 성도답게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준비하여 바치면서 이 날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감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 감사를 받으시는 분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해야 함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제사의 예배’를 통하여 감사드리고 ‘감사의 예물’을 바치면서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감사는 ‘성도의 잔치’로 나누어져야 합니다.

29절과 30절에 기록하기를 “29너희가 여호와께 감사제물을 드리려거든 너희가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릴지며 30그 제물은 그 날에 먹고 이튿날까지 두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감사제물”이란 ‘서원제, 낙헌제, 감사제’로 세분되는 ‘화목제’ 중에서 특히 감사제 때에 바치는 제물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5대 제사’에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이 화목제에만 해당되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다른 제사의 제물들은 오직 제사장과 그 식구들만 먹을 수 있었지만, 이 화목제만은 그 제물을 바친 일반 백성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만 강조된 다른 제사들과는 달리, 이 화목제에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교제’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열왕기상 8장 63절 이하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 낙성식을 거행하면서 “이만 이천 마리”“소”“십이만 마리”“양”으로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드리고 온 백성이 함께 나누어 먹은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화목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화목제의 특별규정은 ‘감사제’뿐 아니라 ‘서원제와 낙헌제’에도 다 적용이 되는 것이었지만 한 가지 차이점은 있었습니다.
곧 서원제와 낙헌제의 경우에는 제사 드린 후 그 제물을 ‘이튿날’까지도 먹을 수 있었지만, 감사제만큼은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반드시 “그 날에 먹고 이튿날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소나 양을 한 마리 잡아서 감사제를 드리고 그 고기를 당일에 다 먹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혼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비단 가족이나 친지뿐 아니라 더 많은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먹게 되었을 것이고, 그런 가운데 자연히 선민 간의 교제가 더 넓게 확장되었으며,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제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유명한 말도 있듯이, 감사 역시 혼자만 하는 것보다는 서로 나누는 사이에 더 커지게 됩니다.
예배 시간에 감사헌금의 특별한 제목들을 함께 나누는 것도 바로 모든 성도들이 “아, 저럴 때에도 저렇게 감사드리는 것이구나.”라고 배우게 됨으로써 자신도 같은 경우가 생길 때 감사드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교회에서는 전쟁터에서 죽은 자기 아들의 이름으로 ‘기념 헌금’을 드린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의 주일예배 시간에 또 누가 그런 헌금을 드리자 회중에 있던 한 부인이 곁에 있는 남편에게“우리도 저 성도처럼 우리 아들을 위해서 헌금을 드려요.”라고 속삭였습니다.
그 남편은“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요? 우리 아들은 살아 있잖아요?”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이 말하기를“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 아들의 생명을 지켜주고 계시니까 당연히 감사드리자는 거예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히 ‘감사제물’은 그것을 바친 성도 본인뿐 아니라 가능한 한 그 주변의 많은 성도들이 함께 나누도록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남보다 당연히 먼저, 당연히 더 크게 감사해야 할 조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무심히 넘기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나보다 더 작은 것 받았는데도 감사드리고, 내가 보기에는 감사의 제목은 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두고도 오히려 감사드리는 성도들을 보게 될 때 그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 되고 돈을 많이 벌고 있으면서도 1년 52주일 내내 감사헌금을 단 한 번도 드리지 않던 교인이, 이제 막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쥐꼬리만큼 받는 첫 월급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그 전부를 ‘첫 소산의 감사헌금’으로 바치는 청년을 보면 좀 무언가 충격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집안 식구들이 다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단 한 번 감사기도조차 드리지 않던 교인이, 사랑하는 가족의 상을 당하고도 오히려 큰 위로와 은혜 가운데 장례식을 마치게 해 주신 것을 기억하여 특별감사예물을 드리는 유족 성도들을 보면 당연히 부끄러운 생각이 생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아름다운 성전을 출입하면서도 ‘보리떡 헌금’이나 ‘열두바구니 헌금’을 단 한 푼도 바치지 않는 ‘짠 어른 교인’들이, 주일밤예배 때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선교헌금’이나 ‘비전헌금’을 저금통으로 이 제단 위에 올려놓는 것을 보면 좀 무언가 그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목제’를 ‘그 날’에 함께 ‘나누어 먹는’ 성도들 사이에서는 이런 감사의 공감대가, 이런 영적 교감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역시 이 ‘맥추절의 잔치’를 통해 우리의 감사들이 나누어지고 증폭되어서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더욱 기쁘게 받으시는 큰 감사의 제사를 함께 올려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감사는 ‘순종의 결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31절 이하 33절에 “31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32너희는 내 성호를 속되게 하지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33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감사제물’만 강조하고 끝내지 않으시고 연이어서 “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고, 어떻게 보면 앞 구절과 동떨어져 보이는 듯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늘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너무나도 문맥에 맞는 말씀입니다.
감사제사를 한 번 드렸다고 해서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다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주 만홀히 여기는 신성모독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 성호를 속되게 하지 말라”고 곧 이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로부터 “거룩하게 함을 받아” 마땅하신 하나님께 겨우 양 한 마리, 소 한 마리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고 해서 내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여긴다면 하나님께 그 얼마나 모독적인 일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즉 당신의 백성을 천하만민들 중에서 택자로 부르시고 선민으로 삼아 주신 분이신데, 딱 감사절기 하루만 지키고 나머지 날들은 그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간다면 정말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그 하나님은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순히 일 년 농사를 도와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바로의 종노릇하던 그들에게 출애굽이라는 기적적인 해방을 베풀어 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니 그 엄청난 구원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있는 자라면 무슨 맥추절이나 장막절 때에 제사 한 번 드리는 것만 가지고서 그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다 나타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내가 베풀어 준 구원과 생명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한다면 감사제를 드리는 절기뿐 아니라 항상 내 계명을 순종하고 살아야 한다.’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명령하신 것입니다.
즉 ‘말씀 순종’이야말로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모시는 방법’ 중에서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요, 말씀대로 사는 생활이야말로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제물’ 중에서 가장 요긴한 제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올리는 감사는 단지 예물을 바치는 것뿐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는 것까지 행함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갖출 것을 다 갖춘 감사가 됩니다.
‘감사’가 하나님을 거룩히 모시는 성도의 ‘기본마음’에 해당된다면, ‘순종’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은 성도의 ‘기본자세’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맥추감사절을 지키면서 그냥 한 번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하며 헌금봉투 한 장 내밀고 돌아서서 ‘이제는 다 끝났다.’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오늘 드린 감사가 진짜 감사인지 아닌지는 이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을 통하여 다시 일깨워진 감사의 마음을 내일부터도 매일 계속 간직하고 있어야 하며, 이 맥추감사절 때문에 각자의 심령 속에 증폭된 감사를 이제 2019년의 하반기를 통해 더 잘 순종하고 충성하는 삶으로 하나님께 보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절 예배에 참석했으니까 이번 여름 동안에는 적당히 주일을 빼 먹어도 괜찮겠지.’라고 벌써부터 ‘머리를 굴리는’ 교인이 혹 있습니까?
‘오늘 특별감사헌금을 내 딴에는 꽤 많이 드렸으니 이제 추수감사절이 올 때까지 일반 감사헌금은 안 해도 내 할 일은 다 한 것이지.’라고 제멋대로 ‘계산을 마쳐 놓은’ 교인은 혹 없습니까?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감히 그처럼 만홀히 여길 수 있습니까?
당신의 독생자를 내 죄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신 성부 하나님을 명색이 신자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처럼 모독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은 성도라면, 하나님의 은혜로써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을 받은 구원인이라면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감사절을 진정 기쁨으로 지키는 성도라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도 매주일 순종해야 하며, 감사절의 예물을 정성껏 준비하여 바치는 성도라면 평소에도 역시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을 준행해야 마땅합니다.
오늘의 이 맥추감사절뿐 아니라 매일의 삶을 통하여서도 늘 감사드리고 매주일 빠짐없이 감사예물을 드림으로써 진정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는’ 감사의 제사를 일 년 내내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감사드린다고 하나님께서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가 그저 예의 차리는 정도에 불과할 때, 감사의 정성이 모자랄 때, 혹은 감사 자체가 아예 외식이고 거짓일 때에 그 감사는 절대로 열납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that you may be accepted)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제물이 받으심이 되도록’이 아니라 ‘너희 자신이 하나님께 받으심이 되도록 감사의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자신이 과연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어떤 진심과 정성으로 감사를 드리는가 하는 데서 나머지 모든 것들이 다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런 마음과 자세부터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명하시는 대로 갖추고 감사드려야 할 뿐인 것입니다.

감사절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정해 주신 절기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날을 지키면 좋겠다고 의논을 해서, 목사가 이런 절기를 만들어 놓으면 교회 예산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 만들어 놓은 날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날을 통하여 스스로 감사의 제사를 받기를 기뻐하셨고 또한 이 날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까지 이처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이 감사절을 사람의 명절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예물을 바치는 날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이 감사절을 성도들이 함께 지킴으로써 감사의 감격과 기쁨이 훨씬 더 커지고 서로 나누어지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또한 이 감사절이 그저 한 번의 인사나 일회의 잔치로 끝나지 않고 신자의 순종을 통하여 매일 계속되는 예배가 되도록 이끌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맥추감사절을 통하여 이처럼 ‘하나님께 받으심이 되는 감사’를 함께 드림으로써 오늘뿐 아니라 자신이 살아 있는 순간순간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하는 제사’, 그래서 실로 하나님께서도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영원토록 올려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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