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6-30 “우는 백성과 짐을 담당하는 장로”민수기 11장 4절 – 12장 16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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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6-30
2019′경향의 강단(28)(2019년 6월 30일 / 주일 대예배)
“우는 백성과 짐을 담당하는 장로”민수기 11장 4절 – 12장 16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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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백성과 짐을 담당하는 장로”

민수기 11장 4절 - 12장 16절 / 석기현 담임목사
아테네는 인류 역사상 민주주의 정치가 제일 처음으로 나타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그 민주주의,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직접 민주주의’의 결정적인 단점과 폐해를 정확하게 파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추첨으로 선발된 ‘400인 평의회’와 모든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민회’를 통해 중요한 국사를 직접 의결했는데,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그로 인해 ‘어리석은 다수’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그들을 이용하는 ‘군중 선동가’들이 정권을 휘두르게 된다고 지적했던 것입니다.
  그처럼 온 아테네 시민들이 ‘중우(衆愚) 정치’에 빠졌다고 비판하고 당대의 최고 권력자들을 ‘민주주의 착취자’라고 부르면서 오히려 앙숙인 스파르타의 ‘귀족정치’를 ‘지혜로운 엘리트가 다스리는 이상적 정치’라고 칭송했으니 결국 소크라테스는 매국노로 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소위 ‘청년들을 부패시킨다.’는 죄목으로 독배를 마시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출애굽이라는 큰 구원 역사를 체험한 선민들이 모인 이스라엘의 광야교회도 바로 그와 같은 ‘중우 정치’로 인해 큰 위기를 당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그 광야교회가 어떤 모습의 정체(政體)를 가져야 할지에 대하여 명백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 광야교회가 인본주의적인 시행착오를 벗어나서 실로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교회를 통하여 가르쳐 주셨던 교회의 정체는 과연 어떤 것이었습니까?
  저는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들이 따르는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가 과연 어떤 성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장로교회는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불신앙적인 불평이나 개인적인 요구가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을 단호히 배격합니다.

  11장 4절부터 6절에 기록하기를 “4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광야교회의 위기는 이스라엘 회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음”으로써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아직 신앙이 약하고 공동체 정신도 희박했던 사람들이 먼저 불만을 터뜨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도” 부화뇌동 격으로 따라서 “다시 울며” 그 불만을 더 크게 확대시켰습니다.
  그 이방인들이 불신앙적인 불평을 하면 신앙 좋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것을 무마하고 진정시켜야 할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거꾸로 그런 분위기에 같이 휩쓸려 들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불만이란 것은 사실상 별것 아닌 음식 투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만나를 잘 받아먹고 있다가, 갑자기 몇 사람의 선동에 휘말리면서 온 백성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못 먹게 되었다고 울기까지 하면서 참 유치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반찬 몇 가지 없다고 해서, 그들이 아직까지는 기억이 생생해야 마땅했던 출애굽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도, 매일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감사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온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불평과 원망으로 들끓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어떤 불만은 항상 신앙 약한 사람들이 그 발단이 되기 마련입니다.
  평소에 교회생활을 그리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 어쩌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사람들이 항상 교회 내에서 어떤 불만을 찾아내는 눈은 밝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만이라는 것은 지극히 세속적이며 자기욕구중심적인 것들뿐입니다.
  정말 예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면 아무 불만거리도 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교회가 어쩌니, 교역자가 어쩌니’ 하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섞여 사는 교인’들이 불신앙적인 불평의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신앙 있다는 교인들이 그것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자기도 그런 소리에 오히려 합세하게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주객전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영적 비주류에 속한 사람들의 소리가 교회 안에서 더 크게 확대되는 일이 없도록, 특히 잘 믿는 성도들이 그런 말을 들을 때 지혜롭게 권면하고 처신함으로써 그런 시험의 초기에 아예 싹을 잘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1장 10절과 11절에 기록하기를 “10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11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그런 유치한 울음 앞에서 모세는 그야말로 철없이 보채는 “젖 먹는 아이” 이백만 명을 혼자 품에 안고 있는 “아버지”가 된 기분이었습니다(12절).
  원래 모세에게 주어진 책임은 그 백성들을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 가나안으로 무사히 인도해 가는 것뿐이었습니다(12절).
  그것만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그처럼 백성들의 자질구레한 불평불만에 대한 비난까지 한 몸에 받아야 했으니 실로 “혼자는...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었으며(14절), 차라리 “즉시 나를 죽여” 주십사고 하나님 앞에서 하소연하게 될 만큼 괴로웠던 것입니다(15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만과 요구는 인간적으로만 생각하자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의 의사 표현의 자유도 없다면 결코 민주적인 공동체가 아니라는 소리를 들을만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 불만 표출은 지도자 모세를 괴롭게 했으며 그런 소위 민주적 의사 표현이라는 것이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게” 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는 결코 팔방미인이 될 수 없고 교회가 무슨 도깨비 방망이를 두들기는 곳도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가장 큰 구원, 십자가 대속과 천국 영생의 소망을 그 최고의 복으로 믿고 선포하는 공동체이며, 목사는 교인들로 하여금 이 대열을 끝까지 함께 따라가도록 인도할 영적 책임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일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 중에는 교회에 다녀도 자기 육신 생활이 뜻대로 안 된다고 불만을 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 집안에서나 직장 혹은 사업장에서 무슨 일이 잘 안 되면, 그 스트레스를 교회에서 토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인일수록 교회에서 걸핏하면 말을 만들어 내고 회의 시간만 되면 열변을 토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는 당연히 그런 교인들의 불만스러운 것들을 해소해 주고 그런 교인들의 의견을 모아서 교회를 이끌어가야 마땅하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교인들과 그렇게 끌려가는 목사가 합작을 함으로써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산으로 올라가는, 사공이 많은 배’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당연히 민주주의를 좋아하고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민주적인 교회’라는 말에 대해서만큼은 의구심과 회의를 느끼는 목사이기도 합니다.
  정말 ‘민주적인 교회’가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있겠습니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이 경향교회가 처음부터 철저하게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교회였다고 한번 가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독신자로서의 생활을 어떻게 하고 교회의 예배와 봉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성경은 잠시 덮어놓고 장로교 헌법도 일단 제쳐놓고, 그냥 ‘중생 받은 각자의 신앙양심’만을 가지고 민주적인 투표로써 모든 것을 결정했다고 하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한 주에 예배를 몇 번 드리면 좋을까?’라는 의제를 두고 토의가 시작되면 그 누군가가 일어나서 “예배는 주일 아침에 한 번만 ‘진하고 뜨겁게’ 드리고 주일 오후에는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육신의 안식을 취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라고 발언할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누가 그 완벽한(?) 논리에 반대하겠습니까?
  새벽기도회나 수요예배는 고사하고 주일밤예배조차 그 공동의회에서 통과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헌금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라는 의제가 나오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 의무적으로 시행하고 나머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에 맡깁시다.”라는 정도의 발언을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그것은 구약 시대의 율법적인 명령에서 나온 것이니 십일조든지 무슨 헌금이든지 일체 강요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도 ‘자원적인 헌금’을 훨씬 더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발언하면, 그 훌륭한(?) 말씀에 당장 동의 재청이 따라 나오지 않겠습니까?
  만약 경향교회가 그렇게 민주적으로 시작되었더라면 오늘날 신학교 후원이나 세계선교 사업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을 뿐 아니라, 이 강서성전 건축은커녕 아직도 을지로의 창고 건물에서 목사 월급이나 겨우 주는 꼴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민주적 교회’라는 것은 결국 ‘사람이 기뻐하는 데로 가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따라야 하는데, 그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은 거의 다 예외가 없이 사람에게는 부담이 되기 마련이고, 민주적인 결의는 다수가 싫어하는 것이라면 백이면 백 반드시 부결시킬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세상 정치에서도 민주주의라는 것이 쉽게 ‘중우정치(衆愚政治)’로 흘러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민주적’이라는 미명 하에 결국 사람의 욕심과 어리석은 판단에 휘말리는 ‘중우교회(衆愚敎會)’가 되지 않도록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집중하고 주력하고자 하는 장로교회의 정신을 똑바로 깨닫고 소중히 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장로교회는 말씀을 맡은 목사와 그 사역을 돕는 장로들로 구성된 당회를 중심으로 교회의 질서와 화평을 지킵니다.

  11장 16절과 17절에 “1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17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불평하는 백성들과 낙심한 모세의 모습을 내려다보신 하나님께서는 일단 그들에게 메추라기를 주어서 그 고기를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31절부터 35절에 보면, 그 고기 먹은 직후에 그런 원망의 주동자들과 동조자들을 재앙으로 치심으로써 엄중히 심판하셨습니다.
  광야교회와 모세를 향하여 함부로 원망하는 죄를 하나님께서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아니하심을 똑똑히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혼란에 빠진 광야교회를 위하여 새로운 대책을 세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특별히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모세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모세 혼자 지지 아니하도록 조처하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 가운데 이 ‘칠십 명의 장로’들을 뽑아 놓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백성의 불만에 대한 대변자’ 노릇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오직 그 백성을 바로 인도해 가려는 ‘모세의 동역자’가 되어 주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24절 이하 3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칠십 장로들에게 “(모세에게) 임한 영”을 똑같이 임하게 하심으로써 일종의 취임식을 해 주셨습니다.
  그 칠십 인 중에서 “엘닷”“메닷”은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회막에 나오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똑같은 성령 충만의 체험을 입게 해 주셨던 것으로 보아서, 그 두 사람에게 어떤 불경한 동기는 없었던 것이라고 추측됩니다(26절).

  이처럼 장로는 기본적으로 목사의 사역을 돕기 위해 주어진 직분입니다.
  무슨 교인들의 불만을 대변하고 교인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당회에 반영하는 것이 장로가 해야 할 사명의 본질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말하자면, 장로는 국회의원 같은 사람이 아니라 대통령을 보좌하고 돕는 장관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목사 혼자서 다 질 수 없는 교회의 짐을 나누어지고, 교인들을 보살피는 책임을 함께 담당하기 위하여 장로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장로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목사와 성령 안에서 늘 마음이 일치되어야 하고 눈만 마주쳐도 뜻이 통할 정도가 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사와 장로가 영적으로 동등한 직분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17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임하게 하셨던 성령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해 주셨지만, 여전히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회막에서) 너(모세)와 말하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달하는 일만큼은 어디까지나 모세에게만 주어진 고유의 사명이었고, 이것이 모세와 다른 칠십 장로들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였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점을 너무나도 뚜렷하게 강조하셨습니다.
  12장 5절 이하 8절에 기록하기를 “5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6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모세가 “구스 여자” 즉 에티오피아의 이방 여인을 취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 정확한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죽어서 재혼을 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첩을 취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지 간에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에게 모세를 비방할 핑계를 제공해 준 계기에 불과했고, 실제 이슈는 모세의 지도권에 집중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이 모세를 비방하여 말할 때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2절)라고 그들의 진짜 의도를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즉각 직접 개입하셨고,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모세의 편을 드셨습니다.
  비록 미리암과 아론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들로서는 도저히 비교도 못할 특별한 것이 모세에게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점을 가리켜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하는 자이며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는” 특별한 관계라고 두 가지로 밝히시면서, 그런 모세를 어찌 함부로 비방하느냐고 그 두 사람을 책망하시면서 특히 주동자였던 미리암을 일주일 동안 나병에 걸리도록 징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해당되는 광야교회를 맡아서 충성스럽게 섬기는 ‘지도자적 직분’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대언자적 사명’에 있어서 미리암과 아론은 그야말로 모세와 상대도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장로들 중에도 ‘목사만 중생 받고 목사만 성령 받았느냐? 우리도 똑같이 받았다.’라고 아론과 미리암처럼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목사와 교인, 목사와 장로 사이에는 엄연한,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목사가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생각하는 정도라는 것은 제아무리 신앙 좋은 장로나 집사나 권사라 해도 결코 따라갈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 목사가 있다면, 그 목사는 일찌감치 스스로 사표를 내어야 마땅합니다.
  또한 목사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를 이끌어가야 할 고유의 사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훈도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목사를 가리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딤전 5:17)라고 다른 일반 장로들과 명백히 구분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그 누구보다도 교회를 사랑할 뿐 아니라 교인들을 이끌어가는 말씀을 맡은 목사이니, 그런 목사가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장로는 그런 목사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획하는 일, 그런 목사가 성경을 가지고 선포하는 설교에 저 ‘칠십 장로’들처럼 ‘같은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전적으로 공감하고 조력해야 마땅합니다.
  또한 교인들은 바로 그런 당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영적 ‘관할과 치리’에 기꺼이 순종함으로써 실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의 교회를 제대로 세워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께서 세례 받으시거나 입교하실 때 하나님과 공회 앞에서 했던 서약들 중에서 네 번째로 했던 것, “나는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며 그 정결함과 화평함을 이루도록 힘쓰기로 작정합니다.
 ”라는 서약이 보통 중요한 서약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자복하는 첫째 서약, 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음을 고백하는 둘째 서약, 그리고 내가 이제부터 신자다운 거룩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다는 셋째 서약 - 이런 알짜배기 서약들에 이어서 네 번째로 넣을 만큼 중요한 서약인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의 관할과 치리’라는 말이 곧 지교회 내에서는 ‘당회의 영적 다스림’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미 세례를 받고 입교하신 모든 교인들은 자기가 속한 교회의 당회의 지도와 행정에 ‘복종하기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서약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장로교회에 속한 교인은 각자 세례를 받을 때 서약했던 이 네 번째 조항의 의미를 바로 알고 그것을 지켜야만 교회가 ‘개인의 목소리’가 중구난방 하는 시장바닥이 되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고, 말씀을 맡은 목사와 그 사역을 돕는 장로들로 이루어진 당회를 중심으로 이 경향교회를 ‘그 정결함과 화평함’을 지키는 질서 있고 은혜로운 공동체로 함께 세워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광야교회의 정체(政體)가 어떻게 되어야 할지를 명백하게 지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목소리들이 주도하는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 중심’의 공동체였으며, 한 교권주의자의 독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와 그를 돕는 칠십 명의 장로들로 구성된 ‘영적 대의정치’가 실시된 교회였습니다.
  개인적인 불만을 터뜨리면서 우는 자들의 소리만 드높은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오직 말씀을 맡은 지도자와 그를 돕기 위해 함께 성령 받은 장로들이 리드하는 교회만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루어 갈 수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다른 교회는 제쳐놓고 그래도 명색이 ‘장로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 가운데서도 실제로는 그저 ‘민주적인 교회’라는 미명 아래 교회의 질서가 파괴되고 교회의 영적 권위가 땅바닥에 내팽개쳐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실로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한탄했던 ‘중우정치’가 현대교회 안에서 그 어느 때보다 극성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즘 우리나라가 비록 형식적으로는 ‘대의민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무슨 일만 터지면 당장 거리에 몰려나와서 ‘결사투쟁 데모’를 통해 자신의 불만을 터뜨리고 개인적인 요구를 관철시키려 하는 ‘직접민주주의’의 고질병에 단단히 걸려 있는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온 국민이 다 ‘내가 손해를 당하는 억울한 사람이다.’라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그처럼 저질화 된 ‘국민의식’에 빠져 있는 대중을 ‘복지의 사탕발림’으로 선동하는 정치가들이 권력을 잡고, 자기네만 철저히 편들어 주는 정권이 기업을 일방적으로 옥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불만의 소리를 끝도 없이 높이기만 하는 노조가 이 나라에서 문자 그대로 치외법권의 최고 실세가 되어 가는 기막힌 형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는 그래도 재판이라도 받고나서 독배를 들었지만, 만약 그가 지금의 우리나라에 살아서 ‘중우정치’ 좀 더 쉬운 말로 ‘다수의 국민들이 멍청하다.’ 운운하는 비판을 했더라면 일찌감치 반민족적인 매국노로 몰려 뭇매를 맞아 죽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이 나라는 그런 꼴을 보이고 있을지라도 정말이지 교회까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는 백성’의 소리만 높은 교회는 밖으로 구령 단체로서의 힘을 상실할 뿐 아니라 안으로도 계속 상처 받는 영혼들만 남기게 될 뿐입니다.
  오직 ‘말씀을 맡은 목사’와 ‘짐을 나누어 담당하는 장로’들의 영적 리더십이 교회를 바르고 강력하게 이끌어 가야만 안으로 약한 성도들이 성장하게 되고 밖으로 세상을 향하여 규모 있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민주적이라는 미명 하에 개인의 불만과 인본적인 사고방식이 판을 치는 어지러운 교회를 만들지 않고, 오직 교회의 관할과 지도에 순종함으로써 개인적으로는 구원의 은총을 더 뜨겁게 확신하는 가운데 세상 앞에서는 실로 질서 있고 화평한 신앙공동체로 함께 세워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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