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6-23 “요제로 온전히 드린 바 된 자” 민수기 8장 1-26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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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6-23
2019′경향의 강단(27)(2019년 6월 23일 / 주일 대예배)
“요제로 온전히 드린 바 된 자” 민수기 8장 1-26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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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로 온전히 드린 바 된 자”

민수기 8장 1-26절 / 석기현 담임목사
지구상의 자연계가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공기와 물 외에도 햇빛이 꼭 필요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살 때 제 집의 해수(海水) 어항에 열대어와 산호를 키우면서 이 사실을 더욱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어항은 진짜 햇빛 대신 전등과 형광등으로 조명되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 등이 아침에 켜지고 밤에 꺼질 때까지 바로 그 빛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은 비록 어항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이기는 했지만 제 눈에는 실로 오묘하고 흥미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인조 햇빛’이 비취기 시작하면 밤새 움츠려 있던 산호들이 기지개를 켜는 양 몸을 떨면서 촉수를 뻗기 시작합니다.
  또한 돌 표면 같은 곳에는 이끼 같은 해조류들이 그 빛을 받아 광합성 작용을 하면서 아침과 저녁이 다르게 보송보송 자라납니다.
  그런 가운데 열대어들은 그 이끼를 뜯어 먹느라고 혹은 돌 틈에 있는 작은 벌레들을 잡아먹느라고 온종일 산호 틈새를 비집고 헤엄쳐 돌아다닙니다.
  그야말로 빛이 비취는 바로 그 순간부터 어항 안의 모든 생명체들이 왕성하게 활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세운 성막 역시 어떤 빛이 그 안을 비추게 되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1절부터 4절에 “1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등불을 켤 때에는 일곱 등잔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게 할지니라 하시매 3아론이 그리하여 등불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도록 켰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 4이 등잔대의 제작법은 이러하니 곧 금을 쳐서 만든 것인데 밑판에서 그 꽃까지 쳐서 만든 것이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보이신 양식을 따라 이 등잔대를 만들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성막이 완성되고 제사장들이 위임식을 하고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특별예물을 드리는 일련의 준비 과정이 다 끝난 후 이제 드디어 그 성막이 공식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함을 알리는 점등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곧 “일곱 등잔”으로 이루어진 “등잔대”에 불을 켜서 그 빛이 “등잔대 앞으로” 즉 등잔대 맞은편으로 “비추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소의 구조를 보면 등잔대 맞은편에는 열두 덩이의 떡 즉 ‘진설병’이라 불린 떡을 두 줄로 쌓아올린 상이 있었습니다.
  그 진설병의 상은 바로 하나님께 항상 헌신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백성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상을 향하여 등불이 항상 비취는 것은 곧 성령의 조명이 항상 그 선민에게 충만히 부어지고 있음을 상징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빛을 받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은 날마다 살아 움직이며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내용에 이어 5절 이하에 레위인의 취임식이 나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즉 성막의 등불이 비췰 때 그 빛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당연히 그 생명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성막에서 특별히 봉사하게 될 레위인부터 나타내야 마땅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오늘도 교회를 중심으로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선한 일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성도가 과연 어떻게 살아 움직이면서 부지런히 섬겨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는 교회봉사가 자신을 하나님께 가장 정결하게 바치는 귀중한 기회인 줄로 알고 섬겨야 합니다.

  5절부터 13절에 기록하기를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데려다가 정결하게 하라 7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하게 하되 곧 속죄의 물을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에게 그들의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하게 하고 8또 그들에게 수송아지 한 마리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그 소제물로 가져오게 하고 그 외에 너는 또 수송아지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가져오고 9레위인을 회막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10레위인을 여호와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안수하게 한 후에 11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레위인을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이는 그들에게 여호와께 봉사하게 하기 위함이라 12레위인으로 수송아지들의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네가 그 하나는 속죄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려 레위인을 속죄하고 13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앞에 세워 여호와께 요제로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레위인의 취임식에는 크게 두 가지, ‘정결의식’과 ‘제사’가 따르게 됨을 보게 됩니다.
  비록 제사장 위임식의 경우보다 좀 더 간단하기는 했지만 레위인 역시 먼저 자신을 “정결하게” 준비하고 그 직분에 임해야 했습니다.
  첫 번째 순서는 “속죄의 물”을 뿌림 받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그냥 ‘정결의 물’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전신을 삭도로 미는” 것은 나병 환자가 고침을 받았을 때에도 적용된 규례였는데(레 14:7-9), 레위인의 경우에도 역시 이 정결의식이 적용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사장이 특별한 의복을 입었던 것과는 다르게 레위인은 그냥 자기가 입던 “의복을 빨아서” 입도록 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가 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정결케 예비한 후에 성소를 섬기는 직분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레위인은 성소를 섬기는 직분에 종사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더욱 거룩하고 정결한 모습으로 유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그들은 온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특별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중에서 “번제”는 ‘헌신’을, “소제”는 ‘최상의 것을 바침’을 뜻하며, “속죄제”는 물론 ‘죄 사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특별제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레위인을... 여호와께 요제로 드릴지니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이 “요제”란 제사의 종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방법을 가리킵니다.
  ‘화제’는 불에 태워 드리는 것이고, ‘거제’는 높이 들어 올려서 드리는 제사인 반면에, ‘요제’는 짐승의 뒷다리나 가슴을 좌우로 흔들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레 7:30-34). 물론 이 경우에는 제사장이 레위인을 직접 붙잡고 공중에서 흔든 것은 아니며, 여기서 바쳐지는 제물들을 레위인 대신 그런 방법으로 드렸다는 뜻입니다.

  요제와 거제는 그처럼 ‘들어 올리거나 흔들어서’ 일단 하나님께 드려진 후 그 제물 자체는 제사장에게로 돌려졌습니다.
  그러므로 “레위인을 요제로 드릴지니”라는 말이 이 8장에 네 번(11, 13, 15, 21절)이나 반복되어 나오는 것은, 그 레위인은 특별히 제사장에게 속하여 그들을 도와 성막을 섬김으로써(19절상)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림이 되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오늘날 성도가 교회를 섬기는 것 역시 이처럼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정결한 제물로 바치는 지극히 고귀하고도 귀중한 기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레위인이 요제로 드린 바 되어 제사장을 도와 성막을 섬겼던 것처럼, 여러분 역시 반드시 교역자의 지도와 감독 하에서 교회봉사를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런 봉사가 그 어떤 의미에 있어서도 교역자를 섬기는 일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열심히 교회봉사할 것을 가르치고 명하는 것은 세상에서 사장이 직원에게 일을 열심히 하라고 말하는 경우와는 전혀 다릅니다.
  회사 사장은 자기에게 돌아올 이윤이 조금이라도 더 많게 하기 위하여 직원들을 다그치는 것이지만, 교역자는 본인의 이해관계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주일학교 교안준비를 잘 해 오지 않은 교사에게 꾸중을 하고, 전도사가 구역장더러 심방 같이 가자고 조르거나 찬양대 좌석에 앉는 대원 숫자까지 체크하면서 전도회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거는 것은, 절대로 자기 밥줄 끊어질까봐 걱정이 되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교역자들이 교인들을 그처럼 영적으로 ‘붙들고 흔드는’ 이유는 오로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빠짐없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제물’로 만들어 바치고자 함일 뿐입니다.
  여러분을 꼭 붙잡고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는 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시간과 힘을 다른 데 허비하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지는 헌신에 쓰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때로 여러분의 정신이 버쩍 들도록 쥐고 흔드는 것도 여러분이 나태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함과 순결함을 지키는 가운데 제대로 봉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곧 ‘제사장의 임무’인 것입니다.
  교회봉사는 결코 교역자를 섬기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하나님께 가장 ‘정결한 제물’로 바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임을 명심하면서, 늘 교역자의 관할 하에서 그 지도에 순종하며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교회봉사가 하나님께 은혜의 빚을 진 자로서 마땅히 행할 의무인 줄 알고 섬겨야 합니다.

  14절부터 19절에 “14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15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16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 곧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17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18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 19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이 그처럼 성막을 섬겨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상기시켜 주고 계십니다.
  왜 레위인은 “구별”되어 하나님께 온전히 “속한”,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들인지, 왜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취하시고” 완전히 당신의 것이라고 공언하시는지를 또 다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레위인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극히 타당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장자들과 가축의 첫 새끼들까지 죽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주셨던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건 직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당신께 “속한” 것으로 바쳐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시 방법으로서 “레위인”을 위시하여 ‘레위인의 가축’ 혹은 ‘속전세’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대신”하여 드리도록 앞서 민수기 3장에서부터 지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같이 레위인이 하나님 앞에 구별되어 바쳐져야 할 의무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그 어느 누구도 이의나 반론을 제기할 여지조차 없었습니다.
  레위인은 자기네가 성막에 상주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일반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불만을 품을 수가 없었고,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그 레위인들을 자기들이 물질적으로 뒷바라지하게 되었다고 불평할 입장은 조금도 못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레위인의 봉사는 온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최소한의 요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따지고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다 성막에 나와서 섬기라고 명하셨더라도 거역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대신 오직 초태생만으로 대신하게 하셨습니다.
  그것마저도, 모든 이스라엘 집안의 장남들로 하여금 다 섬기게 하지 않고 레위인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만약 그런 가장 기본적인 봉사조차 준행하지 않으면서 버젓이 성소에 “가까이” 나아오려 한다면 19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참으로 “재앙”을 받아 마땅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빚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간에, 그야말로 입이 열 개라도 군소리 없이 따라야 마땅한 처지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와 복들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너무나도 가벼운 것들뿐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왜 내가 남들은 편히 노는 주일에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바쁘고 힘든 하루를 보내야 하나? 왜 나는 주중에까지 불려 나와서 다른 교인들은 하지 않는 고생을 사서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왜 우리 교구 담당 목사님은 구역장을 꼭 힘들게 만들려고 하시나? 왜 우리 주일학교의 담당 전도사님은 다른 교역자들보다 더 유별나게 주교교사들을 들들 볶나?’라는 유치한 생각이 혹 들 때가 있습니까?

  교회봉사가 좀 힘들다 싶으면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내게 먼저 내려 주신 은혜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는 다 영벌의 지옥에 가야 마땅했던 자들이었는데 오로지 우리 대신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 덕분에 영생의 천국을 약속받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주님께서 지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는 날 위해 지금 당장 순교해라.’라고 명하셔도 꼼짝 없이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할 도리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봉사’라고 거창하게 부르는 것들, ‘직분자’니 ‘청지기’니 하면서 아주 대단한 일이나 하는 것처럼 이름을 붙이고 있는 섬김이란 것들은, 실상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에 비하여 그 얼마나 미미한 것이겠습니까?

  교회의 모든 직분들은 다 ‘자원봉사’입니다.
  문자 그대로 ‘자원’이니, 당회가 여러분에게 그 직분을 맡으라고 무조건 임명할 권리는 없으며, 교역자가 여러분에게 억지로 요구하거나 강제로 시킬 권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 교회봉사를 ‘자원’하도록 명령하실 권리가 있으십니다.
  아니 우리 모두에게 그런 작은 봉사들 이상으로 훨씬 더 어렵고 진짜로 힘든 헌신까지도 당당하게 명령하실 권리를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교회봉사를 할 때 이처럼 자기가 섬기고 있는 ‘짐의 무게’만 느끼기보다는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한량없는 ‘은혜의 빚의 크기’를 기억함으로써 오히려 늘 기쁨과 감사로만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성도는 교회봉사야말로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최고로 활용하는 방법인 줄로 알고 섬겨야 합니다.

  20절 이하 26절에 “20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께서 레위인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다 따라 레위인에게 행하였으되 곧 이스라엘 자손이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더라 21레위인이 이에 죄에서 스스로 깨끗하게 하고 그들의 옷을 빨매 아론이 그들을 여호와 앞에 요제로 드리고 그가 또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여 정결하게 한 22후에 레위인이 회막에 들어가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앞에서 봉사하니라 여호와께서 레위인의 일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게 하신 것을 따라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더라 23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4레위인은 이같이 할지니 곧 이십오 세 이상으로는 회막에 들어가서 복무하고 봉사할 것이요 25오십 세부터는 그 일을 쉬어 봉사하지 아니할 것이나 26그의 형제와 함께 회막에서 돕는 직무를 지킬 것이요 일하지 아니할 것이라 너는 레위인의 직무에 대하여 이같이 할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20절부터 21절의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앞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명령을 따라 레위인의 취임식을 거행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 레위인은 본격적으로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하게 되었는데, 그 “복무”의 기간은 “이십오 세”부터 “오십 세”까지였습니다.
  앞서 민수기 4장 3절에 보면 레위인은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성막의 일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여기서 “이십 오세 이상”이라고 한 것은, 레위인이 본격적으로 성막 봉사를 하기 전에 일종의 수습 기간을 가지도록 한 것을 뜻합니다.
  즉 첫 5년 동안은 선배 레위인들의 가르침과 시범을 통해 성막 섬기는 법을 배운 후에 30세부터 자기 분야에 있어서 그야말로 전문가로서 봉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20년을 섬기고 50세가 되면 “그 일을 쉬어 봉사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완전한 정년퇴직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그 이후에도 “그의 형제와 함께 회막에서 돕는 직무를 지킬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그 형제 레위인들을 ‘도와서’ 혹은 그들을 ‘감독하면서’ 자기의 직무를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50세 이후에는 육체적으로 힘이 떨어지기 때문에 전성기 때처럼 성막에 관계되는 육체노동을 수행하기에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30세부터 50세 사이에 있는 실제 종사자들을 지도 감독하기에는 더 없이 적격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또한 25세부터 30세까지 수습 기간 중에 있는 레위인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역시 가장 ‘숙달된 조교’가 될 수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레위인은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을 따라 평생토록 성막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값있게 활용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바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젊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자신의 전 인생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특권이겠습니까?
  자신의 힘을 한창 발휘할 수 있는 최전성기에 이랬다저랬다 시행착오하면서 낭비하지 않고 오직 의롭고 선한 일을 위해 충실하게 다 바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보람되고 알찬 것이겠습니까?
  육신의 힘은 쇠잔하여 가더라도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고 교역자들을 잘 모시는 법에 대하여 자신의 체험을 통해 신앙의 후손들에게 지도하는 지혜는 날이 갈수록 더 충만해지는 노년이란 정말이지 그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겠습니까?

  세상일은 젊을 때나 한번 힘써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후세대에게, 더 똑똑하고 더 힘 있는 청장년에게 밀릴 수밖에 없는 일들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회에서 소위 ‘명예퇴진’이다 ‘조기은퇴’다 하는 차가운 바람이 일고 있는 것도 그 한 단면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만큼은 그런 ‘불명예스러운 명퇴’나 ‘물러나고 싶지 않은 정년퇴직’이 없습니다.
  잘 섬기는 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더 숙달되고 더욱 명예롭게 일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교회봉사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선한 봉사에 한 해라도 일찍 시작하는 것은 더욱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한평생을 다 낭비해 놓고 그것을 후회하면서 노년을 맞이하게 된다면, 한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교회를 통해 지금 맡고 있는 직분을 잘 섬기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내년에는 더 잘 섬기고, 그런 ‘작은 봉사’에 충성함으로써 ‘이보다 더 큰 일’까지 너끈히 해냄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 아쉬워할 것이 없이 완벽하고도 충만하게 채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구약의 성막에는 창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성막 안을 비취는 빛은 오직 등잔대의 불 하나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이 비추고 있는 동안 성막의 생명적인 기능과 활동은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은 매일 상번제를 드렸고 레위인은 그 직무를 따라 부지런히 섬겼던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 된 교회를 향하여 성경 말씀의 빛으로, 보혜사 성령의 빛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조명해 주고 계십니다.
  교회 안에는 이 빛 외에는 다른 빛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연도 빛을 받으면 온갖 생명 작용이 일어나듯이 이 빛이 있는 교회라면 그 안에는 그 교회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영적 생명 작동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교회를 통해 이 빛을 제대로 받고 있는 성도라면 결코 종일 잠만 자고 있거나 죽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그냥 영적 동면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이 되는 즐거움은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항상 받아먹기만 바라는 비만증에 걸린 양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인들에게 봉사를 가르치고 충성을 강권하는 목사, ‘레위인을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던 아론’의 모습은 오늘날의 소위 세련된 목사들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게만 여겨지는 현실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헌신의 제물로, 수고하고 애쓰는 제물로, 회개에 합당한 구체적인 열매를 맺는 제물로 바쳐 드리고자 애쓰는 제사장을 만나면, 양들은 지레 겁을 집어 먹고 아예 도망가 버리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등불이 켜져 있는 성막 안에서는 결코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조명이 항상 빛을 발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는 섬기는 자들의 생명력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결한 제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자 바쁘게 움직이는 성도, 교회의 모든 교인들을 그런 요제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교역자 - 이들이야말로 빛을 받아 움직이며 활동하고 있는 ‘살아 있는 지체’들이 아니겠습니까?
  2019년도 벌써 반이 지나가고, 이제 두 주일 후에는 ‘하반기 직원임명식’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정결한 산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함으로써 모든 어렵고 힘든 것을 넉넉히 이기며, 젊을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자기 인생의 최고와 전부를 헌신함으로써 오직 ‘희년의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올해에도 끝까지 ‘요제로 온전히 드린 바 된 레위인’으로서 주님을 기쁘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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