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6-09 “요나의 표적과 바리새인의 누룩” 마태복음 16장 1-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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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6-09
2019′경향의 강단(25)(2019년 6월 9일 / 주일 대예배)
“요나의 표적과 바리새인의 누룩” 마태복음 16장 1-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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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표적과 바리새인의 누룩”

마태복음 16장 1-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제가 다닌 대학교에는 ‘부전공’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전공이 아닌 다른 과목의 강의를 일정한 학점 이상 취득하면 졸업장에 그 사실을 명기해 주는 제도였습니다.
  그 취지는 전공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타 학과의 과목을 보다 폭넓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학생들에게 제공해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한 신학과 학생들은 주로 인문 계통의 부전공을 선택했고 저의 부전공 역시 철학이었습니다.
  하지만 개중에는 신학과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부전공, 그저 졸업 후 취직에 도움이 될 만한 부전공을 택한 학생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그런 학생들은 비록 신과대학에 입학하기는 했지만 애당초 신학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로지 정치운동에만 전념하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군사정권이었던 당시 대학가에는 반정부 데모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한 번쯤은 다들 참여해 보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도 데모 현장에 나가서 최루탄의 매운 맛을 보기도 했고, 데모 주동자 중의 한 명이었던 신학과 학생이 갑자기 제게 전단지가 든 가방을 맡기는 바람에 엉겁결에 그것을 숨겨준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완전히 제쳐놓고 그런 데모만을 자신의 전공처럼 여기는 소위 ‘운동권’ 학생들은 비록 졸업장은 어떻게 받는다 하더라도 장차 사회에 나가서 기여할 실력은 전혀 구비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전공을 소홀히 하는 학생은 비단 이 세상의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흔히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자라면 당연히 신앙생활이 자신의 인생에서 전공이 되어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오히려 부전공 정도로 여기는 교인, 혹은 교회에 이름은 등록해 놓았지만 다른 ‘과외 활동’에만 온통 몰두해서 사는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별 관심도, 더 잘 배워 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꾸 딴 데에만 한눈팔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교인은 제대로 학점이 나올 리도 없고, 그런 상태가 길게 되면 졸업장은커녕 낙제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처럼 ‘신앙생활’보다 ‘세속적인 삶’에만 집중하고 있는 교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시간 저는 적어도 진짜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주의를 집중하고 실력을 배양해야 할 영적 전공분야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 지식’보다 ‘하나님의 구속사’에 관한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1절부터 4절에 “1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사건은 15장 39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속한 “마가단 지경”에 도착하셨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두로와 시돈, 또 데가볼리 등 비교적 이방인이 밀집된 지역에서 사역하셨습니다.
  그처럼 오랜만에 다시 유대인의 동네로 돌아오신 예수님을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러” 왔습니다.
  즉 예수님께 여러 가지 어려운 질문과 요구를 하여 어찌하든지 군중 앞에서 망신을 주고 그 명성을 떨어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원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가까운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 사상이 아주 상반되고 이해(利害)가 완전히 대립되는 당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신기할 정도로 그 두 집단이 일심동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찾아오는 접근 자세부터가 아예 예수님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을까?’, ‘정말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일까?’라고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오는 자들입니다.
  그처럼 자기에게 있는 영육간의 고질적이고도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깨닫고 그것을 해결 받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이란 존재에 관한 의문만 앞세우고 나아오는 것은,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는 것이며 그 끝 역시 그들처럼 오로지 불신과 반역으로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에게 ‘당신이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면 그 증거로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오.’라고 요구했습니다.
  즉 모세가 기도를 드려서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려오게 했던 일이라든지, 여호수아가 명하여 태양을 서게 한 일이라든지, 혹은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는 것 따위의 기적을 당장 자기네 눈앞에 보여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육신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죄로 인한 영혼의 고통에서 자유를 얻는 표적, 이미 나타나고 있던 그 많고도 귀한 표적들은 그들의 눈에 조금도 표적처럼 보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그런 부당한 요구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적 역사에 대한 너희들의 통찰력이란 것은 날씨에 대한 너희들의 상식에조차 미치지 못할 정도로 극히 낮은 수준이다.’라는 뜻입니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라는 말은, 구름과 안개와 수증기 등이 팔레스타인 서쪽의 지중해로 물러가게 되면서 저녁놀이 선명한 붉은 색으로 나타난 경우를 두고 한 말인데, 이것은 그 다음날 날씨가 좋을 징조였습니다.
  반면에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이란 말은, 그 반대로 서풍이 불어 지중해 상에 있던 수분이 육지로 올라와서 아침 하늘이 붉으면서도 흐리게 될 때인데, 이 경우는 궂은 날씨가 예상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처럼 날씨에 관한 상식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의 전공 분야가 아닌 기상 문제에 대해서도 그 정도의 정보 분석과 예보는 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전공으로 알아야 할 영적 세계, “시대의 표적”에 대해서는 아주 무지했고 분별력이 전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생활과 심령 속에 일어나기 시작한 놀라운 변화의 조짐들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권능으로 불치의 병들이 낫고 주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은혜를 입어 죄를 회개하고 중생함을 얻음으로써 천국영생의 소망 가운데 살게 된 그 놀라운 영적 기상 조류의 변화에 대하여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그야말로 깜깜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당시 신앙생활에 대한 최고 전문가들처럼 보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오히려 ‘세상의 상식’만 더 통달하고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달리 “보여 줄 표적”이 없으셨습니다.
  즉 요나가 사흘 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난 것같이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실 표적, 이것 외에는 더 이상 다른 표적을 그들에게 보여 주실 필요조차 전혀 느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처럼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는 아무리 더 많이 보여주어 보았자 아무 쓸모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같은 답답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저 자기가 원하는 신유나 돈벼락의 기적이 일어나야 예수를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철부지 같은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눈여겨보아야 할 표적은 단 하나, ‘요나의 표적’밖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대속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구속역사와 그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심령과 생활 속에 일어난 변화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필요충분의 표적입니다.
  그 십자가의 대속과 무덤에서의 부활이야말로 이 지구와 인류 역사상 벌어진 최고최대의 기적이요 표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 표적’을 예비하기 위하여 구약의 예언들이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고야 말았는지를 관찰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이르는 전 교회사를 통하여 사도들과 종교개혁자들과 순교자들이 그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구원의 복음을 우리에게 어떻게 전해 주었는지를 똑바로 볼 줄 아는 식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에 대하여 적어도 이 정도의 기본적인 통찰력은 있어야 기독신자로서의 전공 필수과목을 이수한 제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날씨’에 상당한 관심을 쏟고 있을 것입니다.
  단지 내일 날씨 정도가 아니라 금주의 날씨, 아니 금월과 올해의 기상이 대략 어떻게 될 것인지까지 손바닥 안에 있는 스마트폰을 통해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일기예보를 보고 들으면서 ‘이번 주에는 장사가 잘 되겠구나.’라든지, ‘금주 말에는 낚시 가기에 알맞겠구나.’ 하고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상식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의 표적이 완성될 재림의 그날을 생각하며 오늘 하루를 어떻게 성실하게 살아야 할지, 자신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잘 예비하며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그만한 영적 상식을 갖추고 있습니까?
  증권 시세가 하루 만에 얼마나 바뀔 것인지를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만큼, 국제사회의 정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신경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거기에 대처하려는 만큼,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흐름을 통찰하면서 그 대단원의 종말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물론 신자가 인간사회에 관한 정보나 삶에 대한 상식도 불신자 못지않게 많이 배우고 알아야 하지만, 그처럼 세상 일 돌아가는 것은 구석구석 밝히 알면서 정작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전공 분야에 속한 이 하나님의 구속사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무식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재림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사는 완성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털끝만큼도 의심할 수 없는, 반드시 이루어질 가장 중요하고도 확실한 ‘역사의 예보’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일에 전공한 성도라면 하늘에서 구름 한 점을 보더라도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계 1:7)라는 주님의 재림 예고를 상기하면서 그 날을 위해 더 잘 준비하는 자세로 살 줄 알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천기를 구별하는 상식보다 이 가장 확실하고도 중요한 역사의 표적,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사의 시종에 대한 통찰력을 꼭 발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제자는 ‘육신의 의식주’보다 ‘자신의 영적 건강’에 대해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5절 이하 12절에 “5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앞서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이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었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에도 열두 바구니에 가득 남았었는데, 이번에도 또 먹기 시작할 때 있었던 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많이 남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필요하실 때면 언제든지 떡을 부풀려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방심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알아서 챙길 것이라고 서로 미루다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남은 “떡 가져가기를 잊고” 다시 갈릴리 건너편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누룩’이란 밀가루 반죽을 부풀릴 때에 쓰는 효모인데, 여기서는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처럼 비유하신 이유는, 누룩이 밀가루 반죽에 영향을 끼치는 속도가 빠르며 그 범위가 전체적이며 또 결정적인 변화를 준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잘못된 교훈은 사람들의 마음에 그처럼 ‘속히, 생애 전반에 걸쳐, 심각한 악영향’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제자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들은 즉각 ‘아, 예수님께서 우리가 남은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꾸중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표현은 실제로 떡에 관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기에 오히려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을 듣고 그 누가 ‘이게 떡을 안 가져 왔다고 하시는 말씀이구나.’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앞뒤 문맥에 따라 귀담아 듣지 않고 그저 ‘누룩’이란 한마디만 듣고서 그것이 상기시켜 주는 ‘떡’을 곧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평소에도 그 제자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영혼에 얼마나 심각한 위험이 되는지를 거의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으며, 반면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매일 식량 조달하는 문제에만 온통 신경을 쓰고 있었음을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들의 사고 구조 자체가, 그들의 생활 패턴 전체가, 그들 자신의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들을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의 육신에 공급해야 할 것들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었습니다.
  삼년 동안 매일같이 예수님을 통해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바로 사람의 영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복음을 전공으로 익히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실제적인 관심사는 자기 영혼보다는 자기 육신이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자신의 전공과목에 집중하지 못하는 교인들은 없겠습니까?
  매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여 설교를 통해서 영적인 문제에 대하여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배우고 있으면서도, 남들 보기에는 영적 문제에 전공하고 있는 사람 같으면서도, 막상 주간의 엿새 동안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에는 그저 ‘어떻게 먹고 살까?’ 하는 ‘떡 걱정’에만 사로잡혀 있는 교인들이 아마 꽤 많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전공에서 뒤쳐져 있는 제자’들을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그런 기적을 두 번이나 보았다면 이제 날 따라다니면서 최소한 먹을 걱정하는 수준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런 ‘의식주’에 대한 걱정보다는 오히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 그들에게 미칠 영적 악영향에 대하여 더 주의하고 살아야 한다고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즉 ‘나쁜 교훈’들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경건주의자로 자처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대표적인 형식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저 율법만 지키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그들의 교훈이었습니다.
  바로 오늘날 그저 교인으로서의 형식만 지키고 있으면, 그저 교회에 등록하고 주일예배에 출석하고 헌금하는 등 외형적 모양만 따르면 자신의 영혼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고 여기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정말 주의해야 할 ‘바리새인의 누룩’입니다.

  반면에 사두개인은 대표적인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의 비호 아래 종교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상류계급을 유지하면서 현실적으로는 아무 불만 없이 살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인의 모습은 가지고 있지만 영적으로 극히 나태하며 그저 세상과 짝하여 편안히 사는 일만 즐기는 향락적 자세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극히 조심해야 할 또 하나의 누룩이 바로 이와 같은 ‘사두개인의 누룩’인 것입니다.

  정말이지 ‘신앙생활에 전공’하는 신자라면 적어도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지금 ‘내 영혼이 도대체 무엇을 먹고 얼마나 건강하게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살펴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자기 영혼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는 ‘걱정’, 꼭 해야 될 ‘근심’, 정말 하면 하면 할수록 더 좋은 ‘조심’을 해 보셨습니까?
  오늘 저녁 우리 집 반찬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생각하는 이상으로, 오늘 하루 동안 내 영혼의 식생활, 나의 경건생활, 기도생활이 어떻게 영위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니까?
  내 심령이 설교 말씀을 정말 얼마나 잘 받아먹고 잘 소화시키고 그것을 한 주간의 삶을 통해 축복의 열매를 맺게 하는 에너지로 잘 사용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십니까?
  상한 음식을 먹고 식중독에 걸릴까봐 걱정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오늘 하루도 나와 내 자녀들의 영혼을 좀 먹고 있는 ‘불신앙과 이단과 세속의 누룩’들이 과연 무엇인가 하고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계십니까?

  우리는 자신이 바리새인처럼 그저 형식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지, 사두개인처럼 신앙생활은 뒤로 제쳐놓고 실제로는 그저 육신의 향락에 파묻혀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정말 ‘요주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믿고 바르게 따르는 제자답게 ‘일용할 떡’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영적 건강을 해치는 불신앙적인 ‘누룩의 사상과 교훈’들을 경계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전공과 부전공을 뒤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다닌다 하면서도 그저 먹고 사는 일만 여전히 전공으로 삼는 가운데 그래도 좀 시간이 남으면 성경공부도 참석하고 구역예배도 가보겠다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전공을 제쳐놓고 엉뚱한 서클이나 과외활동만 쫓아다녀서도 안 됩니다.
  교인이라 하면서도 마땅히 주력해야 할 복음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아무 봉사도 희생도 하지 않고, 목사라는 사람이 사회사업에만 관심을 가지거나 정치운동에만 쫓아다니는 것은 이미 ‘예수 학교’의 신실한 제자가 아닌 것입니다.

  전문가는 자기 전공 분야에 대하여 비전문가보다 월등하게 탁월해야 합니다.
  세탁업자가 집에서 주부가 하는 빨래보다 더 못하게 해서는 말도 안 될 일입니다.
  자동차 수리공이 아마추어가 직접 정비하는 것보다 더 서투르게 해서야 그 직업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은 뻔합니다.

  그러니 목사가 말씀과 기도 능력에서 일반 성도보다 더 떨어진다면 당장 사역을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
  장로와 집사가 교회 섬기는 일을 자기 집안 꾸려 나가는 것보다도 더 못한다면 이것 또한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인들이 성경 말씀을 세상의 상식보다 더 몰라서야 말이 안 될 일이며, 자기 영혼을 위한 조심보다 자기 육신을 위한 걱정이 더 많다면 정말 큰일입니다.

  신자라는 사람이 신앙생활보다는 다른 세상일을 더 잘 하고 자기 인생 자체에만 더 신경 쓰면서 어떻게 진정한 ‘예수 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먹고 사는 것이 최우선이고 그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교회생활도 열심히 해 보겠다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그런 ‘여유’라는 것이 생기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자신의 육신 생활을 보다 폭넓고 의미 깊게 만들기 위한 부전공쯤으로 생각하는 교인은 이미 학과 선택부터가 잘못되어 있는 학생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전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단 한순간이라도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돈 잘 버는 것이, 출세하여 명예를 얻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전공과목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더욱 은혜롭고 복스럽게 영위하기 위하여 보충하는 부전공이나 과외활동과 같은 것들입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이것만이 바로 우리 기독신자의 최고의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라도 우선 예수님을 잘 믿고 교회봉사를 잘하는 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발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전공을 제쳐놓고 부전공만 잘한 학생이 스승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쓰이는 일에는 빵점 받은 교인을 세상 사회에서는 성공했다고 예수님께서 상장을 주시겠습니까?
  인터넷 대화방은 매일같이 드나들면서도 성경 말씀은 한 구절도 직접 읽어 보지 않는 교인, 연예인 이야기만 나오면 신이 나서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무 간증할 체험도, 전도할 증언도 없는 교인 - 이런 교인이 과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르는 일 - 이것만이 저와 여러분이 결코 낙제해서는 안 될, 우리 인생의 전공필수과목입니다.
  ‘시대의 표적’을 통찰하여 하나님의 구속사를 밝히 깨닫고 ‘헛된 교훈의 누룩’을 조심하여 자신의 영혼을 건강하게 유지함으로써, 진정 예수님의 우수한 제자로서 계속 성화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