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5-26 “이 악한 세대가 이렇게 되리라” 마태복음 12장 38-50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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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5-26
2019′경향의 강단(23)(2019년 5월 26일 / 주일 대예배)
“이 악한 세대가 이렇게 되리라” 마태복음 12장 38-50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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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악한 세대가 이렇게 되리라”

마태복음 12장 38-50절 / 석기현 담임목사
몇 학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튼 제가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우리 반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한 급우가 갑자기 “선생님, 아기는 어머니의 몸 어디로 태어나나요?”라고 질문했습니다.
 아직 ‘성교육’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대인지라 담임선생님도 당황하셔서 아무 대답을 못하셨습니다.
 그때 다른 급우 한 명이 아주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x구멍으로 나오는 거야.” 저를 비롯한 우리 반 아이들 대부분은 ‘정말 그런가?’ 하는 눈초리로 선생님을 바라보았지만, 담임선생님도 그냥 얼굴만 붉히실 뿐 끝까지 묵묵부답이셨습니다.
 사실 당시 제 또래의 ‘국민학교’ 아이들은 대부분 다 아기가 ‘엄마 배꼽’에서 나온다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초등학생’들은 그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나도 제왕절개로 태어났을까?’라고 궁금해 한답니다.
 인터넷에 보면 그 외에도 ‘국민학생과 초등학생의 차이점’이라는 유머 시리즈가 많이 있는데, 낯부끄러운 속어도 나오고 비도덕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서 차마 이 자리에서 소개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구세대’와 ‘신세대’의 생각과 행동이 얼마나 다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이런 ‘세대 차이’란 문명의 발달이 가속화된 현대에 들어와서 갑자기 사용하게 된 개념입니다.
 옛날 중세기같이 거의 1천년 내내 학문과 기술 및 사회 전반에 걸쳐 그리 뚜렷한 변화가 없었던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이런 단어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즉 동시대 사람이나 그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나 생활방식은 물론 사고방식도 그리 큰 차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세상에서는 오직 ‘같은 세대’에 속한 사람들끼리만 통할 수 있는 문화, 관습, 정보 등이 날이 갈수록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까닭에 ‘세대차’라는 말이 피부로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 세대차라는 것도 이전에는 10년 간격은 있었는데, 이제는“어린 아이들 사이에서는 1년 단위로 세대차를 느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세대차를 구분 짓는 햇수가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형편입니다.
 즉 같은 세대에 속한다고 다 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공감대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와 비슷한 의미로 ‘세대 차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 “이 세대 사람”, “이 악한 세대”라고, 예수님께서 ‘세대’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사용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이 세대(this generation)’란 말의 의미는 물론 10년 단위로 나누어서 부르는 ‘세대’가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동시대의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비록 ‘동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그 ‘이 세대’에 속하지 않는 아주 특별한 한 집단을 구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둘의 차이는 요즘 우리가 말하는 ‘세대 차이’와는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크고도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제 가정의 달 5월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게 된 오늘 저는 기독신자가 과연 어떤 ‘영적 세대 차이’를 느낄 줄 알아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지 않는 ‘불신앙 세대’는 갈수록 더 악하고 음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38절부터 45절에 “38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41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일견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한 태도로 예수님을 “선생님” 즉 ‘랍비’라고, 그들로서는 최고의 예우에 해당되는 존칭으로 부르면서 접근해왔습니다.
 _ 하지만 그 예의와 공손의 가면 뒤에 숨어 있는 것은 실로 고질적인 불신앙과 악한 교만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무언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신비한 기적’을 가리킵니다.
 즉 지금 당장 하늘에서 무슨 불덩어리가 떨어지게 한다든지 혹은 갑자기 벼락을 내리게 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기적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 정도는 보여 줄 수 있어야 예수님의 신분과 능력을 인정해 줄 수 있겠다는 것이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한 가지 알아야 할 점은, 앞의 22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는 놀라운 표적을 조금 전에 이미 보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그 기적을 그저 ‘귀신놀음’에 불과하다고 일소에 부치고, 이제 자기네들의 구미에 맞는 또 다른 기적을 뻔뻔스럽게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과 육이 근본적으로 변화 받고 새로 거듭나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은 아예 무시하면서, 그 대신에 무슨 깜짝쇼 같은 기적을 보여 주어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다고 말하는 바리새인들의 자세는 바로 오늘날 세대의 불신자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똑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 그런 요구에 응해 주실 리가 만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이 바리새인들의 요청은 ‘표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표적이 없으니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교만한 도전인 것을 잘 아셨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 요구를 받자마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음란’이란 말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나 배교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으로 구약 선지서에서 자주 쓰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하나님께 반역하고 교만한 세대에게 보일 표적이 있다면 그것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요나의 표적’이 비유하는 바는 요나 선지자가 삼일 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 나온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삼일 동안 무덤에 계시다가 부활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신 사건만이 모든 세대의 모든 인류에게 보여 주실 수 있는 최대의 표적이며 또한 필요충분한 증거가 될 것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십자가 사건을 보고도, 죄인을 위해 흘려 주신 그 보혈을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악하고 음란한’ 불신앙이요 배교요 교만인 것입니다.

  41절과 4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처럼 위대한 ‘십자가 표적’을 끝까지 거부하는 불신앙의 세대가 그 얼마나 교만한지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남방 여왕”“심판 때”에 그 불신 세대를 “정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은 아무 ‘표적’ 없이 그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의 말’만 들었지만 곧 회개하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을 믿지 못할 것 같았던 니느웨 사람들, 요나 스스로도 결코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 백성들이 단 하루 동안의 전도만 듣고도 한 명 빠짐없이 다 회개했습니다.
 남방 여왕, 즉 스바 여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가망성조차 없어 보였던 먼 아프리카 지방 사람이었는데, 자기 발로 찾아 와서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만 듣고도 즉시 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이 세대 사람”들을 비교해 본다면 어떠합니까?
 이 세대의 사람들은 “솔로몬보다 더 큰 이”, “요나보다 더 큰 이” 곧 예수님을 통해 직접 복음을 전해들은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보다 전도를 더 잘한 사람, 예수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지혜롭게 가르친 사람은 문자 그대로 전무후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무슨 표적이 없니 어쩌고 하면서 믿지 못한다면, 그 예수님보다 훨씬 못한 요나나 솔로몬의 말만 듣고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 앞에서 심판 날 큰 수치와 함께 정죄당할 것은 너무나도 당연지사가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불신앙의 악한 세대에 속해 살던 자들은 이처럼 심판 때에 가서는 무서운 지옥에서 영원히 같이 살게 될 뿐인 것입니다.

 _ 본문 43절부터 4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불신 세대’에 속한 자들이 얼마나 ‘악하고 음란한’지에 대하여 “더러운 귀신”의 비유를 통해 계속 책망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란 문자적으로는 ‘더러운 영’이란 뜻인데 일반적으로 ‘귀신’을 뜻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 속에서 살고 있던 귀신이 밖으로 나가서 “물 없는 곳” 즉 당시 유대사회에서 귀신이 일반적으로 거하는 장소라고 여겨지고 있던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그 귀신이 마땅한 거처를 찾지 못하고 다시 원래의 “집” 그 어떤 사람의 마음속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와보니 웬걸 그 집은 여전히 “비어” 있을 뿐 아니라 깨끗하게 “청소되고 수리되어” 귀신이 살기에 더 좋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귀신은 다시 나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까지 데리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귀신이 어떻게 들어가고 나가고 했는지가 아니라, 예수님의 결론이 분명히 가르쳐 주시는 것처럼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며,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는 데에 있습니다.
 즉 마땅히 채워야 할 것을 채워 넣지 않은 마음, 다시 말해서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영접하지 않고 비어 있는 마음에는 자연히 ‘더러운 불신앙의 영’이 대신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사역 초창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듣고 감동받기도 했으며 병 고침을 받는 복도 누렸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 심령에서 악령이 떠난 듯이 보였지만, 그 좋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완전한 믿음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끝까지 그저 공짜 떡이나 먹여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끝내는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하고 오히려 배신하는 무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불신앙 세대’에 속한 자들은 이처럼 똑같은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에 그 말과 행동도 ‘악하고 음란하게’ 서로 잘 통하는 ‘같은 세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에도 이처럼 ‘악하고 음란한 불신앙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절대다수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5천년을 이어 내려온 불신앙의 세대에 태어나셨으면서도 외국 선교사들이 ‘예수 천당’ 하고 외치는 한마디에 당장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훨씬 더 많이 배우고 세련되었다는 현세대의 사람들은 신구약 66권이 있는데도 그 증거를 간단하게 무시하고 그 대신에 이것저것 따져들면서 얼마나 교만하게 자신의 불신앙을 합리화시키려 합니까?
 우리의 부모님들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세대에 속했지만, 소위 ‘쪽복음’ 한 권 외에 별다른 증거도 없는 가운데서도 그처럼 진실하고도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흘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도 다니고 학교마다 기독교 동아리가 있고 어느 동네로 이사를 가도 교회 십자가가 지척에 있는 이런 좋은 시대에서 자라나고 있는 ‘이 세대의 현대인’들은 왜 이렇게도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귀찮게 여기는 것입니까?

 _ 일단 같은 피가 통하지 않으면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피 흘려 주신 것을 믿지 않으면 내내 이 불신 세대, 영적 마피아와 같은 이 ‘악한 패밀리’와 같이 세상에서 살다가 결국 같이 지옥에서 영벌 받을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짜 같은 가족이라면 또한 마음이 맞고 뜻이 통해야 마땅합니다.
 ‘성령이 거하는 성전’의 마음 대신 마귀가 살기 좋게 되어 있는 ‘악한 마음’, 하나님을 거역하는 ‘음란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세대는 결국 그 나중의 영적 형편이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하게 부패해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_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악하고 음란한 불신앙 세대’는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는 날 ‘의인의 회중’과 철저히 분리되어 영원히 ‘지옥 세대’에 속하게 된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신앙 세대’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새 가족이 됩니다.

  46절 이하 50절에 기록하기를 “46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께서 계시던 집 “밖”에까지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보아서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의 공생애 초창기에는 아직 완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21절에 보면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집으로 데려가려고 찾아온 적도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그와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는 그들도 다 신자가 되었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같은 이는 초대 교회의 지도자까지 되었지만, 본문의 사건이 있을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여튼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모처럼 멀리까지 찾아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그 가족들을 맞이하러 나가기는커녕 집안으로 모셔 들이라는 말씀조차 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엉뚱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정말 엉뚱하게도 당신의 “제자들을” “손을 내밀어” “가리키시면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라고 자문자답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그야말로 폭탄선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사실 인간윤리를 따져 보자면 이보다도 더 부모에게 불효하고 형제에게 매정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엄연한 당신의 핏줄을 제쳐놓고서, 아니 아예 외면까지 하시면서, 성(姓)도 족보도 전혀 다른 사람들을 가리켜서 당신의 진짜 모친이요 형제자매라고 공언하고 계시니, 세상에 이런 아들, 이런 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실로 중요하고도 특별한 가족, 실로 혈연보다도 더 가까운 한 ‘새 가족’을 소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비록 몸은 이 세대에 속하여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불신앙의 세대’와는 완전히 딴 살림을 차리고 사는 ‘신앙의 세대’를 예수님께서 친히 선포해 주셨던 것입니다.
 앞서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부모나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고 잘라 말씀하신 것도 이와 똑같은 맥락이었습니다.
 같은 핏줄을 나눈 육신의 가족도 참으로 끈끈한 것이지만, 똑같은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사는 신앙생활로 맺어진 이 새 혈연관계는 육신의 가족보다도 훨씬 더 가깝고 훨씬 더 진하고 훨씬 더 강하고 뜨거운 ‘영적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육신의 가족은 이 땅에서 끝나고 말지만 이 ‘신앙 세대’에 속한 사람은 영원토록 ‘천국 가족’으로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하고 음란한 불신앙 세대’에서 벗어나서 바로 이 ‘신앙 세대’에 속해야만 합니다.
 지연(地緣)도 때로는 좋은 것입니다.
 혈연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장 가까운 관계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써 맺어지는 새로운 관계, 이 십자가 보혈의 혈통을 공유함으로써 성립되는 영적 가족은 금세에서뿐 아니라 내세에까지 영원히 이어지게 됩니다.

  이 ‘신앙 세대’, 이 ‘천국 가족’에 속하기 위해서는 일단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같아야 합니다.
 단순히 같은 지구상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해동포’라고 일컫는 것은 이 영적 가족의 구성에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말입니다.
 신은 달라도 아무 종교나 가지면 다 같은 형제요 자매라는 말도 어처구니없는 헛소리입니다.
 아버지가 엄연히 다른데 어떻게 한가족이라는 말입니까?
 하늘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양자(養子)된 자들만 생명책의 호적에 정확하게 올려놓으셨는데, 다른 신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는 종교인들도 기독교인들과 한 형제라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족보법을 따른 소리입니까?
 _ 한쪽은 천당에서 영원히 같이 살 가족이고 다른 한쪽은 지옥에서 영원히 동거할 가족인데, 현주소가 다르고 돌아갈 본적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형제자매가 된다는 말입니까?

 _ 또한 이런 영적 가족관계는 단순히 교회의 등록교인이 된다고만 해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매주일 예배시간에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즐기기만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천국 가족’이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목사와 안면이 익숙해지고 아무리 교회 출석만은 계속하더라도, 만일 그 사람이 끝내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 예수님을 구세주로 진정 영접하지 못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참된 신행일치의 삶을 보이지 못하면, 그런 교인은, 미안하지만, 예수님의 구분에 따르면 아직도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이지 ‘이 가족’에 속한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목사도 어떤 교인과 더 가까워지겠습니까?
 그것은 목사에게 인사를 잘하고 선물을 자주 갖다 주는 교인이 아니라 오직 신앙생활을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잘하는 교인입니다.
 그런 교인은 목사에게도 정말이지 자신의 친가족보다도 훨씬 더 가깝게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조차 그러하다면 예수님이야 오죽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심령에 ‘내가 이제는 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충성을 보여 드려야지.’라는 서원이 생기고, 여러분의 손발이 하나님께서 원하실 여러 가지 교회의 봉사를 열심히 섬기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습니까?
 그런 성도는 바로 그 마음과 몸의 체험이 하나로 묶어주는 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끈끈한 형제자매, 하나님의 집에 든든히 동거하는 진짜 새 가족이 이미 되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 불신앙의 세대와 완연하게 구별되는 예수님 안의 새 혈통, 영원한 천국 가족이 되기 위하여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믿고 순종하는 ‘신앙 세대’에 끝까지 속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때로는 인종으로, 때로는 나라로, 때로는 세대차로 구분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불신앙의 세대에 속한 악하고 음란한 사람들’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의 세대에 속한 천국 가족’으로 실로 칼같이 갈라놓으셨습니다.

  구세대에 속해서 신세대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 나겠습니까?
 소위 ‘아날로그 세대’인 까닭에 스마트폰의 기능을 5퍼센트도 채 활용할 줄 모른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또 구세대에 태어나지 않고 신세대를 마음껏 즐기면서 살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청년들과 청소년들이 여러분의 세대에 속한 사람만 가입할 수 있는 인터넷 카페를 만들고 여러분의 세대 사이에서만 통하는 온갖 희한한 신조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해서 여러분의 삶의 질이 구세대 어른들보다 월등할 것 같습니까?

 _ 구세대든지 신세대든지 간에 어차피 칠팔 십 인생 살다가 죽으면 다 끝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너는 내 가족이 아니다’라고 차별하시는 그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면, 실로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혈육관계는 이 세상에 잠시 살고 있는 동안만 유지될 뿐입니다.
 죽은 후에 천당에서나 지옥에서는 그 가족 관계가 더 이상 존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이 땅에서 ‘불신앙 세대’와 ‘신앙 세대’로 나누어지는 관계는 죽은 후에도 ‘서로 상대편으로 건너갈 길이 없는’ 영원한 ‘세대 차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가 바로 우리를 ‘신앙 세대’에 속한 사람이 되게 해 주는 ‘예수 가족’의 공동체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하지만, 그 피보다 더 진하게 맺어진 관계가 같은 예수 십자가의 보혈을 나눈 가족입니다.
 매일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나누는 한가족처럼 늘 교회중심으로 살면서 한 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떡을 함께 먹고 있는 가족입니다.
 같이 웃고 같이 우는 형제자매들처럼 한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고 그 마음과 뜻이 늘 서로 통하는 가족입니다.
 합명회사를 세우고 함께 땀 흘리고 함께 벌고 함께 나누는 대가족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사업에 늘 힘과 정성과 땀을 모아 신앙의 공동체를 같이 발전시켜 가고 있는 가족이 바로 교회의 성도인 것입니다.

  한 핏줄을 나누고 한 지붕 밑에 사는 가족은 결국 그 미래도 공유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불신앙 세대’는 함께 지옥에서 영벌을 받게 되고 교회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통하는 ‘신앙 세대’는 또한 천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사는 영원한 가족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와 성도는 비록 현실적으로는 ‘이 세대의 사람’들 중에 섞여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들과 완전히 ‘세대 차이’를 가지고 있는 아주 특수한 ‘신세대’가 아니겠습니까?
 결국 영벌의 저주를 공유하게 될 ‘악하고 음란한 불신앙 세대’에 결코 빠지지 않고, 늘 ‘십자가의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자매’가 되며 어디서나 ‘하나님 한 분만을 같은 하늘의 아버지로 모신 자녀’들이 되어 금세와 내세에서 영원히 ‘신앙 세대’에 속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