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5-19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사도행전 4장 1-22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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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5-19
2019′경향의 강단(22)(2019년 5월 19일 / 선교주일 대예배)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사도행전 4장 1-22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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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사도행전 4장 1-22절 / 석기현 담임목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조폭 두목이 불치병에 걸렸는데, 만나는 의사마다 다들 가망성이 전혀 없다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한 의사가 “아주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도는 한 번 해 봅시다.”라고 하면서 치료를 시작했는데, 웬걸 깨끗이 완치되고 말았습니다.
  그 조폭 두목은 너무나 고마워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자기 생명의 은인이 된 그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달리 이 은혜에 보답해 드릴 길은 없지만, 그 대신에 혹시 앞으로 누군가가 선생님을 귀찮게 하거나 시비를 걸어오면 그저 제 이름 석 자만 대고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 주십쇼. 그렇게만 하면 이 근처에서는 아무도 선생님을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스갯소리로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유력한 사람의 이름’을 알기만 해도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 든든한 배경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실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 사회의 최고위층 권력자들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지극히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바로 그처럼 ‘권세 있는 이름’ 하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갈릴리 어부 출신에 불과했던 그들은 위엄스럽게 높은 자리에 틀고 앉아 있는 산헤드린 공회원들로부터 “너희가 도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했느냐?”라는 추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웬만한 사람 같으면 가슴이 절로 졸아들고 숨 한번 제대로 크게 쉬지도 못할 것만 같은 처지에 놓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뜻밖에도 두 사도는 조금도 주눅 들거나 떨지 않고 오히려 그 공회 앞에서 지극히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 두 촌사람들이 그 잘난 유대 사회의 최고위급 권력자들을 모조리 완전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오늘 교단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우리 기독신자로 하여금 늘 사람 앞에서 당당하고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게 만드는 ‘권세 있는 이름’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미련한 것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예수 이름’을 아는 전도자는 어떤 핍박자 앞에서도 항상 담대합니다.

  1절부터 7절에 기록하기를 “1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쳐준 후에 모여든 군중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신경의 촉각을 세우면서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유대사회의 상류계급을 형성하고 있던 그들은 사도들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을 심히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자기네들만이 유대인의 유일한 정신적, 신앙적 지주인양 행세해 왔는데 만약 백성들이 ‘다른 도’를 따라가게 되면, 지금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자기네의 부유한 생활이 위협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 두 사도들을 당장 체포하여 “이튿날”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가두어” 두었던 것입니다.

  다음날 모인 공회, 유대사회에서 정치적 및 종교적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가 주도했는데, 당시 현직 대제사장은 가야바였고 안나스는 전임자였지만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이라는 자는 나중에 가야바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알렉산더”는 어떤 사람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문중”으로서 산헤드린 공회원인 자들이 다 참석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루살렘에서 내로라하는 인사들은 다 모인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앞에 세워 놓고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 위협에 대해 사도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8절부터 12절에 “8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위세 등등한 산헤드린 공회에서 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거침없이 대답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해 주셨던 사실 곧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눅 12:11-12)는 그 말씀이 정확히 실현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처럼 성령 충만했던 사도 베드로의 대답의 요지는 오직 “나세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 앉은뱅이 “병자”“건강하게” 고쳐 주었으며 오직 그 이름만이 ‘천하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유일한 이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베드로는 이어서 그 예수님이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 취급을 받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집을 짓는 사람들이 쓸모가 있다고 판단되는 돌만 골라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그냥 도로 땅에 버리듯이,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님의 귀하심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로마 군병들의 손에 죽도록 만들었던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 즉 집을 짓는 데에 사용되는 돌 중에서도 가장 귀한 돌이 되셨다고 베드로는 증언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 존귀함을 발견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것으로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최고의 보배가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저 흔한 길거리의 돌멩이와 다름없이 여겨지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거기에서도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름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놓여야 할 중요한 자리에 재질이 약하고 모양이 틀어진 다른 돌을 놓을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을 구원하는 이 중차대한 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대신할 만한 대용품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던 것입니다.

  실로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고전 1:27상) 하나님의 오묘한 복음 역사가 확연히 나타난 장면이 아니었겠습니까?
  유대 사회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 제일 부유하게 살던 사람들,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갈릴리의 천한 어부 출신인 베드로 앞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오히려 한 수 크게 지도를 받는 형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회에서 ‘이름’ 하나만 알아도 크게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아까 서론에 나왔던 조폭 두목 같은 뒷골목 세계의 사람보다는 판검사처럼 합법적으로 유력한 사람을 아는 것이 훨씬 더 믿음직합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아는 신자는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 부활의 주님,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교회의 머리가 되신 이 그리스도, ‘천하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이 위대한 구세주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백그라운드가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문제는 그런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와 직접 관계는 없어도 동네 사람의 입을 통해서 그곳 조폭 두목의 이름을 알 수도 있을 것이고, 유력한 판검사의 이름 역시 사무실에 붙은 명패나 신문지상을 통해서 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름만 아는 것은 실제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어떤 이름을 아는 것이 힘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이름을 가진 사람과 본인 사이에 구체적인 관계가 있어야만 합니다.
  자기가 우연히 그 조폭 두목을 도와주는 은인이 되었다든지 판검사와 어떤 연줄로 닿아 있어야 그 이름이 자기 인생에 유효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유력한 관계는 혈연으로 아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 아버지가 조폭 두목이고 자기 남편이 판검사일 때가 그 이름이 가장 힘이 있게 됩니다.

  예수 이름을 아는 것도 꼭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그냥 입으로만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과 ‘피로 통하는 관계’가 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유일한 구세주’로,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으로 믿고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그 보혈이 자기 몸속에 흐르는 참된 신자가 되어야만 그 예수 이름을 아는 것이 진짜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아는 신자는 그야말로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니 세상의 부자들 앞에서 기가 죽을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음으로써 그분의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가 된 신자는 세상의 상류사회 사람들 앞이라 해도 자기 신앙에 대하여 결코 주눅 들지 않습니다.
  이런 요긴한 머릿돌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를 자기 인생 기반으로 두고 사는 신자는 세상의 어떤 박사 앞에서도 그 이름을 외치는 전도가 결코 막히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리석고 천한 자’들을 택하여 오히려 세상에서 ‘똑똑하고 잘났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신의 진실한 신앙고백을 통해 확실히 간직함으로써 그 어떤 핍박자들 앞에서도 늘 담대하게 복음을 증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약한 것을 들어 강한 것을 폐하는 ‘하나님의 권세’를 등에 업은 전도자는 끝내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13절 이하 18절에 “13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베드로가 그 재판정에서 “담대하게” 즉 지극히 당당하고 유창하게 대답하는 것을 듣고 완전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갈릴리 시골 출신의 무식한 어부들이 감히 산헤드린 공회에서 오히려 자기네들에게 교훈조로 대답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설상가상 그들은 그런 예상외의 펀치를 한 방 맞고도 어떻게 한마디 대꾸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지금 앉은뱅이를 고쳐 놓고 그것이 바로 ‘예수 이름’ 때문이라고 기탄없이 외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명백한 증거까지 자기네들 눈앞에 있으니 무슨 “비난할 말” 즉 아무 트집거리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사도들을 일단 “공회에서 나가라”고 명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네들끼리 일종의 밀실회의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들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 난관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지만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라고 완전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무작정 체포해 오고 재판을 벌였는데, 오히려 그 피고인들이 그 자리에서 변론한 사실과 그들 앞에 제시한 증거는 자기네들 말마따나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 실로 명백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그들은 겨우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곧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당시 로마제국이 유대인에게 허용해 준 자치권을 행사하는 기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공회는 어떤 사람이든지 마음대로 체포하고 심문할 뿐 아니라 사형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형벌이라도 선고할 수 있었습니다.
  즉 산헤드린 공회는 적어도 유대 사회에 있어서는 신분적으로 최상류 사회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최고의 실권을 쥔 기관이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공회원들은 바로 그 권한의 공포감을 십분 활용하여 사도들의 입을 막아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도 역시 또 한 번의 뜻밖의 반격에 의하여 완전히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19절부터 22절에 “19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마치 자기네가 모든 사람들 위에 최고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듯이 착각하면서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부활을 했든지 말든지,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런 것을 전파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과 사상에 거치는 것이기만 하면 무조건 마음대로 처벌하고 금지시킬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그처럼 인간적 권력을 마음껏 누리던 중에 바로 자기네보다 훨씬 위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산헤드린 공회의 엄중한 경고가 떨어지자마자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지” 아닌지 “(너희들 스스로 한번) 판단해 보라”고 되받아쳤습니다.
  즉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보다 훨씬 더 높은 권위를 경외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짜 높으신, 진짜 권세 잡으신 하나님을 세상의 그 어떤 힘 있는 자들보다도, 그 어떤 권위 있는 기관보다도 훨씬 더 두려워하며 받들어 복종하는 전도자들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아무리 유대 사회에서는 최고 권력을 자랑하더라도 그것과는 비교의 대상도 못될 진짜 권세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까닭에 그 사도들은 그런 세상 권력 앞에서 조금도 겁내거나 머리를 수그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있어서는 자기네들이 “보고 들은 것” 즉 구세주 예수님의 이름과 그 행하신 일들을 전파하는 것은 바로 그 높으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사명에 순종하는 행위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열두 명만을 뽑아서 삼 년 동안이나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게 하시고 그들의 귀로 직접 듣게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지 아니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권위를 두려워하는 신자로서는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즉 베드로와 요한으로서는 아무리 현실적으로는 세상 권력자들이 그들을 협박해 오고 있어도 사신 하나님의 권위에 감히 불복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또 한 번 창피스러운 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네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발언을 그 공회석상에서 들으면서도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그저 두 사도들을 다시 한 번 “위협하여 놓아 주는” 즉 경고 사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고전 1:27하)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 역사가 여기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본인은 약해도 그 사람이 어떤 강력한 것을 소유하거나 그것과 줄이 닿아 있으면 그 힘을 고스란히 입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빼빼마른 사람 혼자 있다 해도 그 손에 권총이 들려 있으면 건장한 사람 여럿이라도 함부로 덤빌 수가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그저 평민인 줄 알았는데 품속에 있던 마패를 꺼내들면 모든 관리들이 그 앞에 벌벌 떨면서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문제는 그 권력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민간인은 권총을 소지할 수 없지만, 경찰은 치안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합법적으로 그것을 소지하고 다님으로써 범죄자들을 제압합니다.
  청와대를 사칭하여 사람들을 협박하고 돈을 뜯어내는 자들은 다 쇠고랑을 찰 수밖에 없지만, 대통령으로부터 정식 임명을 받은 국무총리나 장관이나 보좌관들은 자신의 업무수행을 위한 권한 역시 위임을 받게 됩니다.
  결국 권력이라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임명해 주는 직위와 부여해 주는 사명을 통해서 활용될 때, 정당하면서도 효과 있게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지극히 높은 권위와 무한한 능력은 그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 임명하신 직분과 함께 따라오는 것이고 그 사명을 수행하는 자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강력히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는 일에 전력투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힘을 아깝게 낭비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받은 사명에 충성하는 일에 쓰지 않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 많은 달란트와 더 큰 고을의 권세’를 허비하실 아무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용기와 힘은 오직 하나님의 권세를 높이 받들고 그 사명을 순종함으로써 절로 얻게 됩니다.
  그런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의 권력이라는 것은 제아무리 높아 보이고 제아무리 강해 보여도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도록 충성하는 신자는 아무리 불신 사장이 핍박을 해도 주일성수에 조금도 굴하지 않습니다.
  천주교가 온 세상을 장악하는 교권을 휘두르면서 개혁주의 기독교를 포위 공격해 오고 공산독재자들이 총칼로 위협하면서 참된 교회를 무너뜨리려 할 때, 그것을 두려움 없이 대항하고 승리할 수 있는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 앞에서 벌벌 떨 줄 아는 교회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사회의 가장 강한 것이라 해도 전지전능자의 가장 약한 것 앞에서조차 전혀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들을 들어 ‘강하고 교만한 자’들을 완전히 무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경외하고 의지함으로써 사탄의 온갖 공갈협박과 박해 앞에서도 끝까지 충성하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서 최고로 부요하고 귀한 것들, 세상에서 최고로 높고 강한 것들과 정면으로 맞선 첫 번째 공식대결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은 한 죄수의 이름이 당대의 가장 세련된 것을 상대로 서게 된 자리였습니다.
  가난하고 무식한 어부 두 사람이 변호사 한 명 없는 무력한 피고로 서 있는 반면에, 유대사회의 최고 부자와 최고 학벌이, 최고 권력과 최고 상류사회가 판사, 배심원, 검사 자리를 다 차지하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누가 보아도 도저히 게임이 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겠습니까?

  하지만 대결이 시작되자마자 그 촌사람들이 그 잘난 사람들을 초전부터 완전히 압도해 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세상의 가장 지혜롭다는 것을 공이 울린 직후부터 무색케 만들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세’는 세상의 가장 강한 것을 1회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KO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디 그 첫 대결 때뿐이겠습니까?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이 싸움은 항상 일방적인 것이었습니다.
  여의도 증권가에 아무리 많은 돈이 굴러다녀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이름을 가진 전도자의 부요함 앞에서는 결코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서초동에 있는 대법원의 권위가 아무리 신성하고 높게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두려워하는 성도의 진실한 신앙과 충성스러운 생활에는 아무런 영향력조차 발휘할 수 없습니다.
  실로 세상의 가장 ‘지혜롭고 강한’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패했고 사도들 앞에서 연이어 창피를 당했으며 오늘날의 기독신자들 앞에서도 여전히 무색하고 무력한 것입니다.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조금도 꿀리지 아니합니다.
  ‘예수 이름’을 확실히 알고 ‘하나님의 권세’를 두려워할 줄 아는 신자는 그야말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복음을 믿고 전하고 있는지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처럼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언하는 멋진 복음의 전도자들, 하나님의 주권에 크게 영광을 돌리는 충성된 증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