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5-05“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장 4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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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5-05
2019′경향의 강단(20)(2019년 5월 5일 / 어린이 주일예배)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장 4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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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장 4절 / 석기현 담임목사
역사적으로 볼 때 어린이를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게 된 것은 꽤 최근부터입니다.
  과거로 올라갈수록 어린이는 어른으로부터 마치 ‘반쪽 사람’ 같은 취급을 받았는데, 그것은 어느 나라 민족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어린이’라는 명칭 자체도 아동 문학가 방정환 씨가 제일 처음으로 사용할 때까지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원래는 그냥 ‘어린아이’라는 말만 썼는데, 그 ‘어린아이’도 어른과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아이’라는 말 대신 보통 사람을 칭할 때 쓰는 ‘의존 명사’인 ‘이’ 자를 붙여서 ‘어린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린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전까지는 어른들이 이들을 그저 ‘어린 아이’로만 여겼지 ‘어린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특히 그 어린아이가 자기의 자녀일 때에는 그 정도가 훨씬 심했는데, 대표적으로 로마제국 시대에 그랬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권한은 거의 전능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매를 드는 정도는 아무 이야깃거리도 아니며, 쇠사슬에 묶어서 들판에 보내어 일을 시킬 수도 있었고, 혹은 다른 노예처럼 시장에 내다 팔 수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갓 태어난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아무 데나 갖다 버리든지 아니면 죽일 수 있는 권한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에베소서를 쓸 때의 사회적 배경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아버지가 자녀의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있었고, 그 아버지가 자녀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법과 권위 그 자체였던 시절에, 바울은 성도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자녀교육 방침’을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비록 “아비들아”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꼭 ‘아버지’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11장 23절에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부모”라고 번역된 말은 문자적으로 ‘아버지’이지만 문맥상으로는 ‘부모’가 분명한 까닭에 그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 성도를 가리켜 “형제”라고 부를 때 실제로는 ‘형제자매’를 다 포함하는 뜻으로 쓰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라는 단어가 실제적으로는 ‘부모’ 양자를 뜻하는 경우가 자주 있고 본문에서도 그러합니다.

  하여튼 성령께서는 그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과는 전혀 다른 부모의 자세를 에베소교회의 성도에게, 그리고 오늘날의 모든 부모 된 신자에게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신앙의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과연 어떻게 키워야 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부모는 자녀가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 인격체’라는 사실을 항상 존중해야 합니다.

  4절 상반절에 “1a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본문 앞의 1절부터 3절에서 사도 바울은 먼저 자녀를 향하여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도록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이제 부모에게 말할 때에는, 바로 그 권위, 즉 하나님께서 분명히 부모에게 주신 그 권위를 절대로 오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어린 자녀가 가지고 있는 그 다치기 쉬운 섬세한 성품을 부모 쪽에서 늘 기억하고 배려해야 함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어린이가 어른보다 훨씬 더 때 묻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은 어린이의 그런 순진함을 칭송은 하면서도 반면에 바로 그 순진한 마음이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것인지는 쉽게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예를 들자면, 똑같은 말을 어른과 어린이에게 해도 그 말을 받아들이는 정도는 크게 다릅니다.
  어른이라면 그냥 농담으로 넘기거나 혹은 속으로 적당히 삭히고 들을 수 있는 말이라도, 어린이가 듣게 될 때에는 매우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들은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다른 어른에게라면 절대로 하지 않고 남의 자녀 앞에서도 조심할 말을 자신의 자녀에게는 무심코 함부로 내뱉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그 자녀가 마음에 받는 상처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부모가 별 생각 없이 그냥 충동적으로 내뱉는 말로써 자녀를 노엽게 만드는 일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아무렇게나 말하고 함부로 대하는 동안, 그 여린 마음은 어른이 알 수 없는 자기 나름대로의 큰 아픔을 겪고 있으며, 그 상처는 다른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그 자녀의 마음속에 한 층 한 층씩 더 깊이 쌓여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린이들이 나중에 자라서 타인을 향한 분노를 폭력으로 나타내고 사회에 대하여 항상 적의에 가득 찬 문제아와 범죄자가 되어 갈 때, 도대체 그들이 어디서 그런 감정을 제일 처음 배웠을 것 같습니까?
  십중팔구 바로 어린 시절에 자기 부모에 대한 노여움이 그 마음 깊은 구석에 계속 쌓여서 조성된 성격인 것입니다.

  자녀를 상스러운 말로 부르고 자녀에게 욕설을 밥 먹듯이 할 때, 그런 소리를 매일 들으면서 자란 아이가 나중에 어떤 어른이 되겠습니까?
  부모 자신도 학교에 다닐 때 별로 공부를 못했으면서 자기 자녀들은 공부 못한다고 허구한 날 들들 볶을 때, 그런 잔소리를 들어도 대꾸 한번 하지 못하고 속으로 불만만 가득 쌓인 아이가 나중에 머리가 커지고 몸집이 자라면 부모 앞에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부모 자신도 어릴 때 제일 듣기 싫던 소리 ‘옆집의 아무개는 저런데 너는 왜 이 모양 이 꼴이냐?’ 하고 다른 아이와 자기를 비교하면서 열등의식을 부채질하던 그 지긋지긋한 소리를, 이제 부모가 되니까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고, 똑같이 자기 자녀에게 날마다 퍼부어 댈 때, 그것이 그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눈곱만큼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가 있겠습니까?

  부모는 자녀 앞에서 지식, 경험, 능력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습니다.
  특히 권위 문제에 있어서는 일방통행이나 다름없는 관계입니다.
  자녀는 부모에 대하여 어떤 권위라는 것이 전혀 없는 반면, 오직 부모 쪽에서만 자녀에 대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처럼 일방적인 권위인 까닭에, 그것이 오용될 때에는 얼마나 심각한 죄를 저지르게 되는지를 부모는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권위에 대하여 거역하는 자식의 죄나 자식을 향한 부모의 권위를 오용하는 죄나 둘 다 똑같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신자 부모가 그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어린이에게도 어른과 똑같은 인격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개인’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어른이나 어린이나 아무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부모가 꼭 인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임스 딘이 남우주연으로 나왔던 유명한 영화 ‘자이언트(Giant)’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조단 베네딕트(Jordan Benedict)는 방대한 목장을 소유한 부자인데, 그는 이제 막 세 살이 된 아들 조디(Jordy)가 말을 탈 줄 모른다고 해서 화를 냅니다.
  말안장 위에 아들을 억지로 올려 태우면 어린 조디는 무서워하면서 내려 달라고 막 웁니다.
  조단은 그런 아들의 모습이 무척 못마땅하고 속이 뒤틀려서 “이놈아, 나는 걸음마 시작하기 전에 말부터 탔어.라고 야단을 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내가 말을 받아서 “좋아요. 그건 참 장한 일이지요. 하지만 그건 당신이었지 이 조디가 아니에요. 이 애는 당신과는 다른 또 하나의 사람이에요. 이 애가 원래 천성적으로 말을 싫어할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라고 합니다.
  조단은 “이놈은 베네딕트 가문의 핏줄을 타고 태어난 녀석이오. 말을 못 탈 리가 없어. 정 안 되면 말 잔등에 묶어서라도 기어이 말을 타게 만들겠어.”라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 아내는 항의하기를 “당신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어요. 온 세상이 다 당신 마음대로 되는 줄 아세요?”라고 합니다.
  그때 조단은 “나는 내 것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뿐이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자 그 아내도 목청을 높이면서 “그 애는 당신 것이 아니에요. 그 애는 당신 것인 동시에 또한 제 것이에요. 사실을 바로 따지자면 그 애는 당신 것도 제 것도 아니에요. 그 애는 그 애 자신일 뿐이에요."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 부부 간의 대화는 참으로 중요한 교훈 한 가지를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그것은 곧 자녀가 부모의 소유이기 이전에 스스로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성경이 이 사실을 명백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그 순종의 의무를 핑계 삼아서 자기 자녀를 본인의 욕심대로 만들어 나가려고 할 때 그 자녀의 인격은 무참하게 학대당하고 파괴되기 마련입니다.
  자녀를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자신의 소유처럼 착각함으로써 그 자녀를 노엽게 하는 일이 반복될 때, 그 어린 심령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쭉쭉 금이 가고 엉망진창으로 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욕심대로 되지 않는 것을 두고 부모에 대한 거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모가 가지는 최악의 언어도단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원이나 요구대로 자라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자녀는 부모가 만들어 낸 부모 자신의 소유물도 결코 아닙니다.
  모든 어린이 한 사람 한 사람은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그 개인의 인격을 각각 예정하시고 조성하시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는 내 자녀를 바로 이런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아이는 내 아들딸이기 전에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자녀가 내게 속한 핏줄이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께 직접 속해 있는 하나의 완전하고도 귀중하며 특별한 존재임을 잊지 말고, 그 귀중한 자녀를 항상 인격적으로 존중하면서 대하는 부모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모는 자녀를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서 교육해야 합니다.

  4절 하반절에 기록하기를 “4b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양육”이란 헬라어 단어는, 문자적으로 ‘젖을 먹여 키우는 것’을 가리키는데, 다시 말하자면 ‘잘 자라나도록 키우는 것’을 뜻합니다.
  즉 부모는 자기 자녀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그야말로 마음과 정성과 힘과 시간을 들이면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신이 자녀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기억하지만, 그 자녀를 잘 키워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은 자주 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라는 목사는 “만일 어떤 부모가 그들이 꽃을 키우거나 동물을 기르는 것만큼이라도 자기 자녀에게 신경을 쓴다면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럴 것 같지 않습니까?
  현대인들이 매일같이 꽃이 잘 피어 있는지, 시든 잎은 없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물을 주고 분갈이까지 한다든지, 혹은 애완동물을 키우느라 아이 하나 더 돌보는 것 이상의 시간과 정력을 쏟는 것을 볼 때, 만약 자녀 양육에 그만큼이라도 좀 더 마음과 힘을 쏟으면 정말 그 아이들이 자라는 정도와 질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양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합니까?
  그것은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써 양육되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교훈”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사실상 ‘훈련, 징계(discipline)’를 뜻하는 말로서, ‘규율과 징계를 사용한 엄한 교육’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훈계” 또한 바로 그런 교육에 또한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것임은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엄한 교육’의 필요성은 성경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바 자녀 교육에 있어서 불가결의 요소입니다.
  잠언 13장 24절에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했으며, 22장 15절에도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고 한 말씀이 그런 의미입니다.

  사실 옛날에는 이런 말씀을 마치 부모가 자녀를 마음대로 폭행해도 되는 구실처럼 오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필요한 체벌과 아동학대적인 구타를 전혀 구별할 줄 모르는 무지막지한 부모들이 많이 있었고, 더욱이 술에 만취해서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자기 아들딸을 때리는 것을 무슨 해장거리쯤으로 여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날에는 그 반대 극단으로 치달아서 부모가 자녀에 대한 징계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몇 십 년 전 싱가포르에서 어떤 미국 소년이 남의 차에 제멋대로 페인트로 낙서를 해 놓고서 그 때문에 그 나라 법에 의해 매 몇 대 맞게 되니까, 미국 사람들이 대통령까지 나서면서 애를 때리면 안 된다고 난리를 친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때 그 미국 소년이 남의 멀쩡한 차를 페인트로 엉망진창을 만들어 버린 그 행동 자체에 대해서는 미국 사람들 중 아무도 이렇다 할 만한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우리는 자녀 교육의 ‘징계’라는 요소에 대하여 두 양 극단을 다 조심해야 합니다.
  ‘지나친 징계’를 반대하느라고 ‘방임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적절한 징계’를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무(無)징계’를 반대한다는 것이 ‘마음대로 징계’하는 다른 쪽 극단으로 가서도 안 되며, 오직 ‘올바르게 징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부모가 자녀를 정당하고 적절하게 징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 자녀를 징계하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부모 스스로가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겨서 신경질이 났거나, 부모로서의 자존심을 상하게 되었다거나, 혹은 자신에게 생긴 기분 나쁜 일에 대한 화풀이조로 자녀를 징계하는 못난 부모가 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까 인용했던 로이드 존스 목사는 또 말하기를 “부모가 자녀를 징계할 때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함이 중요하다. 분명히 부모 자신에게 먼저 수양(discipline)이 필요한 상황에서 자녀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며 무슨 벌을 줄 수 있겠는가? 자기 조절, 특히 자기 감정의 조절이 다른 사람을 조절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절대필수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자녀 양육에는 이처럼 합당하게 조절이 된 징계와 함께 또한 “훈계,” 즉 ‘바른 교훈’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것이 자녀에게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는 뜻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잔소리나 강압적인 지도는 피해야 하지만, 그들이 바른 신앙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옳은 것’을 그들에게 계속 보여 주고 그들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부단히 교훈해야만 합니다.
  그런 교훈이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성경 말씀일 뿐입니다.
  신구약 성경이야말로 한 개인이 배울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교훈이며 자녀에게 가르칠 수 있는 최선의 훈계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본문은 이를 가리켜 “주의 교훈과 훈계”라고 밝힌 것입니다.
  그런 ‘징계를 동원하여 잘못된 것을 고치는 엄한 교육, 자녀의 심령을 깨우쳐 바른 인생으로 이끌어 주는 교육’의 내용은 오직 주님께서 그 자녀를 대하시는 자세로, 주님께서 그 자녀에게 베풀어 주시는 마음처럼, 주님께서 친히 그 자녀에게 해 주시는 말씀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모의 지식이나 부모의 경험이 자기 자녀 교육의 최고 커리큘럼이 절대로 아닙니다.
  국가가 요구하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윤리와 지식이 기독신자 자녀 교육의 핵심 교과 과정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구원 얻는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전해 주신 ‘예수 복음’이야말로 자녀 교육에 있어서 절대필수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완전한 신전인격자로 성장시키기 위하여 기록해 놓으신 신구약 66권이야말로 이들의 전 생애를 위한 완벽한 교과서입니다.
  바로 이 성경 말씀에 따른 교훈과 훈계로 양육이 되어야만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합격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인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좋다는 다른 교육을 아무리 잘 시켜 놓아도 이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키워 놓지 못하면, 정말 말짱 헛일입니다.
  아무리 부모의 마음에 드는 대학교에 들어가고 아무리 부모 마음에 흡족한 배우자를 얻고 아무리 사회에서 인정해 주는 직장을 가지게 된다 하더라도, 이 하나님의 기준에 떨어지는 자녀로 키워 놓게 되면 세상에서 제일 못난 부모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자기 자녀를 그처럼 부모 소원에 맞게, 또한 사람 앞에서는 자랑스럽게 키워 놓는다고 해서, 그 자녀가 나중에 자라서 진정으로 부모에게 감사하고 성심으로 효도할 보장이 있을 것 같습니까?
  자녀를 먼저 하나님의 기준에 맞도록 교육시키지 않으면 정말이지 큰코다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오직 성경 말씀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을 받은 자녀만이, 실로 평생을 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을 배우고 익힌 자녀만이, 끝까지 자기 부모에게 역시 순종하며 효성으로 받들게 됩니다.
  자녀 교육의 최종 결말은 그들이 부모 앞에서 어떤 자식으로 성장하느냐에서 결정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들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을 명심하면서, 맡겨 주신 소중한 아들딸들을 오로지 성경중심으로 하나님의 기준에 합격되도록 양육하는 부모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헨리 크로웰이란 성도는 자녀를 두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의 손은 크고 그의 손은 작습니다.
  그리고 내 앞에 가로놓인 과업보다 더 중요한 일이란 이 온 땅 위에 다시없습니다.
  주여, 제가 이 어린이를 올바로 인도하기 위하여 나는 주님께 지혜를 구합니다.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나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의 곁을 걸으면서 그의 발을 의로운 길로 인도하도록 당신이 나의 인도자가 되어 주소서. (하략)” 정말 그렇습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한 생명의 금세와 내세를 좌우하는 실로 중차대한 과업입니다.
  그 자녀의 성장 과정과 전 인생은 오직 부모의 교육에 달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정말 이 과업의 중요성과 책임의 무거움을 깨닫는 부모라면 그 자녀를 양육하는 일에 대하여 더욱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부모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간단하지만 지극히 요긴한 두 가지 명령으로써 신앙의 부모가 꼭 지켜야 할 자녀 교육의 요령을 일러 주셨습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부정 명령’은 부모가 조심해야 할 주의 사항을 깨우쳐 주는 말씀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속한 존재이기 훨씬 전에 먼저 하나님께 직접 속한 고귀한 독립 인격체인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긍정 명령’은 부모가 꼭 따라야만 할 최고 최선의 교육 내용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부모의 욕심이나 비교되는 다른 아이나 사회의 인정이 기준이 되는 교육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신앙과 행위의 기준’인 성경을 중심으로 자녀를 키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딸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훨씬 더 사랑하시는 생명임을 기억하면서 이 소중한 자녀들을 오직 그 하늘의 아버지의 눈에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인으로 잘 양육해 나가는 부모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