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4-28 “백이십 명의 모인 무리” 사도행전 1장 12-26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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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4-28
2019′경향의 강단(19)(2019년 4월 28일 / 주일 대예배)
“백이십 명의 모인 무리” 사도행전 1장 12-26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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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십 명의 모인 무리”

사도행전 1장 12-26절 / 석기현 담임목사
가끔 뉴스에서 소위 ‘원조 논쟁’이라는 것을 보게 되는데, 특히 요식업계에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짜장면’이나 ‘라면’의 원조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으며, 같은 종류의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간판마다 ‘원조’ 혹은 ‘본가’라는 말이 꼭 들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가 하면 유명한 맛집 골목에서 평소에 장사가 잘 되던 식당 이웃에 비슷한 이름을 딴 식당이 생기는 바람에 주인들 사이에 ‘원조 논쟁’이 벌어져 법정 투쟁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왜 그토록 ‘원조’를 가리는 일이 중요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원조’라는 말에는 ‘진짜’, ‘최고’, ‘오리지널’ 등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식업계에서의 ‘원조 논쟁’은 앞으로도 끝없이 계속되겠지만, 적어도 ‘교회의 원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예루살렘교회’라고 간단하게 동의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열한 제자들을 위시한 소위 ‘120 문도’들이 모여 첫 번째 교회인 예루살렘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명백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원조 교회’가 과연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예루살렘교회의 설립 과정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절로 ‘진짜 교회’, ‘최고의 교회’로 세워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저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의 열매로 따라오게 된 교회운동의 태동 과정을 통해 우리 경향교회 역시 그 ‘원조’를 따르기 위해 꼭 지켜야 할 기본자세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들이 기도를 통해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12절부터 14절에 “12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람원이라 하는 산” 즉 ‘겟세마네 동산’이라고도 불리는 곳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이 산이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고 한 것은, 그 승천이 꼭 안식일에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그 동산까지의 거리가 당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여행할 때 허용된 한계 안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가룟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이 그 “유하는 다락방”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이 다락방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다락방이나, 사도행전 12장 12절에 나오는 저 유명한 ‘마가의 다락방’과 같은 장소였을 가능성이 많지만 확실히 알 길은 없습니다.
  하여튼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은 그 다락방에 모여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즉 성령 받기를 기다리면서 오직 기도에만 힘썼던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뿐 아니라 또한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이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이란 예수님 공생애 기간 중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수종 들던 성도들이었습니다.
  “예수의 아우”들은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었지만, 부활 이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 주신 이후부터 신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신약 성경에서 바로 이 장면에 마지막으로 나타날 뿐 다시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천주교에서 ‘성모’니 ‘제4위 하나님’이니 하면서 받들고 있는 마리아는 실상 예루살렘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똑같이 기도드리고 있는 한 성도의 모습을 끝으로 성경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교회가 창립될 때 가장 먼저 일어났던 일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마디로 ‘기도’입니다.
  사도들조차 일단 기도부터 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고 육신 형제이고 할 것 없이 다 기도만 했습니다.
  그 다락방에 함께 있던 ‘120 문도’ 전체가 다 일심으로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큰 성령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일어나기 이전에 그들은 기도를 통하여 마음을 같이함으로써 첫 교회를 태동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무슨 모여서 노는 일도 아니고 주님을 섬기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뒤따라가는 일에 똘똘 뭉치는 일심동체가 된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회에서는 그처럼 다르게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한 교회 안에서 서로 연결된 지체로서 철저하게 결속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이 바로 기도입니다.
  오직 기도만이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며 ‘거룩한 공회’로 함께 모이게 만들어 줍니다.
  같이 모여서 기도하는 것만이 가정을, 구역을, 교구를, 이 교회 전체를 하나의 신앙공동체로 뭉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단 서로 말이 통해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대화의 소재나 수준이 서로 같아야 만나는 재미가 있고 더 가까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학교 출신이라서 학생 시절의 추억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같으니까 동창회가 모이게 되는 것이고, 같은 변호사들이고 같은 의사들이 서로 만나 대화를 통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나눌 수 있으니까 그런 협회들이 설립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도는 바로 기독신자만의 고유 언어요 모국어입니다.
  이 언어를 모르는 영적 문맹들,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영적 벙어리들은 절대로 교회의 참된 지체가 될 수 없습니다.
  말부터 안 통하는데 그 사이에 무슨 교제가 있을 수 있으며 무슨 결속이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마치 영어와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우리나라사람과 미국인이 한 자리에 만나게 되었을 때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하게 바라보며 피차 어색한 분위기만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기도를 모르는 교인들 사이의 만남이란 그냥 얼굴로만 아는 사이일 뿐 결코 마음으로 통하는 천국시민의 교제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헌금을 많이 하는 장로, 교회봉사에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는 집사라 해도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마음을 같이 할 줄 모르면 실제로는 교회의 리더가 아니라 영적 유아독존에 빠져 있는 외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주일에 반갑게 만나 인사하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서로 대접까지 한다 해도, 그 교인들 사이가 피차 기도로써 연결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사교적 만남’이지 ‘성도의 거룩한 교제’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오직 기도를 통한 영적 일체감과 결속력을 피차 공유할 수 있어야만, 이전에는 그렇게 서로 달랐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의 몸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한 성전이 되어 가며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말소리를 높이지 말고 늘 기도로써 대화할 줄 아는, 아니 기도로 항상 통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말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마음이 하나로 뭉쳐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목사가 성경을 통해 구속사의 흐름을 깨닫고 가르쳐야 합니다.

  15절부터 20절에 “15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약 백이십 명”이나 되는 “모인 무리”가 성령을 기다리면서 함께 기도하는 중에도 우선 가룟 유다로 인한 공백을 메우는 일이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였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그 와중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곧 그가 성경 말씀의 예언을 깨닫게 됨으로써 일어났습니다.

  그는 가룟 유다의 배반 사건이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한” 일이었다고 선포했습니다.
  즉 베드로는 가룟 유다의 배반에 대해 다윗이 기록한 시편의 예언을 가지고 분석하면서 판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 유다에게 일어났던 자세한 전모는 본문 18절과 19절에 있는데 이 내용을 복음서의 기록과 연결시켜 볼 때,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고 그 후에 그 시체가 땅에 떨어지면서 복부가 파열되고 창자가 흘러나오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 18절과 19절이 괄호 안에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이 내용은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누가가 사도행전을 쓰면서 보충 설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에게 일어났던 일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있었기 때문에 특히 그 다락방에 있던 성도들에게는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 새삼 누누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도행전의 수신자 ‘데오빌로’는 그런 사건의 전모를 잘 몰랐던 까닭에 그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누가는 바로 이 부분에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던 것입니다.

  하여튼 베드로는 그런 유다의 비참한 말로가 다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 유다가 죽었던 밭이 그 당시까지 “피밭”이라고 불리게 된 것을 두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라는 시편 69편 25절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라는 시편 109편 8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 유다의 궐석으로 인한 공백을 이제 메워야 할 때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또한 곰곰이 따져보면 놀라운 첫 걸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백이십 문도들은 이제 막 예루살렘교회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 자리에서 그들이 그 교회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베드로라고 해서 교회를 어떻게 세워 나가야 할지 무슨 경험이 있거나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런 와중에서도, 유다에게 일어났던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지금 예루살렘교회가 당장 해야 할 가장 시급한 현실 과제를 바로 성경 말씀을 통해 찾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마 요즘의 웬만한 목사 같았으면 그런 상황에서 틀림없이 일단 사람들의 의견부터 수렴하겠다고 나섰을 것입니다.
  교인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도 하고, ‘교회 회칙 제정 위원회’ 따위도 만들고, 공동의회도 몇 번씩이나 모이면서 공정한 무기명 투표를 통하여 무언가를 찾아보겠다고 바빴을 것입니다.
  하지만 ‘첫째 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경 말씀이 베드로와 예루살렘교회로 하여금 그들이 현재 처해 있는 역사적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하고 그들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길을 뚜렷하게 제시해 주었고, 그 무엇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지도자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왜 많은 교회들이 갈팡질팡하고 있습니까?
  사람 소리만 볼륨이 높고 사람 말들만 난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말하기에 바쁜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배울 길이 아예 원천봉쇄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현대교인들이 이전의 성도들보다 훨씬 더 잘 살고 있는데 오히려 갈수록 더 인색하고 불충해집니까?
  기독신자로서의 ‘역사의식’이 전혀 없고 그저 눈앞의 행복만 추구하는 ‘다람쥐 쳇바퀴’ 인생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은 바로 목사에게 있습니다.
  목사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교인들을 바른길로 이끌어 가지 못하고, 그저 소위 ‘민주적인 교회 운영’을 한답시고 교인들을 부추기고 있으니 절로 입만 큰 교인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목사 자신부터가 성경을 통하여 ‘역사의 벽보’를 읽음으로써 시대적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성도로 하여금 ‘발의 등이요 길의 빛’ 된 말씀이 조명해 주는 대로 자기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똑바로 맞출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경향의 성도들은 원로목사님을 통해 바로 그 ‘구속사관’을 확실히 배워 오지 않았습니까?
  ‘세계사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고 있다.’, ‘교회는 복음전파를 통해 그 구속사를 완성해 나가고 있다.’, ‘그러니 오늘의 나는 가든지 보내든지 전도와 선교를 위해 생애 최고를 바침으로써 평화시대를 사는 값을 해야 한다.’ - 정말이지 이 얼마나 일목요연하면서도 멋진 ‘영적 사관(史觀)’입니까?
  혼란스러운 역사와 복잡한 인간사회 속에서도 오직 성경 말씀이 이토록 명백하게 가르쳐 주는 ‘구속사의 흐름’을 깨달음으로써 ‘교회의 존재 의의’와 ‘기독신자의 인생 좌우명’을 분명히 정립하고 그대로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교회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21절 이하 26절에 “21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이제 그 한 명의 사도를 보선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 후보자가 될 자격은 두 가지로 명시되었는데, 하나는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즉 다른 열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 기간에 계속 동행하면서 그 전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직접 듣고 목격했던 자라야만 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된 구원의 능력 있음을 확실히 증언해 주는 마지막 도장과 같은 사건으로서, 복음 전파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노른자위에 해당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수 있는 자는 이처럼 반드시 ‘예수님 공생애’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함께 전할 수 있는 ‘제1차 목격자’라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 후보자로 두 명이 나왔는데 하나는 “요셉”이었고 하나는 “맛디아”였습니다.
  둘 다 사도로서의 자격을 똑같이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비를 뽑아서 마지막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것을 본받아서 교회의 직분자들을 선출할 때 그대로 적용하는 교회들이 간혹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선 이 예루살렘교회의 사도 선출에서는 전교인이 후보자가 되지 않았고 오직 ‘자격 있는 후보자’를 먼저 공천했었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예수님께서 친히 고르신 것처럼 마지막 열두 번째 사도 역시 주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기 위해서 제비를 뽑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신약교회에서 제비뽑기 선거를 행한 일은 이 ‘사도 보선’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곧 이어 나타나는 첫 일곱 집사 선출 때만 해도 이미 적용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튼 그 특별한 선거 결과 맛디아가 결정되어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는” 열두 번째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열두 사도’들이 ‘첫째 교회’ 설립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 열두 사도들이 자기네 눈으로 보고 자기네 귀로 들었던 대로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역, 또한 그들이 직접 확인하고 죽기까지 증언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 바로 이것들이 신약교회 설립의 확고부동한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사도의 터’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터’가 된 것이며, 바로 그 터 위에 초대교회 중에서도 첫째 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아무도 이런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무슨 특별은사를 받았다 해도 오직 예수님의 생애와 부활을 직접 목격한 제자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이 자리에 감히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사도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천사를 통해서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느니 해서 세워진 마호메트교나 몰몬교 따위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이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만나 본 그 사도들의 증거 외에 교회에 필요한 또 다른 계시, 덧붙여져야 할 새로운 복음이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목사들은 ‘선지와 사도의 터’라는 말의 중요성과 강도를 점점 잊어가고 있으며, 자연히 교인들에게도 그 말은 점점 더 생소하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냥 ‘오직 예수’면 되는 것이지 그 사이에 또 무슨 인간적 권위주의 냄새가 풍기는 ‘사도’ 따위를 끼워 넣을 필요가 있느냐고들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만 제대로 믿으면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을 제대로 믿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 바로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되 사람들의 헛된 전설이 아니라 바로 그 주님의 생애를 자기 눈으로 목격했었던 사도들의 증언이 있어야만 제대로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되 거짓말하는 이단의 감언이설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던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만 그 예수님께서 남겨 주셨던 영생의 약속을 제대로 듣고 신앙고백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다 같은 믿음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되 어떻게 믿느냐 하는 것이 진짜 문제이며, 오직 사도들이 증언했던 대로 믿고, 사도 본인들이 믿었던 그대로 우리도 믿는 것만이 예수님을 바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사도들의 증거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육성과 똑같은 권위를 가진 말로 들어야 하며, 그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을 마치 예수님께서 친히 쓰신 친서처럼 완전무결한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실로 “선지 사도 터 위에서 주의 교회 이루리라”는 ‘경향교회 노래’의 가사가 진정 ‘원조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본받는, 그야말로 ‘초대 교회’를 제대로 계승하는 길인 것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 승천 직후 그 주님을 따르는 ‘백이십 명의 무리’가 함께 모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성령을 기다렸고, 땅 끝까지 복음을 증언할 사명을 받았으며, 천당 소망을 간직하고 있는 참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개인 신자들이 모이게 되자 곧 따라온 것이 바로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의 형성이었습니다.

  그 ‘첫째 교회’의 구성원들은 사실 ‘교회생활’이란 것을 처음으로 겪게 된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교회를 어떻게 운영해 나가야 한다는 헌법도 없었고 참고로 할 만한 어떤 전례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지 그 완벽한 ‘원조의 모델’을 정확하게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루살렘교회의 모범을 통해 초대교회의 모습을 부흥시키고자 할 때 가장 흔히 강조되는 것은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단에서는 ‘초대교회 부흥운동’이라는 것이 곧 ‘성령 은사 강조’와 직결되는 등식인 것처럼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예루살렘교회 형성과 발전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전부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태동 과정에서 성령강림 사건보다 오히려 먼저 있었던, 그리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기초단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원조 교회’ 보여 주었던 것처럼 지상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기도’라는 영적 언어가 통해야만 한마음으로 뭉쳐진 거룩한 공동체를 세울 수가 있습니다.
  오직 기록된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각 성도들이 나아가야 갈 방향과 완수해야 할 사명을 찾을 줄 알아야만 교회는 이 급변하는 역사와 복잡한 현실 속에서도 ‘구속사의 중심’에 높이 서게 됩니다.
  무슨 ‘성모 마리아의 대리적 사역’ 따위가 결코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생애와 부활의 생생한 목격자였던 ‘사도들의 증언’만을 기초로 삼아야 지상교회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하나의 우주적 교회를 형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 경험도 지침도 없는 중에 태동했던 예루살렘교회였지만, 바로 이 때문에 그 ‘첫째 교회’는 오고 올 수많은 교회들에게 실로 진정한 ‘원조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초 없이 교회가 제대로 세워질 수 있는 방도는 전혀 없으며, 이 원칙을 따르지 않고 교회가 초대교회의 신앙을 계승할 길은 결코 없습니다.
  지난 46년 동안 그러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 경향교회를 오직 ‘기도를 통한 단합’과 ‘말씀을 통한 인도’와 ‘선지와 사도의 증언을 통한 터’ 위에 세워감으로써 그 ‘원조 교회’와 똑같이 더욱 거룩하고 튼튼한 신앙공동체로 만드는 모든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