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밤예배 2019-04-21 어린양에게 찬송과 영광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요한계시록 5장 9-14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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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밤예배 2019-04-21
부활절 찬양예배
설교 : 어린양에게 찬송과 영광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요한계시록 5장 9-14절] 석기현 담임목사
찬양:시온·호산나·할렐루야 연합찬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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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에게 찬송과 영광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요한계시록 5장 9-14절

이 요한계시록 5장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유배를 살던 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에게 나타나셔서 미리 보여 주신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 가운데 천상보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보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 책’을 취하고 계실 때, 그 주위를 옹위하면서 엎드려 있던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의 손에는 ‘거문고’와 ‘향을 담은 금대접’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금대접의 향’은 바로 ‘성도의 기도’를 가리키는데, 이제 9절 이하에서는 ‘거문고’의 용도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하 13절까지의 내용은 그 ‘거문고’의 반주에 맞추어서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새 노래를 노래함”으로써 앞서 나왔던 ‘기도의 향’과 나란히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어린양께서 인봉을 떼시는 장면의 배경을 완벽하게 조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노래”는, 우선 9절과 10절에서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선창을 했는데, 먼저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는 종말의 계시 사역을 찬양했습니다.
또한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택자 구속 사역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라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대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인 교회를 중심으로 승리생활하게 된 것을 두고 찬양했습니다.

그처럼 ‘네 생물들과 이십사 장로들의 찬송’이 끝나자마자, 11절과 12절에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연이어 찬송을 시작했습니다.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고 했으니 정말 굉장한 규모의 찬양대였으며, 그래서 12절에서 “큰 음성으로 이르되”라고 했듯이 그 찬양 소리 또한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천군천사의 초대형 찬양대가 부른 대합창곡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는 가사의 찬송이었습니다.
아까 첫 번째의 찬송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 즉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두고 부른 것인 반면에 이 두 번째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되심’ 즉 ‘예수님의 신성’ 그 자체를 두고 올리는 찬송이었습니다.
그 가사 내용은 소위 ‘칠언 찬송’이라 불리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능력, 부, 지혜, 힘, 존귀, 영광, 찬송’이 세세무궁토록 돌려져야 할 것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번째 찬송의 가사를 보면, 첫 번째 찬송에서 나왔듯이 어린 양이 무슨 무슨 일을 했으니 이런 찬양을 드려야 한다는 어떤 이유나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는, 그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돌려야 마땅하다, 그저 그 분은 이런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그저 그 분은 이런 찬송을 받으셔야만 할 분이다.’ - 이런 분위기로만 일관됩니다.
그래서 바로 이 구절을 가사로 인용한 헨델의 메시야에 나오는 합창곡의 제목도 “어린 양은 합당하시도다(Worthy Is The Lamb)”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어린 양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시면서 행하신 대속 사역을 생각해도 정말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시지만, 그런 것이 혹 없다손 치더라도 그 어린 양의 존재, 그 분의 성자 하나님 되심, 그것만 생각해도 그 어린 양은 찬양을 받기에 지극히 합당하신, 찬양을 받아 마땅하신 존재라고, 지금 모든 천군천사들이 입을 모아 큰 소리로 대합창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과 14절에 곧 이어지는 마지막 세 번째 찬송 역시 이 사실을 거듭 강조하는 노래인데, 우선 그 합창대의 규모부터가 그야말로 최대한도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의 합창으로 시작되었다가, 두 번째 찬송에는 ‘하늘의 수천수만의 천군 천사’의 대합창으로 확장되었고, 이제는 아예 전 시공계의 모든 우주만물이 다 함께 공명되면서 울려 퍼지는, 그야말로 초대형 찬양으로써 그 분위기가 점점 더 최고조로 치솟고 있는 것입니다.

그 우주적 대합창의 가사를 보시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라고 성부와 성자를 나란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성부와 같은 하나님이신 까닭에 그 자체만으로도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리면서” 찬송해야 마땅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찬양이야말로 우리 주님께서 최고로 영광을 받으시는 방법입니다.
천상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군왕들처럼 무슨 휘황찬란한 왕복을 입은 형상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조차 ‘일찍이 죽임을 당한 흔적을 지니신 어린 양’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계실 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보좌하는 영물들이나 장로들로부터 무슨 값비싼 선물이나 조공을 받으시는 모습으로 당신의 영광을 얻으려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천상보좌에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물들과 땅의 성도들과 전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오직 ‘당신의 이름을 높이 부르는 찬양’을 통하여서 모든 영광과 존귀와 위엄을 다 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그리고 성자 하나님으로 진심으로 믿고 있다면 이런 찬송의 감정 또한 100퍼센트 그대로 공감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지금 이 요한계시록 5장에서 ‘네 생물들과 이십사 장로들과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모든 만물’들이 다 한 목소리로 온 우주를 진동시키면서 부르고 있는 이 찬양이 바로 이 강서성전 안에서 저와 여러분의 인격 속에 똑같이 공명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교역자들이 단풍놀이를 가면서 여느 때처럼 버스 안에서 ‘노래방’이 열렸는데, 제가 그날 부른 노래는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었습니다.
그 노래는 5천만 국민이 다 알지만 단 한 명도 정확하게 부르지는 못한다고 하기에 ‘내가 한 번 그 단 한 명이 되어 보자!’라는 도전의식이 생겨서, 평생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던 ‘랩’을 무려 한 달 동안이나 열심히 연습을 해 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버스 안에서 제 순서가 돌아왔을 때,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난 내 친구도 믿었기에 / 난 아무런 부담 없이 널 내 친구에게 소개시켜 줬고”라고 열창을 시작했습니다.
버스 안의 청중들은 당장 광란(?)의 도가니에 휩싸였고, 저는 잠시나마 ‘오빠부대’에 둘러싸인 ‘아이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그 난곡을 멋있게(?) 완창하고 나자 한 여전도사님이 감히 제게 ‘노래 배틀’을 하자고 도전해 왔는데, 그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자의 이름을 ‘정모 은모 숙모’ 전도사라고 차마 밝힐 수는 물론 없습니다.

하여튼 배틀이 시작되어서 1절은 그 전도사님도 제법 저와 비슷하게 따라했지만, 2절에 가서 승부가 깨끗이 갈라졌습니다.
저는 “너를 사랑했던 것만큼 난 내 친구도 믿었기에 / 난 자연스럽게 너와 함께 어울렸던 것뿐인데 / 어디서부터 우리의 믿음이 깨지기 시작했는지 난 / 알지도 못한 채 어색함을 느끼면서”라고 일사천리로 속사포랩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여전도사님은“난 자연스럽게 너와 함께”에서부터 버벅거리는 바람에 제가 압승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한껏 의기양양해진 저는 곁에 있던 부목사님에게 “다음 단풍놀이 갈 때에는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날’을 불러서 또 한 번 히트를 쳐야지.”라고 예고했습니다.
그러자 그 부목사님이, 제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대답하는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목사님, 그 노래는 ‘가창력’으로 승부해야 하는 노래인데요.”라는 것이었습니다.
‘니는 노래를 정확하게 부를 수 있는지는 몰라도 가창력은 전혀 없어.’라고 대놓고 조롱하는(?)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여튼 그 괘씸하기 짝이 없는(?) 부목사님 때문에 자신의 천재적(?)인 음악성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던 저는 완전히 쪽팔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가창력이 있든지 없든지, 박자감이나 음감이 있든지 없든지 아무 상관없이 마음껏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저 천국의 새 예루살렘 성전에서 온 성도들이 ‘어린 양의 새 노래’를 부를 그 자리입니다.
거기서는 저도 ‘가창력이 없다.’는 비난일랑 전혀 받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서는 여러분도 경향교회 담임목사로부터 ‘찬송가를 정확하게 부르지 못한다.’는 비판(?) 따위는 다시는 들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천상의 찬양대원에게 필요한 음악성이란 오직 ‘어린 양 예수님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려야 마땅하다!’라는 성령의 감동만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한 때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가장 낮은 몸으로 오신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셨지만, 그 후에 부활승천하시고 이 순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 영광스러운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 계시네’라고 가슴 터질 듯이 찬송을 부를 줄 아는 성도라면, 노래를 잘 부르고 못 부르고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반드시 그 천당의 ‘십사만사천 인’ 가운데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이 강서성전에 경향공동체의 이름으로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인하여 감사 찬양을 드리고 그 주님이 곧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하여 모든 영광의 찬송을 올리는 이 예배시간이야말로, 이미 천당교회의 은혜와 기쁨을 고스란히 체험하고 있는 복스러운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밤 이 순간에도 저 하늘의 보좌 주위에서 어린 양 예수님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리는 찬양 소리를 들으면서, 이 지상의 경향제단에서도 똑같이 우리 주님의 대속 사역과 그 성호에 영광을 돌리며 화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