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4-2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1-4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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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4-21
2019′경향의 강단(18)(2019년 4월 21일 / 주일 대예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1-44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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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1-44절 / 석기현 담임목사
원래 영어이지만 워낙 자주 쓰는 바람에 아예 우리나라말처럼 된 외래어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클라이맥스(climax)’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말로 옮기자면 ‘절정, 극치, 최고조’ 등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연극이나 영화 따위에서 관중들이 어떤 사건의 발단, 전개, 갈등 등의 과정을 보면서 긴장에 빠져 들어가다가, 모든 사건의 흐름이 한 장면에 집중되면서 그 흥분이 최고에 달하게 되는 순간, 바로 그때를 가리켜 클라이맥스라고 부릅니다.
  만일 어떤 스토리에 클라이맥스가 빠져 있다면 아무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며, 어떤 사건에 클라이맥스가 없다면 그저 범상한 일이 될 뿐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생애에서 클라이맥스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주님의 부활 사건이 그 클라이맥스이고 주님의 승천은 ‘대단원(finale)’에 해당될 것입니다.
  만일 이 부활을 빼놓는다면 우리 예수님의 전 생애는 아주 맥 빠진 스토리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좋은 교훈을 남기거나 병 고치는 기적을 행하거나 하는 정도의 생애는 예수님 이외의 현자들이나 위인들에게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일도 그 외면적인 사건 자체만 따지고 본다면 당시 로마제국 산하에서 비일비재한 일이었습니다.
  오직 이 부활 사건이 우리 예수님의 생애 전체에 생동감과 박진감을 부여하며, 그 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로 하여금 최고조의 흥분에 휩싸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과연 어떤 의미에서 이 부활 사건이 우리 예수님의 생애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클라이맥스가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부활은 성자 하나님께 돌아가는 영광의 극치입니다.

  본문 1절부터 4절에 “1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 기간인 고난주간이 시작되기 조금 전에 일어났습니다.
  여기 나오는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그녀들의 오빠인 나사로는 평소에 예수님을 자주 대접하고 가까이 지내던 형제자매들이었습니다.
  2절에서 마리아를 가리켜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라고 한 것은, 시간적으로 따질 때에는 나중에 일어난 일로서 본문 다음 장인 요한복음 12장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는 모든 것이 다 과거 사건이었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마리아를 더 자세히 소개하기 위해 미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나사로가 중병에 걸리자 누이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자기 집에 오셔서 “오라버니”를 고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나사로의 병을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 역시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6절에 나타나는 대로, 예수님께서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심”으로써 일부러 지체하시고, 그 결과 나사로가 죽은 후에 거기 도착하시게 될 것과 그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일어나게 될 결과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소식 자체는 분명 나쁜 일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무슨 적시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식으로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에 있어서 그 나사로의 병과 죽음은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크게 받으시는 길로 이끌어 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시는 길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들을 보고 찬탄을 발하며 영광을 돌립니다.
  우주와 세계 만물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만드는 것은 그것들이 사람의 능력의 한계를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절대자라는 존재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신비에 접하게 될 때, 사람은 자연히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에서의 부활은 하나님께 그보다 더 큰 영광이 돌아가게 되는 일입니다.
  죽음이란 사람에게 있어서 속수무책의 세력인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죽음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에는 최상의 기회가 됩니다.
  그런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능력을 발휘해 주심으로써, 정말 하나님다우신 하나님으로,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생명주로서 우리 앞에 실로 영광스럽게 나타나시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부활의 능력이 없다고 한다면, 그런 하나님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높이 받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자연계시의 신비감만 가지고 하나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자연과학이 발달되고 우주의 신비가 조금씩 벗겨지며 기계와 기술이 이 시공의 세계를 조금씩 더 점령해 갈수록, 사람은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을 점점 더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죽은 자의 부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며, 부활이란 인간이 아무리 진보한다 해도 결코 도전할 수 없는 영원한 불가능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그 부활의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심으로써, 당신께 합당한 영광이 돌려지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이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자 되심을 찬양하고 그 성부께서 세상에 보내신 성자 하나님께 지극한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활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있어서 최고 정점입니다.

  21절부터 27절의 말씀에 “21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에 이미 나사로는 죽은 지 며칠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한 마르다의 첫마디는 그래서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좀 더 일찍 오셨더라면 제 오빠를 살려 주실 수 있으셨을 텐데요.”
라는 탄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와중에서도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성부 하나님을 통해서 무엇이든지 다 이루실 수 있는 것을 믿습니다.
 ”
라고 했습니다.
  지금 그녀가 예수님께 무엇을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말은 평소에 마르다가 예수님에 대하여 지니고 있던 신앙을 반영해 줍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마르다로 하여금 바로 그녀의 믿음을 최고 단계에까지 올라가도록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마르다에게 말씀하시자, 그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미 부활신앙은 구약성경을 통해서도 증언되었기 때문에 마르다 역시 최후심판 때의 부활은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부활은 그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사로를 살려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믿었고 그 신유의 능력도 믿었지만, 그 예수님이 자기의 죽은 오라버니를 지금 당장 부활시켜 줄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는 아직까지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로 하여금 바로 그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도록 이끄시기 위하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그녀에게 결정적인 시취문답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여기서 ‘부활신앙’과 결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신자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할 때에 그 문장에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두 가지 내용만 대표적으로 들어가지만, 그 행간에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부활의 그리스도’로 믿어야만 정말 죄에서 구원해 주실 능력이 있으신 구세주로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을 ‘부활의 성자’로 믿어야만 진짜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절대주권자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는 반드시 부활의 주로 믿어야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제대로 믿고 하나님의 아들로 제대로 믿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성자 하나님’이라고 신앙고백은 하면서도 그 예수님을 ‘부활의 주’로는 믿지 않는 교인들이 지상교회 안에 어쩌면 다수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의 신앙은, 안됐지만, 다 헛것입니다.
  부활은 빼놓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의 신앙은 반드시 도달해야 할 신앙의 최정점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는 질문은 예수님께서 오늘도 모든 교인들에게 주시는 시취문답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마르다처럼 ‘주여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참석하면서 기독신자 노릇을 해도 다 헛물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빠져 있는 거짓 믿음을 믿음이라고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그 귀한 영생을 값싸게 주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진짜 믿음이 되게 하는 최종단계이며 꼭 도달해야만 하는 신앙의 최고정점인 줄을 깨닫고 그렇게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부활은 구세주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최대 성취입니다.

  38절 이하 44절에 “38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을 향해 가시는 도중에 우리 예수님께서는 매우 감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가 또 예수님 앞에 와서 오라버니를 잃게 된 것을 두고 통곡하는 것을 보시며 주님께서는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33절)고 했는데, 38절에서도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비롯하여 동네의 조문객들이 그들의 사랑하던 사람을 잃고 슬퍼하며 우는 것을 보시면서, 그처럼 죽음 때문에 고통 받는 무력한 인생들을 두고 스스로도 ‘슬퍼하시고 괴로워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사로를 장사지내 시체를 안치해 두었던 무덤으로 가시면서는 끝내 “눈물”(35절)까지 흘리셨습니다.

  백 마디 천 마디의 말보다도 눈물 한 방울이 그 사람의 마음을 더 잘 대변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보시면서 비통해 하시고 슬퍼하시고 눈물을 흘리신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고 계시는지, 우리를 향한 사랑의 진실함이 얼마나 진한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인생이란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정말로 이해해 주시고, 사람이 죄 때문에 죽음이란 저주 아래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을 두고 정말이지 마음 아파해 주셨던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인애, 자비, 사랑이란 것이 하나님께 그냥 붙어만 다니는 미사여구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우리 예수님의 눈물이 그 어떤 설명이나 웅변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사로를 향한 우리 예수님의 사랑은 그런 눈물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를 무덤에서 일으켜 주심으로써 실로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죽은 지가 나흘이 되어” 이미 “냄새가 날” 정도로 썩어있던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마치 살아 있는 친구를 부르듯이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데에도 무슨 안수니 무엇이니 할 것도 없이 그냥 나사로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는 그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일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까 3절에서 나사로의 누이들은 예수님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면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당신의 친구를 병에서 고쳐주시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문안하는 것은 세상 친구들도 해 줄 수 있는 것이고 치료하는 것은 세상 의사만 잘 만나도 되는 일이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 정도의 친구나 의원이 아니셨습니다.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는 설사 그가 무덤에 들어가 있어도 거기까지 찾아가시며, 그 몸이 이미 썩어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랑하시는 친구의 이름을 큰소리로 불러서 반드시 다시 살려 주고야 마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비록 동네 사람들의 눈물도 진실한 사랑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저 울기만 할 뿐이지 죽은 나사로를 두고 어떻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전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눈물에서만 끝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능력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즉 ‘관심을 기울여 주실 뿐 아니라 실제로 돌보아주시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주시는 사랑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을 병 걸린 데서 고쳐 주시는 정도에서 끝나지도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시는가 하면, 이 더럽기 짝이 없는 죄인들 틈에 몸소 찾아오셔서 함께 사실 정도였습니다.
  함께 사는 정도로 끝나지도 않고, 이 악한 인생들 대신 죽기까지 하시면서 원래 하나님과 원수지간이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셨습니다.
  아니 거기에서도 끝나지 않고, 원래는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했던 우리를 부활시켜 그 하늘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영생하게까지 해 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자선사업가가, 세상의 그 어떤 한없이 마음 좋은 성인이 이렇게 끝까지 사랑해 주고 이처럼 완벽하게 돌보아 줄 수 있었습니까?
  부활은 구세주 예수님께서 그저 죽어 마땅할 뿐이었던 나와 같은 죄인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의 클라이맥스, 더 이상 베풀어 줄 길도 베풀어 줄 것도 없는, 사랑의 최대 성취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산을 오르는 사람이 정상에 도달하지 못하면 아무리 9부 능선까지는 올라갔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입니다.
  정상을 눈앞에 두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직접 밟아보지 못하고 하산하면 그 등산은 아무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높고 험한 산, 산악 등반에 유명한 산들을 많이 탔다 해도, 산악인들이 따지는 것은 몇 개의 산을, 몇 차례, 어디까지 올라가 보았느냐가 아니라 그 중에 몇 개의 정상을 밟아보았느냐 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구속사업의 역사를 시행하심에 있어서 결코 도중하산하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거기서 발을 헛디디거나 되돌아 내려가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 십자가라는 마지막 난코스까지 너끈히 통과하시고 끝내 부활이라는 정상에서 영광의 깃발을 꽂고야 마셨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이라면 그 신앙생활 역시 바로 그와 똑같은 정상에 도달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뭐 아무리 예수님 말씀을 좋아하고 예수님 때문에 인생에 변화를 일으킨다고 해도, 만일 예수님의 육체부활을 믿지 않으면 그 사람은 결국 그 인생 시발점인 사망의 골짜기로 미끄러져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 믿는다면서 살아왔던 것은 말짱 헛수고가 될 뿐이고, 아예 믿지 않고 살았던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누차 강조한 말이 그것 아니었습니까?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 15:13-18) - 부활이라는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신앙이나 신자라는 자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일이 될 뿐입니다.

  왜 예수를 믿는 것이 별 재미가 없고 신자라는 사람이 맥 빠진 꼴을 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이 절정, 극치, 최고조에 도달하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클라이맥스가 없는 스토리나 사건과 마찬가지로 클라이맥스가 없는 신앙도 당연히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부활절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선언하신 우리 주님께서 그 생애 최고의 영광에 도달하신 날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생애는 결코 시시하고 흔해빠진 이야기가 아니라 이처럼 드라마틱하고도 흥분스러운 절정이 있는, 멋진 사건이었습니다.
  그 주님께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가는 신자의 삶 역시 클라이맥스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 현세에서 도달해야 할 신앙의 클라이맥스가 있고, 그 신앙을 지킨 사람이 내세에서 누리게 될 클라이맥스가 또한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이 부활신앙이라는 정점에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잡고, 이미 주님께서 도달하셨던 그 영광스러운 부활, 그리고 바로 그 예수님께서 오직 ‘믿는 자’에게 베풀어 주실 최고 사랑의 선물인 영생부활에 한 명도 빠짐없이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