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4-07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느헤미야 5장 1-19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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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4-07
2019′경향의 강단(15)(2019년 4월 7일 / 주일 대예배)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느헤미야 5장 1-19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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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느헤미야 5장 1-19절 / 석기현 담임목사
‘2년차 징크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프로로 데뷔하고 나서 두 번째 해가 될 때에 생기기 쉬운 슬럼프를 가리켜 부르는 말입니다.
  이것은 특히 첫 시즌에 좋은 성적을 내고 신인왕 등의 상까지 받은 선수가 잘 걸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단 첫 해에 프로선수로서의 출발이 잘 풀려나간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지만, 두 번째 해를 맞이하면서 ‘계속 잘 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나 혹은 ‘올해는 작년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내겠지?’라는 팬들의 기대가 오히려 부담감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만약 그런 ‘2년차 징크스’에 잘못 걸리면 그의 프로선수 인생은 그냥 용두사미로 전락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것만 잘 극복해 내면 진짜 ‘대형선수’로서의 앞길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벽재건이라는 큰 과업에 착수했던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 역시 그와 비슷한 단계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햇수로 두 번째 해는 아니었지만, 2장 18절에서 온 백성이 “일어나 건축하자”라고 대동단결하여 “이 선한 일”을 위해 “모두 힘을 내어” 시작했던 일이 이 즈음에 와서는 내부적으로 발생한 갈등으로 인하여 중대한 차질을 빚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렇게 멋지게 시작했던 ‘선한 일’이 그야말로 용두사미로 끝나버리고 말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은 그런 위기상황을 잘 극복해 내었고, 그 결과 성벽재건은 그야말로 일사천리의 가속도를 내면서 놀랍게도 52일(느 6:15)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그 대공사를 완수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작년 이때에 ‘희년맞이 비전헌금 운동’을 위해 ‘모두 힘을 내어’ 정말 멋지게 출발했던 우리 경향교회 역시 이제 이 ‘선한 일’의 경주에 두 번째 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저부터도 그렇고 이 일에 앞장서고 있는 당회원들 역시 마음 한구석에서 ‘계속 잘 해야 할 텐데.’, ‘2차 비전헌금이 1차 때보다 더 많이 작정되어야 할 텐데.’라는 염려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2년차 징크스’에 빠져서는 결코 안 됩니다.
  ‘Y-4 희년’을 이제 한 주일 남겨둔 오늘 주일에 저는 우리 경향교회가 여기서 조금도 주춤거리거나 멈추지 않고 ‘푯대를 향하여 더욱 속도를 올리며 달려가기’ 위해 모든 성도들이 꼭 명심하고 합력해야 할 사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다른 교인의 희생으로써 자신의 유익만 취하는 ‘얌체 교인’으로 남지 말아야 합니다.

  1절부터 5절에 “1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2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3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4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5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라고 기록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자의 발언권이라는 것은 거의 전무한 것이나 다름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1절에서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었다는 것은, 그 불만이 얼마나 심화되어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2절 이하에서 나타나 있듯이 그 시발점은 식량 부족 사태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모든 노동력이 성벽재건 공사에만 집중적으로 투입되고 있었으니 자연히 가장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일할 시간이 없어졌고 그 결과 각 가정마다 끼니를 잇기 어렵게 되었던 것입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성벽재건 공사는 총 52일이 소요되었는데, 오늘날의 경우라도 집안의 가장이 직장을 두어 달이나 쉬게 되면 그 가족의 생계에 지장이 있을 것은 뻔하지 않겠습니까?

  유다 백성의 그런 식량 문제는 뒤이어서 3절과 4절에 나오는 대로 그들의 가계부 사정을 급속도로 악화시켰습니다.
  그들은 “양식”을 사기 위해서, 또 “세금”을 바치기 위해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밭과 포도원과 집” 등의 부동산들을 “저당”잡히고 “빚”을 내게 되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세율은 매우 높았고 그로 인하여 제국 말기에는 물가가 50% 이상 폭등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유다 백성의 가계는 날로 어려워지면서 종당에는 5절에 나타난 대로 모든 재산을 다 잃고 더러는 “자녀를 종으로 파는”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런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백성들의 분노의 초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빚을 내어주고 이자놀이를 하는 자들에게로 쏠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이라는 말이 바로 ‘빚을 내주는 사람이나 빚을 못 갚고 몸까지 팔리는 사람이나 사실은 다 같은 동족이 아니냐?’라는 뜻에서 하는 불만의 표출인 것입니다.
  자기 동족에게 이자놀이 하던 자들은 7절에 보면 “귀족”들과 “민장”들 즉 유다 백성 중에서 상류계급이며 부유층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나중에 11절 하반절에 보면 그 이자율은 “백분의 일” 즉 매월 1퍼센트, 연리 12퍼센트로서 당시 중근동 지방의 일반적인 연리 20퍼센트에 비하면 낮은 것이기는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힘겨운 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생계의 위협까지 받으면서 성벽재건 공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바로 그런 상황을 오히려 자신의 재산증식을 위한 기회로만 악용하는 자들이 이방인도 아니고 바로 ‘형제 된 동족’ 가운데 있었으니 열심히 일하는 백성들로서는 그 얼마나 맥이 빠지고 또한 분통터질 노릇이었겠습니까?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그런 사람들을 과연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이어지는 6절부터 13절에 기록하기를 “6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7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8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9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10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11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 12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그 말대로 행하겠다고 맹세하게 하고 13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소식을 들은 느혜미야는 “크게 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급하게 반응하지는 않고 그 대신 일단 “깊이 생각하면서”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를 숙고했습니다.
  그 후에 느헤미야는 “귀족들과 민장들”을 만나는 대로 사적으로 “꾸짖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공적으로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경책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교인이 범죄했을 때 먼저 개인적으로 권면하고 그래도 듣지 않을 때에는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징계하는 ‘장로교 권징’의 원리를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책망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그 첫째는 8절에 있는 대로 ‘우리는 바벨론에 잡혀갔던 동족들을 힘을 다하여 데려왔는데 너희들은 그렇게 어렵게 해방시켰던 형제들을 도로 종으로 팔리게 하고 있으니 이 도대체 무슨 짓이냐?’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9절에 나오는 대로 ‘믿는다고 하는 우리 유다 백성들 사이에서 이런 부끄러운 일을 행하면 이방인들이 얼마나 비방하겠느냐? 너희가 정말 하나님 두려워하는 신자라면 결코 이럴 수가 없다.’라는 책망이었습니다.
  10절에 이어진 내용은 느헤미야도 이자놀이를 했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 자기와 자기 부하들도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 주기는 했지만 이자는 조금도 받지 않았으니 ‘당신네들도 더 이상 이자는 받지 말라.’는 말입니다.
  귀족과 민장들이 그 말에 따르기로 하자 느헤미야는 그 약속을 절대로 어기지 못하게 하려고 아예 “제사장들을 불러” “맹세”를 시키면서 만약 그 맹세를 어기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벌을 받아 모든 재산을 다 “털리게” 될 것이라고 자신의 “옷자락을 털며” 경고했습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 회중은 느헤미야의 그런 처사에 감사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게 되었고 그 채권자들도 “그 말한 대로 행함”으로써 약속을 지켰습니다.

  오늘날에도 그처럼 한쪽에서는 교회의 어떤 큰 일을 완수해 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는데도 다른 한쪽에서는 그저 자기 좋은 것만 챙기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한 교회 안에서 ‘사채놀이’를 하는 교인은 설마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교인들은 교회에서 이런 궂은 일, 저런 힘든 일들을 맡아서 죽도록 충성하고 있는데,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도 하지 않고 그저 편안히 즐기는 재미로만 교회에 다니고 있는 교인들은 근본적으로는 역시 ‘백분의 일’만 챙기려는 자들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교인들은 실상 자기만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있는 교인들에게 엄청난 사기저하를 유발시키게 됩니다.
  같은 당회원이면서도 헌금에 인색한 장로, 같은 제직회원이고 사실 재산도 많으면서 큰 헌금에 쏙 빠지는 집사는 다른 교인들의 짐을 더욱 무겁게 만들 뿐 아니라 그런 충성스러운 교인까지 힘이 쏙 빠지게 만들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 경향교회 안에서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성도’로서 정말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계를 받은 교회’를 통해 실로 은혜롭고 복스러운 신앙생활을 풍성하게 누리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교회를 위해 ‘생애 최고와 전부’는 고사하고 ‘생애의 약간’조차 희생할 줄 모른다면, 지금 바로 곁에서 ‘평화시대의 순교자’의 각오로 땀 흘리며 충성하고 있는 교우에게 정말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두려워하고 있는’ 신자라면 결코 이기주의 교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비록 끝까지 비협조적인 교인들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경향교회는 4년 후에 실로 영광스러운 ‘희년’을 반드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역사’는 ‘안 하는 교인’들 때문에 중단되는 일이 아니라 ‘하는 교인’들에 의해서 결국은 완성되고야 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경향 희년’의 날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교인이 있을지 모릅니다.
  ‘희년맞이 비전헌금’에 참여한 성도들의 충성을 영원히 기념할 동판에 아무런 ‘족적’도 남기지 못할 교인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처음에는 그저 자기만족만 찾으려고 교회에 왔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예수 목적, 내 삶 수단’이라는 인생의 참된 존재 가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무사태평하게만 교회생활을 해 왔을지라도 이제부터는 ‘내가 이처럼 선한 일에 부요한 경향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구나.’라는 소명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의 실리와 이욕만 채우려 하면서 다른 교인들까지 실족하게 만드는 ‘얌체 교인’의 모습을 깨끗이 청산하고 이제 ‘두 번째 해’부터라도 이 ‘선한 일’을 위해 ‘일어나 힘을 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 각자가 본인이 먼저 충성함으로써 다른 교인에게도 힘이 되는 ‘모범 교인’으로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14절 이하 19절에 “14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15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16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17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 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18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19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아까 보았던 2절부터 5절의 말씀에서, 대다수의 유다 백성들이 극심한 물질적인 궁핍을 겪으면서도 성벽재건 공사에 끝까지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빚을 지면서까지 52일의 삶 전부를 오직 하나님의 사업 완수를 위하여 다 바쳤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재건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경제적으로 큰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반드시 그리고 속히 완수해 내야만 할 중차대한 과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처럼 온 유다 백성들이 문자 그대로 마음과 힘을 합하여 성벽재건 공사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이 사업을 제일 처음에 시작했던 느헤미야 자신부터가 ‘솔선수범’의 모범을 보인 지도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만 호통을 치고 자기는 편안히 앉아 있던 사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우선 그는 그 공사 기간뿐 아니라 유다 총독으로 재임했던 “십이 년” 내내 아무 “총독의 녹” 즉 봉급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총독들은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하여 재산축적하느라고 바빴었지만, 느헤미야는 그 공사 전후 기간 동안 아무 “땅을 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성벽재건 공사가 끝나면 예루살렘 주변의 부동산 가치가 급등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오늘날의 부정한 공무원이나 국회의원 같으면 결코 놓칠 리가 없는 호기였지만 느헤미야는 그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7절 이하에 보면 느헤미야는 공사 기간 내내 매일 점심때마다 실로 대단한 분량의 식탁을 제공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내용을 대략 계산해 보면 한꺼번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나눌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는 “민장들” 즉 공사 책임자들뿐 아니라 “유다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가난한 자들과 또 멀리서 온 “이방 족속” 출신의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그 많은 양의 점심식사를 순전히 개인비용으로 부담했던 것입니다.
  물론 느헤미야는 바사 제국에서 ‘왕의 술 관원’(느 1:11)이라는 고위 관직에 있었으니 엄청난 부자였음에 틀림없지만, 아무리 재력이 크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그처럼 풍성하게 쓰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큰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15절에서 그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대로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아까 9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까닭에 희생은커녕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 했던 자들과 좋은 대조를 보여 줍니다.
  실로 느헤미야는 하나님 경외의 신앙을 항상 지키고 있었던 까닭에 이처럼 하나님 사업을 위해 희생적으로 크게 바치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전인격자’였기 때문에 또한 부당한 이득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직 “백성의 부역이 중함”을 먼저 이해해 주면서 그들 앞에서 지도자로서 솔선수범하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느헤미야에게 하나님께서 그가 기도한 대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유다 백성들은 성벽재건 공사를 위해서 빚돈을 쓰고 이자를 내고 결국은 저당 잡혔던 논밭을 날리기까지 했는데, 요즘의 현대교인들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목사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빚을 내어서 헌금하다니요. 생활비 쓸 것 다 쓰고 남는 돈도 헌금하기 아까운데, 없는 돈을 어떻게 빌려서 헌금합니까?
 라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안 됩니까?
  집 사고 차 살 때에는 은행 대부를 내서라도 일단 사 놓고 보아야 하고, 자식을 대학교 보내기 위해서라면 학자금 융자를 받아서라도 일단 등록금은 마련해 놓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내가 먹고 살고 내 자식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돈을 빌리는 것은 조금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생활의 수단으로 받아들이면서 왜 빚을 내어서 헌금하는 것은 그다지도 비정상적인 일처럼만 생각하는 것입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 교회에 충성한다 하면서도 아직도 자신의 희생으로써 하려 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가 먼저 쓰고 남는 것’만 가지고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생활의 ‘여분의 것’을 구걸하시는 분이십니까?
  교회가 교인들의 ‘쓰고 남은 것’만을 모아서 겨우 운영하는 곳입니까?
  이처럼 자기희생 없이 말로만 ‘교회중심’으로 산다고 하는 교인들이 모인 교회는 몇 년 몇 십 년이 지나도 세계선교는커녕 자체 예배당 건축을 위한 ‘성벽의 돌’ 하나도 쌓아올리지 못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으로 교회를 귀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일을 최우선으로 완수하려고 하면 현실적으로는 희생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개인의 생활에는 아무 부담이 안 가는 한도 내에서 교회봉사를 하겠다.’라는 것은 절대로 성립될 수 없는 계산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교회의 직분자들이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역할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남보다 더 잘 알고 남보다 교회생활의 연륜이 오래된 교인이 이끌어가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로지 남보다 먼저 봉사하고 남보다 더 많이 희생하는 사람이 앞장서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나는 목사이니 헌금할 돈이 어디 있나? 나는 그저 헌금하라고 설교만 부지런히 하고 헌금은 교인들이 열심히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 누구보다 목사 자신부터 헌금생활에서 희생적인 모범을 보여 주지 않으면 장로들이 누구를 본으로 삼고 헌금하겠으며, 또 일반 교인들은 어떤 장로를 본으로 삼고 헌금하겠습니까?
  원로목사님께서는 1대 당회를 이끌어 가실 때 이 점에 있어서 항상 모범을 보여 주신 분이셨습니다.
  원로목사님께서는 진심으로 당신이 경향교회에서 항상 ‘헌금 1등’을 하고 싶어 하셨고,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연히 장로 가운데서 목사보다 더 많이 헌금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가르치셨고 실제로 또 그런 장로님들을 키우셨습니다.
  제가 작년 이맘 때 다른 교회 교인들이 듣고 깜짝 놀랐던 ‘십이조 헌금’ 설교를 했을 때에도 경향교회 성도들은 조금도 시험 받지 않고 오히려 ‘희년맞이 비전헌금 제1차 작정’에 온 힘을 다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런 선배들의 ‘솔선수범’이 낳은 열매가 아니었겠습니까?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엔테베 공항 인질 구출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작전을 수행했던 이스라엘 특공대원 백여 명 중에 전사자는 딱 한 명이었는데, 바로 특공대 지휘관이었던 요나단 네탄야후 중령이었습니다.
  그는 특공대가 엔테베 공항에 진입할 때 제일 앞장서서 진두지휘를 하다가 우간다 군의 총격에 희생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 영화를 통해 제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이스라엘 군대의 장교에게는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은 없고 오직 ‘나를 따르라!’는 명령만 있다고 합니다.
  부하들에게만 적군을 향해 돌격하라고 뒤에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먼저 지휘관이 제일 앞장서서 쏟아지는 총탄을 뚫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사방팔방으로 둘러싼 적국의 군대를 이겨내며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지휘관의 자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전투하는 지상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희년맞이 비전헌금 제2차 작정’에서도 저를 위시하여 경향의 장로님들이 또 한 번 ‘힘을 다하여, 그러면서도 기쁘게 희생하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처럼 교회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솔선수범을 보일 때 제직들도 절로 그 뒤를 따를 것이고 온 교우들 역시 더욱 힘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총독’이 먼저 자기희생의 본을 보였을 때 모든 ‘유다 백성’ 역시 빚을 내면서까지 예루살렘 성벽재건 공사를 위해 힘을 다했던 것처럼, 이 ‘경향희년맞이’를 위한 ‘큰 역사’를 위해서도 당회원들부터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직분자’로서의 모범을 보이는 가운데 그로 인하여 용기백배 사기충천하여 뒤를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지상교회 안에는 내면적으로 서로 판이하게 다른 두 부류의 교인들이 있습니다.
  교회마다 그 정도와 숫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지금도 신앙생활을 ‘빙자하여’ 오직 자신의 이익과 만족만을 찾고 누리는 교인들이 있는가 하면, 정말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면서 교회를 유익하게 만드는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교회 안에도 아직 ‘백분의 일을 취하는’ 재미로 나오는 교인들도 있을 것이고, 반면에 ‘녹을 받지 않으면서’ 오히려 다른 성도들을 위해 기꺼이 큰 식탁을 베푸는 교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한 교회 안에서도 그처럼 정반대의 다른 교인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 역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그 교인에게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입니다.

  나 자신은 과연 어느 쪽이겠습니까?
  혹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 욕심만 채우면서 살고 있지 않는지,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내 마음의 수양이나 내 가족의 화평이나 내 자식의 교육을 위한 수단만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는지 한번 돌이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가 사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신자라면, 우리는 당연히 백 마디의 찬송이나 기도보다도 먼저 한 가지의 희생적인 신행일치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길 줄 알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작년에 우리 교회가 ‘희년맞이 비전헌금’을 시작했을 때, ‘열두바구니 십이조헌금’에 189명, ‘열두바구니 월정헌금’에 1,035명, 그리고 ‘보리떡헌금잔액 월정헌금’에 780명의 성도들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헌금을 동시에 작정해 주신 성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정헌금의 총액은 매월 1억 2천만 원의 목표액을 조금 상회하여 달성되었고, 더 중요한 것은 그 헌금이 작정한 그대로 1년 내내 정확하게는 99퍼센트, 딱 1퍼센트 모자라는 100퍼센트로 실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뭐, 경향교회니까 그 정도는 으레 하는 일이지.’라고 생각하는 교우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것이 ‘경향교회니까 일어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열두바구니 십이조헌금’에 참여해 주신 성도들에 대해서는 제가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표현할 말이 없고 그저 그런 눈물겹고도 힘겨운 헌금을 오직 기쁨으로 바칠 수 있는 마음을 그 분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정말이지 원로목사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순교하는 대신에 헌금으로써 평화시대를 살아가는 값을 해야 한다.’는 구속사적 사명의식을 가진 교인들이 아니고서야 이런 헌금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시작했던 ‘희년맞이 비전헌금’을 오늘 당회원들과 교역자들이 먼저, 그리고 다음 주일에는 온 성도들이 함께 제2차로 또 작정하려고 합니다.
  목사의 얼굴을 보거나 교인들끼리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이 ‘선한 일’에 우리 각자가 힘을 다하면 이 두 번째 해에도 조금도 약해지거나 ‘영적 슬럼프’에 빠지지 않고 넉넉히 감당해 낼 수 있을 줄로 저는 확신합니다.
  지금 당장은 ‘희생’이지만 그것을 기억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결국 ‘백배의 은혜’와 ‘천배의 복’으로 꼭 채워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이 ‘희년맞이 비전헌금’ 2차 작정에서도 경향인의 저력을 발휘하여 작년보다 오히려 더욱 속도를 내어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