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3-31 “에브라임아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호세아 6장 4-11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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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3-31
2019′경향의 강단(14)(2019년 3월 31일 / 주일 대예배)
“에브라임아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호세아 6장 4-11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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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임아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호세아 6장 4-11절 / 석기현 담임목사
부모가 자녀에게“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 줄까?”라고 하는 것은 원래 더없이 사랑이 충만한 말입니다.
  아파서 끙끙거리면서 드러누워 있는 아들에게 엄마가“먹고 싶은 것이 뭐니? 내가 뭐든지 만들어 줄게.”라고 하거나, 어려운 학교 숙제를 하느라고 애를 쓰고 있는 딸에게 아빠가 다가와서“내가 좀 도와줄까?”라고 물어 주는 것은 아주 정감 넘치는 질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문장은 똑같아도 그 의미는 오히려 정반대로 최악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부모 편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빗나간 자식을 두었을 경우입니다.
  학교에서 걸핏하면 사고를 일으켜 학부모 호출을 당하게 하는 자녀, 밤늦게까지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때로는 경찰서에 가서 데려와야 하는 자녀, 자기 아버지 어머니에게조차 항상 적의 어린 싸늘한 표정으로 대하는 자녀를 둔 부모의 입에서는“도대체 내가 너를 어떻게 해야 하겠니?”>라는 장탄식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물론 그런 말은 앞서 나왔던 것과 같은 행복한 질문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대책이 없는’ 자녀를 두고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는 절규입니다.

  놀랍게도, 그처럼 문제아 자녀를 둔 부모의 입에서나 나올 수 있는 고뇌의 한숨이 다름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입에서도 나왔습니다.
  바로 본문 4절 상반절에 기록된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라는 탄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의 어떤 소원을 들어 주시려고 묻는 질문이 결코 아니라, 명색이 선민이라 하면서도 실제로는 오로지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실로 한심하고 못난 모습을 두고 지극히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의인화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도대체 에브라임과 유다의 어떤 죄악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처럼 한숨과 탄식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습니까?
  이 시간 저는 오늘날 역시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하여금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라고 탄식하게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배는 드리지만 신자로서의 사랑은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탄식하게 합니다.

  4절에 “4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신앙생활에 대해 첫 번째로 지적하시는 것은 곧 그들의 “인애”가 너무나도 희박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 이 ‘인애’(헤세드)란 단어는 딱 하나의 단어로 번역하기는 좀 어려운 말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경우로 나타날 때에는 ‘긍휼, 자비, 은혜, 인자, 선하심, 좋으심, 신실하심’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사랑의 모든 종목들이 총망라된 단어인 것입니다.
  또한 이 단어를 사람 편에 적용시킬 때에는 ‘하나님을 향한 충성, 경건, 이웃사랑, 진실, 친절, 온유’ 등의 뜻이 해당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뜻을 정리한다면, 이 ‘인애’ 즉 ‘헤세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사람이 그 받은 사랑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두고 ‘너희들이 인애가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니까 후자의 경우가 되겠습니다.
  그들의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사랑에 대해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고,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이나 이웃에게 베푸는 따뜻한 사랑도 전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니 본인들은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실상 그것은 그야말로 “아침 구름”이나 “이슬”처럼 “쉬 없어지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점을 6절에서 또 한 번 반복하시기를 “6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곧 알 수 있듯이 이 문장에서 “제사”“번제”, 그리고 “인애”“하나님 아는 것”이 나란히 병행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까 설명한대로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이웃에게 선히 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 즉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먼저 베풀어 주신 사랑을 바로 깨닫고 믿는 사실’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에게는 바로 이런 인애가 전무했으며, 그 결과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외형적인 제사와 번제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비극이었습니다.
  중심은 비어 있고 종교적 습관만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란 하나님 보시기에는 장탄식이 절로 나오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꼴이었습니다.
  형식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는 드리지만 그 마음에 정말 있어야 할 인애가 결핍된 것, 이것이 에브라임과 유다의 대표적인 죄였던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입장을 더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식이 저녁마다 집에 들어오기만 한다고 자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와 밥상에 함께 앉는다고, 같은 지붕 밑에서 잠을 잔다고 해서 그것만 가지고 부모 앞에 사랑스러운 자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식과 부모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이 서로 통해야 합니다.
  즉 부모의 사랑이 자녀에게 전해지고 자녀가 그 부모의 사랑을 느낄 줄 알아야 제대로 된 부자부녀요 모자모녀가 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그 사랑 가운데서 착하고 아름답고 튼튼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는 자식이, 그저 같은 지붕 밑에 몸만 거처하고 있다고 해서 부모의 마음에 기쁨이 될 리는 만무합니다.
  정다운 대화가 한마디도 없는 식탁에는 아무리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있어도, 따뜻한 눈길이 전혀 오가지 않는 거실 소파에는 아무리 같이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하더라도, 그 부모는 오히려 그런 자식을 바라보며 ‘내가 너를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속으로는 땅이 꺼질 듯한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겉으로 나타나는 종교의식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듯이 생각한다면 바로 그와 똑같은 꼴이 될 뿐 아니겠습니까?
  매주일 아침에 예배당 지붕 밑에 들어온다고 해서, 함께 주일예배의 좌석에 앉아 있다고 해서 다된 줄로만 생각한다면 정말 크나큰 오산입니다.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헤세드의 사랑’을 느끼고 믿고 감격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또한 주중의 삶을 통하여서도 그처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교제하는 성도만 고백하고 실천할 수 있는 충성과 이웃사랑의 신행일치가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사와 번제’는 드리지만 신앙인으로서의 사랑이 전무한 교인은 실상 오늘도 하나님을 지극히 탄식하시게 만들고 있음을 깨닫고, 하늘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진정 원하고 계시는 ‘인애와 하나님 아는 것’을 보여 드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탄식케 합니다.

  5절에 기록하기를 “5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란 말은 ‘너희들이 그러한 형편에 있기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된 인애가 없이 형식적인 종교생활만 하고 있는 그들을 어찌하든지 바로 돌이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애를 쓰셨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수단을 통해서였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였습니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대구법(對句法)이 나타납니다.
  “선지자들로”라는 말과 “내 입의 말로”라는 말, 그리고 “그들을 치고”라는 말과 “그들을 죽였노니”라는 말이 각각 대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되고 또한 책에 기록된 ‘당신의 입술의 육성으로’ 그들을 깨우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치다’와 ‘죽이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 말씀에 동반되는 심판의 경고를 특별히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 심판이라는 요소가 항상 동반됩니다.
  즉 말씀에 불순종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반드시 영벌심판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밝은 빛’보다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 무엇이 있으며 누가 그 빛 앞에서 숨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심판을 천명하고 계시는 것은 아무도 못 볼 사람이 없으며, 또한 정작 그 심판이 닥치게 될 때에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확연하기 짝이 없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 이상한 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첫 사람 때부터 나타난 오래된 악습이었습니다.
  바로 7절에서 “7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고서 아담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는 엄중한 심판의 경고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빛나는 빛’처럼 누가 들어도 명백하기 짝이 없는 경고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분명히 귀로는 그 말씀의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그 경고의 내용은 사실 듣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 언약을 어기는 패역을 행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은 정말 장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처럼 아담의 귀에 당신의 입으로 들려 준 명백한 말씀을, 그처럼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에게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전해 준 경고를 전혀 듣지 않고 그 받을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심리는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유다는 이처럼 하나님 말씀의 ‘소리’는 분명히 듣고 있었지만 그 말씀이 전하는 ‘내용’은 사실 전혀 듣지 않는 죄에 빠져 있었습니다.

  “너 그런 위험한 데서 놀면 다친다.”라고, “너 그렇게 농땡이 치다가 나중에 크게 후회한다.라고 부모는 자녀에게 경고합니다.
  부모의 눈에는 그렇게 행하는 자식의 미래에 벌어질 일이 너무나도 자명하기 때문에 그처럼 사전경고를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곧 어떻게 될지 뻔한 일을 부모가 그렇게 여러 차례 말을 해 주어도 결국 사고를 내고 시험에 낙제하는 자식을 보면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휴, 내가 너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니?”라는 한숨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의 말을 그냥 흘려듣는 자식과 귀담아 듣고 그 말씀의 경고를 받아들이는 자식은 실로 천양지차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는 심판의 메시지도 반드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면서 에덴동산에서 나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어도 된다.’라는 축복의 말씀도 있었지만, ‘그러나 선악과는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라는 경고의 말씀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고를 무시하면 그 심판 역시 아담이 당했던 것과 똑같이 ‘피할 수 없는 빛처럼’ 그 이후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임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십자가의 구원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중생인의 복과 동시에 또한 마지막 한 날에 있을 심판이 명백히 선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또 한 번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면’ 이제는 영원히 죽는 심판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성경은 몇 십 번, 몇 백 번 반복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의 소리는 들으면서도, 아니 성경에서 ‘복’과 같이 ‘좋은 말씀’은 듣고 믿기까지 하면서도, 같은 성경에 기록된 심판의 메시지만은 듣지도 믿지도 않으려 하는 이상한 귀를 가진 교인들을 향하여 오늘도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면서 일깨워 주시는 ‘마지막 경고’를 지금이라도 깨닫고 회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속에 살면서도 오직 악한 일만 행하는 자가 하나님을 탄식케 합니다.

  8절 이하 11절에 “8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9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10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11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축복에 대하여 오히려 배은망덕했던 이스라엘의 모습은 마치 깨끗하고 비싼 화폭에 더러운 때만 묻히는 모습과 같았습니다.
  그런 악한 모습은 두 가지로 나타났는데, 그 첫째는 “길르앗”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동북쪽에 위치한 이곳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제일 먼저 차지했던 땅이며, 그 땅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먼저 나누어졌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육신생활을 위하여 주신 축복의 땅에 대해 늘 감사하며 성실히 살기는커녕 오히려 그곳을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로 만들었으며 “피 발자국”이 가득 찬 곳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이것은 북조 이스라엘 왕조가 정권 쟁탈을 위해 싸우는 가운데 서로 죽이고 죽는 이른바 ‘피의 보복’의 반복으로써 그 땅을 피비린내 나게 만든 것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배은망덕은 “세겜 길”이 상징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세겜은 그 유명한 도피성이 있는 곳이었으며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바로 “제사장의 무리가... 살인”하는 곳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남쪽 예루살렘 성전으로 예배하러 내려가는 사람들이 세겜을 지나갈 때에, 그 세겜에서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던 제사장들이 그들을 죽이고 그 제물을 탈취한, 실로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거룩한 직분을 받고서도 오히려 배교에 앞장서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해 주신 도피성이라는 장소마저 참된 성도들을 핍박하는 데에 사용했던 것이었습니다.

  6장 11절의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라는 구절은 원문의 어순으로 볼 때에 7장 1절에도 연결할 수 있는 것인데, 문맥으로 볼 때 그것이 더욱 타당할 것 같습니다.
  즉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라고 이어서 번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포로에서 돌이켜 주시고 그들의 문제점을 치료해 주려고 하셨지만, 그런 때조차도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가증한 일”“음행”만 저지름으로써 “추수할 일” 즉 하나님의 심판을 더욱 빨리 자초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저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라고 장탄식하실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남보다 더 좋은 집에서 자라고 남보다 더 좋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남보다 그 어떤 면으로 보나 정말 좋은 환경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그런 것들을 감사하거나 행복해 할 줄 알기는커녕, 학교는 빼먹고 나쁜 친구들만 사귀고 연일 사고를 저지르고 게다가 부모 앞에서 오히려 눈을 부라리는 자식을 두게 되었다면 그 부모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참 기가 막혀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시는 생의 필수적인 모든 것들을 누릴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베풀어 주신 온갖 좋은 영적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살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우리가 우리보다 단 한 세대 앞에 사셨던 부모님들처럼 끼니를 못 이어서 걱정을 합니까, 아니면 교회 다닌다고 누가 잡아가거나 죽이려 합니까?
  누가 보아도 정말 부모 잘 만난 복된 자식이요, 누가 보아도 잘못되려고 해야 잘못될 이유가 전혀 없는 완벽한 호조건 속에서 살고 있는 행운아 중의 행운아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심령에서 진정한 감사는 전혀 없고 그저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싸움만 일삼고, 걸핏하면 낙심하여 시험에 들고, 더욱이 불충하고 배교까지 한다면 그런 자식을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은 과연 어떻겠습니까?
  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은혜 받을 기회’를 베풀어 주시는데도 끝까지 영적으로 ‘음행’하고 생활에서 ‘가증한 일’만 저지른다면 그런 인생이 마땅히 받게 될 ‘추수 심판’이 어떠할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풍요한 ‘길르앗’의 축복과 넘치는 ‘세겜’의 은혜를 망각하고 배은배교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은 결국 무서운 심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아직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로잡힘으로부터 돌이켜’ 주실 때에 그 아버지 앞으로 속히 돌아가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라는 깊은 탄식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많은 순간에 하나님의 입에서 절로 나오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과 진정한 사랑으로 통하는 것이 전혀 없을 때, 아버지께서 훈계하시며 경고하시는 말씀을 도무지 귀담아 듣지 아니할 때, 실제로는 세상에서 좋은 것을 다 누리고 있으면서도 전혀 성화의 진보 없이 오히려 타락만 하고 있을 때, 그런 자녀들을 보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오늘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라고 장탄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자식을 둔 부모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끝없는 탄식 외에 별 뾰족한 대책이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하셨는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이런 빗나간 자식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당신의 품으로 이끌어 들이시기 위하여 성자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보내 주기까지 하시면서 당신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끝까지 보여 주려 하셨습니다.
  그것도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는 어떤 반성과 회심의 자세를 먼저 보여 주었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악인으로 살고 있을 때에, 우리 쪽에서는 오히려 한술 더 떠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려고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 편에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성자의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그 한없는 ‘헤세드’의 사랑을 증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정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옛날에 한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 임금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임금은 이제 막 걷기 시작한 몇 살 된 아들을 데리고 궁전 뒤 숲에 자주 산책을 나가곤 했습니다.
  그 임금의 아들은 때때로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자기 혼자 숲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숨곤 했었는데, 어느 날 산책 도중에 임금이 잠시 앉아 쉬는 동안에 이 아들은 또 자기 혼자 돌아다니다가 그만 완전히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질겁을 한 임금은 곧 신하들을 총동원해서 온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 깊은 숲속에서 끝내 아들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임금은 온 나라에 방을 붙이고 그 아들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그것도 허사로 끝났습니다.
  그동안 그 임금의 아들은 숲속을 헤매다가 어떤 도적 떼를 만나 그들의 손에 길러졌고, 그렇게 자라는 동안 이 아들은 자기의 원래 신분이 무엇이며 자기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까마득히 잊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성장한 후에는 그 도적 떼의 두목이 되어 강도와 살인을 일삼았으며 그 누구보다도 그 나라 임금을 혐오하고 모욕하는 반역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어느 날 체포되었습니다.
  임금은 최악의 흉악범이요 역적인 이 두목을 심문하는 동안 그가 바로 자기가 잃어버렸던 아들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임금은 그 아들에게 자기가 바로 그의 아버지인 것을 알려 주려 했지만, 아무리 설명을 하고 출생증명서를 보여 주고 해도 이 아들은 끝까지 그 임금을 저주하면서 자기 아버지인 것을 부인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그 임금은 나라의 법을 따라 자기 아들에게 사형언도를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형 집행 전날 밤에, 그 아들이 갇혀 있는 옥중에 그 임금이 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네가 만일 내가 너의 아버지란 사실을 믿고 지금까지 저질렀던 일에 대하여 진정으로 회개만 하면 모든 것을 용서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막무가내였으며 끝까지 독설과 저주로 임금을 욕하면서 회개를 거부했습니다.
  정말이지 문자 그대로 ‘대책이 없는 아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날 새벽에 그 아들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그냥 감옥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궁금하게 여긴 그 아들은 간수에게 무슨 영문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 간수는 지난밤에 임금이 그 아들의 죄를 대신해서 스스로 독약을 먹고 죽었으며, 만일 아들이 자기를 아버지인 줄로 믿고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기만 하면 자기 대신 임금으로 세우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어이없게도, 이 이야기는 거기서 그냥 끝나고 맙니다.
  그 아들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임금의 모습을 보고서도 끝까지 회개치 않고 도적의 생활로 되돌아갔는지, 아니면 그제야 비로소 그 임금이 자기 아버지인 줄을 믿고 자신의 왕자 신분을 도로 회복하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아이구, 임금이 그 정도까지 해 주었는데 자기도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당연히 깨닫고 돌아섰겠지.’라고 생각되시지요? 아닙니다, 정말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 속의 아들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저와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야말로 누가 보아도 어리석고 악하기 그지없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지극히 당연한 줄로 알고 끝까지 고집 부리고 있는, 정말 ‘멍청하고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그 아들과 똑같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양자로 삼으시기 위해 독생자까지 대신 죽게 하시는 실로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데도, 저와 여러분은 여전히 하늘의 아버지를 부인하면서 왕자의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려 하지 않고 여전히 도적떼 가운데 섞여 죄 지으면서 살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아까 여러분이 그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다들 생각하셨던 것처럼, 아버지께서 이만큼 해 주시는데 정말 ‘일말의 양심이 있는 자녀’라면 즉시 회개하고 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예배에는 참석하지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인애’가 없는 사람, 말씀은 듣지만 불순종에 대한 ‘심판’을 전혀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가운데 살면서도 여전히 ‘악’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까지 세상에 보내 주시면서 ‘내가 이 이상 네게 어떻게 하랴?’라고 오늘도 탄식하고 계십니다.
  이 간절한 하늘 아버지의 부르심을 듣고, 아직은 당신의 택하신 자녀를 찾아 주시는 이 ‘은혜 받을 만한 때’에 즉시 회개와 믿음과 사랑으로써 응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