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3-24“너는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호세아 3장 1-5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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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3-24
2019′경향의 강단(13)(2019년 3월 24일 / 주일 대예배)
“너는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호세아 3장 1-5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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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호세아 3장 1-5절 / 석기현 담임목사
톨스토이가 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미하일이라는 천사가 어느 날 한 여인의 생명을 거두어 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지상에 내려왔는데, 그 여인에게는 막 출산한 쌍둥이 자매가 있었습니다.
  미하일은 차마 그 여인의 생명을 취하지 못하고 그냥 하늘나라로 돌아왔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로 인간의 몸이 되어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미하일에게 세 가지 문제를 주셨는데, 미하일은 그 답을 다 알게 되어야 하늘나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된 미하일은 가난한 구두수선공의 도움을 받아 그 집에서 6년을 살게 되는데, 그러던 와중에 처음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답을 하나하나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6년 째 되던 어느 날 옛날 자기가 차마 죽이지 못했던 그 여인이 낳은 쌍둥이 자매가 다른 여인의 보살핌 속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미하일은 세 번째 문제 즉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의 답이 바로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가게 된다는 스토리입니다.

  저도 제일 처음 읽었을 때 매우 큰 감동을 받은 소설이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아주 큰 함정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바로 기독교의 사랑을 ‘이웃사랑’으로 국한시켜 버리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사랑이 하나님이다.’라고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출발점이 되고 기준이 된 가운데 ‘사람 사이의 사랑’을 논해야 하는데, 전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냥 ‘사람의 사랑’만 가지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과 똑같은 사랑인 것처럼 오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결코 ‘사람끼리 서로 나누어 주는 사랑’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나오는 ‘사람의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질적으로 아주 다른, 아니 아예 차원이 다른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너는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는 실로 이상한 명령을 내리신 이유도 바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고 무한한 것인지를 그로 하여금 생생하게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 기독신자가 꼭 알고 체험해야 할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큰 사랑’입니다.

  본문 1절에 “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나타나는 “그 여자”란 앞서 1장에서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결혼했던 “음란한 여자”, 즉 “고멜”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한 후에도 또 다시 방탕하여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가버렸습니다.
  여기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라는 말씀이 곧 그 기 막히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고멜을 사랑하라고, 다시 아내로 데려오라고 호세아 선지자에게 정말 희한한 명령을 내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호세아와 고멜 사이의 상황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던 현실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신을 섬기는” 배교에 빠져 있었습니다.
  “건포도 과자”는 사치스러운 기호식품에 속한 것으로서 특별행사 때나 먹는 귀한 음식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처럼 가장 좋은 것들을 우상신 앞에 갖다 바치며 그 앞에서 잔치하고 즐거워하고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해” 주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너도 지금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있는 네 음란한 아내를 한번 사랑해 보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호세아가 그런 고멜을 사랑해주기가 쉬웠겠습니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처럼 음란한 여인을 자기 아내로 맞아주는 것만 해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는데, 고멜은 고마워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남편 호세아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서 가출해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아내를 용서해주는 것만 해도 마음이 보통 넓지 않고서는 안 될 일인데, 하물며 일부러 찾아가서 다시 데려오고 게다가 더 사랑해 준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남편에게도 전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호세아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지금 하나님을 떠나 배교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그래도 용서하시고 찾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뜨겁게 체험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우리 역시 바로 이 크나큰 하나님의 사랑을 꼭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아직 악을 행하고 있었을 때, 아니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도’ 아무 조건 없이, 아니 오히려 마땅히 미워해야 할 조건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세상의 그 어느 다른 종교에서도 결코 찾을 수 없는, 그 어느 훌륭하다는 성인도 결코 보여 주지 못했던, 지극히 특별하고도 유일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지기 전에 사람이 알고 있던 사랑이란 다 ‘조건적인 사랑’뿐이었습니다.
  매력 있는 이성이라는 조건이 있어야 연애라는 감정이 생기고, 마음 통하는 친구라는 조건이 있어야 우정이라는 사랑을 나누며, 한 핏줄이라는 조건이 선행되어야만 가족애란 것이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조건에 부합되지 못하면, 그런 대상은 무관심으로 대할 뿐이었으며, 이런 조건에 반대되는 대상은 당연히 미움의 대상이 될 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무슨 공로나 매력이 있어서 주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미운 짓만 하고 있는 죄인인데도 그냥 부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조건’ 정도가 아니라 ‘악조건’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풀어 주시는 사랑, ‘사람의 사랑’ 수준으로서는 비교의 대상조차 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기독교 구원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조건부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려 하셨다면, 우리 가운데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만한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결단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자 역시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신’을 사랑하고 그 앞에서 ‘건포도 과자’를 먹으며 즐기는 바로 그때에 먼저 우리를 택해 주시고, 자기 백성이라 불러 주시고, 당신의 신부로 영접해 주시는 참으로 놀라운 사랑으로써 우리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그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찬 305장)라고 감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음녀가 된 여자’같이 죄에 빠져 있던 나를 먼저 찾아오셔서 무조건 베풀어 주시는 이 한없이 큰 사랑의 부르심을 듣고 그 주님의 품으로 꼭 다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친히 죗값을 대신 치러주신 깊은 사랑’입니다.

  2절에 기록하기를 “2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라고 했습니다.

  호세아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고멜을 다시 데려오려고 했을 때, 그는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고멜은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호세아가 치른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합쳐서 계산해 보면 대충 ‘은 삼십 세겔’ 정도가 되는데, 그것은 당시 여종 한 사람의 몸값에 해당되는 액수였습니다.
  이는 고멜이 다른 남자에게로 갔지만, 그의 정식 아내로 대접받은 것이 아니라 창녀나 여종의 신분으로 붙잡혀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바로 사람이 하나님과 사귈 때는 하나님의 자녀요 주님의 신부로 대접받지만, 마귀에게 끌려가게 되면 그 마귀가 마음대로 학대하고 부리는 종의 신세로 전락되는 것과 똑같습니다.
  호세아는 그처럼 타인에게 붙잡혀 있던 고멜을 다시 데려오기 위하여 그 몸값을 지불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런 호세아 선지자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진리는 너무나 명백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죄 아래 종 되었던 우리는 사망의 저주에 꼼짝없이 묶이는 신세가 되어서 스스로 벗어날 길도, 힘도 전무한 처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니 그런 자리에서 떠날 생각조차 아예 하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고멜 역시 다른 남자와 연애하며 지내는 동안 그런 처지에서 스스로 벗어나 호세아에게로 돌아갈 생각일랑 꿈조차 꾸지 않고 있었을 것이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본질적인 ‘타락의 본성’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까닭에 우리를 완전히 당신의 소유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그 ‘몸값’까지 대신 치러 주셨습니다.
  그처럼 남편을 배반하고 떠난 고멜에게 호세아 편에서 먼저 찾아가서, 그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그녀의 몸값까지 대신 지불하고 다시 아내로 맞아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음란한 고멜이었지만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그 무언가 그녀 가슴에 뜨겁게 와 닿는 것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전달하시기 위하여서도 그와 똑같은 방법을 쓰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우리 죄인 쪽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던 지극히 비싼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당신의 신부로 맞아들이겠다고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 돌 같은 우리의 마음이 깨어지고, 그 꼿꼿했던 우리의 목이 숙여지면서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죄 가운데서 떠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던 우리가, ‘예수님께서 내 죄 때문에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라는 이 대속의 복음, 다른 교주의 입에서나 다른 경전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이 신기한 복음을 듣는 순간, 그 심령이 충동을 받고 그 양심에 회개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를 감격적으로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놀라운 감동을 가리켜 히브리서의 말씀은 증언하기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3-14)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희생제물의 피’를 대신 뿌림 받고도 정결하게 되고 거룩하게 되었다면, 하물며 ‘그리스도의 보혈’을 대속제물로 받게 된 성도들이야 그 죄 사함의 효력이 오죽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해 주시는 사랑이 그 얼마나 깊고 뜨겁고 진실한지를 단번에, 그러면서도 확고부동하게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용의자로 체포되었을 때에도 보석금을 지불하면 수감되지 않고 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유죄 판결을 받았을 때에도 감옥에 가는 대신에 벌금을 내고 풀려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돈을 누가 내어 주겠습니까?
  바로 그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가족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용의자만 되어도 벌써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고, 유죄 판결을 받으면 죄인으로 낙인을 찍고 경멸할 뿐이지만, 그 사람의 부모나 배우자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보석금이나 벌금을 마련해서 그를 구해 내려고 백방으로 노력할 뿐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정말 비싼 대가를 대신 치러 주신 분이 아니시겠습니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고 스스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약간의 동정이나 연민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사시기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값으로 대신 치러 주신 이 ‘깊고 깊은 사랑’에 진정으로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회개할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주시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이것 역시 호세아가 고멜을 통하여 체험했던 사실이었습니다.
  3절 이하 5절에 “3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4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5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고 기록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서 그처럼 고멜을 사랑해 주고 대가까지 치르고 도로 데려왔지만, 고멜 쪽에서 당장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에 그런 호세아에 대한 진정한 감사와 사랑이 일어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3절에서 호세아가 고멜에게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냥 ‘너는 오랫동안, 평생토록 나와 해로하자.’는 뜻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네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나는 너와 함께 살면서 기다려 주겠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 역시 호세아 선지자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그처럼 지극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면 즉시 마음을 바꾸어야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못된 음녀의 본성과 과거의 잔재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답답했겠으며 또 화도 났겠습니까?
  하지만 호세아는 바로 그런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느끼고 계실 심정을 똑같이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그런 큰 실망감을 느끼실 수밖에 없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오래 참고 기다려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을 먼저 사랑해 주셨고,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에 십자가의 대속 은혜로써 불러 주셨지만, 사람 쪽에서 그 하나님 앞으로 돌아서는 반응은 여전히 지극히 느리기만 합니다.
  그런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한 몸에 쏟아 받으면서도, 그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며 돌아가는 발걸음은 항상 꾸물대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지금 하나님의 처지에 있다면 그것이 정말 견딜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만큼이나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그 회개하는 속도마저 그처럼 더디다면 그것이 정말 참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도 또 참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속이 뒤집힐 정도로 화가 날 상황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많은 날 동안’ 우리를 더 기다려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4절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이라는 말씀은 3절과 대응하고 있는 구절로서, 장차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될 기간을 가리킵니다.
  70년이라는 그 오랜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는” 상태, 즉 한 국가로서의 힘을 완전히 상실한, 최악의 날을 보내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포로 기간이 또 이점도 있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서는 “(우상 앞에) 제사도 (드릴 수) 없고”, “주상”이나 “에봇”이나 “드라빔” 같은 우상 자체가 아예 “없이 지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자기 나라가 있을 때에는 우상숭배도 제 마음대로 했지만, 오히려 포로가 된 땅에서는 그럴 여유나 겨를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포로가 되었던 “많은 날”이 흘러 간 후에 끝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을 받고 “돌아와서” “다윗” 왕조를 회복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운데 이제부터는 “여호와와 그의 은총” 안에 사는 참된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처럼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죄인을 부르시는 사랑의 손길과 죄인을 감격하게 하시는 십자가의 은총을 듣고서도 깨닫지 못하고 꾸물거리고 있는 우리를 완전히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많은 날’을 참고 기다리시면서 우리에게 ‘은혜 받을 만한 날’을 연장해 주고 계십니다.
  그 ‘많은 날’들이 ‘이스라엘의 포로 시대’와 같은 날들이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택자로 하여금 세상에서 하는 일마다 잘되지 않고 실패만 거듭하게 되는 때를 통과하게도 하십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죄를 짓고 우상숭배에 빠질 여유마저 없어지게 되며, 그런 시련의 날들을 통과함으로써 그 마음은 더욱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는 이 ‘많은 날’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려 주고 계시는 소중한 시간인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남 따라 억지로 교회출석만 간신히 하고 있는 날들, 기도는 드리고 있는데도 아직도 모든 일들이 잘 풀리지 않는 날들, 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노력하는데도 오히려 시험이 닥쳐와서 환난을 겪게 되는 날들 - 우리에게도 이런 날들이 많이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모든 날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절실히 깨닫고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며 당신 앞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고 계시는 ‘은혜의 때’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다려 주시는 ‘많은 날’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벌써 일찌감치 끝장났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에게 선포되었다 하더라도, 그 복음에 반응하고 회개하며 돌아서는 속도가 이처럼 느린 우리에게 만일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려’ 주지 않으셨더라면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는 아무에게도 실제로 적용되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잠시 타올랐다가 금세 식어버리는 사랑이 아니라 오래 기다리시되 ‘인내’까지 하시며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사랑, 하나님께서 우리처럼 연약한 죄인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이것 또한 꼭 필요함을 아시고 베풀어 주시는 이 ‘무한한 사랑’에 속히 응답하고 돌아오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찬 304장)라고 찬송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사람이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크고 깊고 무한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까지 몰라서는 절대로 안 될 사랑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그런 기상천외한 체험학습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저 입으로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운운하며 끝내지 말고, 정말 그 사랑의 엄청난 크기, 뜨거운 깊이, 영원토록 변치 않는 무한성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너도 한 번 음란한 아내를 사랑해 보아라.’고 호세아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당신의 사랑을 적어도 당신의 자녀들은 꼭 알아주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거부하고 배반하는 자를 끝까지 사랑해 주신다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어려운 일, 아니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절감해 봄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이란 것이 그 얼마나 강력하고도 위대하고도 진실한 것인지를 확실히 체험해 보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사랑을 끝내 모르면 정말 안 됩니다.
  우리에게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무관심해도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우리에게 이처럼 계산이 안 될 무한정의 용서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깨닫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큰 배은망덕과 신성모독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라고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우리의 찬송은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로 그냥 끝나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는 도저히 측량할 길이 없는 사랑이지만,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똑똑히 깨닫고 그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성도여 찬양하세’라고 화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꼭 깨닫고 반응해 주기를 원하고 계시는 그 사랑, ‘우리가 완전타락에 빠져 있을 때 무조건 베풀어 주신 큰 사랑’, ‘전적무능력 상태에 있던 우리 대신 비싼 값을 치러 주신 깊은 사랑’, 그리고 ‘우리가 당신 앞으로 돌아오기를 지금도 여전히 기다려 주시는 무한한 사랑’ - 이처럼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밝히 깨닫고 뜨겁게 응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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