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3-17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호세아 1장 1절 – 2장 1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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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3-17
2019′경향의 강단(12)(2019년 3월 17일 / 주일 대예배)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호세아 1장 1절 – 2장 1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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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호세아 1장 1절 - 2장 1절 / 석기현 담임목사
‘사랑’은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가장 대표적인 소재이지만, 그런 사랑의 스토리에 반드시 포함되는 것이 ‘미움’입니다.
  만약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으로만 일관되면 극중의 인물들은 마냥 행복할지 몰라도 보는 시청자에게는 지루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중간 중간에 갈등, 배신, 증오와 같은 반전이 섞여 있어야만 그 스토리가 더욱 흥미진진하게 전개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미움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로 가 버리면 그 뜨거운 사랑이 극도의 미움으로 바뀌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만약 그런 상황에서도 아무런 미운 감정이 들지 않는다면 애당초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도 진실이 아니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소위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라는 말도 그래서 생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기하게도 그런 ‘애증(愛憎)(love & hate)의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도 존재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호세아서에 나타납니다.
  1장 1절에 “1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본문의 역사적 배경으로 세 명의 “유다 왕”들과 “여로보암”이라는 “이스라엘 왕”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호세아 선지자가 분열왕국 시대에 북조 이스라엘에서 사역했음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의 선지자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호세아 역시 자기 백성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악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장차 다가올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를 주요 메시지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경고하는 가운데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을 동시에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악에 대한 필연적인 미움’을 수반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직결되는 것인데, 그처럼 대조적인 두 감정이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실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내는 사실을 이 호세아서가 아주 명쾌하게 증언해 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본문을 통하여 일견 서로 대립될 것만 같은 ‘하나님의 미움’과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의 삶에 어떻게 합력하여 결국 선한 역사를 일으키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악을 철저히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성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1장 2절부터 6절에 “2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3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4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5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6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아까 1절에서 본 대로 호세아 선지자가 사역했던 시대는 ‘여로보암 2세’가 북조 이스라엘의 왕이 된 때였는데, 그의 조상은 저 악명 높은 아합 왕가를 멸절시키고 새로운 정화의 기운을 불어 넣었던 예후였습니다.
  하지만 그 예후는 바알 우상을 일단 타파해 놓고도 여호와 신앙에 그 우상숭배 의식의 잔재를 그대로 남겨두는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사람 생각에는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다고 했으니까 신앙의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두고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고 치열하게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처럼 우상과 타협하는 혼합종교야말로 하나님께서 오히려 불신자보다 더 싫어하시고 치를 떠실 수밖에 없는, 실로 가증스러운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그들로 하여금 똑똑히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하여 그야말로 기상천외의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은 호세아 선지자로 하여금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하신 명령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두고 하나님께서 당신이 세우신 선지자에게 실생활에서 그런 불결한 결혼 생활을 명령하실 리는 없으니, 아마도 호세아의 결혼은 계시를 받는 환상 중에 일어난 일종의 ‘가상현실’이 아니었겠느냐고 주장하는 해석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3절에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호세아서를 계속 읽어 보면 이 “고멜”이라는 여인을 어떤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뚜렷한 역사적 실재성들이 너무나 자주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그녀가 실재 인물이며, 음란한 성품이 있는 여인 내지는 아예 창녀 출신이었을 가망성까지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처럼 비정상적인 결혼을 호세아에게 명령하신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지금 얼마나 추한 꼴을 보여 주고 있는지를 호세아 자신부터가 피부에 와 닿도록 절감하면서 그 사실을 백성에게 생생하게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3절 하반절 이하에 보면 호세아 선지자가 그처럼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한 이후 더 기가 막힌 장면들이 나타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첫 아들에 대해서는 “그에게 아들을 낳으매”라고 되어 있으나, 둘째로 낳은 딸과 셋째로 낳은 아들에 대해서는 이 “그에게”라는 말이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그 둘째와 셋째는 호세아의 친자식이 아닐 가능성까지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2절에서 호세아더러 그 결혼을 통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자녀들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참으로 이상한 이름들을 지어주도록 명하셨습니다.
  첫째 아들에게는 “이스르엘”이란 이름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지명으로서 바로 우상숭배에 앞장섰던 아합과 그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설명하고 계시는 그대로 장차 “예후의 집” 또한 이곳에서의 전쟁을 통해 망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호세아의 첫아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시는” 즉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는 저주의 상징 그 자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태어난 딸에게는 “로루하마”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긍휼 없음’이란 뜻의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살육 당하게 하실 뿐 아니라 그런 와중에서도 조금도 긍휼을 베풀어 주시지 않겠다는 뜻으로서, 첫아들의 이름보다 더 무서운 저주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저주는 여기서도 그치지 않고, 8절과 9절에 “8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고 하는 저주로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호세아에게 셋째로 태어난 아들에게는 “로암미”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그 뜻은 9절에 부가설명하고 있는 그대로 ‘내 백성이 아님’입니다.
  명색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타공인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고 선언하고 계시니, 이것은 ‘긍휼 없음’보다 훨씬 더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가 최악에 이른 단계인 것입니다.

  이처럼 호세아 선지자는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두어야 했고, 그 사이에서 자기 자식이 아닐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낳게 되었으며, 거기에다 그런 저주스러운 이름들까지 지어주어야 했으니, 그가 당한 인간적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극단적인 체험을 통하여 호세아로 하여금 지금 하나님께서 배교한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는 심정이 어떠한지를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지 않고 우상종교와 혼합된 모습의 이스라엘이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에는 정말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심정이란 그야말로 음란한 여인이나 창녀를 자기 아내로 둔 남편과 같은 것이었으며, 그 결과 이스라엘에게는 ‘멸망, 무긍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백성’으로 점점 더 악화되는 현실만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그 자신이 지극히 나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지 않는다면 그 상태에서 호전될 길은 전무합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 자기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고집을 부리면 치료를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북한 정권이 자기네의 공산주의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최악의 체제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우리 식대로’라고 고집만 부리면 그 어떤 원조나 도움으로도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될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종교에 있어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악을 철저히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써 바른 진단을 받지 못하면, 사람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꼭 필요로 하는 죄인에 불과함을 깨달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결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자신을 곁에 있는 다른 사람들 하고만 비교할 때에는 전혀 인정할 수 없었지만, 이 완벽하신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자기의 죄가 실로 창녀와 같이 부끄러운 것이며 음란한 여인과 같이 악한 것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보고 겸손하게 인정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악을 미워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완전타락’을 먼저 깨닫고 고백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비로소 참된 구원의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이외의 그 어떤 종교도 사람을 가리켜 이처럼 철저하게 죄인이라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경전은 그저 애매모호한 추상적 사상을 나열하든지 기껏해야 권선징악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지, 사람 자신이 근본적으로 이처럼 추악한 죄인이라고 적나라하게 꼬집어서 지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종교는 인본주의 종교이며, 따라서 사람이 싫어할 말은 아예 입 밖에 내지도 않고 경전에 넣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른 진단이 없는 종교에 바른 치료가 있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환자에게 무조건 다 건강하다고, 아무 문제없다고 좋은 말만 해 주는 사람이 진짜 의사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 의사는 고칠 실력이 없든지, 아니면 그 환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없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오직 참된 종교, 여호와 종교만이 사람을 가리켜 ‘너는 죄인이다.’라고 매섭게 질책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사람을 제대로 살리기 위하여 꼭 필요한 기본단계이기 때문이며,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그 주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에 대한 미움’ - 이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 앞에서 자신이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에 불과함을 깨닫고 음행을 저지른 자처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됨으로써, 그 하나님의 미움 뒤에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택자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성도는 구원의 감격을 최대로 체험하게 됩니다.

  1장 10절 이하 2장 1절에 “10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11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1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고 기록했습니다.

  2장 1절은 문맥상 2장 2절이 아니라 1장 11절과 연결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이 문단에 기록된 말씀은 바로 그 앞의 내용과 너무나도 극단적인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9절 이전까지 구구절절 넘쳐흐르던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분노와 무서운 저주들이 여기서는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그저 “그러나”라는 한마디의 접속사 이후 실로 같은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말씀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그 분위기가 삽시간에 싹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앞의 4절과 5절에서는 멸망의 골짜기 “이스르엘”에서 활이 꺾이고 폐하게 될 것이라고 했던 이스라엘이, 여기 10절에 와서는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는” 창대한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엄청난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라고 하시며 ‘로암미’라고 명명하셨던 바로 “그 곳에서” 그 똑같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제는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의미의 “암미(내 백성)”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무언가 문장이 잘못되든지 아니면 원래 이어진 문단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극단적인 전환입니다.
  게다가 설혹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런 기적적인 회생의 구원이 주어진다면 한마디라도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런 것도 없이 그냥 순식간에 모든 것이 뒤바뀌어져 버린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처럼 음란한 배교로 인하여 멸망 받아 마땅했던 이스라엘이 왜 갑자기 눈 깜짝할 사이에 엄청난 축복이 약속된 하나님의 자녀로 둔갑하게 된 것이겠습니까?

  앞서 7절에 이미 그 대답에 대한 힌트가 나와 있는데, 바로 “7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된 말씀입니다.
  호세아의 자녀들의 작명을 통해 배교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무섭고도 맹렬한 저주가 연이어지는 와중에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라는, 일견 문맥에서 완전히 벗어나 보이는 말씀이 삽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7절 전까지의 문맥은 오로지 ‘저주’와 ‘멸망’ 일색입니다.
  심지어 바로 그 다음의 8절과 9절에서도 여전히 ‘로루하마’와 ‘로암미’라는, 배교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만 철철 넘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이에, 정말 기가 막히게도 ‘하나님의 긍휼’이 불쑥 들어오면서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라는 희한한 약속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은 극히 미워하시면서도 결국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사랑을 베풀어 주실 수밖에 없는 ‘애증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극적인 구원은 과연 어떻게 베풀어집니까?
  그것은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대로 무슨 정치적, 군사적 구세주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11절에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는 예언에 나오는 “한 우두머리”를 통해 성취될 구원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두머리”라고 번역된 말은 ‘통치자, 지도자’라는 뜻인데, 바로 ‘오실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장차 유다 지파를 통해 나타날 메시아야말로 절망적인 이스라엘에게 유일한 그러나 완벽한 구원자가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호세아 선지자는 1장 서두에서부터 이미 암시를 해왔습니다.
  1절에 보면, 호세아 선지자는 본인이 북조 이스라엘의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조 유다의 왕들을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한창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도 7절에 보면 “유다 족속”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호세아가 자기 민족의 그 절망적인 상황에 대하여 유일한 구원의 희망을 오직 장차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실 메시아’ 그 한 분에게만 집중시키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 줍니다.
  즉 그 메시아께서 오시면 그 분은 비단 남조 유다 백성뿐 아니라 북조 이스라엘 백성도 함께 구원해 주실 것을 호세아는 굳게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이 ‘이스르엘’이라는 단어는 앞서 4절에서 ‘하나님이 흩으신다.’는 뜻으로 쓰였지만 여기 1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으신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저주를 받았던 그 두려움이 컸던 만큼, 그 저주에서 벗어나 극적인 구원을 받게 된 감격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욱 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또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도저히 구원받을 이유나 가망성이 전무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일방적으로 한순간에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의 독생자를 ‘구원의 통치자’ 곧 메시아로 보내어 주심으로써 가능하게 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핏값으로 모든 인생의 죄를 대신 갚아 놓으시고, 그 구원의 길에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고 우리를 그냥 공짜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참된 구원은 ‘오직 은혜’요 ‘전적 은혜’에 의한 것일 따름입니다.
  원래는 “로루하마(긍휼 없는 자)”라 불리던 백성이 하루아침에 “루하마(긍휼 얻은 자)”가 되고, 당연히 ‘로암미’(내 백성 아닌 자)일 수밖에 없던 자들이 ‘암미’(내 백성)로 회복된 것은 오직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단 한 점이라도 이스라엘 백성 쪽의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니라 100퍼센트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덕분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신자의 구원받은 감격이 솟아나오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로암미’에서 ‘암미’로 넘어 가는 과정이 우리의 노력에 의하여 조금씩, 우리의 선행 때문에 당연히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처럼 순전히 ‘자신의 공로’에 기인해서 완성되는 구원에는 이와 같은 큰 감격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어떤 보람이나 성취감 정도의, 순전히 자기중심의 자화자찬만 남게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인위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구원이라는 것에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고 찬미하고 영광을 돌리게 할 아무런 동기도, 이유도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구원은, 도저히 구원받을 이유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이 ‘완전 타락’에 빠져 있던 우리에게, 스스로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는 ‘전적 무능력’ 상태에 처해 있던 우리에게, 아니 영벌을 받아 마땅하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던 ‘음란한 여인’ 같은 우리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그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작정하시고 스스로 충족시켜 버리신 대속의 조건에 의해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공짜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말도 안 되고 이치에 맞지 않을’ 정도로 죄인에게는 전혀 뜻밖의 사랑이며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은혜였습니다.
  그러니 그런 일방적인, 그런 무조건적인 구원을 받게 된 신자 쪽에서의 반응이라는 것은 그저 넘쳐 솟구치는 감격 외에는 다른 것이 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저 우리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찬 310장)라고 놀라며, 오로지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찬 143장)라고 충격적인 감사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종교에서 어떻게 이런 감격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신으로부터 얻어 내려고 하는 ‘무당 종교’에 무슨 감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는 신과 흥정하는 줄다리기만 있고 ‘주시는 만큼 바치겠다.’는 냉정한 ‘give and take’만 있을 따름입니다.
  자신의 성찰과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셀프서비스 종교’에 그 무슨 감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는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줄 모르는 끝없는 방황과 자신의 악함을 고백하지 않는 교만만 가득할 뿐인 것입니다.

  오직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며 전부를 주께로부터 받은 줄’을 아는 성도의 입에서는 그런 계산적인 복채나 외식적인 염불 대신에 오직 감격에 넘치는 감사와 찬송만이 하나님을 향해 늘 터져 나오게 됩니다.
  어떤 조건 때문에 사랑하는 세상의 사랑과는 달리 아무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악조건과 역조건만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택자를 ‘내 백성’이라고 불러주시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고 심령으로 체험함으로써 ‘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애증(愛憎)’이라는 것은 실상 인간관계에서는 변덕과 변심의 산물이며 괴로움과 고통을 유발시킬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미움은 이처럼 오묘하고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애증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은혜의 하나님’은 어떤 죄라도 용서해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둘은 일견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만 보이는 까닭에 세상의 다른 어떤 종교도 이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발휘하는 신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종교들은 원래가 사람이 만들어낸 인본주의 우상종교이며, 그런 까닭에 사람의 생각에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을 그들의 교리나 경전에 애당초 포함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그런 종교들은 기껏해야 공의나 긍휼, 둘 중에 하나만을 강조할 수 있을 뿐이었으며, 사실상 그렇게 나누어 놓고서도 그 하나하나를 제대로 완성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우상종교의 공의는 기껏 ‘사회 정의’ 정도의 수준에서 끝날 뿐, 각 사람 속에 있는 근본적인 인생의 악을 공의롭게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인본주의 종교의 긍휼은 기껏 ‘이웃 사랑’의 수준에서 끝날 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대신 죽으심으로 나타낸 이 놀랍고도 무궁한 은혜의 비슷한 것에도 미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 종교만이 이처럼 공의와 은혜를 완벽하게 조화시키면서 선포해 주고 있습니다.
  자식을 무조건 엄하게만 다스리는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일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잘못하는 것까지도 아무런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냥 방임하는 아버지가 진정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진짜 훌륭한 아버지, 진짜 좋은 아버지라면 사랑하는 자식인 까닭에 그 자식이 저지르는 잘못을 미워하면서 고쳐 주려 할 것입니다.
  또한 그 자식을 사랑하는 이유도 그 자식이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식인 까닭에 무조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는 저와 여러분을 ‘내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무섭고도 당연한 저주가 선포된 바로 ‘그 곳’에서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최종적으로 확정해 놓았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바로 그처럼 의롭고도 긍휼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악을 지극히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통하여 자신이 절망적인 ‘로암미’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회개하는 가운데 당신의 택자를 끝까지 무조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루하마’의 자녀가 됨으로써, 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늘에 계신 우리 구원의 아버지께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