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3-10 “베냐민의 자손들” 역대상 8장 1-40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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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3-10
2019′경향의 강단(11)(2019년 3월 10일 / 주일 대예배)
“베냐민의 자손들” 역대상 8장 1-40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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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의 자손들”

역대상 8장 1-40절 / 석기현 담임목사
‘막내’ 하면 우리 모두가 다 퍼뜩 떠올릴 수 있는 인상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항상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자라고 그래서 응석받이 내지는 버릇없는 아이가 되기 쉬운 것이 막내입니다.
  똑똑하면서도 별난 데가 있어서 잘 되면 크게 되고 못 되면 또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다든지, 개성이 강하면서도 천재적인 자질이 숨어 있는 것 - 이런 것들이 우리가 막내를 생각할 때 주로 연상되는 것들입니다.

  장남이란 그저 만사가 무난하고 평범한 스타일이 되기 쉽습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제가 꼭 그런 전형적인 장남 스타일 같지 않습니까?
  그에 비해서, 막내는 아무래도 자유롭게 극단을 왔다 갔다 하는 위험과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 또한 내포되어 있는, 한마디로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할 만합니다.
  저는 막내가 되어 보지는 못했지만, 저의 막내 남동생과 막내 여동생의 어린 시절을 되새겨 보면 영락없이 들어맞는 말입니다.
  그 막내들이 마치 자기네가 형들과 오빠들로부터 큰 핍박이나 당하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 앞에서 아주 과장하여 고자질하고 해꼬질하는 바람에 석기성 장로도 그렇지만 특히 장남이었던 저는 정말 억울한 피해를 많이(?) 당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 중에 제일 막내는 바로 베냐민이었습니다.
  위로 배다른 형들까지 포함해서 장장 열한 명의 형들이 있는 중에 제일 꼴찌로 태어났으니, 그 어린 시절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쟁쟁한 형들 밑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좌충우돌하면서 자랐을 것이니 그 성격이 평범하려야 평범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 기록에서도 역시 그런 톡 튀는 막내 특유의 개성이 베냐민에게서 나타나고 있으며, 그 베냐민 지파의 역사를 보아도 또한 양극단을 오가는 파란만장한 사건들로 채워지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버지 야곱조차 마지막 임종의 침상에서 그를 가리켜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창 49:27)라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였습니다.
  즉 베냐민 지파가, 좋게 말하면 용맹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호전적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는데, 실제로 꼭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런 막내둥이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사용하셨는지를 증언해 주는 아주 특별한 역사입니다.
  평생 꼴찌로 살 수밖에 없어 보였던 그 베냐민 지파가 결국에는 유다 지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스라엘의 선두주자 대열에 합류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문자 그대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과연 베냐민 지파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처럼 만년 막내의 자리를 벗어나게 되었습니까?
  이 시간 저는 교회 안에서 ‘철없는 막내둥이 교인’이 ‘갑절의 기업을 누리는 영적 장자’로 바뀔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자기중심의 인생’을 ‘하나님의 구속사 중심의 인생’으로 바꾸는 것이 만년 꼴찌 인생을 벗어나는 길입니다.

  본문 28절에 “28그들은 다 가문의 우두머리이며 그들의 족보의 우두머리로서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베냐민 “가문”의 첫 선조는 당연히 ‘베냐민’인데, 그것이 “베냐민의 낳은 자는”이라는 서두로 1절부터 시작되는 족보입니다.
  이하 16절까지 이어진 내용은 베냐민 지파가 자기 나름대로 세력을 확장하며 번성해 나간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족보는 성경의 족보들이 대부분 다 그렇듯이 꼭 직계후손으로 이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즉 때로는 몇 대를 건너 뛴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 족보를 가지고 그 베냐민 지파 자손의 정확한 가계와 연대를 확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 기록된 족보를 통해 우리가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막내의 강한 개성과 끈질긴 생존력을 발휘하여 자기네의 생활 터전을 꾸준히 개척하고 확장해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6절에 나오는데, “에훗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그들은 게바 주민의 우두머리로서, 사로잡혀 마나핫으로 갔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번역하기가 조금 애매한데, 개역개정 성경에 “우두머리로서” 다음에 ‘쉼표’(,)를 삽입해 놓은 이유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사로잡혀 마나핫으로 간” 사람들이 “에훗의 아들들”로서 “게바 주민의 우두머리”가 된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게바 주민”이기 때문입니다.
  즉 알기 쉽게 다시 번역하자면 ‘그들(에훗의 아들들)은 게바에 살았던 우두머리로서 게바 주민을 사로잡아 마나핫으로 갔으니’라고 해야 합니다.
  “에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오랫동안 괴롭혔던 모압을 물리치고 80년 동안의 태평시대를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여기서는 그 에훗의 아들들이 게바라는 지역의 족장이 되어 그 주민을 강제이주 시켜 마나핫이란 곳으로 데려갔다는 것과, 거기서 계속 자손을 두고 번성했다는 사실을 이하 7절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확한 연대와 배경은 알기 어렵지만, 하여튼 베냐민 자손의 적극적이고도 호전적인 기질이 엿보이는 장면입니다.

  그 다음 8절에 보면 “사하라임은 두 아내 후심과 바아라를 내 보낸 후에 모압 땅에서 자녀를 낳았으니”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이 “사하라임”은 이혼을 두 번이나 했고 또한 이방 땅 모압에서 이민생활을 하며 살았던, 아주 자유분방한 사람이었습니다.
  9절과 10절에 보면 그는 세 번째 결혼 이후에도 자녀들을 많이 두고 그 아들들은 다 족장들이 되는 등, 그런 복잡한 가정 속에서도 육신적으로는 꽤 번창한 가문을 이루었습니다.
  11절과 12절에는 그 사하라임이 이혼했던 첫 번째 아내 후심의 자녀들 역시 “마을들”을 세우는 등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어지는 13절에 보면 “또 브리아와 세마이니 그들은 아얄론 주민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들이 가드 주민을 쫓아냈더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하 16절까지 그의 자손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베냐민의 두 자손 역시 족장들로서 “가드 거민” 즉 당시 아주 강력한 부족이었던 블레셋 민족의 주요 성읍 중 하나인 가드의 주민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는 용맹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상의 몇 집안의 예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베냐민 족속은 복잡하고 불안한 주변 환경 속에서도 끈질긴 자립심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형들에게 눌리면서 서럽게 자라는 와중에 절로 갈고 닦게 된 ‘자기중심’의 개성이 그 처절한 생존 경쟁을 이겨내면서 자신의 생활 터전을 개척해 나가는 능력으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냐민 족속이 정말 정상 궤도에 올라 전성기를 향해 나아가게 된 것은, 결코 그들 자신의 돋보이는 생활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파가 본격적인 복을 받기 시작한 것은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 유다 민족이 해방을 받고 고국에 돌아올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국을 건설해 나갈 때, 그 누구보다도 바로 이 베냐민 지파가 가장 적극적으로 유다 지파를 도왔던 것입니다.

  본문 17절 이하 32절의 말씀이 그처럼 포로 해방 이후 베냐민 지파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거주하며 살게 된 사실을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17절에서 27절까지에 여러 이름들이 열거되어 있고, 그 문단의 제일 끝에 해당되는 28절에 보면 “그들은 다 가문의 우두머리이며 그들의 족보의 우두머리로서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베냐민 지파는 포로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도 예루살렘 지역에 살고는 있었지만, 여기에 기록된 족보는 모두 다 해방 이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거기 정착한 베냐민 지파 족장들의 이름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29절 이하에서도 “기브온” 자손을 언급하면서 문단의 제일 끝 32절에 “그들은 친족들과 더불어 마주하고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더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기브온은 원래 가나안 원주민이었는데,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과 약조를 맺어서 살아남게 되었던 족속입니다.
  그들이 모여 살던 기브아는 베냐민 지파의 외곽 지역으로서 사울 왕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이 기브온 족속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귀화한 외국인 거주자로서, 나중에 유다 족속이 포로 해방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 베냐민 지파 사람들과 행보를 같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포로 해방 이후 베냐민 지파가 유다 지파와 함께 동조하여 조국 재건에 참여한 핵심멤버가 된 것은 이 지파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그들의 개성과 능력과 용맹이 그저 자기 자신의 생활을 지키고 확장하는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었지만, 이제 그들의 개성과 능력과 용맹은 조국 재건이라는 가치 있는 사명을 위해 크게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초창기에는 막내에 지나지 않았던 베냐민 지파였지만 이처럼 다윗 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메시아 왕국 건설에 그 생활의 목표를 맞추게 되자, 일약 하나님의 구속사에 요긴하게 쓰임 받는 지파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자신의 생활에만 모든 인생의 목적을 부여하고 거기에만 정성을 쏟으면서 산다면, 어떻게 되든지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고 자기 가족 하나 먹여 살리는 것은 그럭저럭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경기가 끝없는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고 가계부는 연일 적자이기는 하지만 이를 악물고 발버둥을 치면서 악착같이 살아가면 ‘산 사람 목구멍에 거미줄 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정도로 겨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된다면 정말 비참한 꼴찌 인생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토록 자기만 알고 자기만 위하는, 철없는 막내둥이 같은 인생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그저 기복신앙에만 사로잡혀 있는 교인들이 바로 그런 철없는 이기주의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저 하나님께 ‘이것 달라, 저것 달라’고 떼만 쓰고, 매사에 오직 ‘자기가 받을 복’을 챙기는 것밖에 모르는 교인은 정말이지 수준이 낮은 ‘만년 막내’인 것입니다.

  참된 기독신자는 보다 높고 넓은 시야를 가지고 보다 성숙하고 의미 있는 삶의 목표를 지향해야 합니다.
  자기중심 생활이라는 이 ‘개구리의 우물’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차원 높은 인생 목표를 설정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 세계사의 중심부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주류에 편승하는, 실로 ‘큰물에서 노는’ 개혁주의 신앙의 삶을 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싸우고 빼앗고 쫓고 쫓기는 ‘다람쥐의 쳇바퀴’ 같은 인생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가 진행되고 있는 교회 속으로 그 삶의 중심이 옮겨질 때에 우리 인생의 진짜 역전이 시작됩니다.
  혼자 먹고 살겠다고 아옹다옹하는 ‘자기중심의 인생’ 속에 갇혀 있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왕국 건설을 위한 선한 사명을 위해 자신의 생애 목표를 분명히 설정하고 충성함으로써, 만년 꼴찌 인생에서 탈피하여 진정 자기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게 되는 것이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인생 전환입니다.

  33절과 34절에 기록하기를 “33넬은 기스를 낳고 기스는 사울을 낳고 사울은 요나단과 말기수아와 아비나답과 에스바알을 낳았으며 34요나단의 아들은 므립바알이라 므립바알은 미가를 낳았고”라고 했습니다.

  35절 이하에 그 족보가 계속 이어지면서 끝으로 40절에 “베냐민의 자손들은 이러하였더라”고 마침표를 찍고 있습니다.
  여기 기록된 내용은, 시기로 따지면 오히려 32절의 사건 훨씬 이전에 살았던 베냐민 세대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베냐민 지파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던 사울 왕가의 족보입니다.

  사울이 처음에 왕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에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삼상 9:21)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라고 언급했는데, 이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라 현실이 그러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사울 훨씬 이전의 사사 시대에 베냐민 지파가 크나큰 죄악을 온 이스라엘 동족 앞에서 저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 베냐민 지파에 속해 있던 기브아 사람들이 한 레위인의 첩을 윤간하여 죽게 만든, 참으로 천인공노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 모두가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서 들고 일어났는데,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오히려 기브아 사람들을 옹호했을 뿐 아니라 한술 더 떠서 그 모든 형제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을 대항해서 전쟁까지 불사하겠다고 나왔습니다.
  자기네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존심이라든지, 혼자 다른 열한 지파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맹랑한 자신감 - 이것 역시 베냐민 지파의 막내 기질을 여실히 보여 준 한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원래 싸움에 능했던 베냐민 지파는 그 전쟁의 초기에는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국에는 다른 열한 지파의 연합군 세력에 밀려 전 지파가 거의 다 멸종될 정도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이 베냐민 지파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는데, 그런 까닭에 사울은 자기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지파 사람’이라고 칭했던 것입니다.
  즉 베냐민 지파는 원래 순서로만 따져도 제일 꼴찌였지만, 그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더욱 푸대접과 멸시를 받는 ‘바닥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첫 왕이 그 베냐민 지파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 가장 고집 세고 말썽 많고 문젯거리였던 지파, 형님 지파들 전체를 상대로 싸움을 걸었고 그 결과 쫄딱 망해서 이제는 명맥만 겨우 남게 되었던 그 베냐민 지파에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첫 왕을 뽑아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울이 놀라고 감격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비단 사울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실로 의외의 이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용두’(龍頭)로 시작되었던 사울 왕의 생애는 ‘사미’(蛇尾)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처럼 큰 은총을 입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처음에는 스스로 겸손을 견지하면서 좋은 출발을 했지만, 나중에는 교만하여 말씀을 거역하면서 끝내 하나님을 떠난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원래 저주 아래 있다가 은혜를 입게 된 베냐민 지파가 또 한 번 저주 아래 영원히 떨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사울 한 사람 때문에 거기서 끝나게 되지 않고 실로 자상하고도 섬세하게 이어집니다.
  아까 읽었던 33절과 34절에 보면 바로 그 사울 집안의 대가 “요나단의 아들”“므립바알”을 통하여 계속 이어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아들들은 요나단을 위시하여 모두가 일찍 죽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사울의 집안사람 중에 살아남은 자를 찾았을 때 오직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만 살아 있었는데, 그 므비보셋이 본문에는 “므립바알”이란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으로 등극한 후에 그 절뚝발이 장애인 므비보셋을 끝내 찾아내어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식탁에서 같이 먹도록 했을 뿐 아니라 사울왕의 모든 재산까지 물려받게 해 주었습니다.
  므비보셋으로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벌어진 셈이었습니다.
  그러니 므비보셋은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삼하 9:8)라고 감격하며 다윗 왕 앞에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을 그토록 미워하고 죽이려 했던 사울왕가에 속한 사람이었으니, 다른 나라의 경우라면 그야말로 ‘삼족’을 이 잡듯이 찾아서 죽이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그런 원수 집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혈족을 오히려 왕과 같은 신분으로 격상시켜 주었으니, 므비보셋으로서는 스스로 뺨을 꼬집어보아도 진짜인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일, 그야말로 ‘무조건적인 은혜’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죽은 개”와 같이 미천하고 약한 존재였던 그 므비보셋을 통해서 사울의 자손이 이어지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짓을 자청한 베냐민 지파였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크게 실패했던 사울의 집안이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자상하신 돌보심 덕택에 그 지파와 그 집안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대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나중에 포로 귀환 후에 가서는, 아까 앞에서 보았던 대로 오히려 이스라엘 국가 재건에 유다 지파와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지파가 되었습니다.
  원래 꼴찌였고 그것을 더욱 악화시키는 죄악을 저지름으로써 마땅히 저주의 밑바닥으로 완전히 떨어져야 했을 지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베냐민 지파의 명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이어져 갔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우리 교회의 앞날도, 오직 이 하나님의 한량없이 크신 은혜 아래 있게 될 때만 참된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 개인은 앞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실족과 부끄러운 실패를 반복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확실히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덟 번 일으켜 주어도 아홉 번 또 넘어지는’ 옛 사람의 연약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중심으로 해 나가는 일 역시 부분적으로는 시행착오도 있을 것입니다.
  지상교회는 아직 ‘완전한 우주적 교회’는 아니며, 목사나 장로도 여전히 성화 과정에 있을 뿐인 까닭에 때로는 오판도 하고 실수도 저지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로 감사한 것은 우리 인생의 앞날이, 우리 교회의 미래가 그런 자신의 과오나 현재의 실패 때문에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다 해도 하나님께서 한 번 불러 주신 택자의 미래는, 그처럼 취약한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훨씬 더 크고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에 이미 요지부동으로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시행착오는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미래는, 여전히 약점이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의 판단이 아니라 자기 몸을 드려 사실 정도로 사랑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꽉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은혜라는 것을 또다시 기대할 염치도 없고 요청할 자격도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며, 놀랍게도 그렇게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고 넘치게 임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서게 된 위치는 얼마나 고맙고도 소망스러운 것입니까?
  십자가 공로를 통하여 베풀어 주시는 무한한 사죄의 은혜는 우리가 저지르는 그 어떤 죄악도 한순간에 소멸시켜 버리고 맙니다.
  우리 인생을 ‘저주의 비탈길’에서 ‘은혜의 품 안’으로 순식간에 바꾸어 버리는 인생 최대의 전환이 여기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한번 부르신 자를 끝까지 견인하게 하시어 결국 완전한 성화 곧 영화의 자리에까지 인도하시는 성령의 은혜는 우리가 저지르는 그 어떤 시행착오보다도 훨씬 더 강력합니다.
  원래는 밑으로 밑으로 저 지옥을 향하여 끝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던 우리가, 이제는 ‘은혜의 사슬’에 꽁꽁 묶여 버린 까닭에 다시는 그 쪽으로 가려야 갈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전에 ‘저주 아래’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거저 베풀어 주시는 이 ‘무조건적이며 주권적인 은혜’를 의지하고 체험함으로써, 절대로 다시는 재역전될 수 없는 이 택자의 복스러운 대열에서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미 역대상 7장에 이 베냐민 지파의 족보가 한번 간략하게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8장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시 한 번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 지파에는 남다른 어떤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냐민 지파, 그 말썽 많고 문제 많고 고집 세고 교만하고 자신만만하던 막내둥이 지파가 오히려 이스라엘 역사상에서는 특별히 돋보이는 지파가 되었습니다.
  자생력만을 믿고 자랑하며 자기 인생에만 집착해서 살던 베냐민 지파가 이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메시아 왕국 건설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그 지파는 막내의 자리를 벗어나 이미 어른이 되었습니다.
  시행착오와 실패를 반복하고 형제 지파들로부터 ‘미운 오리 새끼’와 같았던 베냐민 지파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은혜를 부어 주셨을 때, 그 지파는 겨우 생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재건 역사에 요긴하게 쓰이는 선두 주자 대열에까지 합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팔리는 로또 복권에 ‘인생 역전’이라는 글귀가 씌어 있다고 합니다.
  그 몇 자리 숫자 하나만 맞아 떨어져서 소위 대박이 터지면 자기 인생 팔자를 완전히 거꾸로 뒤바꾸게 될 것이라고 구매자들을 유혹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 복권 당첨 확률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사람이 길 가다가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이 복권 당첨될 확률보다 더 높습니다.
  다시 말해서 로또 가지고 인생 역전해 보겠다는 사람은 그 꿈 이루기 전에 벼락 맞아 죽을 가망성이 훨씬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로또 가지고 인생 역전 해 보겠다는 사람들은 인생 역전은 고사하고 더욱 더 낮은 밑바닥만 기고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인생 역전을 이룰 수 있는, 아주 간단한 길이 있습니다.
  더 이상 밑바닥에 있는 꼴찌가 아니라 높은 곳을 달리는 인생의 선두 주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이란 생각보다는 훨씬 더 쉬운 것입니다.
  그 비결이 바로 이 베냐민 지파의 인생 역전 비결, 하나님의 구속사에 자기 인생을 투자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자리 잡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 하면서도 끝까지 자기 인생만 알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는 교인은 만년 꼴찌 인생을 절대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이 한량없이 넓은 은혜의 바다에 풍덩 뛰어들지 못하고, 자기라는 우물 속에서 제 잘난 줄만 알고 살면 그 인생은 실상 자기 엉덩이를 저주의 자리에 평생 붙여 놓고 사는 것입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대신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대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삶에 투신함으로써, 가장 작은 자가 큰 자가 되며 가장 나중 된 자가 오히려 먼저 되는 이 은총의 선두 대열에 나란히 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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