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3-03“아론과 그들의 형제 레위 사람들” 역대상 6장 1-81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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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3-03
2019′경향의 강단(10)(2019년 3월 3일 / 주일 대예배)
“아론과 그들의 형제 레위 사람들” 역대상 6장 1-81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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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과 그들의 형제 레위 사람들”

역대상 6장 1-81절 / 석기현 담임목사
언젠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어떤 남편이 자기 아내가 여행을 떠난 바람에 혼자 살게 되었던 한 주일의 체험담이 실렸습니다.
  첫 날 그 남편은 아주 신이 나서 청소, 장보기, 요리, 설거지, 개 산책 등을 위한 시간표를 짰는데, 그래도 여가 시간이 많이 남아도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왜 아낙네들은 이렇게 조금만 머리를 쓰면 간단하고도 여유 있는 것을 두고 그처럼 집안일이 바쁘다 힘들다고 난리를 치는지 알 수 없어.’라고 혼자 혀를 끌끌 차면서 머리를 흔듭니다.
  그리고는 그날 저녁에는 식탁에 보를 깔고 분위기 있게 촛불도 켜고 정식으로 스테이크 요리를 차려 놓고, 또 자기 애완용 개에게도 쇠고기 요리에다 디저트까지 곁들여 차려 주고서는 둘이 함께 맛있게 저녁을 먹습니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서 그 남편은 자기가 짜 놓은 일과에 약간의 변동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먹는 시간보다 준비하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식사를 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식생활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저 소시지 하나 굽는 정도로 요리를 간소화합니다.
  그는 아침에 오렌지 주스를 갈아먹고 난 다음에 믹서기를 씻는 것이 매우 귀찮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한 이틀 분 정도를 한꺼번에 갈아 두기로 작정합니다.
  개한테 매 끼니마다 세 접시씩이나 되는 정식을 차려 주는 것도 물론 포기합니다.

  그런 날이 하루하루 더 지나가면 갈수록, 그 남편은 집안일이란 게 더욱 귀찮아집니다.
  주스를 갈아서 마시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했고, 대신에 병 주스를 사다 마셔 보았는데, 그게 장바구니 속에서 얼마나 무거운지를 발견하고는 그것조차 포기합니다.
  소시지를 프라이팬에 굽는 것도 귀찮아져서 그냥 수프를 데울 때 함께 삶아서 그냥 냄비 째 먹기로 했는데, 그 ‘삶은 소시지’라는 것이 아침에는 그런대로 먹을 만하지만 점심때에는 식욕을 뚝 떨어뜨리고 저녁때 가서는 구토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집안 청소하는 것도 물론 주말로 미루어 두었지만 끝내 한 번도 못하게 되고, 이부자리 정돈 역시 귀찮아져서 아침이 되면 몸만 담요에서 살짝 빠져 나오고 저녁에는 또 그 구멍에 쏙 끼어 들어가서 자게 됩니다.

  그러다 한 주일 다 갈 때쯤에는, 삼세 끼를 다 아예 데울 필요조차 없는 인스턴트식품으로 때우게 되었고, 개에게는 그저 애완동물 가게에서 파는 맛없는 드라이 사료만 밥통에 부어 주게 되니까 그 녀석도 불만에 가득 차서 낑낑거리게 됩니다.
  집안은 물론 구석구석이 엉망진창이 되고, 그 남편은 수염까지 덥수룩하게 자라면서 신경 또한 아주 날카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내 돌아올 날이 하루 남게 되자 그 남편은 자기 생존(?)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집 앞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자기 개와 함께 이것저것 마음껏 시켜서 배터지게 먹고는 둘 다 호텔을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사람 살만한 아늑한 곳에 오게 되었다고 행복감을 만끽하면서 잠자리에 들게 됩니다.
  아내가 집에 있을 때에는 매일 같은 반찬만 해 주고 집 청소도 제대로 안 하는 것처럼만 남편의 눈에 보이지만, 그 아내가 없어지고 나니까, 그 아내가 차려 주는 밥상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인지, 그 아내가 정돈해 주는 집안이 얼마나 자기에게 편안한 생활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인지를 톡톡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자기 주변에서, 특히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통해 항상 누리는 것이 얼마나 좋고 행복한 것인 줄을, 그것을 잃어버리게 될 때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나라를 잃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여러 면에 걸쳐 바로 그와 똑같은 심정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조국이 있을 때 매일 누리고 살던 일상들이 그 얼마나 좋고 행복한 것이었는지를 그제야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역대기의 서두에 나오는 옛 이스라엘 선조의 족보는 바로 그와 같은 심정이 배경에 깔려 있는 가운데 기록된 말씀입니다.
  역대상하를 기록한 선지자가 누구인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 말씀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던 유다 백성들이 해방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오게 될 즈음에 쓰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물론 옛 조국을 다시 건설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옛날의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 중심의 역사가 펼쳐지던 나라였는지를 이 역대기를 통해 상기하려 했습니다.

  그 중에도 특별히 귀중한 사실은 자기네 조국이 온 열국 중에서 거룩하게 구별 받은 제사장 나라였다는 점이었습니다.
  꽤 긴 장으로 기록된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레위 지파의 족보와 그들이 성전을 중심으로 행하던 사역을 이처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유다 백성들이 과거에 누리고 있었던 그 좋은 것, 그러나 좋은 줄을 잘 모르고 지내왔던 것, 그러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중에야 깨닫고 다시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사모해 왔던 것, 곧 그들이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통해 항상 누리고 있던 영적 행복을 되새기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오늘날 역시 신자가 ‘아론의 자손들’과 ‘형제 레위 사람들’을 통해 항상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감사를 잊고 넘어가기 쉬운 은혜와 복이 과연 무엇인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강단을 지키는 설교자들을 통해 받고 있는 은혜를 진정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1절부터 3절에 “1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2그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3아므람의 자녀는 아론과 모세와 미리암이요 아론의 자녀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며”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레위”로부터 시작해서 “아론의 자녀”들까지의 족보가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요점은 레위 지파의 첫 선조인 “레위”부터 시작하여 나중에 첫 대제사장이 되었던 “아론”과 그 직분을 승계했던 “엘르아살”까지의 족보를 연결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대제사장직은 레위 지파의 사람들이 수행했던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하 4절부터 14절까지에는 그 엘르아살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 15절에 “15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의 손으로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을 옮기실 때에 여호사닥도 가니라”고 한 대로, 유다가 망하게 될 때 마지막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사닥”까지 그 족보가 이어집니다.
  성경의 다른 기록을 참고해서 살펴보면,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의롭고 충성스러운 제사장들도 있었지만 반면에 악하고 불충한 제사장들 또한 섞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50절 이하 53절에 보면 또 하나의 제사장 족보가 나타납니다.
  바로 “50아론의 자손들은 이러하니라 그의 아들은 엘르아살이요 그의 아들은 비느하스요 그의 아들은 아비수아요 51그의 아들은 북기요 그의 아들은 웃시요 그의 아들은 스라히야요 52그의 아들은 므라욧이요 그의 아들은 아마랴요 그의 아들은 아히둡이요 53그의 아들은 사독이요 그의 아들은 아히마아스이더라”고 기록된 내용입니다.

  여기 기록된 제사장의 이름들은 앞에 나왔던 3절 이하에 기록된 제사장의 족보에 이미 나왔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3절에서 8절까지에 기록된 이름들, 즉 “아론”으로부터 다윗 시대의 제사장이었던 “아히마아스”까지 열두 명의 제사장들만 특별히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 역대상을 기록한 저자는 똑같은 이름들을 두 번 반복했겠습니까?

  그것은 그 많은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그 직분을 제대로 수행했던 모범적인 시대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사장 계급에서 많은 타락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분열 왕국 이후와는 구별되는 시절, 즉 첫 대제사장 아론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영적 전성기였던 다윗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신앙의 순수성이 보존되었던 시절의 제사장들만 여기서 따로 언급한 것입니다.
  아까 3절에서는 아론의 아들로서 제사장이 되었던 네 명의 이름들을 다 기록했지만, 여기서는 그 중에서도 제사장의 정통성을 이어갔던 “엘르아살” 한 사람만 기록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제사장이라고 다 같은 제사장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일부러 부분적으로, 그렇게 제사장다운 제사장들을 언급할 때마다 절로 상기되는 가장 인상 깊은 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바로 49절에 “아론과 그의 자손들은 번제단과 향단 위에 분향하며 제사를 드리며 지성소의 모든 일을 하여 하나님의 종 모세의 모든 명령대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속죄하니”라고 묘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제사장들이 성소와 성전에서 백성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던 장면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주 익숙한, 너무나 일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지고 제사장들이 집례하던 제사가 중단된 이후 이제 와서 돌이켜 볼 때, 그들이 제사장들을 통하여 누렸던 그 흔하게만 보였던 예배생활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인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속죄의 은총을 누리고 축복을 받게 된 사실은 실로 유다 백성이 누렸던 최고의 은혜였으며, 역대상의 저자는 바로 그 점을 이 ‘특별한 제사장들의 족보’를 통해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난 45년 동안 이 경향교회의 각종 예배시간을 통해 한 주일도 빠짐없이 누린 은혜가 그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세워 주신 주의 사자들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을 십자가 대속의 보혈로 충만하게 적셔 주셨던 그 은혜의 시간들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 말씀을 생활에서 체험함으로써 얻게 된 물질의 열매로써 주일마다 하나님께 온전히 상달되는 거룩한 제물을 바칠 수 있다는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복인지를 깨닫고 계십니까?
  나 같은 죄인이 이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와 바로 그 말씀을 통해서 살아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었는지를 뜨겁게 감사하고 계십니까?

  아무 ‘제사장’이나 흔히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일주일 내내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하고 스스로 먼저 체험하는 가운데 설교를 준비하는 목사님, 강도사님들이 이 경향의 강단에 주일 낮, 주일 밤, 수요일 밤마다 세워진 까닭에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복입니다.
  아무 교회에서나 이처럼 ‘신령과 진정’이 충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배의 한 시간을 온전하고 경건하게 인도하기 위하여 참으로 목숨을 내 건 사람처럼 두려운 마음과 신실한 자세로 강단에 올라가는 ‘말씀의 사자’들이 있었던 까닭에 여러분이 이 제단에 모일 때마다 나누고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제게 개인적으로 선배이시고 타 교단의 총회장이신 한 목사님께서 작년 어느 수요일 우리 교회의 밤예배 시간에 사전 연락도 없이 참석하셨습니다.
  다음날 전화를 해 주셨을 때야 저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 그 목사님께서 “어제 경향교회 부목사님의 설교가 정말 은혜로웠다.”고 크게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면서도 속으로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우리 교회의 모든 부목사님들의 평균 실력인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물론 저로서는 정말 기쁘고 뿌듯한 일이었습니다.
  평소에 저는 우리 경향교회의 강단이 주일밤예배나 수요일밤예배에서도 웬만한 다른 교회보다 훨씬 더 은혜롭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결코 저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부터도 우리 교회의 모든 예배시간에 선포되는 설교 말씀을 결코 범상하게 듣지 않습니다.
  아무리 담임목사라 해도 제가 회중석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시간은 저 역시 하나님께서 그 강단에 세워 주신 사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역시 당연히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매주일 듣는 설교라고 가볍게 여기면 절대로 안 됩니다.
  매일 삼시 세끼의 밥상을 받게 될 때마다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당신 앞에 나아오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그 사자를 통해 어김없이 베풀어 주시는 ‘말씀의 양식’을 진정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받아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의 강단을 통하여 신실한 설교자들이 우리에게 바른 말씀을 선포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 얼마나 큰 복인지를 깨닫고 더욱 주일뿐 아니라 주중의 예배까지 사모하며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교회를 섬기는 봉사자들을 통해 나누고 있는 복을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16절의 말씀에 “16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이며”라고 기록했습니다.

  이하 30절까지에는 레위의 자손으로서 제사장이 아닌 다른 직무에 종사한 사람들의 계보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제사를 제외한 기타 성전의 일을 맡았던 자들로서, 레위의 세 아들, 즉 “게르손”“그핫”“므라리”의 가계로 각각 구분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레위 지파 중에서 게르손 자손은 ‘성막의 기구’들을 관리했고, 그핫 자손은 ‘성막의 줄과 천’을 관리했으며, 므라리 자손은 ‘성막의 기둥과 널’ 등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31절 이하 33절에 “31언약궤가 평안을 얻었을 때에 다윗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맡긴 자들은 아래와 같았더라 32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성전을 세울 때까지 그들이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계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 33직무를 행하는 자와 그의 아들들은 이러하니 그핫의 자손 중에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 그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사무엘의 아들이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하 48절까지의 내용은 그 레위 지파 중에 나중에 다윗 시대에 와서 성전에서 찬양하는 직분을 맡게 된 사람들의 족보입니다.
  즉 레위인이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의 종목이 더욱 확대되고 세분화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곧 “찬송하는 직분” 즉 찬양대였습니다.
  그것은 “그 계열대로 직무를 행하는” 즉 체계적인 윤번 조직을 갖춘 것이었으며, “찬송하는 자” 즉 임명된 찬양대 대장이 통솔하는 절도 있는 조직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첫 찬양대 대장이 되었던 “헤만”을 특별히 언급하면서, 그의 족보를 위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레위”, 그리고 “이스라엘” 즉 야곱에 이른다고 38절에 기록했습니다.
  39절부터 43절에는 역시 같은 식으로 게르손의 자손 중에서 성가대 직무를 맡게 된 “아삽”이란 레위인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으며, 계속 44절에서 47절까지에는 “에단”이라는 자가 역시 성가대 직무를 맡았고 그의 족보는 위로 돌이켜 올라갈 때 “므라리”와 연결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상의 세 명은 각각 시편 50편, 88편, 89편을 지은 사람으로 성경에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이들이 그 맡은 찬양의 직분을 얼마나 충성스럽고도 영감 넘치게 감당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48절에는 “48그들의 형제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 장막의 모든 일을 맡았더라”고 기록함으로써, 나머지 레위인들은 원래부터 맡겨진 성소의 다른 일들에 그대로 종사했다고 밝혔습니다.

  포로 귀환 후 이제 조국을 새로이 건설하고자 하는 유다 백성들은 제사장 제도는 물론이거니와 그들을 도와 성전의 다른 일들을 맡았던 레위인들 역시 다시 조직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옛날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성소와 성전을 항상 빈틈없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정돈해 놓고 백성을 맞이했던 레위인의 모습, 예배 시간마다 은혜로운 찬양으로 감동을 끼쳤던 레위인의 모습이 그 바벨론 포로시기를 지나는 동안 내내 그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역대상의 저자는 바로 그 은혜로웠던 시기, 그 아름다운 광경이 다시 자기 조국에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본문의 족보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경향교회 안에도 우리 교회를 이처럼 은혜로운 제단으로 만들기 위하여 교역자들 외에도 많은 ‘레위인’들의 정성과 희생이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주일 아침에 남보다 두 시간 전에 나와서 찬양을 준비하는 찬양대원들 덕분에, 우리는 이처럼 영감 넘치는 아름다운 찬양의 은혜를 만끽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일 밤 예배 이후 그 제일 피곤한 시간에도 또 모여서 교안 준비를 하고 주중에도 계속 기도하면서 주일의 성경공부 시간을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는 주일학교 교사들 덕분에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이 ‘경건한 나실인’으로 잘 자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일마다 무심코 앉는 의자나 걸어 다니는 복도나 차를 대어 놓는 주차장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준비해 두기 위하여 우리 교회의 미화직원들이 주중에 얼마나 수고를 하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레위인’들이 ‘계열을 따라’ 이 경향의 ‘성막과 기구’를 잘 관리하여 성도들을 맞이하기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러나 오직 감사함으로 늘 봉사하고 계시는 까닭에, 저와 여러분은 이 아름다운 아버지의 집에서 거룩하고도 복스러운 안식일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경향교회에 다니다가 이사나 유학이나 해외근무 등의 사정으로 인해 다른 교회에 출석하게 된 성도들로부터 ‘경향교회의 예배가 그립다.’는 말을 정말 자주 듣습니다.
  심지어 선교지 신학교 강의 때문에 딱 한 주일을 빠지게 된 교수님 중에도“이번 주일에 경향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어서 정말 아쉽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석기현 목사님의 설교를 듣지 못하게 되어서 아쉽습니다.
 ’라는 말을 은근히 기대했지만(?), 경향교회 성도들은 그처럼 우리 교회의 예배순서 전체를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실 그런 심정 역시 똑같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부터도 비단 제가 강단에 서서 설교할 때만 아니라, 다른 부목사님이나 강도사님께서 인도하시는 예배나 기도회에 회중으로 함께 앉아 있는 자리 역시 너무나 은혜롭습니다.
  제가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우리 경향교회 성도들 또한 모두 다 그렇게 느끼고 계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왜 이 경향교회의 예배와 모든 모임들이 그토록 목사와 교인들에게 공히 은혜로운 것이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교회에 속한 모든 교역자들과 직분자들이 함께 충성을 다 해 동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차려 주는 밥만 먹는 것보다는, 때때로 자기도 식사 준비하는 것을 돕고 한 가지 반찬이라도 같이 만들어 보면서 먹으면 훨씬 더 맛있는 음식이 될 뿐 아니라 더욱 행복이 넘치는 식탁이 되지 않습니까?
  예배 역시 남이 다 준비해 놓은 것을 받아먹기만 하는 것보다는, 여러분 자신이 한 가지라도 예배를 위하여 준비하는 것을 돕고 함께 봉사하면서 참석하게 되면, 전혀 차원이 다른, 훨씬 더 넘치는 기쁨과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준비하는 목사뿐 아니라, 그 외에도 ‘하나님의 집 장막의 모든 일’을 맡은 직분자들이 이 제단을 이처럼 정성껏 섬기고 이 성소 구석구석을 자신의 땀과 눈물과 기도와 사랑으로 채우는 가운데 우리는 이처럼 은혜로운 교회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로목사님의 멋진 표현 그대로, ‘경향교회는 자기가 서서 섬길 자리가 없는 교인은 자기가 앉을 자리도 없는 교회’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교회를 중심으로 오늘도 성전의 직무를 기쁨과 감사로 섬기고 있는 이런 봉사자들의 희생으로 인하여 우리가 모일 때마다 이처럼 큰 은혜를 나누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를 위해 더욱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슈호프는 구소련 시절에 시베리아의 강제노동 수용소에 살면서 한 끼에 200그램씩 지급되는 검은 빵을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옛날 배부르게 먹던 시절을 되새기면서 후회합니다.
  번철에 구운 감자를 몇 개 씩, 야채를 듬뿍 썰어 넣은 죽을 몇 그릇씩, 커다란 고깃덩어리도 닥치는 대로 삼키고, 우유는 배가 터지도록 마셨던 그 시절을 상기하면서, 그는 음식을 그렇게 먹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조각의 검은 빵이라도 그 씹는 한 순간 한 순간을 음미하면서 먹으면 그것이 입 안에서 얼마나 향기로운지를 맛보면서, 그는 ‘옛날 풍성한 음식을 먹을 때에도 그 맛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먹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진심으로 후회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사람은 자기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그것을 누리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 화목한 가정, 내가 매일 놀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직장, 내게 매일 제공되는 식탁과 잠자리, 내가 자유로운 삶을 마음껏 영위해 갈 수 있는 조국 - 이 모든 것들을 순간순간 음미하며 살아야만 정말 그 행복감을 100퍼센트 만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지금 누리는 교회생활, 예배생활은 과연 어떻게, 얼마나 음미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예배는 참석하기 귀찮은 것을 억지로 나와 주는 것이고, 설교는 매주일 ‘그 소리가 그 소리’라고 흘려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의 직분은 그저 맡았으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고, 헌금생활도 다른 교인의 눈을 의식하면서 그저 장로, 집사, 권사로서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지금 쉽게 누리고 있으니 별 것 아닌 것 같고 오히려 귀찮게까지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이것들을 자유롭게 누리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정말 후회스러울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북한이나, 이슬람 국가나, 제3세계 같은 극빈국에 살게 된다면, 우리는 지금 이 대한민국에서 누리고 있는 신앙생활, 자유롭게 누리고 있을 때에는 오히려 꽤나 어려운 일인 것처럼만 여겨졌던 이 신앙생활이 사실은 얼마나 크고도 특권적인 복이었는지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로운 예배시간의 말씀을, 그 복스러운 교회중심 생활의 맛을 구석구석 음미하지 못했던 나날들이 정말 바보 같았었다고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아론과 그의 자손들, 그들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야말로 복덩어리입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예배시간, 지금 나에게 말씀으로 지도해 주는 교역자, 지금 내게 주어진 직분 - 이 모든 것들이 정말 귀한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생활의 그 무엇도 결코 어떤 부담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혹은 그것을 행함으로써 다른 진짜 복을 받게 되는 것도 아니라, 우리가 이 경향교회를 통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최고의 복인 줄을 꼭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마다 성회로 모이는 것, 강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교우들과 함께 선한 일을 위하여 섬기는 것 - 이런 것을 누리고 있는 순간순간이 실로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요 복인 줄을 기억하고 늘 감사함으로써, 이 경향교회를 중심으로 진정 거룩한 백성이 되며 함께 제사장의 나라를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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