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2-10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II)” 마태복음 5장 1-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More videos
239
Views
   

WMA음성받기MP3음성받기동영상다운받기동영상다운방법

주일낮예배 2019-02-10
2019′경향의 강단(7)(2019년 2월 10일 / 주일 대예배)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II)” 마태복음 5장 1-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경향교회 카톡친구
http://pf.kakao.com/_HxdvSd

(239)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II)”

마태복음 5장 1-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사람 잘 만나는 것이 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부모님을 만나게 된 것부터 시작해서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된 것이나 혹은 좋은 친구나 좋은 동료를 만나게 된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복인지를 인생을 살아갈수록 새삼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만난 것이 그토록 행복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도 딱 들어맞는 원리입니다.
  즉 ‘사람 잘 만나는 복’을 누리고 싶으면 본인이 먼저 다른 사람에게 그런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른 순서인 것입니다.

  이 ‘팔복’의 나머지 네 가지 복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기독신자가 과연 어떤 대인관계를 발휘할 때 본인에게도 복이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다섯째 복은 ‘남에게 자비’를 베풀어 줌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7절에 기록하기를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긍휼”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 원어로는 ‘자비’(mercy)에 해당되는 말인데,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힘들고 괴로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해 느끼는 동정심’인데,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 비유의 결론에 가서 예수님께서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예수님을 찾아왔던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했고 예수님께서는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0:36-37). 그러니 물론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긍휼”에도 그처럼 자기 이웃 가운데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려는 마음도 포함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자비’의 또 한 가지 의미는 ‘남의 죄를 용서해 주는 마음’입니다.
  본문의 문맥에서는 이 두 번째 의미가 좀 더 강한데, 그 이유는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복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처럼 긍휼을 베풀어 주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최고의 긍휼은 곧 ‘죄인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해 주시는 자비’인 것입니다.

  옛날 영화에 보면 반역죄를 저지른 사람은 매우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왕에게 그저 ‘Mercy!’(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딱 한마디만 외치면 그나마 쉽게 목숨을 끊어 주었습니다.
  그런 경우의 ‘자비’란 전적으로 왕이 베풀어 주는 것이지 지금 사형언도를 받고 죽게 된 죄인 쪽에서 무슨 ‘공로’가 있거나 ‘조건’을 채웠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입은 ‘긍휼’이 바로 그처럼 100퍼센트 다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자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게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용서해 주는 것이 어떤 조건이 되어서 하나님께로부터도 자비를 입게 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단지 진정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라면 필연적으로 남에게 긍휼을 베풀게 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라고 기도하는 것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는 것’이 전제조건이 되어서 우리도 용서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닌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이미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 죄 용서를 받은 자라면 당연히 타인이 자기에게 지은 죄에 대해서도 자비를 베풀게 되며, 그런 신행일치를 나타내는 참된 신자는 최후의 심판대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최고의 자비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능하면 타인의 불행으로부터 멀어지려고만 합니다.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통이나 재앙과 자기 사이에 어찌하든지 차단벽을 쳐 놓고서 자신의 행복에 방해를 받지 않으려고만 애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 21:13)고 경고합니다.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지옥영벌이라는 최악의 저주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도 이유도 없이 그저 당신의 자비하심을 발동시키셔서 나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깨닫고 있는 신자라면 결코 그처럼 ‘무심한 방관자’가 될 수 없는 법입니다.

  특히 우리는 ‘자기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하여 ‘긍휼’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고 주기도문은 한 주일에도 몇 번씩 외고 있지만, 실제로 그런 자비를 베풀어 준 적은 과연 몇 번이나 되겠습니까?
  ‘용서란 무기력하고 너무 순해 빠진 것’이며 ‘복수만이 달콤한 것’이라고 여기는 불신자들의 사고방식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 18편 25절과 26절은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라고 이 ‘다섯 번째 복’을 누리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극단적으로 대조시켜 주고 있습니다.
  ‘남을 긍휼이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긍휼을 입었음’을 보여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임을 깨닫고, 특히 ‘내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용서함으로써 주님 재림하실 때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께로부터도 ‘긍휼의 용서’를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여섯째 복은 ‘정직한 마음자세’를 발휘함으로써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8절에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청결한”이란 쉽게 말해서 ‘깨끗한’(clean)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희생제물’과 관련해서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나중에 선지서에서는 ‘도덕적 정결’ 및 ‘영적 성결’을 강조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어떤 거짓이나 가식이 없이 항상 정직하고 솔직함’을 가리킵니다.

  이 ‘청결한 마음’과 정반대되는 대표적인 마음이 곧 ‘위선’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눅 11:39),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도다”(눅 11:44)라고 책망하신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을 통상 동굴 속에 안치했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봉분 없이 그냥 ‘평토장’을 하고 그 위에 ‘회칠’을 함으로써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회칠한 것이 지워지면 사람들은 그 곳이 무덤인 줄 모르고 그냥 ‘밟게’ 되는데, 그것은 ‘의식적으로 부정해지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겉으로만 깨끗하게 보이는 외식’ 즉 종교적 위선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는 참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신자는 ‘잔과 그릇의 속이 깨끗해야’ 합니다.
  즉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 앞에서도 늘 정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5편 1절과 2절에서도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주의 성산에 사는 자”“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오로지 거짓과 외식의 막으로 덮여 있는 사람은 ‘주의 장막’과 ‘주의 성산’에 거주하는 자, 즉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교제’를 결코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일단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깨끗이 씻음’을 받은 신자는 바로 그 ‘정결함’과 ‘성결함’을 계속 유지하는 ‘성화의 진보’를 나타내어야만 결국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영화’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스포츠에서 심판의 눈을 속이는 행위를 두고 흔히 ‘할리우드 액션’이라고 합니다.
  ‘외식’과 ‘위선’이야말로 순전히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신의 의로움이나 선행을 과장하는 영적 할리우드 액션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런 ‘바리새인’들의 ‘겉만 깨끗한 잔과 대접’, ‘평토장한 무덤’들이 이 지상교회 안에 오히려 훨씬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속에 있는 온갖 부정한 생각과 악한 행위를 그처럼 가득 덧칠한 ‘위선의 회칠’로 감추고 있는 교인이 진정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나누고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유명한 ‘던킨 도너츠’가 세계적인 프랜차이즈가 될 수 있었던 비결 중에 하나가 각 지점의 도너츠 제조실에 유리창을 설치하여 그 전 과정을 직접 볼 수 있게 해 준 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단 ‘던킨 도너츠’뿐 아니라, 일반 식당 중에서도 주방 전체를 아예 완전 개방해 놓고서 쉐프들이 요리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공개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고객들은 절로 그 음식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도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감춘 것이 없는 마음’, 사람들의 눈에도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것같이 투명한 인격’을 지켜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인정하시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요 1:47). 왜냐하면 시편 24편 3절과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그처럼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만이 결국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종교적 외식’이 판을 치는 현실 중에서도 진실로 ‘겉과 속이 같은 청결한 마음자세’를 지키고 발휘함으로써 그런 ‘성화’의 과정을 통해 진정 ‘거룩하신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끝까지 나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일곱째 복은 ‘화평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의 양자’로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9절 말씀에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기록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란 영어로 말하자면 ‘peacemaker’입니다.
  예수님께서 ‘peace-keeper’라는 말 대신에 여기서 ‘peacemaker’라는 말을 쓰신 의미는 분명합니다.
  즉 이 ‘화평하게 하는 자’란 ‘적대관계에 있는 두 사람을 서로 화목하게 만들어 주는 제3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까 ‘긍휼히 여기는 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화평하게 하는 자’ 역시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전자는 도덕적 의미로서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나 불화를 중재하여 해결해 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시편 34편 14절의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는 말씀에서의 ‘화평’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그보다 더욱 중요하게 강조되는 것은 역시 영적 의미인데, 그것은 곧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화평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간단히 말하자면 ‘복음 전도’입니다.

  왜냐하면 이 팔복의 말씀을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이 점에 대해 명백히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마태복음 10장 34절부터 36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인간사회의 화평’을 파괴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불화하게 만드시겠다는 뜻으로 하신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당신께서 선포하시는 ‘화평의 복음’이 ‘값싼 화평’과 혼동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화평’이란 과연 어떤 화평입니까?
  이것은 신약성경 곳곳에서 아주 뚜렷하게 증언하고 있는 사실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영적 적대관계를 십자가 대속을 통해 화목시켜 주는 화평’입니다.
  바로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 16절 상반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선언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골로새서 1장 20절에도 사도 바울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하면서, 곧 이어서 23절 하반절에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화평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일컬음을 받을 것”(will be called)이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합니다.
  중생 받은 신자는 이미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양자’의 자격을 얻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진정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양자다운 양자’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은 오직 그 하나님께서 내게 먼저 선포해 주신 이 ‘화평의 복음’을 다른 사람 앞에서도 증언할 때에 따라오게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길입니다.
  즉 ‘복음 전파’야말로 죄인들을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그들과 화목한 관계로 회복되고자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명백히 나타내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화평의 복음’과 ‘달래기만 하는 유화책’을 명백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신앙과 진리까지 양보하면서 영적 대적들과 ‘거짓 화평’의 손을 맞잡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은 복음을 싸구려로 전락시킬 뿐 아니라 교회를 원수에게 넘겨주는 배신행위일 뿐입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5)는 말씀이 기독신자가 그런 ‘값싼 화평’에 결코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을 엄중히 경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참된 신자는 그런 ‘적과의 동침’이 아니라 진정 ‘선으로 악을 이기는 peacemaker’가 되어야 합니다.
  그저 경쟁과 미움과 싸움만 팽배하고 있는 인간사회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화평은 먼저 그들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해야만 절로 따라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세계 평화’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죄인을 하나님과 화평하게 함’으로써 이 살벌한 세상과 냉정한 인간관계에 진정한 화목과 평화가 깃들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하) ‘먼 데 있는 자들과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전해 주신 평안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함으로써 진정 ‘하나님 아버지의 영적 인자’를 그대로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양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여덟째 복은 ‘신앙으로 인한 박해’를 당함으로써 ‘천당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10절 이하 12절에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앞서 나온 일곱 가지 복들도 세속적인 복들과는 아주 다르지만,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이 여덟 번째 복은 실로 기상천외한 복입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가장 ‘비현실적인 복’이 아니겠습니까?
  전혀 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복, 복스러운 상태와 그야말로 정반대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여덟 번째 복에 대해서만은 앞의 경우와 달리 훨씬 더 길게 부연설명을 해 주시는 것만 보아도 이것이 사실은 가장 큰 복, 진짜 복 중의 복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박해”가 무엇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의를 위하여”라는 조건부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도덕적 의’나 ‘사회적 정의’가 아니라 오직 ‘영적 의’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지는 11절에 예수님께서 그 “의를 위하여”라는 말씀의 의미를 “나로 말미암아”라고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오직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지사충성의 삶 때문에 불신세상으로부터 당하는 온갖 핍박이 여기서 말씀하는 ‘의를 위하여 받는 박해’인 것입니다.

  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바로 앞에 나왔던 ‘화평하게 하는 자’와 비교해 볼 때 그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기독신자가 노력한다 해도 현실은 완전히 평화로운 사회나 완벽하게 화평한 인간관계란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선과 악의 투쟁, 진리와 거짓 사이의 적대관계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는 화평을 원하더라도 사탄은 오히려 ‘자기 때가 가까운 줄을 잘 아는’ 까닭에 최후의 순간까지 더욱 발악하면서 ‘여자와 그 남은 자’를 집어삼키려고 싸움을 걸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참된 신자라면 반드시 ‘박해’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하는” 일반적인 핍박으로부터 시작하여, 최악의 경우에는 ‘순교를 당하는 것’도 물론 포함됩니다.
  이처럼 크든지 작든지 간에 온갖 박해를 당하는 것은 “선지자들”부터 시작해서 ‘사도들’ 및 오늘날의 모든 기독신자들에게 이르기까지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라고 3인칭으로 시작하셨다가, 11절에서 갑자기 “너희”라고 2인칭으로 바꾸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부분에 와서 이처럼 스스로 감정이 고조되고 계십니까?
  왜냐하면 ‘신자의 박해’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그 분의 제자 된 자들에게 있어서는 문자 그대로 ‘너와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 중에서 가장 진하고 뜨거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 따르는 복도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복과 똑같은 것인데, 그 이유는 ‘가난한 심령’을 통해 ‘신앙’을 얻게 된 신자는 ‘박해까지 기꺼이 당하는’ ‘신행일치’를 나타냄으로써 자신의 신앙이 진실함을 증명할 수 있고 그 결과 구원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박해’를 당하는 것이야말로 나 자신이 정말 천당구원을 받을 수 있는 진짜 신자임을 가장 명백하게 확인해 주는 까닭에,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할” 최고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박해’는 불신자와 신자라는 이 화해될 수 없는 두 세계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어디까지나 ‘화평케 하는 자’인 까닭에 결코 불신자를 박해하지 않지만, 마귀의 사주를 받은 불신사회는 교회와 성도를 향한 적개심을 조금도 완화시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자는 이 인류역사 속에서 결코 ‘대세’나 ‘다수’가 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가 박해를 당하는 소수였을 때에는 바른 신앙을 지켰지만,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승인되어 온갖 부와 권세를 등에 업게 되면서부터 급속도로 타락하여 결국 천주교 이단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은 참된 교회와 성도에 대해 결코 호의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처럼 수적으로 압도적인 불신가족, 불신상사, 불신권력으로부터 온갖 미움과 욕과 해를 당하게 될 때 그야말로 ‘순교하는 각오’로써 그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것만이 박해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인 동시에 박해를 복으로 바꾸어 버리는 놀라운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는 순간 그의 눈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행 7:55)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이 ‘나로 말미암아 박해를 당하는’ 그 진하고 뜨거운 순간에 예수님께서도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당하는 것’은 결코 특별한 선지자나 사도만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너희’라고 칭하시는 모든 신자에게 다 해당되는 사실인 것을 명심하면서, 오직 ‘평화시대의 순교자’에게만 완성되는 천당구원의 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주일 설교의 결론에서 말씀드렸던 원로목사님의 명언을 조금 더 자세하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 동안 세 가지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첫째는 ‘대신관계’, 둘째는 ‘대인관계’, 셋째는 ‘대물관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부 기독교인들까지도 이 세 관계의 우선순위를 완전히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즉 ‘대물관계’에 자기 인생의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는 가운데, 그 물질적인 행복에만 최우선을 둡니다.
  순전히 그 욕심에만 사로잡혀서 살고 있으니 대인관계에서도 자연히 경쟁심과 다툼과 적대심만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대신관계조차 ‘하나님을 자기의 심부름꾼으로 삼으려는’ 주객전도의 신성모독으로 일관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복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정립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팔복의 처음 네 가지 복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은 먼저 ‘겸손한 심령’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애통하는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죄 사함을 얻어야 하며, 그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을 사람 앞에서 ‘온유함’으로 발휘하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을 받은 은혜’를 따라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팔복의 나머지 네 가지 복들은 그처럼 ‘대신관계’가 바로 되어 있는 사람이 이제 ‘대인관계’에서 나타내야 할 신행일치의 삶입니다.
  진정한 신자라면 항상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정직한 마음으로 대하고’, ‘화평의 복음을 전하며’, 비록 다른 사람으로부터 ‘박해를 당할지라도 선으로써 악을 이겨 낼’ 때에 진정 ‘복스러운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유치한 복, ‘이방인들도 구하는 복’만 혈안이 되어 찾는 교인들과 또한 그런 ‘값싼 복’들로써 교인들을 미혹하는 ‘삯꾼’과 ‘이단’들이 갈수록 더 팽배해지는 이 말세에, 우리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약속해 주시는 이 진짜 복을 금세와 내세에서 풍성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