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2-03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I) 마태복음 5장 1-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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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2-03
2019′경향의 강단(6)(2019년 2월 3일 / 주일 대예배)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I) 마태복음 5장 1-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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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I)

마태복음 5장 1-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찬송가 1장은“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라고 시작되며, 우리 교회의 주일예배 시간에 개회찬송으로 가끔 부르는 28장도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라고 시작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별명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이 ‘복의 근원’인 것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진정 복을 받고 싶으면 이처럼 ‘복의 근원자’가 되신 하나님과의 관계부터가 제대로 정립되어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는 말씀에는 소위 산상보훈이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유명한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5장 1절에 보면 “1a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예수님께서 큰 무리가 당신을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산으로 피해 가셨다는 뉘앙스가 짙습니다.
  왜냐하면 1절 하반절에 곧 이어지는 말씀이 “1b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했는데, 마태복음에는 이처럼 ‘무리’와 ‘제자’를 의도적으로 구분하는 장면이 다른 곳에서도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서 “앉으시니”라는 말씀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주로 학생들이 자리에 앉고 선생이나 교수가 단 위에 서서 가르치지만, 당시의 관례는 그와 정반대로 스승은 자리에 앉아서 가르쳤고 제자들은 서서 배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기의 “제자들”을 꼭 ‘열두 제자’라고 국한시킬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 산상보훈이 ‘일반 대중에게 한 설교’라기보다는 ‘제자 교육을 위한 특별한 교훈’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 산상보훈의 첫 번째 내용이 소위 ‘팔복(八福)’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인데, 영어로는 무슨 ‘The eight blessings’가 아니라 ‘Beatitudes’입니다.
  이것은 ‘행복’ 혹은 ‘복을 받음’이라는 뜻의 라틴어 ‘beatus’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supreme blessedness’ 즉 ‘최고의 복’을 뜻하며 그래서 ‘팔복’ 대신에 ‘지복(至福)’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영어 성경 중에는 본문에 여덟 번 반복되는 “복이 있나니”라는 단어를 ‘blessed’라고 하지 않고 ‘happy’라고 번역한 것도 있습니다.
  전자는 보다 ‘실제적인 복’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마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상태’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는데, 본문의 내용을 보면 물론 후자도 일부 포함되기는 하지만 전자가 더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예수님께서는 이 ‘여덟 가지의 복’ 역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될 때 자동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저는 이 예수님의 ‘팔복’의 말씀을 통해 과연 ‘주님의 제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그에 따라오는 구체적인 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오늘 주일에는 그 중 처음 네 가지 복들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첫째 복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으로써 ‘천당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절에 기록하기를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팔복’의 말씀이 결코 세속적인 복에 관한 내용이 아닌 것은 이 첫 번째 복에서부터 명백히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분명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선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주시는 복은 모든 사람을 ‘물질적 가난’에서 해방시켜서 ‘평등한 부’를 누리게 해 준다는 따위의 정치적 공약과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poor in spirit) 상태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자세’를 뜻합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자신은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지극히 무지하고 무력한 피조물에 불과함을 인정하면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찾게 되는 심령입니다.

  세상 사회에서도 무엇이 없는 사람은 그것이 있는 사람 앞에서 절로 머리가 숙여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가 되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가 없으며 오직 그 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높이 받들게 됩니다.
  시편 34편 6절에 보면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라고 했는데, 여기서 ‘곤고한 자’라고 번역된 말이 영어로는 바로 ‘the poor man’(가난한 자)입니다.
  그리고 이 시편의 문맥에서도 이것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받을 길이 전무한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전적으로 그 분만을 경외하게 된 자가 받게 되는 복이 곧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천당에서 영생하는 구원’이야말로 복 중에 최고의 복입니다.
  하지만 그 ‘천국’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계시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려면 당연히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복을 오직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복 받는 인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 파산상태’에 있음을 자각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에 다니고 예배에 참석한다고 자동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3장 14절 이하에 나오는 라오디게아교회의 교인들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했지만 실제로는 자기네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치명적인 ‘영적 자뻑’에 빠져 있다가 주님께로부터 매서운 책망을 듣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사람 앞에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기가 죽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그런 알량한 자존심 따위는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가난한 심령’만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시작될 수 있는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주권자에 대하여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도 필수적인 자세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만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 무엇보다도 먼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지킴으로써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을 통해 결국 ‘천당영생의 구원’의 복까지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둘째 복은 ‘자기 죄를 자복 회개함’으로써 ‘죄 사함의 안위’를 누리는 것입니다.

  4절에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기록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애통하는 자’란 ‘복스러운 상태’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애통이란 지극히 슬픈 일, 괴로운 일,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절로 나오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이란 그처럼 무슨 장례식장에서 나오는 통곡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애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며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고” 있는 상태에서 ‘거룩 거룩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뵙게 되자 곧바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비명을 지르게 되었습니다(사 6:5). 사도 바울 역시 자기 자신이 여전히 ‘악을 행하는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음을 자인하게 되면서 절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는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처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복하는 자의 입에서는 자동적으로 ‘애통’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진심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며 애통하는 자에게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복이 따라오게 됩니다.
  이 ‘위로’는 곧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 누리게 되는 안위와 평안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물론 오직 예수님만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놀랍고도 은혜로운 위로입니다.
  이사야 4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1절)고 하시면서 그 위로는 곧 “그 죄악이 사함을 받음”(2절)으로써 주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61장에서는 장차 당신께서 보내어 주실 ‘기름 부음 받은 종’이 바로 그렇게 “모든 슬픈 자를 위로”(2절)해 줄 메시아가 되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났던 시므온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눅 2:25)라고 칭한 것도 바로 이 예언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라 하면서도 평생 단 한 번도 이런 ‘회개의 애통’을 해 보지 않은 교인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현대교회로 올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통회자복’이라는 것은 무슨 옛날식 부흥회 때나 있던 순서라고만 생각하면서 ‘세련된 현대교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어색한, 상상만 해도 불편해지는 개념이 되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은혜와 복’만 강조하고 ‘죄와 회개’에 대해서는 그냥 어물쩍 넘겨버리는 교인은 결코 복음의 참된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3, 4상)라고 자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내 죄’를 두고 “주께서 (네가 잘못했다고)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이) 의로우시다(라고 인정)하고 주께서 (너는 죄인이라고) 심판하실 때에 (그 심판이)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하)라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사 66:2)라는 ‘위로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신의 타락과 부패와 더러움과 사망의 저주 아래 떨어져 있는 상태를 두고 애통할 줄 아는 자만 죄 사함의 위로가 진정 따뜻하게, 행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했던”(스 10:1) 것처럼 자기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통회 자복의 눈물’을 흘림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는”(계 7:17) ‘위로의 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셋째 복은 ‘대인관계에서 온유함’을 발휘함으로써 ‘금세와 내세의 상’을 받는 것입니다.

  5절에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온유한”이란 ‘점잖은’(gentle), ‘겸허한’(humble), ‘인정이 있는’(considerate), ‘예의바른’(courteous)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형용사로서, 구약에서 ‘심령의 가난함’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바로 신자가 타인을 대할 때에 꼭 필요한 기본자세인데, 오직 ‘심령이 가난하고 자기 죄를 애통한’ 자만 제대로 도달할 수 있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다른 사람 앞에서도 진정 ‘온유’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 ‘온유함’ 역시 예수님의 제자 된 자가 꼭 배워야 할 신앙인격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불신자들은 대인관계에서도 기본적으로 교만하고 방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상대방에게 꿀리지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존심을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위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있는 신자라면, 그런 ‘신앙의 겸손’은 반드시 ‘대인관계에서의 겸손’으로도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온유함’을 ‘자기 권리를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약한 상태’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참된 온유함에는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시편 37편 9절에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라고 말씀하면서, 연이어 11절에서 다시 한 번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라고 선언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차지하다’(inherit)라는 단어는 ‘확실히 소유하게 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땅의 기업’이란 구약에서는 ‘물질적인 복’의 대명사와 같은 말이며 신약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되는 ‘내세의 복’과 직결됩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가 얻는 복이란 금세와 내세에서 동시에 누리게 되는 상급입니다.
  즉 온유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손해만 당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얻도록 친히 중재해 주시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대인관계에서 항상 악착같이 따지고 대들어야만 자기가 생존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온유함’이란 그저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짓밟히기만 하는 패자가 되는 길을 자청하는 바보짓으로만 보일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차라리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온유한 마음’을 꼭 발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진짜 ‘땅의 기업’을 얻게 해 주는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그랄 땅에서 거부가 된 이삭을 아비멜렉 왕이 시기하여 쫓아내고,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우물들을 흙으로 메워 버리고, 그랄의 목자들이 그의 목자들에게 위협을 가해 왔을 때, 이삭은 한 번도 그들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삭은 화조차 내지 않고 모든 것을 양보하면서 그냥 조용히 다른 곳으로 옮겨서 또 다시 우물을 파고 새 장막을 치면서 새 터전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온유한 이삭’에게 결국 ‘브엘세바’의 축복을 내려 주시고, 그 결과 아비멜렉 쪽에서 오히려 먼저 머리를 숙이면서 화해를 청해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다고 자처하면서 타인이 자기를 비판하거나 공격할 때에는 절로 발끈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온유’는 바로 그런 경우에도 ‘겸손의 미덕’을 발휘할 줄 아는 것입니다.
  치열하게 다투고 악착같이 빼앗아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불신자들과는 달리,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대인관계에서 항상 온유함을 지킴으로써 진정 ‘땅을 기업’으로 받는 상급을 금세와 내세에서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넷째 복은 ‘의로운 일을 행함’으로써 ‘영적 만족과 보람’을 누리는 것입니다.

  6절 말씀에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기록했습니다.

  우선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가 무슨 의인지부터 명백히 밝혀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세 가지 의미의 의가 있습니다.
  하나는 ‘법적 의’인데, 이것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의’를 가리킵니다.
  또 하나는 ‘도덕적 의’로서, ‘신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드는 의’입니다.
  마지막 ‘사회적 의’는 세상 사회에서 통하는 일반적인 의, 쉽게 말해서 ‘사회 정의’ 같은 것입니다.

  본문의 ‘의’는 그 중에 두 번째로서 곧 예수님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바라는 대신에 먼저 구하라고 명하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마 6:33)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의는 ‘경외의 신앙’과 ‘죄 사함’을 통해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에 결코 ‘주리고 목마른 상태’가 아니며, 세 번째 의는 물론 당연히 아니기 때문입니다.
  욥기 9장 2절에서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라고 한 것처럼 본질적으로 완전타락과 전적무능력에 빠져서 스스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가 없었던 죄인을 하나님께서 ‘십자가 대속 공로’로써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처럼 ‘칭의’를 입은 성도에게서 자동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 바로 ‘도덕적으로 의로운 삶’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주림과 목마름’ 즉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를 때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싶어지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강렬한 욕망이자 필수적으로 충족되어야만 할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된 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두고 바로 그와 같은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를 추구하면서 사는’ 신자에게는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는 복이 따라오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만족감, 성취감 등을 가리킵니다.
  특히 이 “배부를 것임이요”라는 말은 영어로 번역하면 ‘they will be filled’ 즉 ‘자기 스스로 배가 불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불신자들은 그저 물질을 추구하고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고 있지만 결코 그 욕구가 완전히 충족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의로운 일’에 자기 인생의 목적을 집중시키면서 사는 신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64장 6절에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이 없는 상태에서의 인간은 결코 스스로 의로워질 수도 없고 또한 의로운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그로 인하여 자기 죄를 회개함으로써 죄 사함의 위로를 얻게 된 신자라면 당연히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의를 구하면서’ 살아야 마땅합니다.
  바로 이사야 61장 3절에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로부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는” 중생의 복을 받은 사람은 자동적, 필연적으로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삼시 세끼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성취해 나가는 보람을 매일 맛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처럼 ‘선한 일’에 부요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사 완성을 위한 일’에 자기 인생의 족적을 쌓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생애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기쁨과 행복이 되는 것을 몸소 체험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먹고 사는 일’에만 쫓기다가 ‘멸망하는 짐승’처럼 죽어가는 불행한 인생이 되지 말고, 이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선한 욕구를 좇아 ‘생애 최고와 최선’을 동원함으로써 진정 ‘영적으로 배부른 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원로목사님께서 남기신 유명한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현대교인들이 ‘그저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려’ 하고 있지만, 이것은 감히 절대주권자를 ‘자신의 복을 위한 심부름꾼’으로 전락시키려 하는 엄청난 신성모독일 뿐입니다.
  일단 ‘먼저 하나님을 섬기려 하면 복은 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섬기려고 작정하고 있는 성도에게 그 섬김을 위해 필요한 건강의 복, 물질의 복을 당연히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참된 복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 스스로 복을 받겠다고 용을 쓴다고 되는 일이 결코 아니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로 모시고 섬길 때 절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축복의 조상’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야곱도 그랬지 않았습니까?
  그는 출생 때부터 자기의 쌍둥이 형 에서를 앞질러보겠다고 그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난 바람에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의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도 야곱은 그 복에 대한 욕심을 스스로 성취해 보겠다고 형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사기도 했고 외삼촌 라반과 재산 문제로 다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야곱이 진정한 ‘축복의 조상’이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의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뜻의 새 이름인 ‘이스라엘’을 받게 되면서부터가 아니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참된 복을 더욱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 첫째 복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을 통해 ‘천당 구원’의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복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회개함’으로써 ‘죄 사함의 은혜와 안위’를 누리는 것입니다.
  셋째 복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온유한 대인관계’를 발휘함으로써 ‘금세와 내세의 상’을 받는 것입니다.
  넷째 복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선행에 최우선을 둠’으로써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정한 ‘만족과 보람’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건강하고 사업이 잘 되고 가정이 행복해진다.’라는 따위의 기복주의와는 아예 차원이 다른 복이 아니겠습니까?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주객전도의 신앙이 아니라, 이처럼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충성함으로써 절로 따라오게 되는 영혼의 복과 육신의 복’을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