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1-27 “이 요새에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사무엘상 21장 10절 – 22장 5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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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1-27
2019′경향의 강단(5)(2019년 1월 27일 / 주일 대예배)
“이 요새에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사무엘상 21장 10절 – 22장 5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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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새에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사무엘상 21장 10절 - 22장 5절 / 석기현 담임목사
어느 격언에“당신이 당하고 있는 일이 최악의 불행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안심하라. 이제 당신의 인생에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은 일어날 수 없을 테니까.”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존재한다면 지금 당하고 있는 것이 ‘최악의’ 불행은 아니니까 위로 받을 수 있는 셈이고, 정말 지금 최악의 불행을 당하고 있다면 위의 격언이 맞는 셈이니까 그 또한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자기 인생이 더 이상 내려가려야 내려갈 수 없는 최악에 도달했다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밑바닥 인생이야말로 이제는 올라갈 방향밖에 없는, 더 나아질 길밖에 없는 자리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회생의 탄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된 다윗은 바로 자기 인생 최저, 최악의 밑바닥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육신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완전히 기어 다니는 꼴에 처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깊으신 뜻은 바로 거기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쓰실 당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그런 비천함 중에서 오히려 더 성숙시키고 강하게 만들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그런 밑바닥 인생을 통하여 체험한 은혜가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자들을 그 처해 있는 가장 낮은 자리를 통해 연단해 주시는 오묘한 경륜이 과연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는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더 의지하는 신앙을 붙잡게 됩니다.

  21장 10절부터 15절에 기록하기를 “10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11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12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13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14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15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던 대로, 놉 땅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으로부터 식량과 무기를 얻은 다윗은 이제 블레셋의 성읍인 “가드”로 도망하게 됩니다.
  아마도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도 적군 이스라엘의 고위 장군이 자기편으로 전향해 오는 것이니 정치적으로 충분히 이용 가치가 있다고 계산하고 자기를 환대해 주리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기스의 신하들은 이 다윗이라는 인물이 자기네들에게 실제로는 사울 왕보다 훨씬 더 큰 위험인물인 것을 알아채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기스 왕에게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라고 간언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다윗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으로 기름 부음 받은 사실을 그들이 알았던 까닭에 한 말이 아니라, 다윗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정치적 실세’라고, 즉 ‘이 사람은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이나 다름없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윗은 아기스의 신하들이 그런 조언을 아기스 왕에게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기스 왕 역시 자기에게 대하여 의심과 경계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을 깨닫고는 “심히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제 발로 찾아와서 독안에 든 쥐의 꼴이 된 것입니다.

  그때 다윗은 최후의 비상수단을 동원했습니다.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는 다급한 카드를 던져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 “대문짝에 그적거리다”라는 말은 ‘문짝 같은 데에 뜻도 없는 글자를 긁적거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침을 수염에 흘리며” 멍한 표정을 짓는 등, 그야말로 영락없이 미친 사람의 행세를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기스 왕으로 하여금 다윗이란 존재가 무슨 위협적인 인물이기는커녕 죽일 가치조차 느끼지 못할 형편없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그와 같은 연극은 잘 들어맞았고, 아기스 왕은 다윗을 죽이는 대신에 그냥 내쫓아 보내게 됩니다.

  ‘창피해서라도 빌어먹지는 못한다.’는 말도 있지만, 일부러 미친 체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장 모욕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미친 흉내를 내는 와중에 다윗이 속으로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얼마나 참담한 기분이었겠습니까? 얼마나 자기 인생에 대하여 진절머리 나도록 혐오감에 사로잡혔겠습니까?
  다윗은 자기라는 존재를 그야말로 내려갈 수 있는 최하의 위치에까지 스스로 끌어내렸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처지에서 다윗의 심령은 실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시편 34편은 그 표제에 있는 대로 “다윗이 아비멜렉(블레셋 왕을 통칭하는 이름)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2절),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8절)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미친 체하여 겨우 목숨 건진 것을 두고도 다윗은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된’ 체험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정말 비참하기 짝이 없는 구사일생이었지만, 다윗은 그것이 곧 사람들 앞에서 ‘여호와를 자랑’할만한 사건이었다고 당당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체험입니까?
  그처럼 미친 체하면서도 다윗은 자신의 연극 재주가 자기를 구원해 줄 것으로 믿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도움이 자기와 함께 해 주실 것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의지했으며, 결국 그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때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들을 극도로 비참하고 낮은 곳에 처하게 하십니까?
  오직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선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맛을 보아 알도록’, 그 영혼에 깊이 체험되도록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불신자들 앞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를 구체적으로 자랑할 거리가 생기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잘되고 있을 때에는 남 앞에서 자기 얼굴을 스스로 나타내고 자랑하려 하게 됩니다.
  하지만 창피한 꼴을 당하게 되면 누군가 자기의 얼굴을 가려 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런 때에 도와주는 사람, 그처럼 난감할 때 남 앞에서 자기 대신 변명해 주고 자기 체면을 세워주는 사람, 정말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성도에게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낮고 천한 처지에 떨어져서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하고 있는 우리의 얼굴을 들어 주시며, 어디 당장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당황해하는 우리를 당신의 품에 끌어안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럴 때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바로 이런 맛이구나.’ 하고 제대로 그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사람 앞에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비참한 지경을 당할 때 오히려 바로 그 자리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즐거움을 체험하고 그 선하신 은혜를 자랑하게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함으로써 다른 약한 성도들을 더욱 잘 이해하고 위로할 줄 알게 됩니다.

  22장 1절과 2절에 “1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블레셋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다윗은 베들레헴 근처에 위치한 “아둘람 굴”로 은신처를 옮겼습니다.
  이 지역은 석회암 천연동굴들이 많아서 은신처로서 적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를 즈음해서 다윗 밑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우선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 즉 다윗의 가족들이 다 다윗을 찾아와서 그와 합류하게 됩니다.
  이미 사울 왕 앞에서 역적 집안이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다윗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본문에 이들을 가리켜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다윗처럼 정치적으로 탄압을 당하여 집안이 결딴나거나, 사업이 망하고 채무를 갚을 길이 없어 쫓기게 되거나, 혹은 온갖 사회적인 부정부패 때문에 이리저리 뜯기는 억울할 일을 당함으로써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도태된 자들을 뜻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다윗이 베들레헴 부근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줄줄이 찾아와서 그의 부하가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정작 이스라엘의 왕은 사울이었지만, 그는 사람들이 어려울 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왕이 못되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외롭고 괴로운 사람들이 의지하고 따라가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을 찾아 온 사람들이 약 “사백 명 가량” 되었고 다윗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권을 본격적으로 인수하기에 앞서 이미 여기서부터 ‘지도자’로서의 실습이 시작된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말이 좋아 ‘우두머리’요 ‘리더’요 ‘두목’이지, 그 어디 해 먹을 맛 나는 자리였겠습니까?
  뭐 쓸 만한 인재나 유력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전부가 다 사회생활에서 이리 터지고 저리 터져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었으니, 처음에야 뭐가 제대로 돌아갔겠습니까?
  모르기는 하지만 그 ‘사백 명의 공동체’에서는 골치 아픈 문제들이 사흘이 멀다 하고 연이어 터졌을 것이며, 무슨 위원회나 반상회 따위로 모일 때마다 다들 시끄러운 목소리만 높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아들을 이끌고 다윗은 참된 리더십을 익혀 나가게 됩니다.
  다윗은 바로 그 어중이떠중이들을 키워서 장차 이스라엘의 위대한 인물들, 중신들과 명장들을 만들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 지도력은 다윗이 그렇게 스스로 인생 밑바닥을 체험하는 가운데 진정 백성들의 약한 것, 슬픈 것, 억울한 것을 제대로 이해해 줄 수 있게 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무력한 한 평민의 처지란 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무능한 통치자 밑에 사는 백성의 비참함이 어떤 것인지, 아니 부당하게 착복당하고 구금당하게 되는 약자의 억울함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다윗은 자기 피부로 생생하게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그는 나중에 왕이 되었을 때 정말 백성을 위한 바른 정치, 민생을 돌보는 참된 정치를 펼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같은 병을 가진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남에게 동정이나 도움을 베풀 때 자기도 그와 똑같은 처지에 있어 본 사람이 해 주는 것이 받는 쪽에서도 훨씬 더 큰 감동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전에 당시 서울 시장께서 우리 교회 주일 밤예배에 오셔서 간증하신 내용 가운데에도 그런 말씀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분은 청계천 시장 바닥에서 이른 새벽부터 청소부 일을 하시면서 대학 공부를 하셨습니다.
  그런 시장이시니까 그 청계천 시장 길가에서 장사하던 행상인들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고, 그래서 청계천 복구공사를 할 때에도 그들을 위한 적절한 대책을 세움으로써 큰 호응을 받고 그 어려운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내었던 것입니다.

  목사도 결혼을 하고 인생을 살아 보아야 하는 이유 중에 하나도 그 때문입니다.
  목사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그저 어디 절이나 수도원 같은 데에 틀어박혀 살면서 자기 혼자 도를 닦고 자기 스스로 거룩해짐으로써 신도들 앞에서 뭔가 ‘신선’이나 ‘성인’처럼 보이려고 하는 승려나 사제가 아닙니다.
  부부싸움도 하고 화해도 해 보아야 교인들의 결혼 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이해하면서 지도할 수 있는 것이고, 자신의 자식을 키우면서 고생도 해 보아야 교회 교육에 더욱 큰 관심과 정성을 쏟아 넣을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전도사로 봉사하면서 쌀 살 돈도 떨어지고 해 보아야 교인들이 헌금하기 위해서 엿새 동안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벌고 있는지를 절감할 수 있는 것이고, 때로는 자기 집안에서 큰 사고나 어려운 병도 겪어 봄으로써 교인들의 슬픔과 아픔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목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도를 극도로 약하게 만드시고 가장 낮은 자리로 끌어내리십니까?
  바로 ‘나보다 더 곤고한 자’를 이해할 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슬픈 마음’을 진심으로 위로할 줄 아는 심령을 배양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약한 처지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언제든지 찾아와서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 만한 신앙 인격이 자리 잡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네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 받네’(458장)라는 찬송 가사 그대로, 자신이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하게 될 때 그로 인하여 오히려 다른 약한 성도들, 나보다 훨씬 더 외롭고 괴로운 형제자매들을 더 잘 위로하고 더 힘써 도울 수 있는 법을 꼭 배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성도는 인생의 최악의 환난을 당할 때에도 더더욱 철저한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로써 이를 극복해 내고 맙니다.

  22장 3절 이하 5절에 “3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4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5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윗은 이제 “미스베”에 있는 “모압 왕”에게 찾아갔는데, 그 주된 목적은 자기 부모의 거처를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윗이 모압 왕에게 그런 청을 하게 된 배경에는, 다윗의 증조모 룻이 바로 모압 여인이었다는 사실도 한몫했을지 모릅니다.
  즉 좀 멀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혈연관계로 이어져 있으니 그 정도의 부탁은 할 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모압 왕은 그 청을 들어 주었고 다윗의 부모는 “모압 왕과 함께”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다윗도 “요새”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것은 ‘산성’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말인데, 뒤이어 나오는 선지자 갓이 한 말의 문맥을 따르면 지금까지 있었던 ‘아둘람 굴’을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모압 왕이 다윗의 부모를 맡아 주면서, 다윗에게도 거할만한 은신처를 마련해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요새는 다윗이 유다 땅 내에서 도망치면서 은신하던 굴 같은 곳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편하고 좋은 거처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은 그 요새에서 꽤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새 장가를 들려고 오나라에 갔다가 거기서 화려한 궁전을 지어주고 초호화판 유흥으로 대접해 주니까 촉나라로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고 신혼의 단꿈에 빠져 살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유비의 경우에는 조자룡 장군이 일깨워 주었지만, 다윗에게는 “선지자 갓”이 찾아왔습니다.
  이 갓이란 선지자는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된 후에 ‘다윗의 선견자’ 즉 다윗의 ‘어전 선지자’가 되었던 사람인데, 이때에는 아마도 사무엘의 선지학교에서 파송되어 온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갓 선지자가 와서 다윗에게 충고해 준다는 말이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으로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말이었을 것입니다.
  편안한 곳에서 잘 대접 받고 있는데, 제대로 된 잠자리 하나 찾을 수 없는 위험한 유다 땅으로 다시 돌아가라니, 상식적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말임에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갓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모압의 요새를 떠나 유다 땅에 있는 “헤렛 수풀”로 돌아갔습니다.
  즉 다시 숨어 도망 다니는 신세로 돌아간 것입니다.
  사울 왕이 여전히 살기등등하고 자기를 밀고하려는 눈들이 도처에서 번득이고 있는 땅으로 제 발로 찾아간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왜 갓은 다윗에게 그런 어려운 명령을 전해 주었고 다윗은 또 순종했겠습니까? 왜냐하면 다윗은 어차피 유다 땅으로 돌아와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조금 편하다 해도 모압 땅이나 블레셋 땅이 자기가 영주하고 자신의 왕권을 펼치게 될 땅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환난이 있고 문제가 남아 있지만, 결국 다윗은 바로 유다 땅 안에서 그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세워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자기가 떠나지 말아야 할 땅이 있습니다.
  학생이 아무리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속상한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학교에 다니면서 문제를 해결해야지 자퇴해 버려서는 안 됩니다.
  정치가들이 아무리 정적으로부터 탄압을 받아도 자기 나라에 머물러 있어야만 결국 자기도 집권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있어서 끝까지 남아 있어야 할 땅은 어디이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교회입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물론 여러 가지 시험들이 생깁니다.
  개인적으로 일이 잘 안 되는 시험도 들고, 때로는 교회생활 그 자체에서 시험거리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 많은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예수 믿어 보았자 잘되는 것 하나도 없으니, 아예 그만 두자.’ 하고 교회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 잘 안 되던 일에 무슨 돌파구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던 사업도 망하고 교인들 보기에도 부끄러우니 이 기회에 교회 다니는 것도 좀 쉬고 다시 시작해 보자.’라고, 교회생활이 마치 자기가 재기하는 데에 큰 방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교회에 나가면 같은 구역에서 저 기분 나쁜 교인을 어쩔 수 없이 계속 만나야 하니 차라리 교회에 안 나가고 그 꼴 안 보는 게 속 편하지.’라고, 문제 그 자체를 신앙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저 교회 출입을 중단하는 것이 상책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애 학교 성적이 자꾸 떨어지고 있으니 주일에 교회에 가게 하는 대신 학원에 보내어서 일단 대학에 붙여 놓고 보자.’라고, 자식을 교회에서 멀리 떼어 놓고 더 잘 키우겠다고 하는 기가 막히는 발상을 하는 부모들도 수두룩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자기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떠나지 않고 살아야 할 ‘유다 땅’을 버리고 툭하면 ‘블레셋 땅’으로 혹은 ‘모압 땅’으로 도망치려 하고 있습니까?

  잠시 편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바른 자세도, 정답도 아닙니다.
  교회 밖은 신자가 안주할 수 있는 땅은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회피’에 불과하지 결코 ‘해결’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대적하고 있는 적군의 땅으로 스스로 항복하고 들어가는 비굴한 짓이며, 자기 생명을 원수 마귀의 손에 갖다 맡기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모든 문제를 반드시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아니 문제가 생기면 생길수록 더욱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에 충실함으로써 그 돌파구를 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문제가 생기면 더욱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생활 중에 교인들 사이에서 무슨 시험이 생기면 바로 그 교회 안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 형제와 화목’하는 해결책을 반드시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더욱 교회중심으로 신앙교육을 시켜서 그 아이의 마음자세부터 근본적으로 바꾸어야만 진정 소망이 있는 것을 부모부터 먼저 똑바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다윗은 유다 땅에 돌아와야 하고 신자는 교회를 떠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떠나 불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문제 해결이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하는 배역의 길이며 사탄의 책략에 그대로 걸려드는 망조의 걸음입니다.
  인생의 환난이 극심해지고 최악에 이를수록 더욱 철저한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로써 그것을 능히 극복해 내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다윗을 낮추신 섭리가 얼마나 오묘한 것이었습니까?
  그는 일국의 왕이라는 최고의 명예를 얻기 전에 미치광이 행세까지 해야 하는 비참한 처지에 내려감으로써, 자기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에 전적으로 달려 있음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을 다스리는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누리기 전에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애환을 자기 몸으로 이해해 주고 위로하는 법을 먼저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이양받기 전에 그는 비록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부터가 그 나라 안에서 사는 법을, 왕이 될 사람이라 할지라도 먼저 그 유다에 속한 백성이 되는 법부터 익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한때 좋아했던 ‘이안’이라는 가수의 노래 중에서 ‘아리요’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는데, 국악이 섞인 신나는 멜로디도 그렇지만 가사가 참 좋았습니다.
  “아리랑 허 아리아리요 아리랑 허 아리아리요 / 인생사 힘들다고 말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나 / 움추린 어깨 펴고 달려가면 꿈꾸던 인생역전 시작되지” - 이렇게 시작됩니다.
  “모두가 일등하면 무슨 재미 워 절망도 뒤집으면 희망이야 / 맞아요 이 세상은 그런 재미 워 일프로의 가능성에 인생역전 / 아리랑 허 아리아리요 아리랑 허 아리아리요.” - 그런 노래입니다.
  ‘인생사 힘들다고 말하지만 절망도 뒤집으면 희망이 된다. 일프로 가능성에 도전해서 인생 역전의 재미를 맛보자’ - 참 얼마나 멋있는 가사인지 모릅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극적인 인생 역전의 재미를 누린 사람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는 한 때 그처럼 인생 밑바닥까지 내려갔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의 왕위를 더욱 빛나게 해 주는 정금의 연단 과정이 되었습니다.
  매일을 공포와 고통과 눈물로 지새우면서 암혈과 토굴들을 여기저기 전전했지만, 그 곳들이 오히려 그의 미래의 왕권과 통치를 더욱 충실하게 해 주는 경건의 도장으로 탈바꿈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청년 시절에 당한 환난은 결코 인생의 손해나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바로 그 최저, 최악의 밑바닥에 도달했을 때, 그 때부터 그의 인생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고 오직 올라가기만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가장 낮은 곳, 가장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위치에서 그 성도에게 놀라운 회생의 탄력, 인생 역전의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이보다 더 어려울 수는 없다.’라는 처지에 몰리게 될 때, 성도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이 깊은 뜻을 깨닫고 그 오묘한 섭리를 똑같이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악의 시험을 당하고 인생의 밑바닥에 처할지라도, 그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이 더욱 확고해지고, 그 때문에 형제자매를 더욱 사랑하게 되며, 바로 그 때문에 더 철저하게 교회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모든 환난과 곤고를 너끈히 극복하고 끝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