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9-01-06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출애굽기 8장 25-28절, 10장 7-11, 24-28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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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9-01-06
2018′경향의 강단(2)(2019년 1월 6일 / 신년주일 대예배)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출애굽기 8장 25-28절, 10장 7-11, 24-28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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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출애굽기 8장 25-28절, 10장 7-11, 24-28절 / 석기현 담임목사
‘밀당’은 제가 우리나라로 돌아온 후에 듣게 된 여러 가지 신조어들 중의 하나입니다.
  아마 ‘밀고 당기기’를 줄여서 만들어진 말 같은데, 주로 남녀 간에 연애할 때 서로 상대방의 눈치를 보고 의중을 떠보려 하는 상황을 두고 사용됩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밀당’이 발생하는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사원이 사장에게 봉급 인상을 요구할 때라든지, 기업이 거래처와 계약을 맺을 때라든지, 혹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 어떤 협정을 맺을 때, 대부분 첫 번째 만남에서 그대로 결정되지 않고 한동안 서로 밀고 당기는 흥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만약 그 ‘밀당’의 과정에서 하나씩 둘씩 양보하다 보면 결국에는 일방적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협상의 테이블은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피차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런 ‘밀당’은 비단 세상사에서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자주 벌어지는데,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두고 모세와 바로가 마주 대하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 흥정의 과정에서 바로는 조금씩 물러서는 척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스라엘의 출애굽만은 막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출애굽기 8장부터 10장에까지 그런 교묘한 ‘밀당’이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한 발짝도 양보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야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모세 자신의 뜻이나 이스라엘 백성의 소원이기 전에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탄은 성도를 실족하게 만들기 위하여 온갖 ‘바로의 밀당’을 동원하고 있지만, 진정 신실한 기독신자라면 결코 그런 수법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이 시간 저는 경향의 성도들이 올 한 해 동안에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타협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대로’만 꼭 지켜야 할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는 신앙생활’에 대하여 끝까지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8장 25절부터 28절에 “25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26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27우리가 사흘길 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28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고 기록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요구했을 때, 바로는 코웃음을 치면서 오히려 백성들의 역사를 더 힘들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낙심에 빠져 있던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7장 3절과 4절에서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어서 너희 말을 듣지 않게 만들 것이며, 결국 내가 친히 애굽에 큰 재앙을 내려야만 너희가 출애굽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한동안은 바로와 끈질긴 줄다리기를 해야 할 것이니 각오를 단단히 가지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처음 몇 라운드가 지날 동안 바로는 그야말로 완강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고, 나일강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애굽 온 땅을 개구리로 뒤덮이게 하는 재앙을 내릴 때까지는 바로뿐 아니라 그의 신하들까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 부분적인 이유는 그 이적과 처음의 두 재앙들은 애굽의 요술사들도 흉내를 내어 따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재앙, 즉 티끌이 이가 되어 온 애굽 땅 사람과 가축에게 오르는 재앙이 덮치자, 애굽의 요술사들이 먼저 바로에게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출8:19)라고 하면서 두 손 번쩍 들게 되었습니다.
  사탄 역시 이적을 행하여 사람을 미혹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임을 보여 준 장면입니다.

  그런 후 네 번째 재앙, 즉 파리 떼로 하나님께서 애굽 땅을 치시자 바로는 처음으로 약간의 반응을 나타내었습니다.
  그것이 방금 25절에서 읽은 대로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는 회유책이었습니다.

  즉 ‘너희들이 정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희생제물을 바쳐야 하겠다면 내가 허락해 주겠다. 하지만, 광야로 나가지는 말고 지금 살고 있는 고센 땅에서 제사를 드려도 별 상관없는 것 아니겠느냐?’ 하고 슬쩍 모세를 떠보는 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서로 조금도 양보 없는 팽팽한 대립이 이어지다가 바로 편에서 먼저 약간 물러서면서 ‘밀당’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바로의 작전에 넘어가지 않고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라고 그 타협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두고 ‘만일 우리가 애굽 땅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애굽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여 죽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말한 것은 황소, 암소, 양 등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사용했던 짐승들을 당시 애굽 사람들은 신성한 동물로 여기면서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땅에서 그런 동물을 잡아 제사를 드리면 애굽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설사 그런 현실적인 이유가 없었다 하더라도 ‘애굽 땅을 떠나지 말고 여기서’라든지 ‘광야로 나가더라도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는 바로의 타협안은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라는 말들은 오늘도 사탄이 성도의 신앙생활을 흔들기 위하여 사용하는 대표적 수단입니다.
  “그렇게 별나게 교회중심으로만 해야 신앙생활인가?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그저 내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좋은 교훈으로 삼아 따르면 그게 진짜 신앙생활이 아닌가?”라는 말들을 우리는 종종 듣게 됩니다.
  ‘교회에 다니더라도 너무 깊이 관여하지는 말고 그저 내 인생을 즐기는 데에는 아무 손해가 없도록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하는 게 상책이지.’라는 자세로 교인 노릇을 하는 사람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이제는 텔레비전으로 유명한 교회의 예배실황 중계를 보면서 설교를 들을 수 있는데 일부러 예배당까지 찾아갈 필요가 뭐가 있나? 그저 주일마다 내 집 안방에 앉아서 편안히 예배를 드리고 헌금도 그냥 온라인으로 보내면 되지.”라는 따위의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제 딴에는 무슨 기발한 아이디어를 착상해낸 것처럼 말하는 사람마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바로가 했던 타협책이고, 그것이야말로 사탄이 제안하고 있는 미혹인 것을 바로 깨달아야만 합니다.
  진정한 기독신자는 “악인의 장막에서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을 몸으로 느낄 줄 알아야만 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엡 2:21-22) 체험을 주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신 교회를 통해 맛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자식이라면 부모님을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는 것이지, 생신 때조차 달랑 전화 한 통만 하고 선물은 우편으로 보내면서 자식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마땅히 아버지의 집에 자기 발로 직접 찾아 나와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교회중심으로 사는 것을 귀찮아하고 그저 자기 편리한 대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은 오직 사탄이 꾀는 교묘한 유혹임을 깨닫고, 예배와 기도회가 있을 때마다 오직 부지런히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신앙생활’에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10장 7절부터 11절에 기록하기를 “7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 8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오니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 누구냐 9모세가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 10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11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에 이를 즈음에는 이미 수차례의 재앙이 연이어지고 있었습니다.
  9장 이하에 기록된 대로 다섯 번째로 돌림병 재앙, 여섯 번째로 악성종기의 재앙이 각각 애굽의 사람과 가축에게 덮쳤습니다.
  뒤이어서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이 휩쓸고 지나간 후, 이제 여덟 번째 재앙으로 메뚜기 떼가 곧 덮치게 될 것이라는 예고가 모세의 입을 통해 바로에게 전달되었을 때였습니다.
  이미 애굽 전국이 거의 초토화된 꼴을 보고 바로의 신하들이 먼저 들고 일어나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바로도 어쩌지를 못하고 모세와 아론을 불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도 바로가 완전항복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남녀노소와 양과 소”까지 몽땅 데리고 나가야겠다는 모세의 확고한 요청에 대하여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고 또 한 번 슬쩍 양보하는 척하고 나왔습니다.
  ‘꼭 모든 가족이 다 가야만 하느냐? 그냥 가족 대표로 남자들만 가서 제사를 드려도 너희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정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겠느냐?’라는, 실로 절묘한 타협안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나머지 여자와 아이들을 인질로 잡아둠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완전히 탈출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 바로의 말에 대하여 모세가 무어라고 응답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어쨌든 그 타협안을 거절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11절 하반절에 기록된 것처럼 모세와 아론은 곧 “바로 앞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 이것 역시 오늘날 우리도 많이 듣는 소리입니다.
  ‘주일에 가족 대표로 나하고 아내만 예배드리러 가면 충분하지, 입시준비에 바쁜 고3 자식까지 꼭 같이 가야 할까?’라는 ‘바로의 타협안’이 부모의 귀에 아주 그럴듯하게 들려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반대로 “내 자식은 교육상 교회에 보내지만, 우리야 일단 주일에도 장사를 해서 먹고 살아야 하니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주일마다 ‘기러기 가족’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 열심히 믿는 사람은 한 집안에서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고, 나머지는 그냥 그 덕 좀 보면 되겠지.’라는 식의 약삭빠른 계산을 하는 사람마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판단해야 합니다.
  부모만 배불리 먹으면 자식들은 밥 차려 주지 않아도 절로 잘 자랍니까?
  자기 밥은 자기가 직접 먹어야 그 육신이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자식만 옷 잘 해 입히면 그 부모도 남들 앞에서 절로 단정하게 보입니까?
  자기 옷은 자기가 차려 입어야 멋있고 아름답게 보일 수 있습니다.
  가족 대표로 한 명만 아랫목에 자면 나머지는 다들 윗목에 몰려 자도 절로 따뜻한 잠자리가 됩니까?
  각자의 잠자리가 따뜻해야 온 가족이 다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의식주도 온 가족이 각자 본인의 몫을 본인이 챙겨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 영혼을 위한 것은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생명의 양식은 남편의 몫을 아내가 좀 더 타내어 두었다가 나중에 남편에게 먹여 줄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입게 되는 거룩한 예복은 제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라 해도 부모가 대신 받아서 입혀 줄 수가 없으며, 자기 것을 벗어서 자식에게 대신 입혀 주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옷입니다.
  천당은 가족 중에 대표로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해서 그 덕에 모두 다 덤으로 붙어서 들어갈 수 있도록, 한 사람이 방 여러 개를 예약할 수 있는 집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아버지가 받을 구원은 아버지가, 아들이 받을 구원은 아들이, 딸이 받을 구원은 딸이, 남편이 받을 구원은 남편이, 아내가 받을 구원은 아내가, 각각 ‘자기 것’만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는 지극히 사랑하고 화목하게 지내던 가족이라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는 ‘각인’이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직고’할 수 있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은 예배에 빠져도 된다.’, ‘내 자녀는 굳이 주일학교나 SFC 성경공부에 보낼 필요가 없다.’, ‘고집불통인 내 부모님은 도저히 전도할 길이 없다.’ – 이런 생각은 사탄이 내 가족을 영원히 쪼개어 놓으려고 꾀는 타협책인 것을 깨닫고, 어찌하든지 ‘나와 내 집이 다 예수님을 잘 믿고 구원에 이르는’ 신앙생활을 끝까지 견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온전한 헌금을 바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결코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10장 24절 이하 28절에 “24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25모세가 이르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제사와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26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 27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 보내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28바로가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때는 이미 애굽 땅 전체가 아예 절단이 났을 때였습니다.
  예고된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 떼가 덮쳐서 그나마 이전의 재앙들을 면하고 조금 남아 있던 것들까지 깡그리 먹어치워 버렸습니다.
  뒤이어 아홉 번째 재앙으로서 사흘 동안 온 애굽 땅이 흑암에 뒤덮임으로써 애굽 사람들은 극한의 공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재앙들을 겪는 동안에는 여러 차례 자신의 약속을 번복했던 바로도 이제는 별수 없이 완전항복을 할 수밖에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로는 아직도 ‘그 마음의 완악함’을 버리지 않고 다시 한 번 밀당을 시도했습니다.
  그것이 곧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는 말이었습니다.
  ‘정 모든 백성이 다 가야 하겠다면 그것도 허락해 주겠다. 하지만 가축들만은 남겨 두고 가거라. 모든 백성이 그저 마음만 모아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이지 꼭 희생제물이고 뭐고 하는 것까지 드릴 필요가 있겠느냐?’ 하고 여전히 끈질기게 모세를 물고 늘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 마지막 밀당, 정말 유혹적으로 들리는 타협안, 그 정도라면 받아주어도 될 만하게 보이는 제안에도 결코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비록 당신이 왕이라 해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와 번제물을 빼앗아 갈 권리는 없습니다.
 ”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짐승으로 희생제물을 바치라고 명하셔도 다 드릴 수 있도록 모든 종류의 가축을 몽땅 다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
라고 응수했습니다.
  남녀 어른들 몽땅, 그리고 이제는 자녀까지 다 보내 주겠다는데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소유하고 있던 가축들까지 다 데리고 가게 하지 않으면 절대 나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맞섰습니다.
  제3자가 보기에는 그 정도도 양보할 의사가 없다면 아예 흥정 자체가 완전히 깨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문자 그대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 역시 바로 이 문제를 두고 사탄과 실랑이를 벌이게 되는 경우가 흔히 생깁니다.
  바로 헌금생활이야말로 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인조차 흔들릴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시험거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에게는, 매주일 꼬박꼬박 예배에 출석하는 것만 해도 제 딴에는 대단한 일로 여겨집니다.
  거기에다 본인뿐 아니라 남편이나 아내도 교회로 데려오고 부모와 자녀까지 다 함께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으면, 이미 대단한 신자나 된 것처럼 스스로 자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에 ‘바로의 마지막 타협책’이 유혹해 옵니다.
  ‘찬양대원이나 주교교사를 아무 보수도 없이 봉사하는 것만 해도 남들에 비하면 꽤 열심히 하는 편이니까 헌금은 대충 넘어가도 되겠지.’라는 생각이 그만 그 신앙생활에서 곁길로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고 있는데 굳이 감사헌금까지 바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물론 오십보백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비전헌금으로 열두바구니 십이조헌금까지 작정해 놓았으니까 이 헌금을 완납할 때까지 3대 후원회비 정도는 잠시 쉬어도 목사님이 날보고 뭐라 할 수는 없겠지.’라고, 참으로 기발한 계산을 해 내는 교인도 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 정도는 교역자들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께서도 충분히 ‘봐 주실’ 것처럼 생각되십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상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부부는 ‘우리가 가진 땅을 몽땅 팔아서 이렇게 많은 헌금을 교회에 갖다 바치는데 그 중에 얼마 정도는 조금 빼돌려도 괜찮겠지.’라고 자기네 딴에는 아무 양심에 거리낌 없이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기합리화는 곧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거짓말하는 중죄로 이어졌고, 그들은 전 재산의 반이나 연보를 하고도 바로 그 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즉결심판을 받아 부부동반으로 죽고 말았지 않았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헌금생활에 대하여 느슨해지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는 자신의 신앙생활 수준이 꽤 높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에게도 신앙파선의 결정적인 위험 요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당연히 바치되 그것도 ‘온전한 십일조’로 바쳐야 합니다.
  사실은 매주일이 당연하겠지만, 최소한 한 달에 한 번도 감사헌금을 드릴 일이 없겠습니까?
  서원헌금은 일단 하나님께 약속했으면 그저 당연히 지켜야 할 일로 알고 제때에 드려야 할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있어서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일은 곧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라.’는 사탄의 유혹에 빠지는 것임을 깨닫고, 모든 종류의 헌금을 온전하게 오직 기쁨으로 바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흥정의 테이블에 마주 앉는 사람들은 피차 속으로 생각하는 ‘마지노선’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인 스스로가 ‘이 이상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라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온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윗선에서 내린 지시’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양보의 선이 일치하면 흥정이 성립되겠지만, 그 간격이 멀면 더 오랜 ‘밀당’이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사회에서 세상일을 두고 흥정할 때나 볼 수 있는 것이지, 우리 기독신자의 신앙생활에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의 유일하고도 최고 ‘윗선’인 하나님께서는 ‘여기까지는 양보해 주어도 괜찮다.’라는 ‘타협의 여지’를 우리에게 조금도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반은 사탄에게 양보해도 된다.’라든지 ‘나한테 3분의 2만 하면 충분하다.’라든지 혹은 ‘90퍼센트까지 한다면 정말 착하고 충성된 종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결코 없습니다.
  분명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도 다하고 힘도 다하라’고 명백하게, 엄중하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까지만’ 하면서 흥정을 해 오는 쪽은 오직 ‘사탄’일 뿐이며, 그런 타협안에 ‘이 정도까지는’이라고 양보를 시작하면 그대로 지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지 말라.’고 대놓고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이 땅에서 섬겨라. 하나님을 섬기되 장정들만 대표로 섬겨라. 하나님을 섬기되 양과 소는 가져가지 말고 섬겨라.’고 밀당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모세의 대답은 너무나도 멋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여호와를 섬겨야 합니다.
 ’라고 당당히 응수하면서 끝까지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주일에 주일낮예배 한 번만 참석하면 충분하다.’, ‘내 아이들은 학원에 보내고 우리 부부만 교회에 다니면 된다.’, ‘현대교인들한테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것은 바리새인적인 발상이다.’ - 이런 말은 ‘바로’가 하는 소리일 뿐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모든 율례와 법도를 순종해라.’, ‘내 앞에 나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 - 이것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허리띠를 풀어 놓으면 일어나기 싫어지고, 신발끈이 풀리면 자기 걸음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약간만 늦추면 그로 인하여 곧 휘청거리면서 넘어지게 되고, 조금씩 양보하면 그것이 곧 신앙의 파선으로 치닫게 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오직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그대로’ 그야말로 항상 ‘타이트’하게 해야 합니다.
  말세가 가까워질수록 부지런히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온 가족이 함께 구원을 받도록 자녀를 교육하고 부모를 전도하며, 십일조와 감사헌금과 각종 서원헌금을 온전히 바치는 등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 ‘허리에 띠를 단단하게 동이고’ 달려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온갖 ‘바로의 타협안’에 조금이라도 양보하지 말고 오로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그대로’ 100퍼센트 순종함으로써 올 2019년 내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에서 항상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