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예배 2019-01-01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장 10-16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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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 2019-01-01
2019 경향의 강단(1)(2018년 12월 31일 / 송구영신예배)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장 10-16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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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장 10-16절 / 석기현 담임목사
제가 중학교 시절인지 고등학교 시절인지 국어책에서 배웠던 ‘고지가 바로 저긴데’라는 제목의 이은상 씨가 지은 시가 있습니다.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라고 시작되는 유명한 시입니다.
  아마 민족 분단이라는 비극적인 현실 중에도 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모든 악조건과 역경을 견디고 이겨내면서 부단히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시라고 생각됩니다.
  이 시에서 가장 강력하게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고지가 바로 저기에 보이는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는 구절일 것입니다.
  추구하고 있는 어떤 목표가 이제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거기서 중도 포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그때까지의 온갖 노력과 고생을 다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실로 어리석은 생각이며 최악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신앙생활을 ‘운동장에서 달리는 경주자’에 비유하면서 ‘푯대를 향해 끝까지 달려가자!’라고 독려했던 사실도 그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2018년이라는 한 해의 경주를 끝내고 2019년이라는 새 구간을 맞이하고 있지만, 물론 해가 바뀐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 경주가 잠시라도 멈추거나 완전히 끝날 수는 없습니다.
  이 ‘송구영신’은 오직 우리의 목표인 ‘푯대’가 조금 더 가까워졌음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며, 그런 까닭에 우리의 경주는 더욱 가속도를 올리면서 완주를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야 할 뿐입니다.
  이제 ‘경향 희년’이라는 ‘고지’가 4년 앞으로 성큼 다가오게 된 오늘 밤에 저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경주는 과연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앙 경주의 출발선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는 중생’입니다.

  10절부터 12절에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앞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 사회에서 최고 학부 출신의 엘리트로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던 자기가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8절)을 얻어 ‘중생’하게 되었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9절) 곧 ‘칭의’를 입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바울은 그처럼 새 사람이 된 이후에 계속 ‘성화의 진보’를 위해 진력하고 있는 자세와 각오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라는 말은 그가 아직도 ‘예수님의 고난의 대속과 육체적 부활’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라고 밝힌 것처럼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따르는 신앙생활’을 살겠다는 각오입니다.
  이어지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는 말이 곧 그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가리키며,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는 말은 두말할 것 없이 ‘죽은 자 가운데 같이 머물러 있지 않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을 따라 영생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가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즉 ‘택함을 입은 구원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즉 ‘구원의 완성을 목표로 삼고 부단히 성화의 경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노력하고 있는 경건생활이나 충성하고 있는 사역 등 모든 현시점의 경주는, 그 출발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 곧 ‘중생’에 귀결되는 것이었습니다.

  단거리든지 중장거리든지 간에 경주는 반드시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해야 해야지, 중간에 끼어드는 것은 오직 반칙일 뿐입니다.
  신앙생활의 경주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고난이 곧 내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함’이었음을 믿음으로써 중생 받는 것만이 모든 참된 기독신자의 출발선입니다.
  이처럼 일단 ‘예수님께 잡힌 바’ 되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진’ 성도만이 이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구원의 완성을 향해 ‘성화의 경주’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자’와 ‘구원파’의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전자는 ‘구원의 확신’은 있지만 여전히 ‘성화의 진보’를 위해 진력하는 신자인 반면, 후자는 ‘나는 이미 구원을 얻었으니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도 아무 상관없다.’라고 하는 방심과 무책임에 빠지는 이단입니다.
  하지만 바른 개혁주의 신자는 결코 ‘성화’를 위한 자신의 노력과 의무를 등한시하지 않고 ‘이미 잡힌 바’ 된 줄을 확신하면서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라톤 같은 장거리 경주를 할 때에 가끔 선수 아닌 사람이 곁에서 몇 걸음 같이 달리면서 응원을 해 주는 경우도 있지만, 물론 그것이 ‘경주’에 참여하는 것으로 인정될 리는 만무합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비록 겉보기에는 같은 교회의 교인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정식으로 같이 달리는 경주자’는 아닌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대속적 고난’을 믿는 신앙고백을 통해 ‘중생’을 받음으로써 이 신앙생활의 경주의 출발선을 똑같이 공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 경주의 결승점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을 영광의 상급’입니다.

  13절과 14절에 기록하기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중생을 받고 사도가 된 직후부터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8절) 즉 ‘예수님을 목적으로 삼고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은 다 포기하면서’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비록 다른 사도들보다 출발은 늦게 했지만, 그가 이 시점에까지 전도자로서 이룬 업적만 해도 이미 선두주자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라는 초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세는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리는 초지일관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마음은 ‘오직 한 일’(one thing)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뒤에 있는 것’ 즉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온 사도로서의 업적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 대신 ‘한 가지 사실’ 곧 ‘앞에 보이는 목표를 완전히 잡기 위해’ 더욱 스스로 주마가편하는 것에만 온 정성과 힘을 다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완수했고, 수많은 초대교회들을 세웠으며, 그 후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체포되어 지금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의 한 가옥에 연금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이만하면 나도 전도자로서 할 만큼 하고 이제 떳떳하게 주님을 만날 준비가 다 되었다.’라고 생각할 법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출발하여 ‘마게도니아와 소아시아 전역’을 다 달리고 이제 당대 세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로마’에까지 온 바울은 그런 ‘뒤에 있는 것’들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것’ 즉 ‘서바나 전도’까지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최종 목표는 ‘로마’도 ‘서바나’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은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위에서 이리로 올라와서 상을 받으라고 부르시는 부름’이라는 뜻입니다.
  그 상은 곧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친” 전도자에게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예비해 주신 “의의 면류관”이었습니다(딤후 4:7-8). 오직 그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 영광스러운 결승테이프를 끊게 될 때까지 자신의 신앙 경주를 잠시도 멈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경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달려왔나?’라고 생각할 여유란 조금도 없습니다.
  물론 고개를 돌려서 자기가 지나온 거리를 체크해 볼 선수도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딴생각을 하거나 엉뚱한 짓을 하는 순간 이미 다른 선수들보다 뒤처지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모든 선수들의 눈은 오직 ‘앞에 있는 결승테이프’에만 고정되어 있으며, 그 양발은 오직 그 결승점이 있는 방향으로만 똑바로 달려갈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경주자 역시 오직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이만하면 나도 꽤 충성을 쌓았다.’라는 자화자찬이나 ‘이제는 한숨 돌리고 좀 쉬어야겠다.’라는 불충에 빠질 여유란 조금도 없습니다.
  그렇게 뒤돌아보고 멈추는 것은 곧 ‘경주 전체’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향교회를 중심으로 지난 45년 동안 달려오면서 실로 많은 것을 이루어 놓기는 했지만, 그 ‘뒤에 있는 것’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것’ 곧 ‘장차 재림주께로부터 받을 영광의 상급’만 바라보면서 계속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신앙 경주의 과정은 ‘예수님의 몸 된 교회 중심의 지사충성’입니다.

  15절과 16절의 말씀에 “15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우리 온전히 이룬 자”라고 지칭하는 대상은 ‘스스로 꽤 성취했다고 방심하고 교만에 빠진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정한 ‘중생인’으로 출발하여 ‘구원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가운데 어느 정도 ‘성화의 진보’를 실제로 나타내고 있는 참된 신자를 가리킵니다.
  “우리”라고 바울이 자신도 거기에 포함시킨 것도 그런 맥락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신자들이 다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은 수준의 성화에 이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이라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즉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신실한 신자들 중에도 신앙생활의 부분적인 면에 있어서는 자신이 생각하고 가르치는 것과 조금 다른 판단이나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빌립보교회뿐 아니라 모든 지상교회 안에 벌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차이가 심각한 문제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고 한 것입니다.
  즉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기가 부분적으로 조금 차이가 있는 교인이라 할지라도 ‘온전히 이룬 자’ 곧 ‘성화의 단계에 있는 신자’인 것만 분명하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 역시 결국에는 더 잘 깨닫게 하시고 더 성장하게 해 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나 빌립보교회 교인들이나 공히 집중하고 노력해야 할 사실은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얼마나 잘 믿고 얼마나 충성하고 있는지’에 있어서 저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을지라도, 어쨌든 ‘출발선’이 같고 ‘결승점’이 같은 참된 신자들이라면 ‘지금까지 자기가 달려오고 있는 성화의 경주’를 계속해 나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출발선’이라는 과거나 ‘결승점’이라는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당장 ‘계속 달리는 것’뿐입니다.
  서로 ‘달리 생각하는’ 것도 있고 ‘어디까지 이르렀는지’의 차이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 별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그대로 행하기만 하면’ 결국은 같은 결승점에서 다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교회 안의 성도 사이에도 개인적인 차이는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같은 장로라 해도 판단의 차이가 있으며, 같은 집사라 해도 능력의 차이가 있으며, 같은 권사라 해도 사랑의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경향교회 교인이라 해도 각자 ‘신앙의 수준’과 ‘충성의 정도’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는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피차 따지거나 상대방에게 신경 쓸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도가 하나님의 택자이기만 하면 그런 차이점은 결국 하나님께서 친히 다 해결해 주시고 끝내는 ‘성화의 완성’ 즉 ‘영화’에 우리 모두 함께 도달하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그저 지금까지 해 온 ‘그대로 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저 ‘예수 목적, 내 삶 수단’이라는 이 멋진 표어를 따라 계속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세계를 받은 교회’라는 이 영광스러운 공동체 안에서 ‘같이 봉사하는 일꾼’으로, ‘같이 싸우는 군사’로 지금까지 일사불란하게 달려온 이 마음과 자세를 그대로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오직 ‘교회 중심으로 지사충성’하는 것만이 ‘신자의 달려가야 할 길’에서 탈락하지 않게 해 주는 유일한 ‘신앙생활의 경주로’임을 명심하면서 끝까지 ‘함께 완주’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자주 인용하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라는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혁혁한 공을 세운 미육군 제101공수사단 506연대 소속의 ‘이지 중대’는 전임자인 원터스 중대장이 대대본부로 발령되고 그 후임으로 다이크 중위가 오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다이크 중위는 매사에 소극적이고 안일한 자세 때문에 중대원들의 신임을 전혀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포이’라는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을 공격하는 작전에 투입됩니다.
  부대대장이 된 원터스는 다이크 중위에게 작전 지시를 내리면서 ‘keep moving’이라는 말을 수차례 강조합니다.
  즉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절대로 중대원들을 멈추게 하지 말고 ‘계속 전진’시켜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작전에 돌입하면서 독일군의 반격을 당하게 되자 당황한 다이크 중위는 변변한 엄폐물도 없는 개활지에서 병사들을 멈추게 하는 등 어리석은 지시를 계속 내립니다.
  그 때문에 사상자들이 속출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제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 다이크 중위를 향해 후방에서 지켜보던 원터스 소령은 ‘go ahead!’(앞으로 나가!)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원터스 소령은 다른 중대의 중대장이었던 스피어스 중위를 급히 보내었고, 스피어스 중위는 다이크 중위에게 “지금부터 내가 지휘한다.”라고 짤막하게 전달한 후에 즉시 박격포로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를 공격하게 하면서 전 중대원들에게 돌격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본인부터가 앞장서서 달려가면서 엎드려 있는 병사들에게 “Get up and run!”(일어나서 뛰어!)라고 소리칩니다.
  그 결과 이지 중대는 순식간에 독일군을 물리치고 포이 마을을 점령하게 되는데, 전투가 끝나고 보니 뒤에 숨어 있던 다이크 중위는 이미 전사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이기는 길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Run!’ - 그냥 ‘뛰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죽지 않을 수 있는 법은 별 것 아니었습니다.
  ‘Go ahead!’ - 그 자리에 엎드려 있지 말고 ‘앞으로 나가면’ 되었습니다.
  목표를 점령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Keep moving!’ - 중대장 이하 모든 병사들이 ‘계속 전진’하는 것만이 유일한 필승전술이었던 것입니다.

  기독신자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겁을 내고 서는 순간 스스로 패배를 불러들일 뿐입니다.
  혼자 살겠다고 머리를 땅에 박고 움직이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일밖에 남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는 당연히 ‘무조건 돌격’해야 합니다.
  이 ‘산성과 요새’ 같은 경향교회는 ‘Y-4’가 된 ‘희년’만 바라보면서 ‘계속 전진’해야 할 뿐입니다.
  작년에 ‘비전헌금’을 정말 힘에 지나도록 작정하고 바쳤지만, 우리가 그 ‘뒤에 있는 것’을 되돌아보면서 만족하거나 방심에 빠질 여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오직 ‘앞에 있는 푯대’만을 향해 계속, 더 힘을 짜내서, 더 빨리 전진해야 할 뿐인 것입니다.

  이제 그 ‘푯대’는 지척에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가다가 중지 곳 하면 아니 감만 못하니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뒤돌아보거나 좌우로 치우치거나 제자리에 서지 않고 계속 달려왔던 그대로 이 2019년에도 오직 ‘푯대를 향해 달려감’으로써 저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해’의 결승테이프를 함께 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