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밤예배 2018-12-30 내가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 시편 18편 29-30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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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밤예배 2018-12-30
연종감사예배
설교 : 내가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 시편 18편 29-30절 ] 석기현 담임목사
찬양:호산나찬양대

경향교회 카톡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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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내가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시편 18편 29-30절 / 석기현 담임목사
제가 가끔 시청하게 되는 ‘미드’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세 남자의 동거’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던 것이 있습니다.
  원래 영어로는 ‘Two And A Half Men’ 즉 ‘두 남자와 반쪽 남자’인데, 왜 우리나라 방송에서는 그렇게 번역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미국에서 꽤 인기 높았던 드라마입니다.
  거기에 보면 주인공인 찰리 하퍼와 그의 남동생 알랜 하퍼, 그리고 알랜 하퍼의 아들인 제이크 하퍼가 나오는데, ‘반쪽 남자’가 알랜 하퍼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아직 청소년인 제이크 하퍼를 가리키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성인인 알랜을 두고 혹 ‘반쪽 남자’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이유는, 그가 형 찰리의 집에 완전히 얹혀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랜은 이혼을 하면서 자기 전처에게 집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기고 월수입까지 거의 다 몰수당하는 빈털터리가 된 이후로, 형 찰리의 집에 자기 아들 제이크까지 데리고 들어와서 공짜로 숙식을 제공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니 찰리는 그런 동생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언젠가 한 번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알랜에게 새로운 여자 친구가 생기면서 찰리는 만약 자기 동생이 그녀와 결혼까지 하게 되면 자기 집을 나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알랜은 갑자기 그 여자 친구와 헤어지게 되었고, 그날 밤 형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고 맙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제 나한테 남은 것은 형 한 사람뿐이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찰리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지금까지 자기만 의지하고 살던 동생이 안 그래도 부담스러웠던 차에 언제까지일지 당분간은 계속해서 더욱 자기한테만 빌붙어 살 것이 뻔하게 되었으니 아무리 형제지간이지만 정말 미치도록 답답한 지경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찰리 역시 결국에 가서는 동생을 부둥켜안고 둘이 함께 울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현실적으로 누군가를 서로 ‘의지’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완벽하지 않고, 또 인생 자체가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알랜처럼 그저 ‘형에게 의지하는 것’ 하나만 가지고 산다면 실로 꼴불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을 의지할 때에는 의지하더라도 그 상태로 안주하지 말고, 그 도움에 힘입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고 끝내는 스스로 설 수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신자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오늘 연종감사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주신 말씀을 통해 기독신자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과연 어떻게 나타나야 정말 아름답고 올바른 모습이 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제대로 의지하는 신앙은 수세에만 몰려 있지 않고 능동적인 공세를 취하게 해 줍니다.

  29절의 말씀에 “29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시편에서 다윗이 ‘내가 주의 품속으로 피합니다.
 ’.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장면들을 여러 번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표현들은 마치 다윗이 매사에 도망만 치는 비겁한 약골, 조금만 급하고 두려워도 그저 하나님 날개 그늘 밑만 찾고 숨어들어가는 겁쟁이처럼 행동했다는 오해를 줄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다윗은 결코 그런 졸장부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다윗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해서 늘 적군 앞에서 하나님 쪽으로 도망만 치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배짱을 가지고 오히려 적군을 향하여 돌격하며 그 적진을 누비면서 압도하는 용맹을 발휘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어디 자기 몸 하나 숨길 수 있는 쥐구멍만 찾는 자세가 결코 아니라 담, 즉 성벽을 훌쩍 뛰어넘으면서 적군을 공략하고 성을 취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공세의 기개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원로목사님께서 어렸을 때를 회상하시면서 당신의 어머니, 즉 제 할머니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이런 일들을 가끔 간증하셨던 것을 여러분 중에도 기억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보면 서로 싸우게 되는 일들은 심심치 않게, 아니 일상에서 다반사로 일어나기 마련이었습니다.
  특히 원로목사님은 세 형제들 중에 제일 막내였고 꽤나 개구쟁이였던 것이 틀림없으니까 더욱 그런 일들이 흔했을 것입니다.
  사실 원로목사님 본인의 말씀에 의하면, 어쩌다 싸움에 말려든다기보다는 당신께서 그런 싸움을 도발하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그런 류의 사건을 하나 소개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원로목사님께서 자기보다 더 큰 동네의 어떤 형이랑 연날리기를 하다가 연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그 형이 연싸움에는 훨씬 더 능숙하니까 원로목사님의 연을 끊어버리게 되었는데, 약이 오른 원로목사님께서 일부러 무슨 반칙적인 수법으로 그 형의 연줄을 끊어버렸다고 했던가, 뭐 그런 사건이 있었다고 했지요?
  당연히 그 동네 형은 불같이 화를 내며 원로목사님을 붙잡아 혼내려고 달려들었고, 원로목사님께서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치셨습니다.
  그럴 때 원로목사님께서 어김없이 찾으신 피난처가 바로 어머니, 즉 제 할머니의 치마폭이었습니다.
  ‘엄마, 아무개 형이 나 때릴라 칸다.’ 하고 일단 그 어머니의 치마폭에 쏙 들어가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만사 안심이었습니다.
  그 쫓아오는 동네 형을 향하여 제 할머니께서 ‘우리 원태한테 와 그라노?’ 하고 오히려 야단치시든지, 혹은 원로목사님께서 그 형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을 알게 되면 그런 경우에도 ‘원태가 어리니까 철없어서 한 짓 아이가? 니가 쫌 참아라.’ 하고 달래면 그 형은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원로목사님께서 간증하신 사실인데, 저는 그런 상황에서 분명히 연이어서 전개되었을 또 한 가지 사실을 추측해 봅니다.
  그렇게 어머니의 치마폭에 안심하고 피신한 원로목사님께서 자기를 쫓아오던 동네 형이 더 이상 자기에게 덤벼들지 못할 것이라고 상황 판단이 되었을 때, 과연 그냥 조용히 끝내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땠을 것 같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원로목사님께서 그 동네 형에게 사과를 한다든지 혹은 최소한 속으로나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자숙하는 자세로 얌전히 계셨겠습니까?.
  아마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르기는 하지만 십중팔구, 원로목사님께서는 그 어머니의 치마폭에 숨은 채로 그 동네 형을 더 놀리지 않았겠습니까?.
  “용용 죽겠지?” 혹은 경상도사투리인 “에골 나지?” 뭐 이런 말들로 그 동네 형에게 오히려 대어들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그런 상황에서는 원로목사님이 아니라도 웬만한 아이들이 다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신변에 든든한 보호를 받게 되면, 그때부터는 그냥 피하기만 하는 수세가 아니라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공세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치마폭이 제공해주는 철석같이 믿음직한 지원을 받게 되면, 그 어떤 힘센 동네 형이라 해도 전혀 겁내지 않고 오히려 덤벼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을 제대로 의지하는 성도의 멋진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부모라 해도, 물론 자기 자식이 동네 친구들에게 쫓겨 오면 보호는 해주겠지만, 자식이 허구한 날 어디서 얻어맞고 울면서 부모의 품에나 달려든다면 속으로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 어떤 부모들도 걸핏하면 그저 자기 품에 도망쳐 와서 안기기만 하려는 자식보다는,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배짱을 가지고 또 몸도 튼튼해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그런 자식을 더 원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도 주님께 피한다는 것을 무슨 패배의식이나 기피주의에 빠지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라는 것이 겨우 내 한 몸 다치지 않도록 피신하고 숨어 지내게 해주는 정도밖에 안 되어서야 쓰겠습니까?.
  내가 절대로 원수에게 잡혀 죽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든든히 지켜 주심을 진심으로 의지하고 있다면, 당연히 마음 놓고 대적을 향해 돌격하고 담장을 넘어서 진격하는 공세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경향교회가 지난 45년 동안 달려온 걸음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원로목사님께서는 교회가 가만히 있는 것, 성도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습니다.
  ‘평화시대의 순교자’라는 멋진 표어도 그래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셔서 ‘반 시 동안의 고요한 시대’를 누리게 해 주실 때에도 결코 그 평화 안에 안주하지 않고 마치 환난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순교자적인 자세로 지사충성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경향교회는 항상 일거리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전도와 선교를 위해 늘 최선을 다하는 것은 기본이고, 천주교와 이단과 종교통합운동을 대적하는 싸움에 다른 큰 교단이나 대형교회들보다 항상 앞장서서 나갔습니다.
  그런 가운데 교회의 존속 자체가 흔들리는 위기도 몇 차례 있었지만, 그럴 때에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이 경향교회를 절대로 망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끝까지 하나님을 의뢰함으로써, 기적적인 구원을 체험하면서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런 구원을 두고 자화자찬하며 그냥 현 상태를 유지하게 된 것에만 만족했다면 경향교회는 벌써 문을 닫고 말았을 것이지만, 경향의 성도들은 그런 기회를 통해 수세를 공세로 바꿈으로써 전세역전의 더 큰 복을 누리며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역시 우리 뒤에서 든든히 받쳐 주시고 지원해 주시는 주님을 믿는 마음으로 그 어떤 환난과 위기 중에도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매사에 능동적으로 나아가고 특히 ‘적군’ 앞에서는 담대한 공세를 취함으로써, 그처럼 주님을 적극적으로 의뢰하는 자에게 반드시 주시는 ‘담을 넘는 승리’를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는 신앙은 우리가 실패했을 때에도 더 온전하게 회복되게 해 줍니다.

  30절에 기록하기를 “30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라고 했습니다.

  우선 본문의 서두에서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라고 했는데, 여기서 우리나라말에 ‘도’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원어로는 ‘길’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사실 ‘도’라고 번역해도 그것이 한자로는 ‘길 도’ 자니까 틀리지는 않지만, 보통 우리가 ‘도’라고 말할 때에는 ‘길’이라는 의미보다는 어떤 ‘진리의 도’를 먼저 떠올리게 되니까, 여기서는 그냥 ‘하나님의 길은 완전하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간단명료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들을 인도하시기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길은 그야말로 잘 닦인 도로처럼 완전합니다.
  그 길만 따라서 가면 절대로 아무 사고 날 일도 없고 분명히 우리의 목적지, 저 천국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순수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옛날 한글개역번역에는 ‘정미하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의 히브리어는 ‘아무 흠 없이 완전무결하다’는 뜻이니 이 경우는 지금 개역개정 번역이 더 낫습니다.
  앞의 ‘여호와의 길’ 즉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길과 마찬가지로 그 길에서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 역시 완벽하게 순수한 것으로서, 우리가 그 지침서대로만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 또한 아무 어려움도, 방황도, 사고도 없이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과 가르쳐 주시는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아무 문제없이 천당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완벽하게 살기란 사실 불가능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우리는 때로 깜빡 졸다가 ‘그 길’을 조금 벗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지쳐서 아예 주저앉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때로는 나 자신이 스스로 고장도 나고 혹은 다른 교인과 부딪혀서 사고를 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바로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피할 자리까지 이미 마련해 놓고 계시는데, 본문 끝에서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품을 우리의 비상대피소로, 또는 휴게소로 마련해 놓으시고, 그리로 피해오는 성도마다 방패로 막으시고 안전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노력은 하지만 결코 완벽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때로는 실족도 하고 때로는 실패도 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 편에서는 충분히 이해해 주시고 그 해결책까지 준비해 놓고 계시는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도로 곁에 비상주차장이 가끔씩 눈에 띕니다.
  정규 차선들이 있고 그 오른쪽 가에 갓길이 있지만 그 갓길보다 더 깊이 들어가서 차 한 대 정도 진입했다가 다시 나올 수 있을 정도의 주차장입니다.
  평상시에는 그런 비상주차장이 별로 의식되지 않지만 주행 중에 차가 고장이 나거나 타이어 펑크가 났을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요긴한지 모릅니다.
  그냥 갓길에다 대면 그 많은 차들이 고속으로 바로 곁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게 되니까 보통 위험한 것이 아니지만, 그런 비상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으면, 안심하고 차를 손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도로에는 정규 차선 이외에도 비상시를 대비한 공간들이 필요합니다.
  별일 없이 목적지까지 가기만 한다면 사실상 전혀 필요 없는 공간이기는 하지만, 모든 차들이 아무 사고나 고장 없이 다 목적지로 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갓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공간 역시 모든 차들이 아무 문제없이 달리기만 한다면 쓸데없이 돈과 시간을 더 들여 만들 필요가 없는 길이지만, 운전자들이 때로는 졸다가 차선을 조금 벗어났을 때에나 자기 차 곁으로 위험한 추월을 하는 차를 피해야만 할 때에는 그 갓길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휴게소 역시 그런 맥락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 역시 차가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데에 반드시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운전자들이 휴식을 취하게 되고 사고를 방지하는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고속도로에 이런 것이 없다고 가정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상주차장이나 갓길이나 휴게소가 없다고 해도, 사실 차를 몰고 가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정규차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운전 중 내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고만 내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길에는 훨씬 더 많은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게 되고, 혹 사고는 나지 않더라도 운전자에게 너무나 피곤한 길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차를 타고 다니는 길에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정로 외에도 비상시나 휴식을 위한 피난처가 마련되어 있어야 더욱 안전하고 쾌적한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저 ‘완전한 길’과 ‘순수한 말씀’만 주셨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그 길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면 그대로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 말씀에서 한 마디라도 놓치면 그대로 지옥행이 된다고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우리 중에 제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중 단 한 명도 구원에 이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가 하나님처럼 조금도 실수하지 않고 완전무결하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길과 그 말씀만 정확히 따라가면 틀림없다는 것은 잘 알지만 타락하고 무력한 죄인들에게 그것은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행로에도 ‘비상대피소’와 ‘휴게소’를 마련해 주시는데, 바로 당신의 품입니다.
  우리가 실족했을 때, 우리가 실패했을 때에도 당황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그 품으로 피하면, 하나님께서는 즉시 우리를 안아 주십니다.
  바로 그 품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 재정비를 하고 시행착오의 원인을 분석하여 수리를 한 후에, 다시금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도 이 경향교회를 섬기면서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몇 년 전의 ‘교회 사태’는 담임목사인 제게 가장 근본적인 책임이 있었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와중에도 저의 ‘방패’가 되어 주셔서 제게 피할 길을 열어 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일이 전화위복이 되어 경향교회가 더 새로운 모습으로, 더 큰 비전과 함께 새 출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교단 사태’ 역시 마찬가지로 따지고 보면 제가 교회와 신학교 사역에만 정신을 쏟느라고 교단에 대해서는 등한했던 과오에 기인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저의 실수를 오히려 덮어 주시면서, 결과적으로는 만약 이번에 ‘제신노회’를 설립할 기회가 없었더라면 결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는 전화위복이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이 피난처, 우리가 실수했을 때, 우리가 시험에 빠졌을 때, 우리가 큰 환난을 당했을 때에도 그 때문에 완전히 쓰러지지 않도록 우리를 향해 활짝 열어 주시는 이 품은 얼마나 고마운 것입니까?.
  우리는 그 하나님의 품에서 때로는 보호도 받고, 때로는 용서도 받고, 때로는 격려와 힘을 받음으로써 다시금 그 달리던 길로 재진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가야 할 바른 길을 보여주시고 꼭 지켜야 할 말씀도 가르쳐 주셨지만, 그 길과 말씀을 따라가다가 때때로 실수하고 약하여질 때를 위해서도 오히려 당신의 사랑의 품을 피난처로 제공해 주시는 이 놀라운 은총에 힘입어서 그 어떤 일을 당할지라도 이 신앙행로를 끝까지 완주해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은 이처럼 오묘하고도 은혜롭습니다.
  그것은 걸핏하면 하나님의 품으로 도망치기만 하고 그 품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안주하려는 ‘마마보이식의 신앙’이 결코 아니라, 그 도우심을 발판으로 삼아 그 환난이 있기 전보다 오히려 더욱 공세를 취하는 적극적인 신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열심을 내어 신앙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무지나 연약 때문에 큰 실패를 당하게 된다고 해서 그대로 망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런 우리를 꾸짖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더욱 당신의 품안에 꼭 안아 치유해 주시는 사랑을 체험하는 칠전팔기의 신앙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안전제일주의로 피해 있기만 하는 것’은 항상 최악의 선택이 될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결국 마귀의 밥이 되는 순서밖에 남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무엇을 해 보다가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죄가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우리의 실수나 실족은 하나님께서 다 처리해 주시고 오히려 그런 실패까지도 합력하여 결국은 선이 되도록 실로 오묘하게 역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찬송가 449장의 고백대로, 그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항상 ‘즐겁고 복된 길’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해를 당하거나 고생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주님의 위로와 안위’를 받고 ‘오직 주를 힘입고 그 말씀을 잘 배워 따름’으로써 끝내 더 ‘풍성한 은혜’를 받고야 맙니다.
  또한 찬송가 342장의 고백대로, 아무리 우리가 궁지에 몰리고 때로 큰 낭패까지 당할지라도 그처럼 ‘구주의 힘과 그의 위로를 빌기만’ 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편에 서서 항상 도와’ 주십니다.
  그러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뢰하는’ 성도는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낙심치 않고’ 적군의 담을 뛰어넘으면서 ‘늘 전진’하고 또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45년을 그래 왔던 것처럼, 다가오는 2019년에도 역시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무조건, 끝까지 ‘내 하나님을 의뢰함’으로써 ‘적군을 향해 용감하게 달려’ 나가고, 그 ‘방패 뒤로 피하는’ 성도로 하여금 ‘완전한 길’로 회복하게 해 주시는 복을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