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12-30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로새서 3장 22절 – 4장 1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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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12-23
2018′경향의 강단(55) (2018년 12월 30일 / 주일 대예배)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로새서 3장 22절 – 4장 1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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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로새서 3장 22절 - 4장 1절 / 석기현 담임목사
오늘 우리는 ‘연종주일’을 지키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오늘 밤예배도 ‘연종감사예배’로 드리게 됩니다.
  사실 2018년이 공식적으로 끝나는 날은 내일이지만, 현실적으로 기독신자의 삶은 ‘주일’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까닭에 12월 31일 대신 그 해의 마지막 주일에 ‘연종’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신자가 일주일의 7일 중에서 당연히 주일을 가장 소중히 여기면서 성수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6일 동안에는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주일’만 ‘주의 날’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엿새 역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자답게 살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고 일깨워 준 사실이 그런 의미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의 전후문맥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의 ‘엿새 동안’의 삶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 중에 가장 흔한 직업을 통계 내어 보았더라면 종 또는 노예가 절대다수로 나왔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로마제국 산하의 사회구조 자체가 수많은 노예와 종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가, 당시 예수님을 믿고 신자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 하층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비록 숫자는 상대적으로 훨씬 적었겠지만, 초대교회 안에는 또한 그런 종들을 거느리고 있는 주인들 역시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주인과 그 종들이 같은 교회에 다니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종’들과 ‘상전’들이 주일이 아닌 ‘엿새’ 동안의 일상을 통해 각자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기독신자가 비단 주일뿐 아니라 평소의 엿새를 통해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기독신자로서의 양심’을 자신의 생업 현장에서 발휘해야 합니다.

  3장 22절과 23절에 기록하기를 “22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선 “종”들을 향하여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명했습니다.
  바로 앞의 문맥에 나오는 ‘자녀들의 부모를 향한 순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말씀도 종이 주인의 모든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일단 신앙문제는 제외해 두고 그 나머지, 즉 자기가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모든 일에 대하여 순종해야 함을 가리키는 말, 즉 ‘주인이 너희에게 일을 시키는 말은 다 순종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한술 더 떠서 그처럼 주인에게 순종할 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라”고 덧붙였습니다.
  사실 종이란 오늘날 우리가 볼 때는 도저히 직업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직종입니다.
  당시의 종이나 노예는 월급은 고사하고 겨우 먹고 살 것만 제공받았으며 주인의 기분에 조금만 거슬려도 생사여탈까지 일방적으로 당하는 처지에서 하루살이 같은 목숨을 연명하고 있던 처지였습니다.
  오늘날 직장생활에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으면 파업을 일삼고 심지어 ‘을의 갑질’까지 벌이는 사람들한테 만약 초대교회 시절의 노예들이 하던 일을 직장이라고 주면 아마 첫날이 지나가기도 전에 모두 다 스스로 목매달아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런 종과 노예로 살고 있던 초대교회 교인들을 향해 ‘상전에게 순종할 뿐 아니라 눈가림으로 대충 일을 해서도 안 된다.’라고, 실로 기가 막히는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정말 ‘눈가림’만 하면 충분할 것 같지 않습니까?
  영어로 표현하자면 그야말로 ‘Why not?’입니다.
  주인이 보지 않는 데서 더 열심히 일한다고 봉급이 늘거나 자기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어차피 평생 남의 손에 달린 목숨을 그저 부지해 나가기만 하면 그만인데, 도대체 눈가림만 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불신자라면 안 될 이유가 아무 것도 없겠지만, 성경 말씀은 뜻밖의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바로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종이 자기 상전의 눈을 속이려 하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저 위에 계신 주님을 속이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참된 신자라면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의 신앙’을 지켜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불신 상전을 속이는 것쯤은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눈이 엿새 동안에는 자기를 보고 있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아무 노동의 대가도 받지 못하고 노동자의 권리라고는 조금도 주장할 수 없는 ‘직업 같지도 않는 직업’을 가지고 살던 종과 노예들조차 그들의 주인을 섬길 때에 그런 일마저 마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양심적으로 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남자들이 군대에 갔다 오면서 배우게 되는 대표적인 요령이 바로 ‘대강 철저히’입니다.
  그저 상사에게 야단맞지 않을 정도로, 그저 고객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까지 ‘대강’만 하면, 그 정도까지만 ‘철저히’ 하면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적당히 ‘눈가림’만 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 이 사회에서는 가장 똑똑한 요령이요 최선의 비결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만약 그 이상 ‘진짜로 철저히’ 한다면 천하에 없는 바보요 사업을 밑지게 만들기 십상이라는 사고방식이 불신자들의 직장과 사업에서는 철칙처럼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악한 직장생활이라 하더라도, 바로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눈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앙과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로서의 양심이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직장이나 사업처에서 꾀를 부리고 남을 등쳐먹으려 하면, 그것은 주인이나 고객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바로 우리 주님을 속이려는 것과 똑같은 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생각에 이것은 오직 종업원에게 부당한 못된 사장과 나 사이의 문제이고, 우리 생각에 이것은 신앙과 아무 관계없는 불신 고객과 나 사이만의 문제인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 모든 것이 다 주님 앞에서 각자의 양심에 직결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직장만큼은, 내 사업처만큼은, 양심을 좀 어기고 살아도 되는 곳이라고, 양심 문제에 있어서는 면제받은 특별구역 같은 곳이라고 착각하면 결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감찰하시는 일곱 개의 눈’이 다른 곳은 다 살피고 있을지라도 이곳만큼은 보지 못하고 있다고 속단하는 것과 똑같은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직장에서 눈가림을 하고 엿새 동안에 상사나 고객을 속이면, 그것은 바로 교회에 와서 주님을 속이려 하고 주일에조차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과 근본적으로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참된 신자라면 항상 주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마땅하듯이, 엿새 동안 생업의 현장에서도 저 위에 계신 주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신자로서의 깨끗한 양심을 꼭 발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성실과 근면’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게 되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3장 24절과 25절에 “24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기업의 상”이란 신자가 “주께 받게” 되는 금세의 복과, 또 더 나아가서 궁극적으로 누리게 될 천국의 상급을 가리킵니다.
  지금 남의 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지금 그 육신의 상전을 마치 주님께 하듯 성실한 양심으로 섬기면 그 보답은 주님께로부터 직접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엿새 동안의 삶을 통해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에 대한 보응 역시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는” 즉 오직 그 중심을 보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그에 응당한 “불의의 보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비록 현실적으로는 ‘육신의 상전’을 섬기면서 엿새 동안 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곧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까 종들과 노예들을 향해 그들의 생업을 두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양심을 따라서 일하라.’고 명령하셨으니, 과연 그렇게 일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그 ‘상’과 ‘보응’을 내리시는 분 역시 실제적으로는 육신의 상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 당시 종이었던 신자들에게 있어서 “기업의 상”이라고 할 때에는 아무래도 ‘내세에 누리게 될 상급’에 해당되는 퍼센티지가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었고, 노예의 경우에는 그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보다는 훨씬 더 합리적인 노사 구조 안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며 자유시장경제 체제 하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오늘날의 신자에게 이 말씀이 적용될 때에는, ‘금세에서 누릴 상급’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직분을 통해 봉사할 수 있는 것도 상이고, 가정이 화목하고 평화로운 것도 상인 것과 마찬가지로, 직장에서 승진하고 사업의 수익이 느는 것 역시 주님께서 내려 주시는 ‘기업의 상’임에 분명합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직장이나 사업을 통해 금세의 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곳은 정말 매일같이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고 매사에 주님을 대하듯이 손님을 정성껏 맞이해야 하는 곳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은 주님 앞에 하듯이 하지 않으면서, 월급만은 주님께서 이 직장을 통하여 더 올려 주시고, 이익만은 주님께서 이 사업처를 통하여 더 풍성하게 내려 주시기를 바란다면 그 얼마나 뻔뻔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반면에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께 하듯 사장을 위해 일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듯이 고객을 맞이한다면 그런 생업에 복이 넘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사업에도 ‘고객은 왕이다.’라는 구호가 있지 않습니까?
  그저 구호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고객을 왕처럼 대해 주는 서비스 좋은 가게에는 발걸음이 절로 더 끌리게 되는 것이 자동적인 반응입니다.
  고객을 왕처럼만 대해도 그런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면, 고객을 주님께 하듯 대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거래처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신용’이 생명입니다.
  어떤 물품을 어느 날까지 납품하도록 계약을 한다든지 얼마의 금액을 언제까지 지불하도록 약속을 했으면, 비록 그 때문에 당장은 손해를 보는 일까지 생기더라도 일단 그것을 먼저 지켜야만 앞으로 더 많은 주문을 받을 수 있고 더 큰 대출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욱이 거래처 사람들을 주님을 대하듯이 신실하게 대하고 바이어(buyer)들과의 약속을 주님께 지키듯이 철저히 지키면서 회사와 공장을 운영한다면 어떻게 그런 기업에 주님께서 ‘기업의 상’을 쏟아 부어 주지 않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복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올리는 장소는 대부분 예배당 안이지만, 그 복을 실제적으로 받게 되는 곳은 바로 엿새 동안의 삶이 진행되는 집과 학교와 회사와 사업처입니다.
  그러니 정말 자기가 기도드린 대로 복을 받고 싶으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내려 주실 곳에서 복을 받을 수 있는 자세를 지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집과 학업과 생업에 복을 주십시오.’라고 기도만 해 놓고 주부로서, 학생으로서, 직업인으로서 성실 근면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런 외식적인 기도에 응답해 주실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매사에 ‘각 사람이 그 행한 대로 갚으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기업의 상을 거의 누리지 못하는 종과 노예로 살아야 했던 초대교회 신자들까지도 끝까지 모든 일을 ‘주께 하듯’ 성실히 행하게 하신 후에 결국 천국의 유업으로 완전히 갚아 주셨습니다.
  하물며 그들보다 몇 배 몇 십 배 더 좋은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더더욱 열심히 일하며 살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불의’를 행한 자에게는 ‘불의의 보응’으로 갚아 주시고 오직 ‘주를 섬기듯이’ 일한 자에게는 그 행한 일에 대하여 조금도 손해되지 않도록 정확히 계산하여 금세와 내세에서 완전히 갚아 주시는 주님 앞에서 엿새 동안 늘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하는 신행일치를 나타냄으로써, 그 응분의 상급으로 주시는 복을 더욱 풍성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인’이심을 엿새 동안 늘 명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4장 1절 말씀에 “1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초대교회에는 종 혹은 노예까지 거느리고 있는 주인들 즉 “상전” 된 자들 역시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노예 제도란 것이 잘못된 것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사도 바울에게 당시의 사회 구조 자체를 변화시킬 의도는 전혀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참된 의무는 이 세상의 모순된 사회제도 자체를 개조시켜 완벽한 유토피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세상 속에서도 천국 소망을 보여주는 빛이 되고 천국 행복의 맛을 내어 주는 소금이 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 당시 신자로서 세상의 상전이 된 자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최선은 바로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푸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만 해도 신자로서 돋보이는 상전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은, 로마제국 산하의 사회에서는 주인이 자기 종이나 노예들에게 ‘의’나 ‘공평’을 베푼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이해조차 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소위 가장 현명하다고 이름난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까지도 “노예는 말할 수 있는 도구다.”라는 정의를 내렸을 정도이니, 상전들이 자기 종들을 조금이라도 사람 취급해 줄 수 있는 여지란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었습니다.
  특히 ‘의와 공평’이란, 사람들 중에서도 자유민, 특히 로마 시민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고귀한 개념이었는데, 그것을 자기가 부리는 짐승이나 도구 같은 존재에 불과한 노예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도 안 될 소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기독신자 상전들만은 그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네들에게도 역시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하늘의 상전’께서 원래는 도저히 ‘의나 공평’으로 대접 받을만한 대상이 될 수 없었던 자신을 그 얼마나 선하게 대해 주셨는지를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신자 상전은 자기의 종들에게도 그처럼 대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까 3장 22절에서 종들에게 말할 때에도 “(너희) 육신의 상전”이란 언급이 있었습니다.
  이 “육신의”라는 수식어는 그 종 된 신자들의 입장에서도 진짜 상전은 따로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 후에 24절에서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고 그 진짜 상전을 명확하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이 땅의 상전들이 잠시 그들의 육신은 제어하고 있다 할지라도, 진짜 하늘의 상전이 그들의 금세와 내세를 주장하고 계심을 깨닫고 있을 때, 바로 그 영원한 주인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 땅에서 종의 직분까지도 오직 성실한 마음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상전이든지 종이든지 양쪽 다 자기의 진짜 주인은 똑같은 한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만 상전으로서든지 종으로서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과 처지에서 올바로 처신하고 최선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눅 16:13)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주인으로 섬길 수 없고, 사람이 남편과 하나님을 동시에 주인으로 섬길 수 없고, 사람이 자식과 하나님을 동시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는 것은, 직장이나 사업처에서도 꼭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내 생명과 생활의 주인은 항상 어디서나 단 한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이 사실을 가장 똑똑하게 상기해야 할 곳이 바로 엿새 동안 일하는 생업의 현장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곳이야말로, 또 하나의 주인 즉 ‘육신의 상전’이 예수 그리스도 즉 ‘하늘의 상전’을 잊게 만드는 시험이 가장 강하게 일어나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를 상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왕처럼 모시면서 키우게 되면서 자기 아들딸들이 예수님 대신 실제적인 ‘집주인’이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성적을 매기고 학생생활기록부를 기록하는 선생님이 나의 대학진로를 결정짓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비록 ‘Student For Christ’라는 멋진 이름은 달고 있을지라도 엿새 동안에는 ‘그리스도’를 까마득히 잊어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학교입니다.
  직장인에게는 내 밥줄을 거머쥐고 있는 ‘사장’ 진짜 주인처럼 보이는 곳이 바로 회사입니다.
  내 수입과 생활과 여생이 어떻게 될지를 결정하는 주인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여겨지기 지극히 쉬운 곳이 바로 내가 벌이고 있는 사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만 예수님을 유일한 주인으로 모셔야 할 ‘주의 날’이라고 착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집의 주인이시요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다.’라는 표어를 걸어 놓고 사는 곳이 자기 집안만으로 제한되어서도 안 됩니다.
  일주일 중 엿새 동안, 그리고 하루 일과 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각자의 집과 학교와 직장과 사업처야말로 ‘내가 모시고 살고 있는 단 한 분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지’가 가장 분명하고 솔직하게 드러나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처럼 가정과 학교와 일터에서 지내는 엿새 동안에도 진정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진짜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의식하는 가운데 ‘함께 한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노다 히로’라는 일본군 소위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에도 일본의 패전을 인정하지 않고 오랫동안 필리핀의 정글 속에 숨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이 되어서 옛날 자신의 직속상관이 직접 찾아와서 ‘투항 명령서’를 전달하자 그제야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2년 전에 그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요코이 쇼이치’라는 일본군 하사 역시 종전 후에도 괌의 정글 속에서 28년 동안 살다가 현지 어부에게 발견되어 결국 일본으로 송환되었는데, 본인은 귀국할 때까지 미군에게 포로가 된 줄 알고 벌벌 떨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일본에서는 그 두 영웅을 서로 만나보게 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오노다 소위가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천황께서 하사하신 총검을 녹슬게 만든 자와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발견될 당시 요코이의 소총은 완전히 녹슬어 있었고 입고 있던 옷도 나무껍질로 만든 누더기였습니다.
  하지만 오노다는 ‘투항 명령서’를 받을 때까지 일본군 복장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으며 99식 소총을 사격 가능한 상태로 정비해 놓았고 5백여 발의 탄환과 대여섯 개의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일본도’는 반짝반짝 잘 닦여 있었고 날까지 시퍼렇게 서 있었습니다.
  똑같은 군인이었지만, 요코이 하사는 매일 매일을 그저 생존하기에만 바쁘게 보낸 반면 오노다 소위는 29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정글 속에서 보내면서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천황을 모시는 군인’이라는 투철한 사명의식과 자부심을 지키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하물며 군국주의 국가의 군주를 섬겼던 일개 군인이 그 정도였다면, ‘만왕의 왕’이시요 ‘주 중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자는 당연히 그보다 훨씬 더 신실하고 충성스러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엿새 동안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우리 아빠 엄마는 정말 예수님을 잘 믿는 분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도록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급우들 모두가 ‘쟤는 기독신자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만큼 학교에서도 최소한 식사시간만이라도 예수님께 감사기도를 올리고 있습니까?
  직장생활을 하면서 꼭 주일을 성수하고 회식 자리에서도 술을 거절하는 모습을 통해 여러분의 진짜 주인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신 것을 여러분의 사장이나 동료들에게 보여 주고 계십니까?
  기업을 경영하면서 관계하게 되는 여러분의 고객이나 거래처나 부하직원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영광을 혹시라도 가리지 않으려고 늘 조심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결코 주일만 예수님을 모시는 ‘주일 신자’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당연히 ‘1년 12개월 52주 365일’ 내내 ‘주 그리스도를 섬기며’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엿새 동안 집에서 가사가 힘들다고, 남편은 돈 못 벌어온다고 하구한날 한숨만 내쉬면서 보내서는 안 됩니다.
  엿새 동안 학교에 다니며 마음껏 공부하여 실력을 키울 수 있는 특권적인 기회를 두고 ‘입시 지옥’이라고 스스로 저주하면 안 됩니다.
  엿새 동안의 직장생활을 그저 지겹고 짜증나는 스트레스의 연속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엿새 동안 ‘비즈니스’라는 문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업의 현장이 그저 먹고 먹히기 위해서 살벌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더 잘 속이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곳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이아말로, 여러분이 엿새 동안 우리 주님을 가장 자주, 가장 가까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곳이야말로 예수님께서 항상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시는 줄 알고 ‘신앙인으로서 양심’을 지켜야 하는 곳이며, 바로 그곳이야말로 ‘성실과 근면’을 발휘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기업의 상을 받아 누리는 곳이며, 바로 그 곳이야말로 여러분이 진정 ‘예수님만을 진짜 내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지 아닌지가 완전히 판가름 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알라’, ‘너희에게는 하늘에 상전이 계시느니라’ - 이 말씀을 따라 엿새 동안의 삶을 통해서도 항상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행일치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