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축하예배 2018-12-25 “누가복음 1장 39-56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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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축하예배 2018-12-23
2018′경향의 강단(54) (2018년 12월 25일 / 성탄축하예배)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누가복음 1장 39-56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9:00 / 2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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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누가복음 1장 39-56절 / 석기현 담임목사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유명한 오페라에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라는 제목의 무척 아름다운 이중창이 나옵니다.
  백작부인이 “부드러운 산들바람이”라고 편지에 쓸 내용을 한 구절씩 불러 주면 스잔나가 “부드러운 산들바람이”라고 복창하면서 받아 적는 상황이기 때문에 두 여인 사이에서 가사가 두 번씩 반복되는 노래입니다.
  이 오페라는 전혀 모르더라도 혹시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보셨으면 거기서 주인공 앤디가 소장의 사무실에서 레코드판을 틀어 교도소 내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전 죄수들에게 들려 준 노래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 노래를 처음으로 듣게 된 앤디의 친구 레드는 나중에 “나는 지금도 그때 두 이탈리아 여자들이 부른 노래의 내용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노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냥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것은 마치 상상도 할 수 없는 먼 곳으로부터 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우리가 갇혀 있는 삭막한 새장의 담벽을 무너뜨리는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 쇼생크에 있는 우리 모두는 자유를 느꼈다.”라고 회상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처럼 ‘가사는 알 수 없고 선율만 아름다운’ 이중창이 아니라, 그 가사부터가 실로 영감에 넘치는 너무나 멋진 이중창이 등장하는데 바로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서로 만났을 때 부른 노래였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예수님의 수태고지를 듣게 된 마리아는 자기 친족 엘리사벳 역시 잉태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것을 확인해 보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동정녀로서 잉태하게 된 마리아와 늙은 몸으로 아이를 배게 된 엘리사벳이 만나게 되자, 그야말로 이심전심 서로 통하면서 마치 오페라의 이중창 같은 장면이 실제로 벌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두 여인이 번갈아가면서 부른 노래들은 무슨 신세타령의 가요나 오페라의 아리아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피차 하나님께서 보내 주실 메시아의 탄생을 믿고 기다리는 가운데 그들의 성령 충만한 심정을 그대로 고백하는, 실로 아름다운 찬송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이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이중창 화답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을 두고 참된 성도 사이에 절로 서로 공감하게 되는 깊고 뜨거운 영적 감흥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는 성탄절을 통해 죄인을 친히 찾아와 주신 구세주를 ‘최고의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우리는 엘리사벳의 노래에서 바로 그런 기쁨을 충만히 느낄 수 있습니다.
  39절부터 45절에 “39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수태고지를 듣자마자 즉시 엘리사벳의 집으로 갔는데,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 문안인사를 나누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던 세례 요한이 마리아의 태중에 있던 예수님의 방문을 받고 “복중에서 뛰놀았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태아의 움직임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기적이었으며, 또한 태아였던 세례 요한이 이미 그때부터 그 얼마나 성령 충만한 아기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엘리사벳 역시 성령이 충만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자기 복중에 있는 태아의 움직임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즉각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바로 그 벅찬 심정을 노래로 표현하게 되었는데, 비록 우리말 번역에는 산문처럼 되어 있지만 원문을 보면 거의 운문 즉 노랫말에 가까움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찬송의 서두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가리켜 “내 주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즉 그녀는 아직 마리아 태중에 있는 아이를 가리켜 벌써부터 “내 주”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녀는 마리아의 방문이 그저 친척지간에 흔히 있는 만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과 자기 백성을 구원해 주실 메시아와 그 메시아를 잉태하고 있는 모친의 방문임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즉시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엘리사벳으로 하여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도의 흥분과 기쁨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는데 그런 감정은 비단 엘리사벳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라고 그녀가 노래한 것처럼 그녀 뱃속의 세례 요한도 같이 느꼈던 감정이었습니다.
  나중에 오로지 구세주의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순교까지 하면서 그의 평생을 다 바쳤던 세례 요한은 이미 자기 어머니 엘리사벳의 복중에서부터 예수님의 탄생을 두고서 성령의 감동으로 이처럼 크게 기뻐할 줄 알았던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멋진 영적 반사신경이 아니었겠습니까?
  아직 태중에 있는 상태에서, 아직 그 무엇을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맛보고 하는 오감을 배우기도 전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찾아오심을 즉시 깨닫고 기뻐할 줄 아는 신비한 성령의 감각을 벌써부터 발휘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태아의 기쁨을 감지한 어머니 엘리사벳의 입에서도 태중의 아이와 함께 기쁨에 겨워 흥분하고 격앙된 어조의 찬송이 절로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찾아와 주는 것은 항상 기쁜 일이지만, 특히 어떤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에 방문해 주는 것은 몇 갑절로 기쁜 일이 됩니다.
  자식이 부모님께 병문안을 가면 부모님은 으레 “바쁠 텐데 뭣 하러 또 왔니? 오지 않아도 되는데.”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 그런 말씀은 ‘이렇게 또 찾아와 주어서 정말 기쁘다.’는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까지 찾아와 주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감히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너무나도 뜻밖의 방문이며 죄인으로서는 문자 그대로 감지덕지할 수밖에 없는 깜짝 이벤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남자들이 군대에 가서 생전 처음으로 머슴아들만 모여 있는 그 삭막한 사회에서, 게다가 다들 자기보다 높은 계급의 선임들로만 둘러싸인 그 압박감 속에서 살다가 드디어 가족의 첫 면회를 받게 되면 그 전날 밤은 잠을 설칠 정도로 설렐 수밖에 없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변호사가 찾아와서 격려를 해 주고 그를 석방시켜 주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할 것을 약속해 준다면 그보다 더 반가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이 죄악의 장망성에 갇혀서 꼼짝 못하고 사망의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던 우리에게 구세주 예수님께서 화육강세 해 주신 것은 그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것도 그냥 잠시 면회만 하고 다녀가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몸을 대신 바쳐서 우리를 이 무서운 저주의 사슬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인류 역사상 그 누가 죄인에게 이처럼 반갑기 그지없는 방문을 해 준 적이 있었습니까?

  성탄의 기쁨이란 이래서 기뻐하고 저래서 기뻐하는 식으로 이것저것 이유를 찾아보는, 그런 느리고 무딘 감각 가지고는 결코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 문안에 들어오셨다는 사실을 감지하자마자 즉각 기쁨에 넘쳐 꿈틀거리지 않을 수 없었던 세례 요한처럼, 저와 여러분도 주님께서 이 땅에 아니 바로 내 곁에까지 찾아와 주셨다는 이 엄청난 사건 앞에 그저 반사적으로 황홀한 기쁨에 넘쳐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영적 감성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찬 115장) - 실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은 오직 구세주께서 죄인 구원을 위해 친히 화육강세까지 해 주셨다는 바로 이 소식에 있음을 깨닫고, 예수님 탄생 소식을 듣는 그 순간 단순한 어린아이처럼 즉시 기뻐하며 크게 즐거워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성탄절을 통해 독생자까지 세상에 보내 주신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립니다.

  바로 이것이 이어지는 마리아의 찬송에 구절구절 넘쳐흐르고 있는 사실입니다.
  46절 이하 56절에 “46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마리아는 지금 자기의 “영혼”“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두 단어는 특별히 구별되는 의미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 거의 동의어라 할 수 있는 것을 시적인 대구를 이루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서, 마리아의 찬송은 입술로만 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가장 정직한 ‘심령’이 감동된 노래임을 보여 줍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녀는 하나님에게 세 가지 내용으로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먼저 49절과 50절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거룩하심과 자비하심’, 이 세 가지 대표적인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했습니다.
  그녀는 “능하신 이” 즉 ‘전능’하신 하나님, 원래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름이 거룩하신” 하나님, 그러나 당신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한없는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그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대한 구속사’ 성취를 위하여 “큰 일을 내게 행하시려고” 자기를 택해 주신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찬양을 드리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성도가 그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제일 먼저 나타내게 되는 본능적 반응입니다.

  이어지는 51절부터 53절에서 마리아는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사람은 “권세 있는 자”“비천한 자”, “부자”“주리는 자”처럼 어떤 외적인 조건 때문에 차이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사람들인 까닭에 서로 저 잘났다고 뻐기고 남을 멸시하며 차별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인간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그런 차이와 차별이 “그의 팔로 힘을 보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히 평정됨을 인하여 찬양을 올렸습니다.
  만약 이 존재 세계에서 사람이 최고의 주권자라면 그 같은 불평등은 결코 해소될 길이 없을 것이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신 왕’으로 보내어 주신 메시아를 영접하는 백성은 이 세상에서의 비천함과 가난함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될 수 있으니 이 또한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제목인 것입니다.

  끝으로 마리아는 54절부터 56절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합니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도와” 주실 것을 “우리 조상에게 말씀”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반드시 “기억”해 주심으로써 결국 마리아 자신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런 “긍휼”의 언약 성취, 즉 구세주를 통한 구원 운동은 앞으로도 이 세계사 속에 “아브라함과 그 자손” 즉 하나님의 택자들이 이어질 동안 “영원히” 계속될 것이며, 그것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그런 신실하신 구속역사를 인하여 또 한 번 큰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벳도 마리아를 향하여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라고 했듯이, 이런 모든 것들을 생각할 때 마리아 스스로도 정말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아” 주셨으니 그 심령 속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듯이 넘치는 기쁨이 절로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름 없는 평민이었고 더구나 사회적으로 아무 힘없는, 문자 그대로 ‘비천한 여자’였지만 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역사하실 때는 이제 더 이상 ‘낮은 상태에 있는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자기 속에 잉태시켜 주신 메시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풀어 주실 ‘큰 일’과 ‘놀라운 긍휼’과 ‘약속의 성취’를 생각할 때 마리아는 정말 자기야말로 세상에서 최고로 복 받은 자라고 감격하면서 이처럼 조목조목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을 불렀던 것이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본분을 망각하게 되면 그 존재 의의와 가치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가장 큰 이유, 최고의 동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곧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보내어 주신’ 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엄청난 사실 앞에 절로 터지게 되는 감사와 찬양입니다.

  예수님의 화육강세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지존하시고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은혜와 자비가 충만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죄인인 저와 여러분이 감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급상승 회복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덕분에 우리는 이제 과거의 비천한 인생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이 ‘왕 중의 왕’을 모시고 사는 백성은 이제 더 이상 가난하거나 힘이 없다고 해서 남보다 더 비참한 인생이라는 딱지를 달고 다닐 필요가 전혀 없는, 존귀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구세주로 찾아와 주심으로써 창세기 3장에서 타락한 인간에게 베풀어 주셨던 메시아의 언약은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주님께서 다시 재림하셔서 성도들에게 영생 구원을 베풀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 또한 더욱 확고부동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 우리가 마리아보다 복을 덜 받은 사람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가져다 준 은혜와 복은 마리아에게나 저와 여러분에게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찬 304장) - 당신의 사랑하시는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보내어 주신 이 성부 하나님께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마리아의 찬가’는 영어로 ‘마그니피카트’(Magnificat)인데, 이것은 이 노래를 라틴어로 번역할 때 제일 처음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말로는 그냥 ‘찬가’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지만 그 어원을 따져보면 ‘magnify’라는 단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는 ‘확대하다, 크게 보이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인데, 이것이 고어에서는 ‘찬미하다’는 뜻으로도 쓰인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은 ‘하나님을 최대한 크게 보이게 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물론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원래의 크기 그대로, 원래의 무한한 위대하심에 걸맞도록 찬양 드릴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할 때에는 어쨌든 사람의 입술로 묘사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써, 사람의 정서로 표현할 수 있는 최고를 다 동원하여 어찌하든지 그 하나님이 더욱 크게 보이도록 찬양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은 정말 영적으로 이심전심이 되는 가운데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는’ 찬송을 서로 화답했습니다.
  그녀들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을 크게 높이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를 줄 알았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성탄절은 가히 ‘세계적인 명절’이 되어 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과연 어떤 ‘영혼과 마음’으로 이 절기를 지키고들 있겠습니까?
  그들 대부분이 찾는 ‘성탄의 기쁨’이란 그저 파티나 선물에만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인사와 축하’란 그저 사람 사이의 예의나 친분 정도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이 절기의 진짜 주인공은 제쳐놓고 저희들끼리만 흥청망청 즐기는 불순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구세주께서 친히 죄인을 찾아와 주셨다.’는 소식이야말로 성탄의 참된 기쁨이며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보내어 주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성탄절을 통하여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만 할 이유이며 또한 사람은 바로 이 본분을 평생토록 날마다 지켜야만 합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에 우리 성도들의 심령은 바로 이런 흥겹고도 뜨거운 기쁨과 이처럼 깊고도 진실한 고백에 영적인 공감대를 느낄 줄 알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소식 앞에서 ‘내 마음이 내 구주를 기뻐하는’ 감격의 찬송을 부르며 성자를 보내 주신 사랑을 인하여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는’ 감사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심으로써, 이 성탄절에 ‘땅에서 그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에게 내려주시는 평화’의 은총을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