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12-23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하매” 누가복음 4장 31-44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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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12-23
2018′경향의 강단(53) (2018년 12월 23일 / 주일 대예배)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하매” 누가복음 4장 31-44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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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하매”

누가복음 4장 31-44절 / 석기현 담임목사
세상의 연가들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게 되는 것을 아쉬워하는 가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요즘 대중가요는 잘 모르겠지만, 소위 ‘7080 세대’의 히트곡 중에 “눈 감으면 떠오르고 꿈을 꾸면 나타나고 안 보면 보고 싶고 헤어지기 싫어지네.”라는, 제목이 ‘좋은 걸 어떡해’라고 기억되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 시대에는 그보다 좀 더 진하게“가지 마오 가지 마오 나를 두고 가지를 마오 이대로 영원토록 한 백년 살고파요... 정을 두고 가지를 마오.”라고, 아주 원색적으로(?) 그런 아쉬운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조상들은 거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라고 아예 대놓고 위협(?)까지 하면서 떠나는 연인을 붙잡아 두려 했었습니다.

  그런 연인 외에도 만나게 된 후에 헤어지기 싫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일손 좋고 성실한 종업원이 개인 사정으로 가게를 떠나야겠다고 말해 올 때라든지,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나 친구와 정겨운 대화를 나누다가 작별의 시간이 왔을 때와 같은 경우입니다.
  이처럼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믿음직한 사람을 만나게 되거나 혹은 흉금을 털어놓고 서로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찌 하든지 그 사람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방문하셨다가 그곳을 떠나시게 되었을 때에 그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했던 것도 바로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꼭 떠나셔야만 했습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붙잡아 두고 싶어 했던 이유나, 예수님께서 부득이 떠나셔야만 했던 이유는 사실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제 곧 주님의 초림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왜 예수님이란 사람은 한번 만나고 제대로 알기만 하면 결코 다시는 놓치지 않고 영원히 모시고 살고 싶은 분이 되시는지 그 이유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영적 세계를 압도하시는 권위와 능력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직한 주님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31절부터 37절에 기록하기를 “31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33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고 했습니다.

  조금 전에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을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같은 “갈릴리” 지방의 큰 동네였던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그 곳의 “회당”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셨는데” 무리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 즉 예수님의 말씀이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의 교훈과는 달리 권위가 충만함을 인하여 “놀라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회중 가운데서 누군가가 “크게 소리 지르는”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속에 있던 귀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 즉 성자 하나님으로 알아보고서 “아이구, 나사렛 예수님! 우리를 다 죽이러 왔습니까?”라고 겁에 질려 외쳤던 것입니다.

  자기가 설교하는 도중에 회중석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만약 예수님께서 여느 랍비와 같은 사람이셨다면 무척이나 당황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귀신을 향해 즉각 “꾸짖어” 말씀하셨습니다.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당장 그 사람 속에서 나오라!”고 아주 권위 있게 명령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그 귀신은 그처럼 강력하고도 압도적인 명령을 자기에게 내리는 사람은 평생 처음 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즉결처분의 권위에 꼼짝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에게서 당장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발악으로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려서” 다치게 하려 했지만, 예수님의 능력은 그것마저 압도하여 그 사람이 “상하지 않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가버나움 사람들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말씀이 어디 있나? 귀신에게 권위와 힘을 가지고 한번 명령을 내리니까 귀신이 꼼짝 못하고 나가네!”라고 충격적인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귀신 들림’이란 그야말로 속수무책의 불치병이었습니다.
  본인은 그 귀신이 괴롭히는 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주위의 사람들도 그것이 악령이 하는 짓인 줄을 알지만 그저 안타까워할 뿐 도울 수 있는 아무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듣지도 보지도, 아니 상상해 보지도 못한 기상천외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대항할 길이 없어 보이던 그 귀신을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압도하고 굴복시키는 놀라운 권위와 능력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오래 붙잡으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면서도 귀신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한심하고도 비참하리만큼 무력할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달걀귀신’이라는 것 때문에 화장실에 혼자 가기를 무서워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밤에 공동묘지를 지나가면 무슨 혼령을 만나게 될까봐 겁을 냅니다.
  옛날 사람들은 불길한 잡신을 물리친답시고 굿판을 벌인다든지 또는 온갖 부적을 붙이곤 했었지만, 개명했다는 현대인들 역시 세상의 온갖 종류의 악령들을 다 모아 놓은 ‘뉴 에이지’라는 종교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사탄은 이처럼 예로부터 지금까지 온갖 종류의 악령들을 동원하여 인간사회에 혼란과 공포를 조성해 왔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화육강세하지 않으셨더라면 이 세상은 여전히 이런 귀신들이 판을 치는 가운데 모든 사람이 사탄의 꼭두각시처럼 놀림을 당하며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악령들을 실로 권위롭고도 힘 있게 압도하시는, 정말 믿음직하기 그지없는 구세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무슨 법적 문제가 생겼을 때, 법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도 없고 연줄도 없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에게 당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법률에 정통하고 또한 법조계에 막강한 영향력까지 미칠 수 있는 어떤 전문가가 여러분을 도와준다면 그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특히 영계에 있어서는 최고의 능력 있는 전문가요 최고의 권위 있는 실무자이십니다.
  그러니 일단 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더 이상 귀신에게 사로잡힐 일도 없고 온갖 악령이 설치는 세계를 상상하면서 겁에 질려 살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역시 ‘보혜사의 영’ 곧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써 귀신에 대한 당신의 완벽한 권위와 압도적인 능력을 여전히 발휘해 주고 계십니다.
  이 더럽고 어두운 악령들이 판을 치는 세상 가운데 성도를 돕고 계시는 성령은 실로 든든하기 짝이 없는 최고의 영이신 것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필적할 대상이 없는 절대적 권위와 능력을 발휘해 주시는 예수님,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악마의 계교를 즉시 물리치사 나를 지켜”(찬 88장) 주시는 이 예수님을 자신의 믿음직한 구세주로 영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인생의 육신적 문제들까지 자상하게 돌보아 주시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됩니다.

  38절부터 41절에 “38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40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고 기록했습니다.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 후 예수님은 연이어서 여러 병자들을 하루 종일 고쳐 주시게 됩니다.
  베드로가 이미 결혼했었다는 사실은 여기 나오는 “시몬의 장모”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 베드로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방금 회당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직접 목격했든지 아니면 소식을 전해 들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누군가가 그녀를 좀 고쳐 주십사고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곧 그 병을 고쳐 주셨고 그 시몬의 장모는 “곧 일어나” 그 자리에서 “수종들게” 즉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 사건 때문에 예수님의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는데, 이제 시몬의 집에서 또 한 번 이런 기적적인 치유를 행하시자, 그 뉴스는 가버나움뿐 아니라 인근 동네까지 단숨에 퍼져나갔습니다.
  그 결과 “해 질 무렵”에 그 주변 지역에 있는 “온갖 병자”들이 예수님께 꾸역꾸역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해 질 적에 찾아온 것은 낮에 일이 끝난 후에 왔다는 뜻이 아니라 31절에 기록된 대로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 24시간을 해가 질 때부터 다음날 해가 질 때까지로 계산했기 때문에, 여기 ‘해 질 무렵’이란 곧 안식일이 막 끝난 시간을 가리킵니다.
  아마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일정한 거리 이상의 여행을 하거나 혹은 병자를 부축하거나 침상에 뉘여 들고 가는 것까지도 ‘안식일을 범한 죄’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처럼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으로서는 아침부터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등 바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막 쉬시려는 참에 그처럼 많은 병자들이 모여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어느 목사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새벽부터 밤까지 정신없이 주일 하루를 보낸 후 이제 겨우 한숨 돌리려는 참인데, 어느 교인이 ‘목사님, 좀 어려운 부탁이 있는데요.’ 하면서 밤늦게 사택을 찾아온다면 아무리 목사라도 속으로는 틀림없이 짜증이 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신을 입으신 몸이셨으니 분명히 피곤하셨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쳐 주셨습니다.
  즉 찾아오는 대로 한 사람 한 사람 빠짐없이 그 모든 병자를 다 친히 안수하여 낫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귀신 들린 자들도 많이 고쳐 주셨는데, 그 귀신들이 쫓겨 나가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기는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귀신들을 “꾸짖으시면서” 그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금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귀신 따위로부터 성자 하나님으로 인정받아야 할 위치에 계신 분이 결코 아니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여튼 예수님께서 그처럼 자상하게 한 사람씩 일일이 안수하시며 밤늦게까지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모습은 그 앞에 찾아왔던 모든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어떤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 능력을 자상하게 베풀어 준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전자는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직한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형용할 수 없도록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의 현실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은 남을 자상하게 돌보아 주는 마음이 부족하고, 인정 많은 사람은 그 마음만큼 남을 도와 줄 힘은 정작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양면에 있어서 공히 완벽한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권위자이신 것이 아닙니다.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과 같이 사시면서 인생의 고달프고 힘들고 괴로운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직접 ‘체휼’해 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 육신 생활의 온갖 대소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돌보아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자상하고도 따뜻한 손길을 매일 매사에 느껴보지 못하면 예수님이 진정 사랑스러워질 수가 없습니다.
  목사가 여러분의 가게나 집에 심방을 오게 되면 여러분은 ‘목사님이 날 생각해 주시는구나!’ 하고 절로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병상에 위문하러 찾아오거나 애사를 당했을 때 조의를 표해 주면 그런 교우들과의 사이에서는 더욱 따뜻한 정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날 돌보아 주시는 사랑은 그런 정도 가지고는 비교도 될 수 없습니다.
  목사는 교회에 잘 출석하고 봉사를 열심히 하는 ‘아흔아홉 양들’조차 제대로 돌보아 주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이지만, 그럴 동안에도 우리 예수님은 ‘길 잃은 양 한 마리’까지도 꼭 찾아 안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교우들 사이에서는 어려움을 당한 교우에게 겨우 전화 한 번 하면서 위로하는 정도일 뿐이지만,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우리 예수님은 밤낮 가리지 않고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다 내려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중에도, 우리의 인생에 매일 벌어지는 일상사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모르고 넘어가시는 것, 예수님께서 도와주지 않고 지나치시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모든 육신의 문제들과 형편들을 지극히 살펴 주시고 “내 맘의 모든 염려 이 세상 고락도 주님 항상 같이 하여 주시는”(찬 88장) 자상하신 예수님을 매사에 몸소 체험함으로써, 날마다 이 구세주를 더 사랑하고 그 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그 무엇보다도 오직 예수님만 선포해 주시는 천국 복음 때문에 우리는 평생토록 그 주님을 붙잡게 됩니다.

  42절 이하 44절에 “42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안식일 저녁에 예수님께서는 밤늦게까지 병자들을 고쳐 주셨을 것이 분명하지만 다음날 아침 일찍 “한적한 곳”에 가 계셨는데, 틀림없이 평소에 하시던 그대로 기도하시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가버나움 사람들은 아침 일찍부터 여기저기 “찾다가” 드디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제발 자기네 동네를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간청했는데, 그 이유는 물론 예수님께서 계속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어 주셨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요청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야 하니까 떠나야겠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와 온 유대의 다른 동네에서도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제일 중요한 진짜 목적이라고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계속 사시면서 전속의사처럼 그저 귀신이나 쫓아내고 병자나 치유해 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사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 능력과 사랑으로 우리의 영적, 육신적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것만 해도 우리로서는 정말 반갑고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우리 예수님의 일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신 사람이라 할지라도 역시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지만, 이 ‘복음’을 받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있어서는, 일시적인 기적이나 치유보다도 ‘천국 복음’이야말로 사람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요 최고의 기적이요 최상의 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사실을 똑바로 깨달아야만 예수님을 진정 반가운 구세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갓 신혼살림을 시작했을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날 무슨 편지를 하나 받았는데, 그 속에 보니 제 이름까지 ‘Mr. Ki H. Suk’이라고 똑똑히 호칭하면서 ‘당신은 백만 불짜리 집 한 채에 당첨되었습니다.
 ’라는 내용의 인쇄물이 있었습니다.
  이제 겨우 ‘원룸’ 아파트를 월세로 내어 살고 있던 저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기막힌 희소식이 아닐 수 없어서, 반신반의하면서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부자이다 보니 어쩌면 이렇게 무작위로 추첨해서 집 한 채를 그냥 주는 일도 있나보다.’라고 크게 기대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께서도 앞으로 미국에서 살 기회가 생기고 그런 우편물을 받게 되면 반드시 ‘작은 글씨’로 된 문장들을 자세히 읽어 보셔야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내용은 자기네 회사에서 제공하는 무슨 상품을 구입하면 ‘백만 불짜리 집 한 채를 탈 가망성’이 ‘눈곱만큼’ 있는 추첨의 대상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기만성 광고’가 아니라 진짜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와 주신 분이십니다.
  이 ‘장망성’ 세상에서 ‘썩을 장막’ 가운데 살고 있던 우리에게 저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집’에 영원히 살 수 있는, 실로 경천동지할 희소식을 전해 주려고 친히 이 세상에까지 내려오신 구세주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된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그 주님을 부둥켜안으면서 감사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천국 복음’ 이것은 오직 예수님만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뭐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도 좀 예수님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전에는 불치였던 병들이 의학의 발전으로 하나씩 치유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가 쓰나미 같은 재난을 당하면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많은 사람들이 온정 어린 성금을 보내어 줍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내 아버지 집에 너희가 거할 곳이 많도다’라는 엄청난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복지사도, 그 어떤 선한 재벌 자선가도, 그 어떤 주택복권 당첨 통지인도 우리에게 그런 소식은 전해 주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어느 날 이 세상에까지 내려오시고 우리를 친히 찾아오셔서 이 꿈같은 집, 하나님께서 천당에 지어 놓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예수님께서 인테리어까지 해 놓으신 그 환상적인 집이 바로 제 것이라고, 여러분을 위해 예비된 것이라고, 그저 와서 살기만 하면 된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실로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오직 예수님만 독점하고 계시는 최고의 소식이며 그 예수님께서 성도에게만 무상으로 나누어 주시는 너무나도 고마운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지옥 갈 수밖에 없던 죄인들에게 이 놀라운 ‘천국 복음’을 전해 주심으로써, 금세에서 “내 영혼 먹이시는 그 은혜”를 누리게 해 주시고 “나 친히 주를 뵙기 원하는” 그 자리에까지 인도해 주시는 이 예수님, 실로 “이 땅위에 비길 것이 없는”(찬 88장) 이 고마운 구세주를 반가이 영접하고 끝까지 붙드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만나게 된 좋은 사람과 헤어지기를 싫어하는 노래는 비단 세상 가요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가 3장 1절부터 4절에 보면 “내가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만나서... 붙잡고... 놓지 아니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는 이처럼 믿음직스럽고 자상하고 고마우신 신랑 예수님을 ‘찾고’ 일단 ‘만나게’ 되면 바로 그 순간부터 꼭 ‘붙잡고’ 다시는 ‘놓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혼탁하고 두려운 악령의 세계를 권위 있는 능력으로 깨끗이 물리쳐 주시는 믿음직한 구세주, 이 어렵고 힘든 인생살이를 이겨낼 수 있도록 자상하게 돌보아 주시는 고마운 구세주, 그 무엇보다도 영벌의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천국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할 수 있는 복음을 선포해 주시는 실로 놀랍고도 위대한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고 그 따뜻한 인격을 느끼고 그 풍성한 능력을 체험해 본 성도는 다시는 그 주님과 헤어지지 않겠다고, 혹시라도 날 떠나지 마시라고,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찬 88장)께 실로 뜨거운 연가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번 바로 만나고 제대로 사귀어 보면 다시는 놓치려야 놓칠 수 없는 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날마다 친구로 교제하는 가운데 그 약속해 주신 천국에 이르도록 끝까지 붙잡고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