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12-16 “내가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마태복음 17장 14-27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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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12-16
2018′경향의 강단(52) (2018년 12월 16일 / 주일 대예배)
“내가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마태복음 17장 14-27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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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마태복음 17장 14-27절 / 석기현 담임목사
‘사람이 참는 데에도 한도가 있다.’ - 우리가 흔히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바로 ‘변화산’에서 막 내려 오셨을 때였습니다.
  그 변화산은 참으로 멋진 일이 벌어진 장소였습니다.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비하되어 오셨던 예수님께서 오래 만에 성부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다시 입으시고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대화하시던 곳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우리가 그저 이대로 여기서 영원히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것도 조금도 무리가 아닐 만큼, 그 변화산상은 모든 것이 완벽하고 영광스러운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제의를 물리치시고 그 좋은 자리를 떠나 다시 이 복잡한 세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 22절과 23절에 “22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고 기록된 대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가장 중대한 사역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사역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마쳐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으셨는데, 그것이 곧 당신의 제자들을 더 잘 가르치시고 키우시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갈릴리에 모일 때에”라는 말은 조금 특이합니다.
  이 “모일 때에”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함께 돌아왔을 때’(came together)라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항상 같이 다니고 있었으니 ‘같이 갈릴리로 돌아왔다’는 표현을 굳이 따로 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가 이런 특별한 표현을 쓴 이유는, 바로 이 시점부터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헤어지게 될 당신의 제자들과 더 많은 사적 시간을 가지시면서 그들을 완전한 제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온 정성을 기울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난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거동행하면서 배워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자 과정’을 수료할 만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제자들의 현실은 여전히 예수님께서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17절)라고 장탄식하실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아직은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 그들이 꼭 도달해야 했던 단계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제 2018년이 저물어 가는 오늘 주일에 저는 예수님께서 아직은 참고 기다려 주시는 동안 주님의 제자 된 성도가 반드시 나타내야 할 성장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더 이상 마귀에게 당하기만 하는 약골이 아니라 ‘믿음의 능력을 발휘하는 신앙인’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14절부터 20절에 기록하기를 “14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마태복음뿐 아니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 간질병 걸린 “아이”에게 사건의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간질병에 걸린 아이의 아버지와 예수님의 제자들만 주요 배역으로 나타납니다.
  그 아버지는 실로 고통스러운 문제를 안고 찾아왔습니다.
  “이 아이가 간질병으로 심히 고생을 하면서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집니다.
 ”
라는 한탄 속에는 그런 불치병에 걸린 자녀를 둔 아버지가 겪었던 기나긴 고통의 나날들, 정말 남들은 알 수 없는 극심한 괴로움이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는 그처럼 큰 아픔을 안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 시점에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 올라가 계셨기 때문에 제자들을 먼저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일전에 전도 파송을 받았을 때 병자를 직접 고쳐 주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마침 예수님도 안 계시니, 자기들이 한번 해 보겠다고 나섰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제자들과 그 아버지에게 공히 실망스럽게도 그 간질병자를 “능히 고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 마침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 아버지는 곧 예수님 발 앞에 달려와 엎드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못했다고 해서 예수님에게 구하는 것마저 포기하지는 않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부재중에 일어난 형편을 듣게 된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안타까우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책망하신 대상은,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 9장의 기록을 참고로 해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기보다는 그 주위에 있던 서기관들과 군중들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쳐 주시고 사람들이 다 떠나간 후 제자들이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
라고 물어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역시 “너희의 믿음이 작아서 그렇다.”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서기관들과 무리 앞에서 무력한 꼴을 보이고 창피를 당했던 이유는 곧 그들에게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같이 ‘아예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도 당신의 제자들처럼 ‘믿음이 있기는 있는데 너무나 약한’ 사람들을 더욱 안타까워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라고 하신 것은, ‘믿음’은 겉으로 드러나는 양보다도 질적으로 충실한, 속이 진실한 것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이라는 말씀은 문자적인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미로 당시 랍비들 사이에서 자주 쓰인 비유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즉 ‘믿음으로 산을 옮긴다.’는 것은 결코 무슨 마술을 부리는 따위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믿음만 있으면 어떤 문제이든지 간에 능히 이겨내고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본문에는 21절이 빠져 있지만, 마가복음에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끝까지 기도드릴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만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바로 이처럼 ‘믿음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온갖 영적, 육적 문제를 가지고 교회에 나올 때 꼭 지켜야 할 자세가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이 서로 도와줄 수 있는 문제들도 있지만, 사실상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해도 사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교역자나 교우들이 어떻게 해 줄 길이 없는 문제가 있을 때에도 결코 낙심하고 돌아서서는 안 됩니다.
  내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결국 ‘예수님’ 앞에 가져가야 완전한 해결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처럼 ‘예수님을 찾아 나오는 믿음’이 없으면 무력한 존재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정말 고통스러운 일, 남에게 하소연해도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일, 교역자에게 다 털어놓아도 속 시원하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까?
  만약 목사나 교인들이 자기를 도와주지 못한다고 실망하면서 신앙생활에서 떠나 돌아서면 그 사람은 ‘간질병 걸린 아이’ 같은 고질적인 인생 문제들로부터 벗어날 길 없이 평생토록 계속 당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경우에도 부디 포기하지 말고 꼭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간구하는 믿음을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예수님은 무능한 목사처럼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예수님 앞에 자신의 모든 문제를 직접 가져올 줄 아는 믿음, 예수님 바로 그 분만을 의지할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만 성도는 그 주님의 능력으로써 능히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로 발휘되는 믿음’이 없으면 역시 아무 것도 해내지 못하는 약골 교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가 될 만큼의 믿음, 장로와 집사로 안수 받을 수 있을 만큼의 믿음, 세례교인이 될 만한 ‘양(量)의 믿음’은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철저히 의지하고 끝까지 기도할 줄 아는 겨자씨만한 ‘질(質)의 믿음’이 부족한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믿음에 따른 그 어떤 능력도 발휘할 줄 모르는, 불신자의 비난과 사탄의 공격 앞에 그저 당하기만 하는 창피스러운 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어려운 문제를 너끈히 풀어내는 든든한 해결책입니다.
  믿음은 사람의 힘으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역사되도록 발동을 걸어 주는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신자 이름만 가진 무력한 교인이 되지 말고,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며 그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는 믿음을 가짐으로써, 자신과 형제 성도들의 문제를 해결해 내는 능력을 크게 발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끝까지 자기만 빠지려 하는 얌체가 아니라 ‘성도의 의무를 수행하는 사명인’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24절 이하 27절에 “24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 사역의 본부라고 할 만한 동네였는데, 또한 당시의 세무서 같은 공공기관의 본부가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동네에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성전세를 징수하는 자들이 베드로를 찾아와서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라고 물어왔습니다.
  이 ‘반 세겔’은 당시 노동자의 이틀 품삯 정도에 해당되는 금액인데, 원래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생명의 속전’으로 명령하셨던 것이 후대에 와서는 성전 유지비 충당을 위한 세금으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질문에 대하여 얼떨결에 그냥 “내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미루어 보건대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시며, 특히 하나님의 성전에 관한 것이니 예수님께서 안 내실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돌아온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즉 베드로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성전세의 의무에 있어서 유일하게 면제될 수 있는 대상이 바로 당신이심을 베드로에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세상 임금들이 “관세” 즉 ‘상품세’나 ‘소비세’, 그리고 “국세” 즉 ‘인두세’를 자기 가족들로부터는 받지 않듯이,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그의 아들이시니 예수님이야말로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될 분임은 너무나 자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즉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하지 않기 위하여 그 세금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스스로 특별히 정하셨던 율례였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세는 이름 그대로 전액이 하나님의 전을 관리하기 위하여 쓰이는 돈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세금을 내는 것을 거부하시면, ‘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성전세를 내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성전세도 바치지 않느냐?’라고 비난할 것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 성전세를 마련할 방법까지 일러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성전세를 합치면 한 세겔, 즉 나흘 치의 노동 품삯에 해당되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흘 간 말미를 주시며 공사판에 가서 일하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그저 잠시 “바다에 가서 낚시”만 한번 던지면 물고기 한 마리를 잡을 것이고 그 입 속에 “한 세겔”짜리 동전, 당시 ‘스타테르(stater)’라고 불린 동전 하나를 얻게 될 것이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그 동전은 물고기의 입에 충분히 들어갈 만큼 작은 것이었는데, 물고기들은 일반적으로 반짝거리는 것에 잘 끌리는 성질이 있는 까닭에 배를 타고 있던 어느 누구가 우연히 동전 하나 물속에 빠뜨린 것을 그냥 삼켰을 것이고 그것이 목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세겔짜리 동전으로 예수님과 베드로 두 사람 몫의 성전세를 바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야말로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따져들지 않으시고 일단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본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이 기록된 당시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 사건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주요 대상은 주로 유대인 출신의 초대교회 신자들이었는데, 그런 까닭에 그들은 옛날 그들이 지키던 율법과 새 신앙 사이에서 갈등을 자주 겪고 있었으며 ‘성전세’도 그런 문제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규례이고 아직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지금 기독신자가 된 유대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기독신자가 된 유대인도 성전세를 꼭 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따지고 드는 사람들이 있었고, 바로 그런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본문의 말씀은 분명한 지침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내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로 성전세를 기피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또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제자이니 나도 성전세 정도는 면제받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아예 가지지 못하도록, 그 물고기 입에서 ‘반 세겔’이 아닌 ‘한 세겔’을 얻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성전세뿐 아니라 베드로의 성전세도 함께 바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모범이 초대교회 성도들과 또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명하신 의무인 한에는, 어찌하든지 거기서 예외가 되고 면제를 받을 수 있는 이유를 찾아내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기본적이고도 필수적인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그런 힘을 달라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색이 기독신자라 하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의무로부터 벗어날 궁리만 하는 ‘얌체 교인’들이 있습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 같은 신자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들을 두고도 어찌하든지 거기서 면제될 수 있는 변명들을 찾으려고 야단들입니다.
  소위 신학자들까지도 눈에 불을 켜고 ‘구약적인 사고방식’ 어쩌고 하면서 따지고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로부터 원하시는 모습이 결코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주어졌습니까?
  그 의무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밖에 없으며,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은 오로지 그 의무를 이행해야 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예외가 될 자격이 있으신 예수님조차 그 의무를 수행하셨다면, 저와 여러분이야 두말할 여지조차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왜 주일을 못 지키는지에 대한 ‘마땅한 이유’를 대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왜 십일조를 못하는지에 대하여 ‘합당한 변명’을 절대로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 그런 사정이 있다면 그저 ‘예수님, 제가 이 가장 기본적인 신자의 의무를 꼭 수행할 수 있도록 어찌하든지 제게 길을 열어 주시고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할 뿐인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노력하는 성도를 어떻게 예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베드로의 성전세를 위하여 물고기까지 동원하신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역시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성실하고 충성되이 섬길 수 있도록 그 길을 반드시 열어 주실 것입니다.
  혼자만 빠져나가려고 따져 드는 교인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그 방법을 보여 주시고 그 힘을 더해 주시는 주님의 도우심을 입어서 하나님께 대한 신성한 의무를 꼭 수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애써서 가르쳐 놓은 제자들이 무력한 약골로 남아 있으면 그 스승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이제 다 키워 놓은 제자들이 스승에게 보은을 해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빠져 나가는 얌체 꼴만 보이면 그 스승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우리 예수님 역시 당신께서 가르치신 제자들이 이 불신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으며 사탄에게 당하는 무력한 꼴만 보이는 것을 도저히 참으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도 당신께서 키워 놓으신 제자들이 그저 따져들기만 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성도로서의 특권적인 의무를 이리저리 피할 핑계만 찾아내려 하는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일 때 통탄하지 않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받아 새 생명을 얻고, 그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양육을 받고 있다는 신자들이 그런 ‘약골’로, 그런 ‘얌체’로 자라나서야 되겠습니까?

  누가복음 13장에 기록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참고 기다려 주시는지를 따끔하게 일깨워 주지 않으십니까?
  포도원의 주인인 하나님께서는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7절)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인 예수님께서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8-9절)라고 주인을 만류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신자라 하면서도 강하고 충성스러운 제자로 성숙하지 못하고 아직도 ‘약골’과 ‘얌체’로만 머물러 있는 교인들을 예수님께서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 주셔야 하고 얼마나 더 오래 참아 주셔야 할 것 같습니까?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고 또 한 번 더 참아 주시지만, ‘내가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하신 대로 아무리 예수님이라 해도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들을 참아 주시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바라보게 된 이때에 각자 자신의 올 한 해를 돌이켜보는 가운데, ‘겨자씨’ 같은 참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발휘하고 주님께서 얻게 해 주시는 ‘한 세겔’로 교회를 섬기는 의무를 온전히 다함으로써 참으로 우리 예수님께서 만족하고 기뻐하실 제자로 계속 자라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